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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 그리고 부르심
-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는가 1: 대림의 이유, 강생의 현실
이사 30,19-26; 마태 9,35-10,8 /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24.12.7
이번 대림시기에 전해 드리고자 하는 강론 구도에 따라서, 오늘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주님의 빛’ 속에서 두 번째 신앙 공리인 강생 부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말씀드릴 것은 강생은 성탄 사건을 성사로 하여 전개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성탄으로부터 시작하여 특히 공생활 전체와 십자가 사건에 이르는 전 생애를 포함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이사 30,20). 이 예언대로 과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던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열두 제자를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앓는 이들과 마귀들린 이들에게 파견하시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마태 9,36; 10,1.6).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시편 147,6) 하는 말씀이 이렇게 하여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이사 30,20)과도 같은 역경이 성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강생하셔야 했던 배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 안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으며 마귀 들려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만나시면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마귀를 모조리 쫓아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의 주요 수단으로 삼으셨던 치유와 구마 기적은 갈릴래아 이외의 지방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도 그대로 이어지게 하셨으니, 이것이 강생의 현실이었습니다.
이사야가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예고한 그 당시 시대 상황 즉 앗시리아의 침공 사태에서는 큰 살육이 일어나고 탑들이 무너질 정도로 처절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하지만 민족적 참상에도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백성을 위로하여 주실 전조(前兆)는 나타났습니다. 기원전 701년 히즈키야가 이끌던 유다 왕국은 앗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침공을 받아 성읍 46개가 정복당하고 히즈키야는 항복하고 말았지만, 수도 예루살렘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열왕기 기자는 주님의 천사가 개입하여 예루살렘이 구원받은 것이라는 해석을 남겨 놓았습니다(2열왕 19,35-36; 이사 37,36-37). 히즈키야가 군사력에 있어서 압도적인 열세인 처지에도 불구하고, 동맹군보다 하느님께 의지하였음을 부각시킴으로써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장차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에 대해 희망적인 근거를 남겨 놓기 위함으로 보입니다(김명숙). 이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도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 하리라”(이사 30,26).
이를 근거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하느님께 기도로써 부르짖기를 권고하면서, 그리하면 그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시는 응답을 보내 주시리라고 위로하였습니다.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
백성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상황은 총체적인 비구원(非救援)의 현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정치는 이민족인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경제는 사두가이들이 제사권으로 독점 장악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백성의 여론은 율법 해석을 독점하고 있던 바리사이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었습니다.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활동과 행보는 이 같은 비구원의 상황에 대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억압하는 정치에 대한 본을 보여 주시고자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을 섬기셨으며, 빵의 기적 등으로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고 사람들끼리도 서로 도움을 받는 현실을 체험시켜 주셨고, 안식일을 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안식일을 가르치심으로써 율법을 바리사이들의 손에서부터 백성의 손으로 돌려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오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당신 혼자서 힘에 부치셨으므로 제자들을 불러 여러 곳으로 파견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미 힘을 가진 자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병들고 마귀 들린 이들에게는 직접 기적을 일으켜서 고쳐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그분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체험시켜주심으로써 이 비구원의 상황을 구원의 상황으로 역전시키셨습니다.
오늘 마태오가 보도하는 대목도 이 같은 예수님의 활동을 집대성한 보도문으로서, 강생의 현실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9,35). 하지만 워낙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인 지가 오래여서 당신 혼자의 힘으로는 부치셨으므로 제자들에게 더 많은 제자들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도록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소의 현실이 드러납니다.
성소는 거룩한 부르심이어서,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몸소 부르십니다. 어느 한 사람의 성소자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필요하면, 하느님께 기도로써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말로써만 바치는 것이 아닙이 그 다음 대목에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들으시라고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는 이렇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으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라.”(마태 9,37)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내용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그것들의 계략에 의해 병든 이들과 허약해 진 이들을 고쳐주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즉, 구마와 치유의 사도직은 그 자체가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행동적인 차원의 기도였으며 특히 하느님의 일꾼을 보내달라는 청원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내리신 이 같은 분부, 즉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서 치유와 구마의 사도직을 행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성소자나 예비자가 더 늘어나기를 바라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께 바쳐드려야 할 행동적 기도가 됩니다.
또한 오늘 교회는 암브로시오 성인을 기억합니다. 4세기경에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나 밀라노에서 주교 학자로 활약한 그는 사제로 서품되기 전에 법학을 공부하고 로마제국의 공직을 맡아 봉사했던 경험을 살려서 정통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아리우스 이단과 대결하는 한편, 전례와 성직을 개혁하고 황제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훌륭한 인품과 탁월한 강론을 익히 알고 있던 모니카는 마니교 이단에 빠져 있던 아들 아우구스티노를 그에게 맡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자라나게 했던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사상이 근 천 년 동안이나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대혼란이 밀어닥쳤던 서방 가톨릭교회를 유럽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이끌었음을 생각하면, 그를 이끌어준 암브로시오의 성품과 신앙이 아우구스티노 이상으로 돋보입니다.
암브로시오 시대에 로마제국에서 신앙에 대한 박해는 종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교로까지 인정되어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지기는 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단들이 출몰하여 대중의 신앙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 분명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단 가운데 아리우스 사제가 주장한 내용은 신자 대중의 이목을 끌만큼 출중한 바가 있었습니다. 키프로스의 주교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키가 크고 군살이 없는 몸매에 준수한 용모와 공손한 말투를 썼으므로 여성 신자들은 그의 정중한 예의와 외모에 홀렸고 남성 신자들은 그의 지적 탁월함에 끌렸다고 합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동등하지는 않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가장 하느님을 닮으신 분이시기는 하지만 피조물로서 세상이 창조될 때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든가 영원하신 분이라고까지 높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단으로 공식적으로 파문당하기 이전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믿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했던 박해시대가 끝나고 순교의 열풍은 자취를 감추었던 그 시대에 황제와 고관대작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사회적으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다 보니 아리우스의 이런 예수관은 일견 합리적인 구석이 있어 보였고 쉽게 이해하고 쉽게 믿고자 했던 세태와 어울렸던 것입니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리우스의 이런 이단적 주장에 맞서서 아타나시우스가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심을 논박하다가 박해를 받기도 했는데, 암브로시오 역시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추신 분이시며 따라서 하느님은 성부께서 성자를 이끄신 성령과 함께 삼위일체이심을 아리우스 못지않은 성품과 치열한 논리로 강론함으로써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당대 지성인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아리우스의 후예들은 지금도 많아 보입니다. 쉽게 믿고자 하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그들입니다. 하느님을 가장 빼닮으신 인간으로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을 믿기가 오늘날에도 그리 쉬운 노릇은 아닙니다.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믿으면서도 신성에 따르는 영성과 함께 인성에서 우러나오는 현실적 투신의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동시에 갖추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려워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깊이 있는 영성과 현실적인 의식은 한편으로는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십자가와도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인체의 두 발과 같아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짝입니다. 영성 없는 투신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투신 없는 영성은 현실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교우 여러분, 이 대림시기에 “주님의 빛 속을 걸어가기 위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두 번째 신앙 공리가 강생 부활인데, 그 중에서 우리가 기다려야 할 주님의 강생이란 초라한 구유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만을 뜻하지 않으며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로 상징되는 비구원의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구원의 복음, 즉 하느님의 자비가 이제 무상으로 베풀어지리라는 희망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의 복음이 바야흐로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어서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도 세상 끝날까지 그리고 땅끝까지 선포되는 현실, 이것이 대림의 배경이요, 강생의 현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어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셨으니, 이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리가 나설 차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럽 언론인들이 한국 사회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관찰한 '오마이뉴스'의 기사(2024.12.6)를 첨부합니다.>
'계엄령' 윤석열은 누구인가? 유럽 언론의 적확한 해석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외신들은 한국 민주주의 역동성에 주목
사회적 진보는 견고한 체제에서보다 허약하고 빈틈 많은 과도기에서 탄생한다. 균열과 흔들림이야말로 제거해야 할 체제의 모순을 선명히 드러내는 잠재 에너지를 갖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퇴행처럼 보이는 현실을 절망과 체념 속에 수용하며 넘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2024년 한국의 겨울은 지난 2년 반의 퇴행을 단숨에 바로잡을 기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생동적이다. 정의를 향한 한국인의 열정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뜨겁다. 이 사실은 국제사회의 시선이 오히려 더 잘 증명해주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 역동성에 주목한 외신들
▲4일 자 영국 <인디펜던트>의 기사 "한국은 왜 계엄령을 선포했고, 윤석열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인디펜던트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이어진 6시간의 긴박한 반전 드라마는 외신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을 향한 총구를 움켜쥔 채 "부끄럽지 않느냐"고 외치는 여성 정치인의 용기를 보며, 그들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가슴에 새겼다.
시작은 불안한 시선이었다. 많은 외신들이 서울발 소식을 긴급히 전하며, 길어질지도 모를 스산한 동토의 밤을 보도했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 <디벨트>는 한국에서 모든 정치 활동과 시위, 정당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언론과 출판 활동 역시 제한된다고 서울의 소식을 긴급 타전했다.
이 신문은 윤석열 대통령이 한국의 국회를 "민주적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범죄자들의 피난처"라고 지칭했다면서 "탱크와 군인이 곧 한국을 통제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고 보도했다. 독일의 대표적 보수매체인 이 신문은 "최근 수개월 한반도에서 (안보)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면서, 하지만 "북한이라는 전체주의가 통치하는 이웃이 이번 상황에 개입됐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유럽인들은 한국과 같이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으로 알았던 나라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소식을 들은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의 첫 반응은 "왜?"였다.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계엄령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했다. 이 신문은 "비상 상황에서 민간 당국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군이 통치권을 갖는 체제"라면서 위반한 사람들은 영장 없이 체포될 수 있다고 전했다.
한국의 나이든 세대에서나 어렴풋한 기억으로 알고 있을 계엄령을 일반 영국 시민들이 알리 만무하기 때문일까? 이 신문은 "이론적으로는 일시적 조치이지만, 계엄령이 시행된 국가들에서는 종종 연장되거나, 경우에 따라 무기한 지속되는 사례도 있다"고전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과거 여러 차례 계엄령이 선포된 적이 있고 가장 최근의 일은 1979년이었다고 설명했다.
'계엄령의 원인은 윤석열의 권력욕'
프랑스의 유력 보수 언론 <르피가로>는 '계엄령을 선포한 윤석열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는 화려한 검사 경력을 거쳐 한국 보수 정당과 함께 정치에 입문했으며, 최근 몇 주 동안 여론 조작 스캔들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 신문은 "한국의 언론은 종종 그를 윈스턴 처칠에 비유한다"면서도,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은 영국의 전 총리와의 모든 비교를 넘어섰다"고 평가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권력욕을 계엄령의 숨은 원인으로 평가한 언론도 있었다. 독일의 유력 진보 언론 <쥐드도이체 차이퉁>은 '두 시간의 자유를 박탈 당한 한국'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불안한 서울의 밤, 식은 땀으로 젖은 한국 민주주의는 악몽에 놀라 깨어났지만, 표면상 무사한 듯 보인다"고 전했다.
새벽의 차가운 여섯 시간이 유럽인들에게 꽤나 상징적이었던 것 같다. 대통령의 선포 시간이 늦은 밤에 이뤄진 것이 물론 우연은 아닐 것이다. 독재자가 깊은 밤을 좋아하는 것은 필연일까? 프랑코 시대를 경험한 스페인은 '독재자의 시절'을 전 세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스페인의 중도 보수 언론 <엘문도>는 다음과 같이 서울의 새벽을 표현한다.
"북한식 권위주의 돌풍에 흔들린 한국의 혼란스러운 새벽. 한국 대통령이 삼엄한 계엄령을 선포해 나라를 마비시킨 지 5시간 이상이 지나, 의회와 사회의 강한 반발로 인해 결국 해당 조치를 철회했다. 이 순간 한국 사회는 북한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거나, 한반도 분단 이후 평양 못지않게 잔혹했던 서울의 독재자들이 통치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스페인인들에게 흔히 한국은 문화 강국으로 인식된다. <엘문도>는 "서구 사회에서 문화적 현상으로는 이상적으로 인식되는 한국이 북한식 권위주의 돌풍에 휘둘렸다"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한국을 뒤흔든 사람은 다름 아닌 검사 출신의 지도자였다고 촌평했다.
영국의 <가디언>은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 시도로 인해 즉각 사퇴하거나 탄핵의 요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40여 년 만의 첫 계엄령 시도가 한국을 그들의 현대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심각한 혼란으로 몰아넣었다고 평가한 이 신문은, 만약 윤 대통령이 해임된다면 민주화 이후 탄핵으로 퇴임한 두 번째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이 워싱턴에 보내는 경고"
▲3일 자 미국 <디애틀랜틱>의 기사 "미국에 대한 한국의 경고"디애틀랜틱
한편, 한국의 상황을 미국이 처한 위기와 비교하는 언론도 있었다. 미국의 권위있는 월간지 <디애틀랜틱>은 "우파 성향의 권위주의적 대통령인데, 언론을 공격하고, 개인적 이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한 혐의를 받고,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부패 의혹에 대한 조사를 방해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인물"이 있다고 운을 뗀다.
"물가 상승과 의료 문제를 해결할 의지는 거의 없어 보이며, 감옥행을 피하기 위해 집권을 지속하려는 희망만 가진 인물 [……]. 이 모든 모습은 곧 미국에서 벌어질 디스토피아적 악몽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한국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위기"라고 <디애틀랜틱>은 설명했다. 이어 이 언론은 "위기의 몇 시간만에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국회는 만장일치로 계엄령을 뒤집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며 해피엔딩을 그렸다.
미국이 앞둔 디스토피아적 위기가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리라는 희망을 한국에서 보고 싶었을까? <디애틀랜틱>은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소개했다. 무엇보다 이 매체는 이번 사건을 "한국이 워싱턴에 보내는 경고"라고 규정하며 그 의미를 부각했다.
스페인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진보 성향의 <엘빠이스>는 한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견고한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로 묘사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발표 하나가 이 견고함에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을 가져올 수 있음을 지적하며, 결국 국회가 거부권을 행사해 계엄령을 저지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대통령이 계엄령의 명분으로 지목한 의회 권력은, 서구 언론의 시각에서는 정반대로 해석되는 듯하다. 그들에게 의회는 권위주의적 대통령이 남발하는 계엄령 같은 독재의 철권을 막아내는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그 역동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계엄령의 남용과 독재적 통치로부터 의회를 보호하려는 헌법정신의 취지를 상기하게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