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우-윤정희를 유인, 북한공작원들에게 넘기려 했던 박인경은 살아 있다! 1994년부터 한국을 드라들며 예술인 대접을 받고 유명인 행세를 하고 있다. 趙甲濟
어제 별세한 윤정희 씨와 남편 백건우 씨, 그리고 딸 세 명은 1977년 7월 말 당시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에서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될 뻔했다. 백건우 씨가 타고 왔던 택시를 대기시켜놓았기에 탈출할 수 있었다. 이 세 가족을 유인, 북한 공작팀에 넘기려 했던 이가 이응노 화백 부인 박인경이다. 90세를 넘은 그녀는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정희 씨 장례식에 나타날지 궁금하다. 박인경은 북한공작원의 하수인 역할을 한 셈인데, 1994년부터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다. 백건우 윤정희 부부는 박인경을 공범으로 단정했고, 당시 한국 검찰도 범인으로 판단, 기소중지했었다. 이외의 다른 객관적 사실들을 종합할 때 박인경은 북한공작원들이 이 세 가족을 북한으로 납치하도록 유인책 역할을 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윤정희 씨 부고 기사를 쓰면서 박인경을 언급하지 않는 기자들은 기자가 아니다.
납치에 성공하였더라면 백건우 윤정희 씨는 북한으로 끌려가 김일성 김정일을 위하여 영화나 음악을 하도록 강요 받았을 것이고, 거부하다가 강제수용소로 갔든지, 신상옥 최은희씨처럼 탈출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가장 유명한 여배우와 피아니스트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던 박인경이 그 뒤 한국정부나 관리들로부터 우대를 받고 존경받는 문화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국가적 추태이기도 하다. 1977년 7월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큰 뉴스가 되었던 납치미수 사건이 40여 년이 흐르니까 잊혀지고 박인경은 한국사회의 집단건망증 때문에 죄값을 치르지 않고 살고 있다. 공소시효 등으로 형사처벌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이 협회가 아니라면 박인경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정리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짓을 하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면 대한민국이 미쳤다는 결론이 된다.
1978년 11월 9일 법무부가 외무부에 통보한 서울지방검찰청의 조치내용, ‘재불화가 이응노의 압수금품처리 결과보고’라는 공문에 따르면 검찰은 이응노 부부를 반역범죄자로 보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공문은 ‘재불화가 이응노는 처 박인경과 공모해 1975년 10월부터 1977년 7월까지 수차에 걸쳐 재불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손미자(윤정희)부부에게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하고, 공작자금 염출 명목으로 1975년 5월부터 1977년 3월까지 국내에서 3회에 걸쳐 북괴를 찬양하는 내용의 추상화 등 작품 170점을 전시, 판매한 뒤 그 대금을 외환은행 등에 예치했다가 1976년 11월 그중 4백만원을 손미자에게 제공해 포섭을 기도한 혐의이며, 백건우 부부를 유고슬라비아까지 유인한 박인경과 함께 반공법 위반죄로 입건 뒤 1977년 12월 29일 기소중지 시켰다'고 했다.
서울지검은 이응노가 작품판매대금중 1541만원은 외환은행에 예금했고 1167만원은 이화화방주인인 이응노의 처남댁 김현숙에게 보관시켰으나, 이 돈이 반공법위반범죄의 공작자금임을 인식한 외환은행 영업부장 신동호와 김현숙이 1977년 11월1일 중앙정보부에 임의 제시해 압수했다고 밝혔다. 서울지검은 국가보안법 제12조2항, 범인에 대해 소추를 하지 아니한 때에도 검사는 압수한 서류 또는 물품의 국고귀속을 명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서익원 검사가 1977년 12월 29일 기소중지 처분과 동시에 압수금품의 국고귀속결정을 내려, 1978년 1월 6일자로 국고에 귀속됐다고 설명했다. 1994년 김영삼 정부가 박인경의 귀국을 허락할 때 법적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는 밝혀진 게 없다. 적어도 공개적 사과나 전향의사 표명이 없었음은 확실하다. 이응노 박인경은 납치미수 사건 직후 잠적, 프랑스 정부에 정치망명을 신청,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납치미수 과정의 사실관계를 정리한다. 아래 내용은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가 1999년에 정리한 것이다.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북미수 사건은 白建宇·尹靜姬씨 부부가 1977년 8월1일 오전, 파리 駐在(주재) 한국대사관에 출두해 공산국가 유고 자그레브에서 프랑스로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신고하면서 공개되었다. 주목받는 피아니스트와 미모의 영화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한 이 사건은 국내외 언론의 관심 속에 국제적 사건으로 떠올랐다. 당시 보도내용을 종합한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77년 7월 초, 白建宇씨는 李應魯씨의 부인 朴仁京(당시 51)씨를 통해,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미하일 파블로비크」라는 부자가 자기 집 살롱에서 음악회를 열어 白씨의 연주회를 듣고 싶어한다는 제의를 받았다. 고려화랑(李應魯씨가 파리에서 경영한 화랑)의 고객 「에나」라는 여성으로부터 이 제의를 받았다는 朴씨는 며칠 후, 파블로비크 이름의 초청장을 白씨에게 건네 주었다. 7월21일자로 된 초청장의 내용은 白씨의 음악을 듣게 되어 기쁘다는 것과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쇼팡 등을 듣고 싶으며 白씨 가족은 물론, 朴仁京씨도 초청, 경비를 다 부담하겠다는 것이었다. 파블로비크는 이 초청장에서 음악회는 고령의 자기 부모를 위한 것인데 그들이 유고 자그레브 교외의 별장에 살고 있다고 했지만 白씨는 연주장소는 당연히 초청자가 살고 있는 스위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유고는 공산국가이므로 한국인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나라였다. 두 달 후로 예정된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서울 연주회 준비로 바빴던 白씨는 일단 거절했으나 朴仁京씨가 자기 입장이 난처하다고 권유해 마지못해 응락했다고 한다. 白씨는 한 해 전에 李應魯씨 주례로 영화배우 尹靜姬씨와 결혼식을 (李씨 집에서) 올렸고, 평소 李씨 집안과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白씨는 부인 尹靜姬씨와 생후 5개월 반된 딸 眞希(진희)양을 데리고 朴씨와 함께 1977년 7월29일 오후 2시5분, 파리發(발) 취리리行(행) 스위스 항공 705便(편)에 올랐다. 다음날인 7월30일은 尹靜姬씨의 33회 생일이었다. 李應魯씨의 아들 隆世(융세)씨가 이들을 파리 공항까지 태워주었다.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자 佛語(불어)가 유창하고 키가 큰, 파블로비크의 비서라는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비서는 파블로비크의 양친이 유고에 가 있어, 거기서 연주회를 하기 때문에 유고행 비행기로 갈아 타야 한다면서 白씨 일행의 짐을 찾아 옮겨 싣는 수속을 밟았다. 白씨가 비자도 없이 공산국가 유고에 갈 수 없다고 하자, 여비서는 스위스 제일의 갑부가 입국 수속을 다 취해 놓았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며 취리히∼자그레브간 왕복표를 건네주었다. 尹씨가 아기에게 먹일 요구르트를 사려고 했을 때, 여비서는 자기가 갔다오겠다고 자청한 후, 朴仁京씨에게 동행을 제의해 朴씨가 따라갔다. 朴씨는 이때 여비서로부터 봉투를 받았다. 취리히 공항에서 잠시 대기하던 白씨 일행은 자그레브行 유고 항공기에 올랐다. 여비서는 동행하지 않았다. 유고 공항 통과 시골 공항처럼 작은 자그레브 공항에서 尹靜姬씨는 「조선민항」이라 쓴 북한 항공기가 착륙 대기중임을 보았다. 白씨 일행은 비자가 없어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승객들이 다 빠져 나간 뒤, 한 공항 직원이 나가라고 손짓해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그 직원은 여권에 입국 확인 스탬프를 찍어주지 않았다. 공항 청사 밖으로 나오자 白씨 일행을 마중나온 사람은 없었다. 尹씨는 선글래스를 낀 동양 여성이 멀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마중객을 찾기 위해 두리번대는 白씨에게 朴씨는 취리히 공항에서 파블로비크 여비서한테서 받았다며 편지 봉투를 주었다. 봉투 겉에는 「아미크」라는 이름과 주소, 집의 약도가 그려져 있으며, 안에 유고 돈 8백 디나르가 들어 있었다. 白씨는 택시를 타고 운전사에게 약도를 보여주었다. 자그레브 시가지를 벗어난 택시는 한적한 시골 길을 15분 가량 달린 뒤, 3층 집 앞에 도착했다. 행인이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택시 요금은 2백 디나르가 나왔다. 마당에 사람이 없고 연주회를 초대한 집 치고는 조용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白建宇씨는 택시 운전사에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이 결정이 그 가족을 살렸다. 부인 尹씨와 딸은 택시 안에 두고, 白씨는 朴仁京씨 및 운전수와 함께 집 근처로 다가갔다. 정문은 잠겨져 있었고, 뒤로 돌아가니 뒷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운전사가 앞에 서고 그 뒤를 白씨와 朴씨가 따랐다. 1층은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끔 창문마다 커튼이 쳐져 있었다. 白建宇씨는 여비서가 준 봉투 속에 들어있던 열쇠로 문을 열었다. 朴仁京씨가 맨먼저 집안으로 들어가고 白씨와 운전사는 밖에서 기다렸다. 조금 있다 밖으로 나온 朴仁京씨는 2층에 만찬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白씨가 들어가보니 1층에 있는 세 개의 방은 모두 문이 잠겨 있었고 2층은 모두 방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중 한 방에 보자기를 씌운 테이블 위에 복숭아를 담은 과일 그릇과 하얀 접시가 놓여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白씨가 이웃 집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옆집에서 10대 소녀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白씨가 소녀에게 『아미크씨 집이 맞느냐』고 묻자 소녀는 『그렇다』면서 『늙은 할아버지가 혼자 사는 집』이라고 했다. 소녀는 3층 창밖에 널려 있는 빨래를 가리키며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다』며 건너왔다. 소녀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고 白씨가 뒤처져 들어갔다. 소녀가 3층으로 올라간 지 얼마 안돼 갑자기 『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서 내려오는 소녀 뒤에 동양 남자가 서 있었다. 놀란 白建宇씨는 택시쪽으로 달려갔다. 동양인은 『웨이트(Wait·기다려라), 웨이트』 하며 다가왔다. 白씨가 얼른 택시에 오르자 동양인은 택시 손잡이를 잡았다. 白씨는 안에서 문을 잠그고 운전사에게 빨리 출발하라고 말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白씨는 미국 영사관을 찾았다.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관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6시10분이었다. 영사관은 문이 닫힌 뒤였고, 도서관도 막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다. 도서관 직원이 크리스텐선이라는 부영사를 소개했다. 부임한 지 얼마 안되는 서른 두 살의 젊은 사람이었다. 크리스텐선은 자기가 숙박중이던 팰리스 호텔로 白씨 일행을 안내했다. 호텔에서 白씨는 다음날인 7월30일 오전 8시50분에 유고를 출발해 파리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저녁을 먹었다. 연락을 받고 호텔로 달려온 미국 공보관 관장은 白씨가 미국 영주권을 가진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을 알고 일행을 집으로 초대해, 白씨의 연주를 들었다. 밤 12시쯤 호텔로 돌아온 白씨 일행(尹靜姬씨+딸+朴仁京씨)은 헤어지기가 겁나 모두가 416호실에 투숙했다. 크리스텐선의 방은 3층에 있었다. 아침 6시40분쯤 밖에서 416호실 문을 두드렸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白씨가 가만히 있으니까 朴仁京씨가 문을 열려고 했다고 한다. 白씨는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하고는, 크리스텐선 방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잠시 후 크리스텐선은 『문밖에 세 명이 있다.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인데 모두 북한 사람 같다』고 전화로 알려주었다. 1시간쯤 지난 후, 짐꾼 한 명을 데리고 온 크리스텐선은 白씨 일행을 로비로 안내했다. 로비에는 다른 미국 영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영사는 크리스텐선에게 白씨 일행을 공항까지 안내하라고 일렀다. 공항에서 출국 심사를 받는데 담당관은 입국 도장이 없다며 의아해했다. 전날 입국 때 白씨 일행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던 사람이 나타나 또 한번 손짓으로 나가라고 했다. 白씨 일행은 파리行 유고 항공기 「JU 1242」便을 타고 7월30일 정오쯤 파리 오를리 공항에 내렸다. 집에 도착하고 얼마 후, 유고 美 영사관의 크리스텐선이 안부를 묻는 전화를 걸어왔 다> 초청 경위에 대한 金聖佑-朴仁京 대화 파리에 도착한 白建宇씨는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金聖佑씨에게 유고에서 있었던 사건을 털어놓았다. 金聖佑 특파원은 朴씨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판단, 파리 시내 20區(구) 악소街(가) 14번지 8층에 있는 朴씨 집을 찾아갔다. 다음은 金聖佑 특파원과 朴씨와의 일문일답(한국일보 기사 인용). ―白씨를 연주회에 초청하게 된 경위는. 『우리는 친부모와 친자식처럼 친한 사이였다. 그들은 우리를 잘 따랐고, 우리도 그들을 귀여워했다. 그런 나를 의심하다니 서운하다.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데…』 ―초청 경위를 듣고 싶다. 『서울에서 신문에 났다니 신문에 뭐라고 썼는지 보고 대답하겠다』 ―신문에서는 朴여사에게 공모혐의가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이 아니라면 누명을 벗어야 할 것이 아닌가. 『빈집(자그레브의 집)에 혼자 먼저 올라갔다고 의심하는데, 왜 올라가 보면 안되며, 내려와서 『만찬준비가 다 돼 있으니 올라가 봐』라고 내가 말했다는데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내가 너무 태연했다고 시비인데 태연하지 않았으면 또 일부러 태연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 아닌가. 白建宇가 누명을 씌운 것이다. 저들은 둘이고 나는 혼자니…』 ―초청 경위를 밝히지 않으니 의심하는 것 아닌가. 『파리로 돌아와서 白씨 내외는 나를 앉혀 놓고 꼬치꼬치 따지는데 이것은 경찰신문도 아니요, 그렇다고 우정에서도 아니요, 그런 식으로 달려드니 어떻게 답변하겠는가. 그리고 전혀 아무 것도 모르고 나만 따르는 바보가 어디 있는가. 저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연주회의 초청자가 대관절 누구냐. 『취리히에 사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무슨 제재소인가 공장을 경영하는 큰 회사의 사장이라고 했다(白씨에게는 스위스 제1의 갑부라고 말함). 사장은 파리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고, 부모들은 유고에서 살다가 스위스로 넘어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장을 소개한 사람은. 『우리 화랑에 그림 구경하러 가끔 오는 어떤 여자가 소개했다. 무슨 말끝에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白建宇를 자랑했더니 취리히에 사는 어떤 사장이 1년에 한번씩 고령의 부모들을 위해 음악회를 여는데 갈 생각이 있겠느냐고 해서 白建宇를 키워줄 욕심으로 그에게 가 보라고 했다』 ―그 여자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글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초청장 주소는 가공 ―이름은 아는가. 『하도 사람 이름 기억을 못해서…. 화랑에 사인이라도 남겨놓고 간 것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화랑에는 댓 번, 아니 서너 번 온 여자다』 ―주소도 모르는가. 『모른다』 ―초청장을 받아 白씨에게 전했다는데 그 초청장은 이 여자가 가지고 온 것인가. 『아니다. 다른 여자였다. 초청하는 사장의 비서라면서 화랑에 두고 갔다.』 金聖佑 특파원과 인터뷰를 가진 후 朴仁京씨는 3차에 걸친 駐佛 한국대사관의 출두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金聖佑 특파원은 초청장에 쓴 주소지 「스위스 취리히 펠드 스트라스 17번지」를 찾아갔다. 「펠드 스트라스」라는 거리는 있었지만 17번지는 없었다. 이 거리는 1번지부터 23번지까지가 없고, 24번지부터 시작돼 주소부터가 가짜였다. 초청자 「미하일 파블로비크」는 유령 인물이었다. 白씨 부부의 유고 탈출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자그레브 주재 美 영사관의 크리스텐선 부영사는 白씨 부부가 파리에 도착한 지 6일 후인 1977년 8월4일, 조선일보 파리특파원과 전화 인터뷰를 갖고 『白씨 일가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게 느껴져 돕기로 했었다』면서 『白씨 일가와 함께 있던 朴仁京씨는 나와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아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고 말했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는 8월14일, 1面에 게재한 장문의 기사에서 白建宇씨가 유고의 자그레브 별장에서 만났던 동양 남자와 유고 공항 입구에서 보았던 선글래스를 낀 동양 여자는 자그레브 駐在 북한 통상대표부에 근무하는 북한인 부부로 밝혀졌다며 白씨 부부 납치기도 사건은 북한에 의해 저질러졌음이 분명하다고 보도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서 지적된 朴仁京씨의 「미심쩍은 행동」은 다음과 같다. ①연주회 초청을 주선했다는 여자에 대해 『파리에 사는 사람이며 아주 친한 사람』이라고 했다가 『어디 사는 사람인지 모르며 서너 번밖에 만난 일이 없다』며 분명한 신원을 밝히지 않고 있다. ②초청장이 처음엔 우편으로 보내져 왔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비서라는 여자가 두고 갔다고 번복했는데 비서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③취리히 공항에서 파블로비크의 여비서가 아기에게 먹일 요구르트를 사러 갈 때 朴仁京씨가 따라가, 白씨 부부가 안보는 데서 자그레브 별장의 약도와 돈이 든 봉투를 받았다. ④자그레브 공항 도착 후, 마중나온 사람이 없어 白씨가 두리번거리자 朴仁京씨가 봉투를 내주면서 『택시타고 오라는 말인가봐. 택시 타고 가자』라고 말했다. ⑤별장 도착 후, 빈 집을 앞장서 올라갔다 나오면서 『만찬회 준비가 다 되어 있다. 올라가 봐』라고 말했다. ⑥미국 영사관으로 가면서 『이 일을 크게 벌리지 말고 조용히 덮어두자』고 말했다. ⑦미국 영사관에 들어서면서부터 말이 없어지고, 미국 공보관장이 집으로 초대했을 때는 호텔에 그냥 있자고 했다. ⑧북한 사람이 호텔 방문을 두드렸을 때 『내가 가볼까』 하면서 문을 열어주려는 것을 白씨 내외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⑨白씨가 한국대사관에 가서 신고를 하자고 하자 『나는 프랑스 정부와 손잡고 살 수 있다』면서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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