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설원, 시리아의 사막, 그리고 한반도 [칼럼] / 1/10(금) / 한겨레 신문
◇ 러시아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중국과의 관여를 확대하는 동시에 북한과의 대화를 재개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트럼프 씨의 중국과의 대결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새해 국제정세의 무대는 우크라이나 설원에서 시작된다. 이후 시리아의 뜨거운 사막을 거쳐 한반도로 옮겨올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20일 미국 대통령 재취임으로 우크라이나 종전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움직임은 강해질 것이다. 트럼프 씨는 7일 가진 당선 후 두 번째 기자회견에서 "종전에는 6개월을 달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종전 협상은 러시아가 현재 거센 공세를 펴고 있는 쿠르스크 주를 완전 탈환한 뒤에나 본격화될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월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종전 협상을 위한 칩으로 사용하려는 쿠르스크 점령지를 완전히 빼앗은 뒤 전력을 완전히 상실한 현실을 인정할 때까지 종전 협상을 위한 접촉을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 씨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씨는 우크라이나를 유럽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 유럽에 방위비 등을 떠넘겨 러시아와의 타협을 달성하기 위한 카드일 뿐이다.
종전을 통해 러시아는 현재의 점령지를 굳히고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배제할 것으로 보인다. 이 필요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결코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남은 것은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장하는 일이다. 이미 영토 문제를 포기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나토 가입과 보장을 주장하며 서방으로부터의 안보 확보를 극대화하려 하고 있다. 트럼프 씨는 이를 기본적으로 유럽이 책임지는 구도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트럼프 씨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실현 가능한 러시아와의 타협이다. 실제로 미-러 관계 회복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미국의 민관 전략가들이 추구했던 대전략이다. 트럼프 씨가 우크라이나의 종전에 따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미국은 중동이나 중국 전선에서 훨씬 큰 재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우선은, 아사드 정권이 붕괴한 시리아의 안정이 미국에 있어서는 급선무다. 아사드 정권의 붕괴는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의 서방에 있어서의 전략적 승리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세력 공백이 길어지면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트럼프 씨는 12월 7일 "미국은 시리아와 관계가 없다. 우리의 싸움은 아니다" 며 러시아에도 "(아사드 정권을 지원한 것은) 오바마가 바보짓을 당한 것 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리아를 놓고 다투지 말자는 얘기다.
시리아에 주둔 중인 두 개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가 타협할 수 있다면 트럼프와 푸틴 모두에게 윈윈 게임이다. 트럼프 씨는 이 타협을 통해서, 시리아 등의 이란의 「저항의 축」의 세력도 제어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도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타협이 필수적이다.
시리아 문제에서 미국 전략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중국·러시아·이란에 북한까지 가세하는 '유라시아 연대'가 만들어질 가능성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러는 미국의 단극체제를 대체할 다극질서를 주창하고 있다. 양국은 BRICS와 비달러 무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어 러시아는 북한과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인 군사동맹을 부활시켰다. 이와 유사한 포괄적 협정을 17일 이란과 체결한다. 그러나 시리아 문제는 러시아를 매개로 한 유라시아 연대의 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다.
트럼프 씨가 우크라이나와 시리아에서 러시아와 이란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면 자신이 장담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좋은 관계를 현실화시킬 기회를 얻게 된다. 북한은 우크라이나의 종전 협상에 이미 깊이 관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북-러 동맹의 부활을 촉발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씨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에 성공하면 북한 역시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북한이 더 이상 미국 등 서방에 관계 정상화를 구걸하는 약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핵무기와 러시아와의 동맹을 두 손에 쥔 북한은 미국과 강자간의 관계로만 만나려 할 것이다. 더구나 북한은 통일을 포기하고 적대적 양자론을 선언하면서 남한과는 공존하지도 않겠다고 공언했다. 북·미 협상이 진전될 경우 한국의 위상은 작아진다. 트럼프 씨가 우크라이나 설원, 시리아 사막, 한반도에서 상대방과 타협해 미국의 위상을 넓힌다면 대외정책의 궁극적 목표인 대중국 억제를 위한 여건을 급격히 호전시킬 수 있다.
한국은 국지전까지 기획하며 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이 자폭하면서 기회와 위기에 동시에 직면했다. 지난 1년 사이에 전쟁 직전까지 갔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의 흉악함으로 인해 한국의 대외 호소력은 급격히 추락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중국과의 관여를 확대하는 동시에 북한과의 대화를 재개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트럼프 씨의 중국과의 대결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