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고려말 유신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이 조선 건국 후 개성을 방문했을 때 소회(所懷)를 노래하기를 :
오백년(五百年)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듸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오래간만에 엊그제 명동을 들려 이곳저곳 한 바퀴 돌아 보았다. 이곳 명동은 서울에서의 내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곳으로
70년대에서 2000년 초까지 과히 내 청춘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라 하겠다.
점심시간에 나서면 또 저녁때 소주 한 잔이라도 할라치면 인사하기 바빴고 또 인사받기에도 바빴던, 마치 명동의 주인인 양
또는 터줏대감이었다. 그처럼 무역, 특히 섬유 수출업의 메카였다. 특히 년 초이면 선배들, 후배들 신년 인사로 족히 10여 일은
이 일이 일과였다.
어느 가게도, 어느 주점에서라도 그저 명함 하나로 외상이 통하던 그런 명동이었다. 특히 늘 월말 계산하였던 충무로에 그 이층
주점은 없어지고 5층 소 건물로 들어서 있다.
그때는 야근이 일상화된 때라, 지금은 없어진 중앙극장 앞에서 밤늦은 시각 이른바 “나가시” 택시에 합승하여 –4인 합승이
기본이며 두당(일 인당) 500원이라 기억된다 – 잠실 시영 아파트까지 가려면 좁은 강변도로를 총알처럼 달리는 이른바
총알택시로 대략 12시 5분 또는 10분쯤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다. 물론 통금시간이 자정이었지만 단지 앞에선 문제 될 게 없었다.
아무튼 이곳저곳 돌아본 명동은 건물들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내가 근무했던 명동 입구의 한일 빌딩 하며, 당시 높은 건물이었던 뉴 서울빌딩, 제일빌딩, 청휘빌딩, 로얄호델 등들이비록 외관은 리 모델링 했으나 그대로 이고 충무로에 몇 개 조그만 건물들로 개축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다만 그 당시 사무실 용도였던 건물들 대다수가 상업용 – 가게들과 소규모호텔로 용도 변경되어 있었다. 이제 이곳 명동에 사무실을 두고 수출업을 하는 회사는 거의 전무한 것 같다.
이제 명동에서는 내가 인사할 사람도, 인사받을 사람도 하나 없이 이곳저곳을 머뭇거리는, 주인이 아니라 그저 과객(過客), 나그네 일 따름이다. 둘러보다가 낯익은 설렁탕집 간판에 보이길레 늦은 점심이나 할까 들렸더니 세월의 나이테가 역력한 백발, 반 백발 그리고 머리칼을 거의 볼 수 없는 일단의 손님들이 두서너 테이블에 소주잔을 앞에 두고 시컬 벅적하였다. 아마 그들도 이곳 명동에 추억을 묻은 분들 이렸다. 아무튼 나도 설렁탕 한 그릇 시켜 놓고 보니 명동 나그네 암연(暗然)히 수수롭기만 하다.
삼십년(三十年) 옛 일터를 홀로이 돌아드니,
동네는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곳없네.
애재(哀哉)라 청춘연월(靑春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2022.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