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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초 만드는 독일인’ 이야기는 한 환경 단체를 통해서 건네 들었다. ‘플러그를 뽑고 한 박자 천천히’라는 모토의 캔들 나이트 운동을 진행하던 중 버려진 밀랍으로 초를 만드는 독일인 부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부부는 환경 운동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하기에 그들의 시골살이 사연이 궁금해졌다. 더욱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이만큼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말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람이겠구나’ 하는 기대가 생겼다. 한국에 반한 독일 청년 독일인 청년이 한국인 빈도림이 된 사연은 이렇다. 스무 살 무렵, 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던 그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서구에 덜 알려진 신비한 나라에 강한 ‘필’을 받았다. 1974년에는 교환학생 자격으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해 3년을 공부했을 정도로 한국에 빠져들었고, 어느 순간 본인이 ‘평생 동안 이 나라와 관련된 삶을 살겠구나’ 하는 강한 영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한다. 마침 그 무렵 독일에도 정식 한국학 강좌가 생겨, 그는 독일로 돌아가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박사 학위를 받은 1984년, 진로를 고민하던 그에게 때마침 한국의 지인으로부터 반가운 연락이 전해졌다. 청주의 한 여대에서 독일어를 가르칠 교수를 뽑는다는 것. 유럽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었던 그에게는 뜻밖의 희소식이었고, 고민할 필요 없이 당장 짐을 꾸려 한국으로 향했다. 대학에서 독일어를 가르친 지 8년째 되던 해, 한국어에 능통하고 사교적인 성격의 그는 독일 대사관에서 사무관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독일과 한국 문화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책임감 또한 막중하던 시절이었다. 번역가인 부인 이영희 씨와도 대사관 일을 통해서 인연을 맺었고, 서울 중심가에 3층짜리 빌라를 얻어 세 아이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객 빈, 길 도, 수풀 림’자를 써서 이름을 지을 정도로 선비 기질이 넘치는 그에게 팍팍한 서울 생활이 마음에 찼겠는가. 결국 2002년 부부는 3층짜리 큰 집 대신 옥천골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옥천골 골짜기 집 1 밀랍을 녹이는 여름에는 텃밭 가꾸기에 더 손이 간다. 본격적인 초 만들기 작업은 겨울에 시작된다고. 2 왼편 꿀초 공방과 오른편 살림집. “법주사 푯말을 따라 쭉 들어오세요. 절 바로 밑 하얀 집이에요” 하는 안주인의 친절한 설명에도 꿀초 집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산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더 이상 차가 진입할 수 없겠다 싶을 무렵에야 아담한 두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하게 지어진 이층집은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나무로 지은 단층집과 머리를 맞대는데, 애써 단장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뒤로는 산을 마주하고 작은 시내도 흐르는 운치 있는 집터는 빈도림 선생이 미혼일 적 구입한 것. 화가였던 친구가 작업실을 만들 요량으로 이곳저곳 발품 팔아 찾은 땅인데, 사정이 어려워 그에게 되팔았다 한다. 1천만원도 안 되는 시세였지만 미혼인 그에게 꽤 큰돈이었는데, ‘나이가 들면 시골에 가서 살아야지’ 하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기에 기꺼이 구입했다. 대사관 퇴직 후 부인과 함께 번역가로 활동할 때도 옥천골 땅은 여전히 노년기를 보낼 시골로 생각했다. 하지만 프리랜서로 일하니 시시때때로 시골 땅을 둘러볼 시간이 생겼고, 어느 날에는 작은 텃밭도 꾸며보았다. 그러다 보니 마음 내키면 자고 올 작은 조립식 창고가 필요해졌고, 가꾸는 작물도 늘었다. “한 달쯤 시골집을 못 둘러봤더니, 텃밭에 잡초가 무성하더라고…. 번역 일이야 시골에서도 할 수 있으니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늙어가자 이야기했지요.” 부부는 미련 없이 서울을 떠났다. 처음에는 걱정도 있었지만, 인터넷 선이 연결되자 막상 일에는 큰 불편이 없었고 오히려 빈도림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연 속 삶을 즐기게 되었다. 자연이 그림이 되다 3 2층 다락방에 꾸민 부인 이영희 씨의 서재. 천장 밖으로 뒷산 풍경이 들어온다. 4 꿀초 공방 내부. “감출 것도 없고 꾸밀 것도 없으니 마음껏 둘러보라”는 주인을 닮은 소박한 집은 ‘동몽헌’이라 불린다. 빈도림 선생이 독일에 있을 때 지은 이름으로 ‘동양을 꿈꾸는 집’이라는 뜻. 청년 시절부터 한국에 살겠다 마음먹었던 터이기에 설계도도 직접 그렸다. “100% 자연 소재로,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집을 짓고 싶었지요.” 흙으로 구운 벽돌로 뼈대를 세웠고 황토로 건물 안 벽을 단장했다. 옛날식으로 황토에 보리 가시를 섞었더니, 시간이 지나도 흙벽이 바스러지지 않는다. 그 위에는 창호를 발라 마무리했는데, 담배 냄새가 배지 않는 것은 물론 습기까지 조절해주어 새삼 조상의 지혜에 감탄하고 있다고. 재미있는 것은 선생이 독일 태생이라는 배경이 더해져 동몽헌 곳곳에서 이국적인 멋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나무를 노출시킨 높은 천장에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작은 천창이 달려 있다. 스무 살 시절, 독일에 유학한 부인 이영희 씨가 그곳에서 보았던 밤하늘을 잊지 못해 남편에게 특별 주문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판매되지 않아 독일에서 직접 공수해왔다. 타원형 계단을 올라 2층 다락방으로 연결되는 구조 또한 독일 집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침실과 부인의 서재가 있어 부부의 프라이버시가 보호된다. 거실에 들어서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나무 그림 장식은 그보다 먼저 한국학을 공부했다는 독일인 스승 핫세 선생과의 합동 작품. “한지를 찢어 마음껏 붙이기만 했다” 하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다락방 계단으로 연결되는 통로에 그려진 수묵화 또한 두 선생이 함께 그린 것이라니 그들의 풍류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방에는 별다른 장식을 걸지 않는 대신 큰 창을 만들었다. 그 창 밖으로 우거진 나무 숲을 감상할 수 있어, “자연이 최고의 그림”이라는 선생의 이야기에 어느덧 동감하게 되었다. 초 만드는 독일인, 빈도림 5 1층 서재. 한쪽 벽을 모두 창으로 만들었다. 6 1층 거실 모습. 흙벽과 스토브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홈페이지(www.honeycandle.co.kr)를 통해 꿀초 만들기 강좌를 수강하면 선생의 초를 조금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다. 선생은 꿀초와의 만남을 ‘운명적’이라 표현한다. 2002년 이사를 결심한 시점에 옥천골 일대를 국립 묘지로 조성한다는 전남 군청의 발표가 떨어졌다. 막을 수 없는 국가 정책이라 억울한 마음을 누르고, 부부는 그와 비슷한 집터를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한 한봉(토종 벌을 키우는 농원) 업자가 집을 판다 하여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집 한편에 벌집, 즉 밀랍이 버려진 채 수북이 쌓여 있더란다. “독일에서 꿀초 공방을 다녀온 일이 있었어요. 은은한 초 향이 무척 좋았는데, 그 귀한 밀랍을 버린다기에 모두 달라고 했어요.” 이후 정부의 계획이 무산됐고, 이는 부부에게 새옹지마인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욕심으로 밀랍을 챙겨왔지만, 제대로 가르쳐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관련 책을 하나 구해 밀랍을 녹이고 찌꺼기를 거르는 방법을 터득했지만, 완성되면 표면이 쩍쩍 갈라지기 일쑤였다. 일반 실을 꼬아 심지를 만들 정도로 초보이다 보니, 초가 제대로 탈 리 만무했던 것. 다행히 독일 방문 중 들른 꿀초 공방에서 초 만들기의 기본을 배울 수 있었고, 선생의 부단한 연구까지 더해져 현재의 실력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석유 찌꺼기로 만든 파라핀에서 발암 유발 물질이 나온다는 발표까지 있어 꿀초를 찾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큰 장식은 없지만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나기 때문에 선물용으로도 인기란다. “단 1시간만이라도 플러그를 뽑고 한 박자 천천히 꿀초 향기를 맡아보세요.” 맛깔스러운 한국어로 환경적인 삶을 얘기하는 빈도림 선생의 얼굴에서도 은은한 꿀 향기가 넘쳐났다. |
첫댓글 포근한~~보금자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