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증거된 아래의 본문 말씀에 있어서 어려워하거나 혼란스러워 하거나 심지어는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특히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했는데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행하는 것이 어찌 그렇게까지 직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게다가 그러한 말씀을 다른 이를 통해서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신 것이기에 더욱 혼동이 되는 면이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으로 살펴봐야 하는데 첫째는 믿음으로 인한 구원에 있어서 당연히 반드시 믿음으로만,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며 절대적인 이치가 아닐 수 없는 것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실상 그러한 구원은 정확하게는 구주 예수님 단독이실 수는 없는 것으로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뜻하시고 계획하시며 약속하시고 예정하시며 준비하시고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성취해 나가심으로 인해 가능한 일인 것이고 애초부터 시작될 수 있었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측면에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인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정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방법이나 통로가 아닌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통해서만 믿음과 함께 구원에 참예케 됨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그 예수님께서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시며 온 우주보다도 더 크시고 영원보다도 더 작으실 수 없는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우리 인생들에 있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셨기 때문인 것이며..
그렇기에 근원적으로 처음의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되는 거듭남의 역사는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되는 바로 그 믿음에 있어서는 엄밀하게 따지면 진정한 믿음,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실 만한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 바로 그러한 믿음에는 처음부터 행함이란 것이 어떤 식으로든 결코 별개이거나 분리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고 관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믿는다는 하는데, 나는 ‘주여 주여’라고 외치는데 하나님 아버지 보시기에는 믿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고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이상한 믿음에 있어 대표적인 자들이 행함이 아닌 외식으로만 가득찼던 자들로 구주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 예수님을 대적했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었던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롯 유다도 마찬가지인 것이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천국 비유 속의 가라지도 아닐 수 없는 것이고,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 2장 9절에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라고 증거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듯이 서머나 교회의 자칭 유대인들 등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말로는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속은 전적인 외식 및 위선인 것이거나 이용 및 악용 등인 자들로 그 속에 행함이 아예 단 1도 없는 자들, 완전 제로인 자들인 것인데 사실상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며, 게다가 때로는 당사자 그 자신조차 잘 모를 수 있어도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두 아시는 것이며 완전 정확하게 아시는 것이고, 심지어는 그러한 행함을 보일 수 있는 시간들이나 타이밍들이 전혀 안 되었고 알 수 있게 하는 계기나 상황들이 아예 없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시간과 공간들, 상황과 현실들, 전후의 모든 사정과 실상들을 뛰어 넘어 그 속에 부족할지라도 합당한 믿음인지, 곧 그 중심에 행함이 조금이라도 포함된 제대로 된 믿음인 것인지 아니면 완전한 위선이거나 거짓된 것인지를 모두 다 아주 정확하게 간파하시고 완벽하게 아시는 것이며..
그렇기에 반드시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됨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마땅한 실제인 것이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서의 행함이라는 것이 제대로 된 믿음, 진정한 믿음,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믿음인가 아닌가에 있어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없을 수 없는 것이고, 아래 본문의 말씀과 같이 구주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강조하실 수밖에 없었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겨자씨만큼이라도 어떻게든 행함이 포함된 믿음에 있어서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시간과 공간들, 사정과 형편들, 타이밍과 실상들을 다 뛰어 넘어 모두 다 완전히 아시는 것으로 비록 작고 어린 믿음일지라도, 또한 중간 중간에 부족함과 허물 투성이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더라도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는 믿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더 나아가 요셉이나 여호수아, 엘리야, 다니엘, 또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이후의 베드로, 돌이킨 후의 바울, 그리고 스데반 등과 같이 한 두 마디 말씀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믿음도 있는 것으로 그러한 믿음은 견고하고 장성한 믿음, 금강석 같고 강한 군사와 같은 믿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또한 다른 그 누구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야 말로 제일 잘 아시는 것이고, 그와 함께 이 세상에서도, 더 나아가 세상 끝 날에서도 그로 인한 다양한 역사와 열매들, 상급과 복들이 결코 작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간과해서 안 되는 아래 본문 말씀의 두 번째 측면은 그렇게 제대로 된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하나님의 백성들에 있어 악한 세력들이 가득한 이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감에 있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 그만큼, 곧 천국에 들어감까지 언급될 정도로 중대하고 또 중대하며, 생각 이상으로 민감하고 절대적인 사안이라는 사실을 과도할 정도로 알려 주시고 최고로 강조하시는 것도 내포된 것으로..
비록 그렇게 행함이 없는 믿음일 때가 많고 죄악들로 인해 마치 병들고 죽은 것과 같은 신앙이 된다고 해서 진정 이미 제대로 믿고 구원에 참예케 된 자가 정말 맞는 것이라면 구원이라는 것이, 특히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해 더 이상의 아담과 하와 때부터의 죄와 진노와 음부와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가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뒤바뀌게 되고 인 쳐지게 된 것이며 영원에 이르기까지의 확증된 의미도 포함된 구원이라는 것이, 게다가 오직 믿음으로 인해 참예케 된 구원이라는 것이 돌이켜 지는 것은 아니고 돌이켜 질 수 있는 개념 자체도 아닌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결코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고, 이미 주어지고 예비된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 특히 온갖 응답과 승리와 복들 등을 생생하고도 강렬하며 풍성하게 누릴 수는 없게 되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더욱 사랑하셔서 라도 더 이상 죄악들을 반복하지 않고 하루바삐 돌이키며 속히 제대로 된 믿음에 서게 될 수 있도록 아비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시간까지 하늘의 힘과 승리와 형통들 등은 막으시곤 하고 대신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과 같은 징계들을 아끼지 않으시곤 하며 마치 광야 40년과 같이 방황케도 만드시곤 하는 상황이 되기 쉽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더 이상 옛 사람과 같이 자신의 힘과 의, 세상적 능력과 방법들이 아니라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들과 싸우고 혹 범하게 된 죄악들에서는 최대한 빨리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주야로 더욱 말씀을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나아가고 또 나아감으로 인해 갈수록 더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근원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으로 풍성케 될 수 있어야 함이 중요하고 또 중요하며, 긴급하고 또 긴급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7:21)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3월 18일(월)1/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