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은 1948년 처음 도입되었으며 그 후 7차례나 개정되었다. 1991년 마지막 개정에서도 국가보안법은 의미있게 변화되지 않았다. 수년동안 국가보안법은 정부의 승인없이 북한을 방문한 사람들, 해외에서 북한사람과 접촉한 사람들, 북한을 지지하는 표현을 한 사람들, 북한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구금하는데 사용되어 왔다. 이렇게 구금된 많은 수인들은 폭력을 사용하거나 주창함없이 표현과 결사의 자유에 관한 자신의 권리를 단지 행사한 사람들이다.
국가보안법은 바로 오늘날 양심수문제의 핵심이요, 한국의 인권상황의 징표이다. 국가보안법의 폐지없이 양심수문제의 논란이 종식될 수 없으며 인권상황이 개선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없다. 민주화의 진전에 있어서 국가보안법의 폐지만큼 절박하고 긴요한 일은 없다. 국가보안법은 완전히 폐지되어야 하며 그 어떤 대체입법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과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법률내용을 아무리 훑어보아도 기존의 형법 또는 형사특별법에 중복되지 않는 조항이 없다. 다시 말하면 국가보안법에 규정된 모든 범죄가 이미 다른 처벌법규에 의해 처벌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더라도 국가안보에 구멍이 뚫릴만한 어떠한 법률적 헛점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며 기존의 형벌법규에 의해 우리의 국가안보와 사회질서는 훌륭히 방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국가보안법의 조항들은 추상성과 모호함으로 가득차 있어서 근대형사법의 기본원리인 죄형법주의에 위배됩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형벌법규는 그 규성요건과 개념규정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명백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국가보안법의 제조항들은 법해석기관의 자의적 해석과 판단에 내맡겨져 있어 남용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같은 가능성은 이미 불행한 현실로 나타난 뼈저린 경험을 거쳤다. 더구나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의 위헌여부에 관한 어정쩡한
'한정합헌'이라는 결정을 한 후에도 해석과 적용의 자의성과 남용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법현실이 바로 국가보안법의 죄형법주의의 위배를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세째, 국가보안법의 규정은 자유민주주의를 유린할 수 있는 독소조항들로 가득차 있다. 특히 찬양·고무·동조죄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표현의 자유를 결정적으로 질식시킬 이험이 있으며 실제그러한 위험을 현실화시켜 왔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언론·출판·학문·예술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해 온 사실은 각계에서 터져 나온 분노와 항의의 목소리에 의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정치적 비판의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사소한 시정의 농담조차 국가보안법의 족쇄에 갇혀야 했던 것이다.
네째, 국가보안법이 근본적으로 문제삼고 있는 북한에 대한 종래의 정책과 인식이 완전히 변했다는 사실이다. 더이상 국가보안법상이 골격개념인 '반국가단체'로 북한을 볼 여지가 사라졌습니다. 우리 정부의 대북한정책과 통일정책은 북한정권의 실체를 완전히 인정하고 대화·교섭·교역한다는 전제위에 서 있다. 북한을 '민족공동체'로 설정하고 있는 '7·7선언'뿐만 아니라 점점 확대되어온 인적교류와 물적교역이 북한을 더이상 반국가단체로 보거나 국가보안법이 규정하고 있는 회합·통신, 잠입·탈출, 고무·찬양·동조 등의 죄목을 적용하여 처벌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다섯째, 우리 사회의 성정과 활력이 더이상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제한없는 자료와 정보의 공개, 활발한 토론을 통해 국정의 방향과 진로를 결정하는 민주주의 본연의 면목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사상이나 이념에 형벌법규로 대응하겠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배치되는 것이며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의 상실, 사회주의에 대한 패배감의 표현에 지나지 않다.
2. 시기별 국가보안법 제정과 적용
2.1 법 제정에서 제 4차 개정(1948.12-1961.5)까지의 시기
1) 제정부터 한국전쟁 전까지의 기간
미군정에 이어 1948년 8월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하고 이에 반대하여 제주도 4.3항쟁이 일어났으며, 다시 이 사건을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순천지구 주둔 제14연대와 그 인근 주민들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생정부는 내란행위자 내지는 남로당원을 단속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다.(법무부, [법무부사]. 1988. 134쪽 참조.) 이 법의 초안 이름이 '내란행위 특별조치법'이었다는 사실에서 국가보안법 제정의 직접적 계기를 제주도 4.3항쟁과 여순항쟁의 진압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국가보안법은 형사법의 기본법인 형법의 제정(1953. 9. 18)보다 5년이 앞서 시행됐다.
이 법이 처음 시행될 당시는 모두 6개 조문으로, 정부 참칭 또는 국가변란 목적의 결사· 집단구성죄(제1조)아 살인·방화·운수·통신기관 등 주요시설 파괴목적의 결사·집단 구성죄(제2조)가 주요 내용이었다.
이 기간 동안 국가보안법의 적용에 관한 통계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단편적으로 발견되는 자료들과 입법목적에 비추어 그 윤곽을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법의 시행에 의해 반미, 반정부의 정치, 언론활동,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언동까지도 처벌받게 되었다. '국제연합조선위원단'의 보고에 의하면 이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의해 1949년 한 해 동안만도 118,621인이 검거, 투옥되고 같은 해 9-10월에 132개 정당, 사회단체가 해체되었다"(재일본조선인과학자협의회 역사부회 역. 김희일 저 [아메리카조선침략사]. 雄山閣. 1972. 6. 224쪽;고준석.[남조선정치사]. 자植書房. 1980 2. 150쪽;한국현대사연구회. [알기쉬운 한국현대정치사]. 공동체. 1988. 139-140쪽). 또한 "그(국군) 정보기관은...... 일반인에 대해서 수사도 하고 군에 대한 수사도 했습니다만 그것은 법적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 정보기관과 헌병이 협력해서 숙청한 군인으로 말하면 무려 8-9천 명에 이르는 공적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공적을 이룬 것은 좋은데..... 그것이 차차 자라서 좌익계열을 박멸하는 이외에 일반형사범에 이르기까지 정보기관에서 수사를 하고 심지어는 고문을 하는 것도 있고 사람을 살상한 것도 있었습니다"(제헌국회 제5회 제56차 회의록. 1378-1379쪽. 권승렬 법무부장관의 '헌병 및 국군정보기관의 수사한계에 관한 볍률안' 제안이유;박원순. 앞의 책 제1권. 106쪽). 1949년 남한의 20세 이상 인구 9,716,309명과 위 입건, 구속자 수를 비교해보면 이 법이 당시 정부의 통치수단 중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1년에 10만 건 정도를 검사가 기소하는데 그 중에서 8할이 좌익사건입니다....1년에 8만 건 가까운 사건에서 3할 가량이 상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5만건"(제헌국회 제5회 제 56차 회의록. 1390쪽. 권승렬 법무부장관;박원순. 앞의 책 제1권. 108쪽)의 국가보안법 사건을 대법원이 처리해야 했다. 이러한 업무의 폭주 때문에 "1950년 12월 7일에는 '판사 및 검사 특별임용시험법'이 제정, 공포되어 충원하였으며, 1953년 8월에 실시된 공무원 감원조치에서도 판사와 검사는 그 대상에 제외되었다"(서울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사]. 1985. 85쪽;박원순 앞의 책 제1권. 107쪽). 단정수립 당시 검사의 정원은 163명(검찰사무직 공무원은 586명)이었고 1956년 10월 검사정원법의 제정과 함께 검사정원이 190명으로 늘었다. 그런데 1949년 12월부터 검찰청법 제26조에 의거 법무부 직원으로서 검사의 자격이 있는 자가 검사를 겸임하는 '정원(법)외 검사'를 두어 별도의 정원을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수는 공식 정원보다 더 많았다(법무부, [법무부사]. 1988. 51-52 및 154쪽). 형무소도 과포화상태였다. "각 형무소에 있는 수용자가 지금 너무 정원 이외에 넘친다..... 광주형무소에 600명 정원에 1,200명 가량, 서대문형무소에 2천명에 4천명, 마포에 몇 배...... 대전형무소에 1,200명인데 3,000명"(제헌국회 제6회 제28차 회의록, 오석주의원 발언;박원순 앞의 책 제1권 107쪽)이나 되었다. 이들 수용자의 8할이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사범 등 범죄가 격증하여 형무소 수용인원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0월에 '형무소 설치에 관한 건'을 제정, 공포하여 부천과 영등포에 형무소를 신설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형무소 직원도 계속 충원하여 정부수립 당시 3,372명에서 한국전쟁 전후하여 3,605명으로 증가하였다.(법무부, [법무부사], 1988. 53-57쪽;박원순. 앞의 책 제1권. 107쪽) 또 당시 법무부 차관이 "국가보안법 사건에서도 집행유예와 보석할 수 있다"([동아일보] 1950년 4월 7일자)고 발표한 것을 보면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의 폭주 때문에 늘어난 형무소 수용인원을 줄여보고자 하는 노력과 함께 이 법의 적용실태가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엄청난 수치는 당시 '국가를 변란할 목적'을 가진 단체와 국민이 사실상 이렇듯 많았거나 아니면 법 자체가 소수의 이익만을 위하여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사건과 적용자수가 폭주함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법의 개정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제정 국가보안법은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석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 중 수괴와 간부에 대하여 무기,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의 벌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개정 국가보안법은 수괴,간부는 물론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까지 사형이 가능하도록 ' 정최고형을 상향조정'하고 그 적용범위를 확대하였다.(제1조). 또 제정 국가보안법은 특별히 심급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반 형사소송법에 따른 3심제가 보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개정 국가보안법은 이 법에 규정한 죄에 관한 사건의 심판은 단심으로 하고 지지방법원 또는 지원의 합의부에서 행한다(제11조)고 하여 '3심제에서 단심제로' 축소하였다. 당시 권승렬 법무부장관은 국가보안법 개정안 제안이유 설명에서 심급제와 관련하여 "이것은 오래면 오랠수록 국가에서는 큰 곤란을 보고 또 형무소는 터질 지경이오...... 좌익분자를 속히 없애 버리고 건국을 속히 하려면 2심제 가지고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제헌국회 제5회 제56차 회의록, 1389쪽)라고 발언하고 있다. 그리고 개정법에 사상전향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에 대하여 선고유예와 동시에 '보도구금'(사상전향공작을 하는 보도소에 구금하는 것)에 부할 수 있도록 한 규정(제12조 내지 제18조)을 신설하였다. 이 개정법은 실제로 시행되기도 전에 국내외의 여론 때문에 재개정되었으나 심급제 부분을 제외하고는 개악내용이 모두 이후 개정법이나 유관 특별법에 살아남았다. 특히 보도구금제는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법원이 결정하도록 하였으나 후에 법원의 재판을 배제한 사회안전법으로 독립, 발전한다. 이러한 개정 중에서 특히 보도구금제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통계가 있다. 보도구금제의 실질적 구상자인 오재도씨의 말에 따르면 사상전향되었다고 판단하여 석방한 사람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던 '국민보도연맹'의 맹원수는 1950년 초반에 30만명(서울시의 맹원수 19,800여 명. [동아일보] 1950년 5월 5일자)이 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후퇴하는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김태광, [해방 후 최대의 양민참극 '보도연맹'사건], [말] 1988년 12월호. 20-27쪽;박원순, 앞의 책 제2권, 18쪽)
2) 한국전쟁에서 4.19민주당정권까지의 기간
한국전쟁 기간 동안 전선의 확대와 반복된 이동은 이른바 '부역자'를 양산하게 하였다. 부역자는 일반법인 형법과 국가보안법에 의해서도 처벌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시 하에서 더욱 엄중한 형을 보다 간단한 절차를 거쳐 선고할 수 있는 특별법으로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 1950년 6월 25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 그리고 이어 같은 해 10월 4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발족되었다. 같은 해 11월 13일 현재 검거된 전국의 총 부역자 수는 48,909명이며 도별 검거인원, 송치 및 석방인원은 다음과 같다(박원순, [전쟁부역자 5만여 명 어떻게 처리되었나]. [역사비평] 1990년 여름, 185-187쪽;[동아일보]1950년 11월 16일자)
한국전쟁 전기간 동안 자수한 자와 검거된 자를 포함하여 당국에 의하여 인지된 총 부역자 수는 550,91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가운데 자수자는 397,090명, 검거자는 153,825명이었다. 또한 위 인원 속에 북한군 1,448명, 중공군 28명, 유격대 9,979명, 노동당원 7,661명도 포함되어 있었다(내무부 치안국, [한국경찰사](II). 1973. 547쪽;박원순, 앞의 글, 185쪽).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서울수복 직후인 1950년 11월 25일 현재 867명의 사형선고자가 집계될 정도였다([동아일보]1950년 11월 25일자;박원순, 앞의 책 제2권. 21쪽)
한국전쟁 휴전 후 남한에서는 친미반공이데올로기가 확고하게 정착된다. 사회전체가 반공이데올로기로 뒤덮여 있었으나 일반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하게 남았고 또한 보수세력이 지배적인 위치에서 사회의 모든 부분을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그 폐해를 잘 인식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모든 '진보적인 것'은 '공산주의'와 동일시 되어 국가보안법의 적용대상이 되었으며 이에 대하여 어떠한 의구심도 제기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1954년 4사5입개헌으로 연임의 길을 열었으나 1956년 대선에서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선전하여 보수정권을 위협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8년 진보당사건이 발생하였다. 진보당의 조봉암,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등 10여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검거되고, 조봉암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59년 7월 31일 사형집행을 당했다.
그러나 구 후 정치적으로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언론의 부정선거 폭로 등에 힙입어 야당이 선전하고, 경제적으로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삭감되어 실업이 증가하는 등 계속 정권의 안보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의 개악으로 이 위기를 넘기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무술경관을 동원하여 야당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파동을 통하여 처리한 국가보안법 제3차 개정이다. 이 제3차 개정법, 특히 제17조 제5항의 인심혹란죄는 주로 언론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귀를 틀어막는 데 사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59년 경향신문의 폐간이었다. 경향신문은 이미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라는 사설과 "여적"이라는 칼럼 등으로 정권의 심기를 매우 어지럽혀 놓고 있었는데 이승만정권은 1945년 4월 5일자의 "간첩 하모 체포"라는 기사를 문제삼고 나왔다. 이 기사가 미리 발표되는 바람에 체포된 간첩과 접선하려던 또 다른 간첩을 놓쳤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향신문은 폐간조치되고 이 기사를 취재한 어임영, 정달선 가지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으며 오소백 사회부장, 이관구 주필은 불구속 입건되었다(박원순, 앞의 책 제2권, 63쪽).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막걸리 보안법'사건은 부지기수로 발견된다. 대법원은 술을 마시면서 대통령에게 욕설을 하다가 국가보안법상의 헌법기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선우만혁 피고에게 원심을 파기하고 형법만을 적용하여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동아일보] 1960년 4월 1일자; 박원순, 앞의 책 제2권, 23쪽).
4.19봉기 이후 국가보안법의 적용은 대체로 자제되었으며 1960년 6월에는 제4차 개정을 통하여 많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제4차 개정법은 '불고지죄'조항을 신설함으로써 오히려 개악된 측면도 갖고 있었다. [동아일보]1960년 9월 29일자와 1961년 4월 30일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재개하고 있다. "부산지검 정보부 한옥신 부장검사 불고지혐의로 조사", "연세대 오화섭 교수 불고지혐의 구속"(박원순, 앞의 책 제2권, 25쪽).
그리고 나아가 민주당정권은 국가보안법 외에 반공법을 새로이 제정하려고 시도하였다. "구법 제17초 이적선전조항, 제19조 은거조항, 제21조 편의제공조항 등의 폐지로 면소, 무죄, 공소기각판결과 불기소사건이 빈발"([동아일보] 1960년 6월 10일자)하자 1961년에 민주당정권은 '반공임시특례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통과시키려 기도하기도 하였다.
2.2 반공법 제정 및 제5차 개정(1961. 5 - 1980. 12)시기
1) 혁명검찰부. 혁명재판소와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쿠데타 3일 후인 1961년 5월 19일 반공법의 모태가 된 '포고령 제18호'를 발표하여 공산주의 활동의 철저한 규제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어 1961년 6월 22일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 제6조의 특수반국가행위조항은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되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 찬양, 고무, 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부칙에 이 법을 공포한 날로부터 3년 6월까지 소급 적용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어 4.19 이후 민주당정권하에서의 학생, 언론인, 교사, 정당인 등에 의한 혁신운동을 처벌할 수 있게 하였다(박원순. 앞의 책 제1권 189-195쪽).
다음은 혁명검찰부가 처리한 사건의 '죄명별 직업별 통계'와 '죄명별 구형형기별통계'이다(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제5집, 1962. 786쪽 이하;박원순. 앞의 책 제2권. 28-29쪽).
혁명검찰부가 위 특별법을 적용하여 처리한 사람은 공소제기 713명, 기소유예 180명, 무혐의처리 171명 등이었다. 그 중 특수반국가행위죄로 혁명재판소에 기소된 사람은 191명(혁명검찰부에 입건된 사람은 833명)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는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의 설치목적, 군사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희의의 중요한 활동목표 가운데 하나가 혁신세력의 제거였음을 보이고 있다. 이는 직업별 통계의 특수반국가행위조항 적용자에 정당, 사회단체 관련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혁명검찰부의 구형통계를 보면 특수반국가행위에 대하여 가장 엄중한 구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최하 구형량이 징역 5년이며 사형구형자도 16명으로 가장 많다. 그 가운데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된 사람은 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박원순, 앞의 책 제2권. 28쪽).
2) 중앙정보부와 '반공법'
중앙정보부법은 1961년 6월 10일, 반공법은 같은 해 7월 3일 군사쿠데타세력이 민정이양의 형식을 취하기 직전에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하여 각각 제정되었다. 이 두 법은 반대세력에 대한 사찰과 규제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한편 박정희정권은 이러한 수단만으로 정권을 유지하기 어려운 위기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계엄령, 위수령, 비상사태 선포 또는 긴급조치 등 각종 초법적 긴급권 행사를 통해 무제한으로 기본권을 침해했다.
다음은 '역대정권이 한 긴급권 행사내역'과 '1961-1980년 각종 정치규제법으로 검거된 인원수'이다(강민, [한국정치체제의 구조적 특성], [한국정치발전의 특성과 전망], 한국정치학회, 1984. 21쪽 및 김영래, [한국이익집단에 대한 조합주의적 분석].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 1986. 78쪽;박원순. 앞의 책 제2권, 30-31쪽)
이 수치의 근거와 그 내용의 정확성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아래 도표에서 알아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이 전기간을 통하여 가장 많이 그리고 꾸준히 적용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억압하는 데 반공과 안보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둘째, 이 기간중에 국가보안법보다는 반공법이 훨씬 더 애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체로 보면 반공법 적용인원보다 약 4배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반공법 제4조(고무·찬양)의 남용에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유신 시기에는 다른 기간보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적용 숫자가 상당히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 시기에 선포되었던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는 1974년의 제1호, 제4호 및 1975년 4월의 제 7호에 이어 같은 해 5월에 선포되어 1979년 12월에 해제된 초헌법적 조치였다. 그 내용은 유신헌법의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거나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와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일체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구금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조치는 조치 자체에 대한 비방조차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으로 가기 전에 먼저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입건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반공법과 긴급조치 제9호의 대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반공법의 남용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넷째, 시간이 갈수록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적용숫자가 대체로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정권의 정치적 위기가 가중될수록 적용회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다음의 1964-1979 및 1980-1991년 사법연감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1969년 삼선개헌. 1971년 제7대 대선, 1987년 6월 항쟁 및 7.8월 노동자대투쟁 등을 전후한 시기에 적용숫자가 급증하고 있다(박원순. 앞의 책 제2권. 32-33쪽;이진복, 앞의 책, 194쪽).
한편 서울지방검찰청 검찰사무보고서에 의하면 1967년부터 1970년 9월 30일까지의 기간에 처리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사건의 피고인은 476명이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결과는 다음과 같다(최대현. [북괴의 대중동원 공작전술과 이에 관련된 반국가사범 재판결과 분석고찰]. 대검찰청. [검찰] 1971년 12월호. 46쪽 이하).
이들 중 반공법 위반사범이 국가보안법 위반사범보다 2배 이상이며, 반공법 위반사범 중 제4조(고무·찬양·동조)에 해당하는 사람이 160명으로 동법 위반사범의 52,4%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의 형사공판 처리인원수율 도표 등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운용의 잔혹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 형사사건의 평균 사형·무기형 선고율보다 국가보안법의 그것이 전체 평균보다 많게는 300배에 이르는 등 상대적으로 월등히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전체평균은 비교적 안정된 수치를 보임에 반하여 국가보안법은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급격한 증감현상을 보이고 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국가보안법의 무죄율이 전체 평균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이다(반공법은 국가보안법보다 더욱 높다). 그러나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장시간 수사와 구문수사에 의한 무리한 기소와 조작 기소가 많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치적 위기해소를 위하여 반대자 등을 여론을 무리하게 구속하여 격리 감금하고 그 수사내용을 기소도 하기 전에 언론에 공표하여 여론을 조작하는 것으로 이미 그 기소의 목적을 달성하곤 하였던 것이다.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가 발효되고 곧이어 5월에 이른바 인혁당사건이 발생하여 국가보안법 운용의 잔혹함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으로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다. 이들 중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형이 집행되었으며 3명은 옥중에서, 혹은 출옥 후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사망하였다(제임스 시노트, [인혁당사건을 증언한다]. [사회와 사상] 1989년 6월호, 236-237쪽). 이들은 모두 대통령 긴급조치 제2호에 따라 설치된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이 비상군법회의는 설치 9개월 동안 203명의 1심, 항소심을 처리했다([한국일보] 1974년 10월 12일자).
국가보안법 운용의 잔혹함은 수사과정에서도 보인다. 국가보안법사건의 초동 수사 과정에서는 대체로 영장없는 강제연행 및 압수수색, 장기구금, 고문, 피의사실공표 등 불법행위가 발생한다. 1980년대의 정치적 의미가 큰 사건들은 예외 없이 이러한 불법행위가 개입되어 있다. 1981년의 전민학련·전민노련사건과 부림사건, 1982년의 부산미문화원사건, 1985년의 민청련사건, 1986년의 건국대사건과 서울노동운동연합사건 등은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다([한겨레신문] 1988년 9-12월 '진상, 한국의 정치사건' 기획기사 및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10대 조직사건]. 아침. 1989 참조).
장기구금과 고문 등 인권침해와 관련해서는 특히 특수수사기관의 활동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데 이들은 고문 등을 통하여 사건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변호인과 가족의 접견신청을 거부하는 사례는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1992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안기부의 변호인 접견불허와 관련하여 고발된 사건만도 3건(김낙중사건의 변호인 및 가족접견 거부, 최호경과 김표무사건에 대한 가족접견 거부, 법무부, 1992년 10월 국회 국정감사 제출자료)이나 된다.
2.3 제6차 개정(반공법 흡수통합, 1981-1991.5)시기
1980년대 특히 그 후반은 국가보안법사건의 항상적 양산으로 가히 '국가보안법의 시대'라 부를 수 있다. 예컨대 이른바 시국사건 구속자가 1986년 6월 19일 현재 978명에서 같은 해 11월 5일에는 2,643명으로 늘어났고, 그 가운데 건국대사건 구속자를 제외하면 1,359명이었다. 이들을 적용법규별로 불 때 국가보안법 461명, 집시법 391명, 폭행 235명, 사문서위조 37명, 기타 235명으로 국가보안법이 단연 선두를 차지하고 있다(대한변호사협회, [1986년도 인권보고서]. 17쪽). 그리고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사이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사람이 1,512명, 집시법으로 기소된사람이 3,316명으로 집계된다([경향신문] 1988년 6월 28일자). 한편 1980년부터 1988년 9월까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군인의 수는 40명이고 1989년 1월부터 8월까지 기소된 수는 8명이다(국방부 군사법원, 1988-1989년 국회 국정감사 제출자료).
지금의 국가보안법은 1980년 12월 31일 전두환 정권출범과 함께 반공법을 흡수통일하여 만든 국가보안법(법률 제3318호)을 노태우 정권하에서 전면적으로 바꾼 것(1991. 5. 31, 법률 제4373호)으로서, 모두 25개 조문으로 되어 있다.
95년 한해동안 구속된 양심수는 12월 5일 현재 총 595명(민가협 집계, 이하 양심수 통계는 모두 민가협의 집계임)에 이르렀다. 이중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269명(약45%)으로 나타났다. 김영삼 정권 출범 첫해인 93년도(2월 25일부터)에는 총 195명(국보법 105명)이 정치적 이유로 구속되었으며, '신공안정국'의 광풍이 몰아친 94년도에는 총 780명(국보법 389명)이 구속되었다.
2.4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에서 95년까지
현정부의 출범 이후 구속된 양심수는 통털어서 1,570명이다. 이들 가운데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전체의 48.5%인 763명이었다. 95년 12월 5일 현재 구속 수감중인 양심수는 352명이다. 이들중 학생은 91명, 노동자 47명, 군인·전경 11명, 재야 및 개타 139명, 장기수 63명, 농민 1명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양심수는 전체 352명 중 75.7%인 266명). 구속자 수에 비하여 현재 실제로 수감되어 있는 양심수는 상당히 낮은 비율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법원의 1심 선고 단계에서 상당수가 집행유예로 풀려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영삼 정권의 공안당국이 정치적 고려로 인한 무리한 구속을 일삼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장기 복역 양심수는 95년 12월 5일 현재 63명(7년 이상 구속자)이었다. 이중 60세 이상의 고령자가 34명, 복역연수 20년 이상의 초장기수는 24명으로 나타났다. 95년 8월 15일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 등이 석방되었어도 여전히 한국은 '장기수의 나라'이다. 정부는 해방 50주년을 맞아 이른바 대석방 사면조치를 '단행'했지만, 이때 풀려난 양심수는 25명(전체 양심수의 5%)에 불과했다. 더구나 김선명씨 등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기 때문에 언제고 다시 수감될 수 있는 처지에 있다.
3. 인권침해를 야기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의 조항들
(1) 반국가단체에 소속한 사실에 대한 처벌
국가보안법에서 규정된 여러 죄목들에서 나타나는 주요 문제점은 '반국가단체'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국가보안법 제2조는 반국가단체를 "국가를 참칭하거나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계를 갖춘 단쳬"라고 정의하고 있다. 1991년 개정되기 전까지의 국가보안법에서는 한조직이나 단체가 "반국가"로 간주됨에 있어 "지휘통솔체계"라는 문구가 없다. 새로운 정의도 여전히 모호한 점이 많다. 많은 경우 한 단체가 반국가단체로 규정될 때 법정은 검찰당국과 어떠한 이견도 보이지 않는다. 반국가단체라고 명명된 많은 조직들은 회원들이 폭력을 사용하거나 주창하지 않는 좌파 정치단체들이다. 또한 국가보안법에 의해 북한정부는 반국가단체로 규정되어 있다.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사노맹) 회원들과 김삼석·김은주 남매는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거나 그 구성원과 접촉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2) "간첩행위"와 "국가기밀"을 전달한 사실에 대한 여러 처벌조항들
"간첩행위"와 "국가기밀"의 탐지, 수집, 누설, 전달하는 것에 관한 국가보안법의 조항들은 군사상 기밀 또는 반국가단체에 비밀로 하여야 할 지식인가의 여부에 따라 다르게 처벌한다. "국가기밀"이란 개념은 검찰당국과 법원에서 폭넓게 해석되고 있다. 때때로 일반인들은 무엇이 "국가기밀"에 포함되는지에 관해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경우에는 일반에게 공개된 정보일지라도 법원에 의해 국가기밀로 간주되며, 이러한 해석이 한국내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정보를 다른사람에게 전달한 사람들을 구금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표현과 결사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침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말"지와 "한겨레 신문"을 일본에 있는 반국가단체의 회원에게 전달하였다는 혐의로 1993년 9월 구속된 김은주씨,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대화내용과 한국에서 출판된 잡지들을 북한당국에게 전달하였다는 혐의로 1993년 구속된 작가 황석영씨 등이 그 좋은 예이다.
(3) 반국가단체로부터의 금품수수에 대한 처벌조항
반국가단체로부터 돈이나 자료를 받은 사람들은 국가보안법 제5조에 의해 처벌된다. 1991년 개정된 국가보안법 ㅈ5조 (2)항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 또는 국가의 안전과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금품을 수수한 사람들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혐의는 대개 더욱 심각한 간첩혐의를 동반하다. 국제엠네스티는 금품이 간첩행위에 사용되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경우에는 북한당국으로부터금품을 받는 행위는 합법적이라고 주장한다.
(4) 국가보압법 제3조, 제4조, 제5조 위반자를 불고지한 사실에 대한 처벌
이 처벌조항의 범위는 1991년 국가보안법이 개정되면서 축소되었다. 이전의 국가보안법에서는 제3조에서 제9조를 위반한 사실을 불고지하면 처벌되었었다. 이 조항은 표현과 결사의자유에 관한 자신들의 권리를 평화적으로 사용한 사람들을 구금하는데 사용된다. 예를들면, 1991년 1월 표현과 결사에 관한 자신의 권리를 평화적으로 행사하였다는 이유로 구금된 남편 장기표씨의 국가보안법 위반사실을 당국에 불고지한 혐의로 집행유예 1년6월형을 선고받은 조무하씨의 경우이다.
(5) 반국가단체와 회합 및 통신하는 행위의 금지
국가보안법 제8조는 반국가단체 또는 반국가단체의 지시를 받는 사람과 여타의 수단으로 통신하거나 회합한 사람들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991년 국가보안법이 개정되면서 이 조항은 "국가의 존립·안전 또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회합 또는 통신한 사람이라는 필요조건을 전제하였다. 이 조항은 북한 사람들이나 반국가단체의 구성원들과 접촉하거나 접촉하기를 시도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며, 때때로 간첩혐의가 추가됨 없이 적용된다.
(6) 당국의 승인없이 북한방문 금지
국가보안법 제6조는 북한으로의 불법적인 탈출이나 북한에서 한국으로의 불법적인 잠입을 금지하고 있다. 991년 국가보안법이 개정되면서 "국가의 존립·안전 또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사람" 이라는 필요조건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문구는 매우 모호하며, 실재에 있어 피고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행동하였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1991년 제정된 남북교류협력볍에 의거 당국은 경제인들의 북한방문은 허용하면서도 통일에 관해 토론하기 위한 일반 한국시민들의 북한방문은 불허하는 등 자의적으로 이 법을 사용하고 있다.
(7) 반국가단체의 활동에 대한 찬양, 고무, 동조한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
국가보안법 제7조는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 또는 동조한 행위에 대해 7년 이하의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1991년 국가보안법이 개정되면서 "국가의 존립·안전 또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행해진 행위들이라는 필요조건을 도입하였으나 이 문구는 매우 모호하며 어떤 행위가 이 문구에 위배되는지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에관해 이해하기 어렵다. 북한을 이롭게 할 자료들에는 이미 공개된 북한문학, 역사서적 등이 포함된다. 즉 북한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고 증명된다면, 어떤 책을 읽거나 소지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조항은 혼란스러우며 법의 임의적 적용을 초래하고 있다. 실제 제7조에 의한 모든 인권침해는 표현과 결사의 자유에 관한 권리들에 대해나 명백한 침해이다. 그 예로는 노래패인 희망새, 친북서적을 출판한 혐의로 체포된 일련의 출판업자, 컴퓨터 통신을 통해 친북적 메세지를 게재한 혐의로 체포된 김형렬씨 등이 있다.
4. 국가보안법에 관한 유엔기구들의 주장
1992년 7월 유엔인권이사회는 한국에서 계속해서 국가보안법이 사용되고 있는 사실과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ICCPR)'의 이행에 있어 위원회의 주요관심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서면을 통하여 이사회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국에서 공공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특수한 상황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은 과대평가되지 않아야 한다. 이사회는 일반법률과 특별법률로 국가안전에 대한 범죄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국가보안법은 다소 모호한 용어로 규정되어 있고, 실제로는 국가안전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활동들을 제재할 수 있도록 광범위하게 해석되며 협약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조처 등 일련의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이사회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한국의 법률들이 협약의 각 조항들과 더욱 부합되도록 한국정부는 노력을 확대하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기본적 권리들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하여,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에서 규정하고 있는 권리들의 완전한 실현에 가장 중요한 장애물로 이사회가 인식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단계적으로 페지하여야 한다."
이 보고서가 작성되는 시점에 '자의적 구금에 관한 유엔활동그룹'은 국가보안법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수인들의 18가지 사례에 대하여 활동그룹의 최종결정을 공개하였다. 각 사례에 대하여 호라동그룹은 이들에 대한 구금이 세계인권선언과 표현·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의 관련조항들에 위배된다고 지적하였다.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을 생각해보자...
진보당 사건
1958년 1월 11일 밤 경찰은 돌연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 부위원장 박기출, 김달호, 간사장 윤길중 등 간부 10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하였다. 경찰이 중앙당 사무소를 수색하고 전국 각 지구당에서 당원명부를 압수하는 등 전면적인 수사가 진행되자 진보당은 사실상의 와해사태를 맞고 말았다. 이어 검찰은 2월 8일 1차로 수뇌간부 9명을 간첩죄, 간첩방조죄,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하였다.(추후 14명 추가기소) 그리고 재판도 시작하기 전인 1958년 2월 25일, 미군정청 법령 제55호에 의거하여 정당등록을 취소한다고 발표하였다. 대법원은 1959년 2월 16일 확정판결에서 조봉암, 양이섭에게 2심대로 사형을 확정하였고, 피고들의 재심청구가 기각된 다음날인 7월 31일 비밀리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2인의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이토록 서둘러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진보당은 법원의 선고이유대로 '대한민국을 해체하려는 불온한 조직'이었는가? 당시 진보당은 사사오입헌법 제정이라는 극단적인 치부까지 드러낸 이승만정권을 유지해나가는 데에 있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창당한지 1년에 불과한 진보당과 조봉암은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서 216만 표를 얻어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얻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존의 야당이었던 민주당 역시 이 새로운 혁신정당을 견제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이승만은 '국가보안'이라는 이름으로 날이 선 칼날을 진보당에 들이댈 수 있었다.
당시의 진보당 등록취소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진보당은 대한민국과 유엔의 입장을 무시하고 북한 괴뢰집단과 소련 및 중공이 주장하고 있는 적성국가를 주로 하여 구성되는 감시단의 감시하에 남북통일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공식으로 선언하고 있다.
2. 진보당 간부들은 북한 괴뢰집단이 밀파한 간첩과 밀사와 파괴공작대들과 항상 접선하여 왔다. 이 사실만으로도 진보당은 대한민국의 합법적인 정당으로서 인정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3. 진보당은 그들의 목적달성의 전제 단계로 공산당 비밀당원과 공산당 방조자들을 의회의원에 당선시키고 그들을 통해 대한민국을 파괴하려고 기도해왔다.
그렇다면 진보당은 실제로 무엇을 지향하는 집단이었는가?
다음은 1955년 12월 22일 발표된 진보당 발기취지문의 주요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쟁취의 역사적 성업인 삼일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금 환기 계승하며, 우리가 당면한 민주수호와 조국통일의 양대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 신당을 조직하고자 이에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의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고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대한민국 파괴의 음모'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형장에서 마지막 남긴 조봉암의 유언은 진보당사건이, 정당성 없는 부패한 정권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 음모였음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건강한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은 것은 바로 이승만정권이었다.
인민혁명당 사건
박정희 독재체제의 전반기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시대요, 후반기는 유신치하의 긴급조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후반기에도, 긴급조치로 억누르기엔 무리가 따르거나 반공이데올로기의 '빨갱이' 컴플렉스로 위압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 혹은 조작에 대한 의혹을 숨길 수 없어 곤란한 경우에 반공법과 보안법은 여지없이 그 정체를 드러내곤 하였다. 그 시대 국가보안법의 최대 피해자는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박정희 독재권력이 위기에 빠졌을 때 두 번씩이나 희생이 되어야만 했다. 특히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은 특별한 증거나 혐의 없이 여러 생명을 앗아간 엄청난 인권유린의 사건이었다.
1975년 4월 8일 39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상고는 기각되었고 24시간도 채 못되어 8명이 처형되었다. 이 8명은 소위 인혁당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당시 황산덕 장관이 밝힌 인혁당 사건의 내용을 살펴보자. 인혁당은 '남한에 강력한 지하당을 건설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1년 남파된 간첩 김상한이 재남 공산주의들을 규합하여 1962년 1월에 조직한 지하당이다. 인혁당은 그후 거의 지하에 잠복해있는 상태이다가 1972년 7월 4일 남북대화의 시작을 틈타 지하활동을 강화, 1973년 10월 이후의 학원소요와 유류파동, 개헌청원서명운동 등이 일어나자 제2의 사일구로 사회혼란을 조성, 민중봉기로 정부를 전복함으로써 적화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라고 속단, 인혁당 재건을 완료하고 학생들을 선동, 폭력에 의한 정부전복을 기도하다가 검거된 것이다.
인혁당 관련자들을 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 갖가지 죄명이 붙여진 채 기소되었다. 인혁당 관련자 21명에 대한 세 번의 재판을 거쳐,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홍선 김용원 7명에게는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1975년 4월 9일 위 7명과 학원관계자 여정남 이렇게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렇다면 인혁당 재건 사건의 실체는 무엇이었는가.
공안당국의 발표는 여러가지 면에서 허구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인혁당 관련자들은 5월 2일부터 8일 사이에 대체로 자택에서 검거되었는데 이들은 인혁당 사건의 언론보도를 보고도 피신하지 않았으며, 공안당국이 말하는 '치밀한 조직망'을 통해 대책을 강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인혁당 또는 인혁당 재건이라는 말은 법정에서도 젼혀 나오지 않을 정도였고 피고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보당국이 발표했던 것이며 인혁당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인혁당 간부 또는 인혁당 당원으로 둔갑하였다. 또 이들과 접선했다는 간첩 김상한에 대해서 도예종씨는 "김상한이라는 사람은 본인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며 만난 사실도 없고 우홍선으로부터 일언반구의 이야기도 들은 사실이 없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당국은 인혁당 사건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 증거나 단서를 제시하지 못했었다.
박정희 정권이 그처럼 사건을 조작하고 소위 관련자를 사형에 처해야 했던 것은 당시 정권의 취약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권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 2호를 발동하고 연이어 4호를 발동하였다. 그해 8월 15일에는 재일한국인 2세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제적으로도 60년대 이후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체제는 점차 동요하기 시작했고, 대 중국 외교성립 및 닉슨 독트린과 75년 베트남전 패배를 계기로 정치군사적 측면에서도 지배적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5년 리마에서 개최된 당시 비동맹국 외상회의에서는 한국이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라는 이유로 가입이 거부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이 국내적으로 가혹한 탄압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특히 인혁당재건 사건은 민청학련 사건을 반공법, 국가보안법, 긴급조치 4호로 완전히 붉은 물로 채색해버리기 위해서 그 배후조종 세력으로 조작된 것이었다. 박정권은 국가전복을 기도하려는 폭력혁명의 실행집단으로서의 민청학련, 해외 공산기지의 지원자로서의 일본인 기자, 전 대통령 윤보선까지를 포괄하는 대야를 배후 조종 지원세력으로 하여 북한과 직접 연관도 갖고 있는 조직으로서 인혁당이라고 하는 거대구조물을 만들어냈다.
인혁당 사건의 재판은 '정찰제 사형판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제대로 심리도 하지 않은 채 8명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사형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처형되었고 시체마저 내어주지 않았다. 특히 30이라는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했던 여정남씨는 정보기관에 의해 가장 잔혹하게 파멸되었던 사람이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이 사람에 대한 집중적인 조작이 필요했으므로 그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받았고 시체마저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화장되었다. 그를 석방시켜주거나 면회를 시켜주면 자신들의 잔학상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
1985년 봄은 격동의 시기였다. 2.12 총선에서 폭발적인 민중의 지지를 얻은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하여 전두환철권통치체제의 한쪽에 균열을 내고 있었고 학생운동에서는 80년 이후 처음으로 전국적 연대조직인 전학련, 삼민투가 조직되었다. 또한 미국은 한국에 친미적인 민간보수정권의 수립을 통한 안정적 체제로의 이전을 검토하는 가운데 <타임>, <뉴스위크> 등을 이용해 은근히 '한국의 민주화'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에 전정권은 반전의 계기가 필요했다. 민중들의 투쟁을 잠재우고 다시금 지배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계기, 그것은 바로 역대독재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었던 반공이데올로기 공세였다.
1985년 9월 9일 각 언론에서는 안기부가 제공한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 수사발표문'을 사건 그림표와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김성만은 지난 1982년 8월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 유학 중, 재미반정부지로 위장한 <해외한민보>의 발행인이며 북괴공작책으로 평양을 수차례 다녀온 서정균에게 포섭되었다. 김은 1983년 7월 헝가리 주재 북괴공관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미국 등 우익세력을 제국주의적 민족반역집단으로, 반공을 민족분열을 책동하는 냉전논리로 매도하는 내용의 반미 팜플렛 <예속과 함성> 300권을 제작하고..." 양동화의 입북, 김성만의 헝가리 동독 방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당국은 이를 학생운동탄압을 위한 절호의 소재로 생각하여 수사에 착수한 후, 이들과 관계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묶어 간첩단사건으로 발표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에게 학생운동이 간첩에 의해 조종된다는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학생운동 전반을 불신케하려는 의도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김성만씨는 '공산주의 서적 탐독', '<예속과 함성>이라는 소책자 배포'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검찰은 "1978년 5월경부터 청계천 고서점 일대에서 구입한 <변증법적 유물론>, <공산주의 운동사> 등 공산주의 관련서적을 탐독하여..." 라고 범죄행위를 구성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어떤 서적을 읽고 그 서적에 담긴 내용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행위 자체가 범죄가 되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말 그대로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최상의 미덕으로 하는 제도 아래에서 말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국민의 어떠한 사상이나 신념체계를 가지는 것은 자유이어야 하고 이 자유에 기초하여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처럼 단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탄압하고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 상황은 '국가보안법'이라는 괴물이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억압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작 김성만씨 자신은 "민주주의의 실현이란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봉건적 유제를 일소하고 독재를 청산하여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상고이유서에서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검찰의 주장에서 이들이 탐지 수집했다는 기밀 역시 <예속과 함성>, <인식과 전략>, <야학비판> 등 단순한 운동권 문서에 불과했으며 그들이 벌였다는 활동 역시 당시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반미의식 정도에 기반한 것이었다. 결국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탄압하는 것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연행된 김성만, 양동화, 황대권씨 등은 안기부 지하실에서 60여일간 감금, 고문조사를 받는 동안 일체의 진실이 무시된 채 안기부가 필요로 하는 인물로 둔갑되어 버리고 북한을 추종하고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무력폭동을 계획한 관제간첩단 사건의 주요관련자가 되었다. 조작을 위해 자행된 고문으로 그들은 목숨까지도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김성만씨는 '항소이유서'에서 "...모진 고문을 참아내느라고 아랫입술을 깨물어 입술이 모두 해진 상태에서 안기부의 조사를 받았고 심지어 혹독한 고문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불의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하기 위하여 본인이 부모님께 보내는 유서마저 써놓고 조사받았다."고 주장했다. 실질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가 모두 무시되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켜지지 않았던 상황. 그 때 인권은 없었다.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
7. 27. 진주시 우리서점 대표 정대인씨가 경찰에 의해 강제연행되고 아울러 당시 연행과정에서 경상대학교 교양과정 교재로 사용되던 {한국사회의 이해} 13권이 압수되면서 소위 '한국사회의 이해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비록 정대인씨는 다음날 바로 석방되었지만, 며칠후인 8. 2 최환 대검공안부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익명을 요구하며 대학교양교재의 내사를 발표하였고, 같은 날 라디오 및 TV가 이를 보도하고, 다음날인 8. 3 일간신문이 이를 일제히 보도하면서 한여름 신공안정국은 그 절정에 달하였다. 당시 공안당국의 설명은 경상대 장상환, 정진상 교수 등 9명이 1990년 집필하여 4년간 대학교양교재로 사용되어 오던 {한국사회의 이해}가 국가보안법 제7조 제5항에서 규정한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며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고, 이후 공안당국은 이들 교수에 대한 사법처리를 시도하면서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한편 이에 대하여 국립대학교 교수협의회 회장단회의, 전국사립대학교 교수협의회연합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11개 단체는 같은달 9일 '학문.사상.표현의 자유수호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하고 이같은 공안당국의 처사는 학문.사상 및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 규정짖고 이를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후 위 위원회 및 기타 단체들이 계속해서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중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검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에 대한 소환 및 구인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고, 동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다가 같은달 30일 해외체류중인 백좌흠교수를 제외한 8인의 교수들은 구인에 응하였다. 이후 이들을 구인한 검찰은 같은날 장상환, 정진상 등 2인의 교수에 대하여는 구속영장을 신청하였고, 최태룡, 이혜숙, 김준형, 이창호교수는 불구속입건하고, 김의동, 송기호교수는 수사종결하였다. 한편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담당판사 최인석판사)은 같은달 31일 검찰의 2인 교수에 대한 구속영장신청을 기각하였다.
이후 검찰은 같은해 11. 30. 장상환교수, 정진상교수 등에 대하여는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고, 김준형, 이혜숙, 이창호, 최태룡교수 및 도서출판 지이대표 임경숙씨에 대하여는 기소유예처분, 해외체류중인 백좌흠교수에 대하여는 기소중지처분을 하였다.
첫댓글 행님 잡혀 갈라면 우짤라고~^^;
에휴~~ 2번에 걸쳐 다읽었다.. 한나라당 개정 보안법 나왔다던데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