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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상인]-작천·옴천 사람들도 상업은 일상사(日常事) | ||||||||||||
영사면(營四面) 사람들(1)- 부모님의 상업 이어받은 김정권 강진군번영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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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으로 출발 강진읍에 정착... 전형적 강진상업역사 보여 트럭짐칸에 타고 시장으로 이동... 말수레도 중요한 운송수단
목포나 광주 등에서 만난 병영상인들은 작천 출신 상인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작천 출신 상인들 역시 자신들을 병영상인의 대열에서 따로 생각하지 않은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상업을 하는 적지 않은 작천, 옴천 출신들이 자신들을 그냥 병영 출신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연은 병영과 작천, 옴천지역의 지리적 관계와 함께 역사적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강진에서 세 지역은 흔히 북삼면이라고 한다. 강진의 북쪽에 있는 세 지역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세 지역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지만 각 마을도 가깝게 형성돼 있다. 역사적으로 병영과 작천, 옴천은 비슷한 행정구역이었다. 강진군마을사에 따르면 작천일대는 1409년(조선 태종 9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열수면, 초곡면, 이지면 등으로 나뉘어 졌다. 그러다 불과 10여년만인 1417년 병영성이 설치되면서 행정구역이 조정돼 작천의 열수, 이지면과 옴천면, 고군면등 4개면이 영사면(營四面)이라 이름 지어지면서 병영의 관할을 받는 지역이 됐다. 영사면이란 행정구역은 500여년 동안 지속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작천면이 분리됐다. 영사면에 들어있는 고군면이란 병영면의 옛 이름이다. 고군면의 명칭은 1914년 작천이 분리되면서도 계속되어오다 1931년에야 병영면으로 개칭됐다. 작천과 병영, 주변 옴천지역의 행정구역 연관성은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병영상인을 규정할 때 인근 옴천과 작천지역 주민들을 포함해야 하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지금도 병영과 작천, 옴천은 북삼면이라고 해서 강진읍의 북쪽에 있는 세 개의 면이란 뜻으로 통칭되고 있다. 현재 강진군번영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강진읍오일시장 입구에서 혼수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정권 회장은 작천 부흥마을 출신이다. 야흥리 부흥마을은 병영과 거의 맞닿아 있는 곳이다. 김회장의 부친과 모친은 북녘의 만주와 함흥까지 무명장사를 했고, 자신은 강진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받아 상업활동에 뛰어들었다. 김회장은 지난호에 소개했던 이 물씨 부부 등과 함께 보부상으로 출발했던 강진의 상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역에서 정착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해방이 된 이후 김회장의 모친은 쌀 장사를 시작했다. 50년대 중반까지 군동 백금포와 강진읍 목리에서 부산을 왕복하는 화물선이 있었다. 모친은 쌀을 가득 싣고 부산으로 갔다. 뱃길은 보통 3~4일이 소요됐다. 부산 영도부두에서 배를 대면 도매상들이 와서 쌀을 구입해 갔다. 쌀이 모두 팔리면 그 돈으로 자갈치시장에서 비단을 샀다. 비단을 한짐 싣고 다시 배를 타고 강진 백금포에 도착했다. 그러면 보통 3~4일이 소요되곤 했다. 부산과 강진을 오가는 화물선은 대단히 낡은 것이어서 뱃길이 매우 위험했다. 한 번은 부산 인근 낙동강 하구언에서 배가 파손돼 많은 물건이 바닷속에 수장되기도 했다. 배가 침몰하려고 하자 타고 있던 강진의 상인들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싣고 가던 쌀을 바다에 버린 것이다. 모친의 등에는 김회장의 동생인 민채씨가 업혀 있었다. 부산에서 강진으로 가지고 온 비단은 도매가격에 상인들에게 팔려 나갔다. 부산에서 가져온 비단은 가격이 저렴하고 품질도 좋아서 상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상품이었다. 그래서 김회장 모친이 탄 배가 백금포에 도착하면 비단을 받아 가려는 상인들이 줄을 서곤 했었다. 김회장의 모친 윤순덕씨는 도매상인을 하다가 나중에 강진의 오일장을 돌며 직접 비단 행상을 하기도 했다. 196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정권 회장은 부모님의 상업을 이어 받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업에 뛰어든 사람이 몇 안되었을 때다. 김회장은 처음에 비단을 짊어지고 모친과 함께 오일장을 다녔다. 한 번은 고금장엘 따라 갔는데 0.5톤에 불과한 쪽배를 타게 됐다. 마량과 고금사이의 바다는 직선으로 300m에 불과하지만 좁은 해역인 만큼 물살이 빠르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도가 거칠어 지는 곳이다. 서너명의 상인들이 망설이다 배에 올랐다. 배에 탄 사람은 서너 명에 불과했으나 각자 짊어지고 온 짐이 몇 배가 됐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배가 기우뚱 거렸다. 비단 위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을 몇차례 더 겪으며 배가 간신이 고금부두에 도착했다. 상인들은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 보다는 장에 갈 수 있다는 만족감으로 짐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김회장은 장사를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바다에서 침몰될 뻔 했던 아찔한 순간을 잊지 못하고 그 후로 오랫 동안 고금장을 가지 못했다. 김회장은 1966년 김재님 여사와 결혼 후 다양한 사업을 시도했다. 장사의 매력에 빠져 들면서 열심히 하면 사업적으로 성공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가던 시기다. 얼음공장과 떡국장사, 운수업 등에 잇따라 진출했다. 60년대 후반은 강진의 인구가 12만명으로 역사상 최고조에 달할 때였다. 상업활동도 왕성하게 눈을 떴다. 상업활동이 번성할 때 김회장은 강진에 새로운 상업문화를 여러 가지 도입했다. 60년대 말에 강진에 아이스크림을 담아파는 하드통이 처음 등장했는데 김회장이 광주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하드통은 '마오병(보온병)'이라고 했다. 안쪽에 반짝이는 유리통이 있었다. 그 안에 아이스크림을 넣고 얼음고무봉지를 넣어 검은 고무뚜껑을 닫으면 아무리 더운 여름에도 한나절 이상은 아이스크림이 온전히 보전됐다. 그 전까지는 아이스크림 장사들이 단순한 나무통에 비닐과 무명을 받쳐 '아이스께끼 사~려~'를 외치고 다녔다. 하드통은 강진의 아이스크림 문화를 변화시켰다. 떡국자르는 기계도 이때 처음 들어왔는데 역시 김회장이 군 단위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기계였다. 떡국자르는 기계도 광주에서 처음 보고 구입했다. 또 70년대말까지만 해도 강진에는 매장에 따뜻한 방을 들이는 문화가 없었다. 매장은 항상 서서 활동하는 공간일 뿐이었다. 겨울에는 화로나 숯난로를 태워 난방을 했다. 김회장은 80년대 초반 오일시장에서 점포를 할 때 처음으로 매장에 방을 만들어 연탄불로 온기를 넣어 손님을 맞았다. 손님들의 반응이 환영 이상이었다. 주변 상가에서 앞다투어 김회장의 기법을 배워간 것은 물론이다. 점포에 방을 만드는 것은 목포에서 배워 온 것이었다. 70년대 초반까지 강진에서는 한 매장에서 단일 품목을 취급하는게 일반적인 일이었다. 이를테면 옷가게에서는 옷만 취급했고, 신발가게는 신발만 취급했다. 김회장의 세은상회는 이불과 비단을 함께 취급하면서 복합상업을 시도했다. 이 또한 김회장이 서울과 인천 등에서 배운 상업 기법이었다. 한 점포에서 여러 가지 품목을 취급하는 형태는 이제 어디에서나 자연스런 문화가 됐다. 김회장은 이렇듯 외지를 돌아다니며 선진 문물을 배워 바로바로 강진에서 적용을 시도한 사업가였다. 김회장은 병영과 작천출신 사람들의 상업기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장사는 신용과 친절이 가장 중요하다. 그분들이 강진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용과 친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상대방에게 신용을 주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게 아니다. 오랜 상업의 역사가 신용과 친절을 자연스럽게 몸에 베게 했을 것이다" 김회장은 60년대 말에 운수업에 뛰어들었다. 4톤짜리 트럭을 구입해 각 장으로 돌아다니는 상인들을 태우 며 영업을 했다. 트럭 짐칸에는 화물과 함께 시장으로 가는 상인들이 빼곡히 들어차 마치 꽃봉우리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요즘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트럭짐칸에 사람이 타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강진읍에서 출발할 때는 걱정이 없었지만 각 면소재지를 지날때가 문제였다. 면소재지 중심가에는 어디든 지금의 파출소격인 지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면소재지가 가까워 질 때 상인들은 지서순경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짐을 수북히 쌓아 아래쪽에 공간을 마련하고 그 안에 몸을 숨겼다. 또 면소재지 입구에서 아예 사람들이 트럭에서 내려 지서앞을 걸어서 통과한 후 다시 차에 오르기도 많이 했다. 상인들이 이동하는 수단은 말구르마(말수레)도 많이 이용됐다. 말수레는 주로 강진읍 남포를 중심으로 한 생선장수들이 많이 이용했다. 지금의 강진읍 공용터미널 서쪽 보리수 식당 주변자리에 마부가 살면서 각종 마구를 팔았다. |
첫댓글 병영 상인들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한기자님 2월부터는 바쁘시겠네? 건강 챙기며 살아가기요~ 화이팅~!
엄사장 반갑네!!~~
장안동 근무할때 한번 놀러오시게!!~~
1/29일자 발령이네~~ㅎㅎㅎㅎ~~
승환이 반갑네 월요일이면 고향으로내려가서 설 세고올라올거여 병영상인중 나의 아버님도 많은활약을 하시었지
마량에 병영상회란 간판을 달고 잡화를 (옹기만 없는 만물상 .과자. 소주는 공장운영)판매하셨는데 20톤의 배로 강진.해남 완도 진도 고금도일대에 상권을 가지고계셨다네
내가8살때 별세하신바람에 상권을 이어가지못하고 결국 문을닫고 그이후로 가난의길에들어서게되어 많은고생을하면서 살아오긴했지만 아버님생전엔 대단하신 상인이셨던것 같아서
회상에 잠겨보았네
오장로님 아버님 얘기는 처음으로 들었네. 대단하셨구만...당시 농업을 위주로 하던 시대에 선구자격인 분들이라는 생각이 드네~~~
정빈이, 그 내용을 글로 써서 초벌을 나에게 보내면 어떤가? 강진신문에 나갈 수 있을 것 같네만....
손원장님 오랫만이네 이번에서울로 가시게 되겠지
아버님에 대해서 나는 어려서 잘모르지만 6,25직전엔 배에 담배를 싣고 황해도 일대의 섬(백령도 도포함)에 다니시면서 생선과 바꾸어오시고
북삼면의 쌀을 서울로 판매도 하셨다고 큰누님(정숙이 엄마)이 말씀하신걸로 보아서 상술엔 일가견이 있었던것 같네
생필품은 배로 부산에 가서 직접구입해 와서 공급했던 기억이 나고 나도 그래서 매년 추억을 쫒아 마량에 다녀오긴한다네 초등학교1학년을 거기서 다녔으니까
빨리 글로 정리한 초벌 내용을 보내 주시게나. 우리 작은 할아버지의 오스틴 도락구(영국제)가 1950년대 중반 이후에 장꾼들 싫고 돌아 다니던 일이 기억나고, 우리 할머니께서 내 학비를 번다고 봇짐 장사까지 하셨던 것 모두가 병영의 상업 내력과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네.
오장로님 가족사 이야기가 한층 기대되네.아마 당시 지방에서는 선주나 차주는 재력가이고 유력한 인물들이었다고 생각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