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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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업자득>
<유홍준이 전국 최고로 꼽는 '환상의 영춘가도'>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아름다운 길>
예로부터 산자수명한 고장으로 이름이 나 있던 영춘현은 조선 말기까지 단양‧제천‧청풍과 함께 사군(四郡)으로 불렸는데, 1914년 왜놈들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단양군 영춘면으로 격하되었다. 오늘날 영춘면은 인구 3470명(2014. 12. 31)의 작은 고장이다. 영월에서 동강과 서강이 합류하여 형성된 남한강이 단양으로 흘러들면서 첫 번째 거쳐가는 곳이 영춘면이고, 이어 단양-청풍을 거쳐 드넓은 충주호로 흡수된다. 유홍준은 영춘에서 단양에 이르는 한적한 시골길을 ‘환상의 영춘가도’라며 극찬하고 있다. 오죽 반했으면 모든 탐방객들이 제일로 치는 구례-하동 간 섬진강 벚꽃길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아름다운 길’이라 했을까. 영춘가도는 사진만 보면 그저 가은에서 농암 가는 길 정도다. 농암천을 따라 가은에서 농암으로 가는 길은 강 양쪽의 풍광도 수려하고 소양서원 같은 유서 깊은 유적도 많아 어법 한코스 한다.
<방연이 아랫동네에 있는 소양서원>
유홍준이 영춘가도를 극찬하는 까닭은 워낙 외진 곳이라 개발의 때가 묻지 않았고 차량 통행도 뜸하여 고유의 시골 정취가 풍기기 때문이다. 전국 어딜 가든 조금만 이름이 알려졌다 하면 4차선 신작로가 뚫리고 가든이다 모텔이다 팬션이다 수퍼다 하여 경관을 망치는 건물들이 들어서 기분을 잡친다. 나는 새재 과거길을 갈 때마다 초입에 영업집들을 모아놓고 관문 안에는 원래부터 있던 세 곳만 음식점 영업을 하도록 제한한 조치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 위에 문경땅인 조령관 너머까지 황토길을 조성하여 자연미를 최대한 살려놓았다. 병옥이가 새재관리소장으로 있을 때 들은 얘긴데, 황토길을 유지‧보수하는 일도 수월찮은 모양이다. 계속 전국에 수소문하여 품질 좋은 황토를 사다가 큰비 등으로 길이 쓸려 내려갈 때마다 보수하고 있단다.
<영춘향교에서 석전대제를 올리는 모습>
옛 영춘현 관아는 시골 치고는 매우 번듯하여 동헌과 객사 외에 9칸의 전대청, 6칸의 동대청‧비장청‧위전청이 있었다. 모두가 현감과 아전들이 공무를 수행하던 공간이다. 관아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사의루라는 2층 누각도 있었다. 왜놈들이 현을 면으로 격하시킨 뒤 이 근엄한 공간들은 동헌은 면사무소로, 사의루는 면 회의실로, 위전청은 경찰 주재소로, 전대청과 동대청은 소학교 건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관아 건물은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고 사의루만 남았는데, 지금은 높은 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관내의 유일한 초등학교인 영춘초등학교는 1906년에 설립되었다. 문경에서 가장 오래된 문경초등학교가 1912년에 설립되었으니 시골 치고는 전통이 깊은 편이다. 옛 공공건물 가운데 영춘향교는 가장 잘 보존되어 지금도 해마다 석전대제를 올리고 있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지금도 일부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문경향교>
전국에 234개교가 보존되고 있는 향교는 지금도 대부분 일정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향교는 고려 때 도입된 교육기관으로 조선조에 접어들자 전국 334개 군현에 일제히 설립하여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 지방 청년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향교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과 청년들을 가르치는 명륜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명륜당은 오늘날의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한다. 정종 1년(1399)에 설립된 영춘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 외에 동재‧서재‧전사청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문경면 교촌리에도 태조 1년(1392)에 설립된 문경향교가 남아있다. 전국 곳곳에 있는 교촌리라는 지명은 모두 향교가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문경군에서는 해마다 선현들에게 제를 올리고 예절교육을 비롯한 각종 교육장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문경향교 근처에는 햇비농원도 있어 주인의 긍지가 대단하다.
<성곽이 일부 복구되어 있는 온달산성>
유홍준이 영춘면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하리에 있는 온달산성(사적 제264호. 둘레 682m) 답사에 나서면서부터였다. 그는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경북 상주의 견훤산성과 함께 온달산성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3대 산성으로 꼽는다. 온달산성은 석회암과 사암으로 쌓은 석축산성으로서, 산의 정상 부근에서 북쪽을 향해 성벽이 형성된 테뫼식 산성이다. 온달산성은 성벽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고대 성곽 축성법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죽령 이남에 근거하던 신라가 국력이 신장하면서 북으로 영토를 넓혀갈 때, 온달산성은 고구려와 신라 간에 가장 치열하게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주연배우 가운데 7명이나 고인이 된 옛 영화포스트>
「삼국사기」 <온달전>에는 온달산성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영양왕 원년(590), 온달 장군이 ‘신라가 빼앗은 한강 이북 땅 백성들이 통탄하면서 국토 회복을 원하고 있습니다. 신에게 군사를 주시면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 하고 간하여 군사를 얻어 출정한 뒤, 성을 쌓고 적과 싸우다가 아단성 아래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이 성을 온달산성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 비문에는 온달 장군이 고구려가 취한 영토를 회복하러 쳐들어온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그 장소는 서울의 아차산성이 된다. 백제는 이곳을 아단성이라고 불렀으며, 백제 개로왕이 이 산성 아래서 전사한 곳이기도 하여 신빙성이 더 높다.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은 고구려 군이 쳐들어올 북쪽을 향해 성벽을 쌓아놓았기 때문에 신라에서 축조한 것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러브스토리는 치정(癡情) 스토리에 불과한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해 훨씬 격조 높은 사실(史實)이다.
첫댓글 바보 온달이야기로 나는 왕자되는 꿈을 꾸고는 했었는데...
그나저나,
제동이 절마 저거 왜 저러지? 누가 제동 좀 걸어주지 그래. 불쌍해서 못 보겠어.
나는 대학을 안 다녔어도 다 아는데...
대학을 다녔다는...그리고 돈도 좀 벌었다는 녀석이 정말 왜 저러지....
성원이 친구
영춘면 따라 흐르는 남한강이 홍수가 나서 수해가 크게 나서 당시에 단양서 서울 가려고 나섯다가 차가 물에 미끄러가다가
겨우 나온 기억이 나서 영 기분이 안좋으네
영춘면 벌방리를 지나다 그랬으니 그지방에 벼루가 유명하지 그후 집을 이주한걸로 안다네
쏘가리도 유명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