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과 큐브 외 2편
김춘리
모래밭에 엎드린 자세로 볼 거야
바닷바람은 멀리서 보면 오징어 같았어
희극적이었고
해변이라는 큐브를 맞추고 말 거야
(배가 올 거야)
4x4x4 퍼즐에서
5x5x5 퍼즐로 바꾸었을 때
SNS에 거짓을 연습하던 여자와
토끼 이빨 조각을 맞추던 남자의
독백을 받아 주던 물거품
해변은 창백한 목덜미 같아
목덜미를 내어주며 맹세했었지
맹세할수록
심장이 모래 같았지
타 오르거라!
타 오르거라!
개머리 능선을 밟고
모래밭에 엎드린 자세로 타 오르거라
사슴 똥을 주우며 타 오르거라
너는 여전히 엎드린 자세로 큐브를 돌리고
(배가 올 거야)
모래 위에 시간을 적고
평면을 만져 볼 수 있을까
해변이라는
비극은 아니니까
모래라는 큐브니까
칼
내 귀에는 갈색으로 변한 칼자국이 남아 있다
칼자국이 서로의 귀를 잡고 있다
푹 익은 사과를 깎으면 외로움이 없어질까
사과를 먹고 나면 칼이 사라질까
더 많은 귀가 필요한 시간에는 사과를 사러 가고
지루한 날에는 칼과 사과를 잡아당긴다
둥근 그림자만 남기고 사과를 먹는다
그림자는 젓가락으로 집어라
썩은 사과로 어떻게 젖은 눈물을 통과할 수 있을까
사과 대신 탁자를 선택했어요
외로움이 익는 동안
탁자를 사과라고 부르거나 시계를 그림자라고 부르거나
썩은 사과를 도려낸 손가락으로 칼을 숨긴다
기념일
해변에 있는 소돌 슈퍼는 애니가 좋아하는 가게다 밀가루와 설탕을 할인해 주기도 하고 방울토마토에서 방울 소리가 나면 구름 위의 장미를 주기도 하는데 반값에 세일 하는 주걱을 사던 날 그날을 기념일이라고 불렀지 애니는 반년마다 기념을 챙겼지 기념일엔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을 뜯었고 애정과 분노가 가득한 드라마를 보며 녹슨 통조림을 먹었지
경멸의 자세는 낭만적이야
일종의 식욕이니까
애니는 주걱을 애인이라 번역했지 요리를 배우기 위해 기차를 타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늘 향하는 곳은 버스정류장, 해변의 방파제는 계단처럼 보이고 파도가 치면 허물어지고 계단을 올라탄 애니의 출항이 시작되었지 정착이란 물로 뛰어드는 것이어서 모래찜질하거나 고깃배를 타거나 달아오른 숨소리도 다 해변의 일이었지 봉돌은 무거운 것으로 애기*는 화려한 색으로 미끼가 돼지비계면 낚시의 확률은 높아졌지 문어들이 걸려들었어
우리는 두 마리 문어였고
애니는 다음 기념일을 세고 있었지
빨판이 달라붙은 유리창으로 해변의 소돌 슈퍼 간판이 보였지
*봉돌과 함께 매달아 물고기를 유인하는 장치.
― 김춘리 시집, 『평면과 큐브』 (한국문연 / 2023)
김춘리
춘천 출생.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모자 속의 말』과 공동시집 『언어의 시, 시와 언어』를 냈다. 2012년 천강문학상을 수상했고, 2013년 경기문화재단 문예지원금, 2017년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지원사업,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