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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공히 군 미필,운동꿘 출신과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 및 국보법의 엑기스 조항인 참칭조항도 삭제하려 했던 자들의 공직진출을 결사 반대한다.운동꿘의 사기협잡과 '국보법 폐지주장자'들 및 '6.15 반역선언 지지자'들의 교언영색에 속지말고 안보중시의 정통보수를 뽑아 나라를 살리자~!**]
2002년 한일월드컵의 열기가 뜨거웠던 6월 29일. 이날 오후엔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4강에 진출한 대한민국 태극전사들과 터키와의 3,4위전 경기가 예고돼 있었다.
앞 뉴스에 금강산 소식이 나오는데요. 만경봉호가 금강산 관광을 하러 들어간다는 내용이었죠. 그리고 월드컵 폐막 소식이 이어지고요. 당시 상황이 그랬어요. 한쪽에선 슬픔이 있고, 저쪽에선 월드컵 축제가 열리고, 다른 한쪽에선 금강산 관광을 가고…. 해석은 관객 분들의 자유입니다. 아이러니한 현실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연평해전'을 연출한 김학순 감독은 "한쪽에선 웃고 떠들고, 다른 한쪽에선 울면서 전투를 벌이는 아이러니한 일들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되풀이 되고 있다"며 "아마도 통일이 될 때까지 이런 아니러니가 계속 되지 않을까 싶다"고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평해전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개인이나 기업체들을 많이 찾아다녔는데요. 이상하게 잘 성사가 안됐어요. 그때 딱 한군데서 관심을 보였어요. 영화와는 관련이 없는 회사였는데, 제가 3D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니 5억원을 투자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한달 뒤에 연락이 끊겼어요. 나중에 이 영화에 함부로 지원을 했다가 코스닥에서 미끄러질까봐 스톱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런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영화를 도와줬다가 정권이 바뀌면 피해를 받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를 샀던 것 같아요.
모두가 외면하던 '연평해전'을 만드시 영화로 만들겠노라고 다짐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3D 영화 투자에 관심을 보이던 업체들도 '연평해전'이 주제라는 말을 듣고는 슬그머니 발을 빼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때 대국민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모으자는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급히 조직을 꾸려 모금 운동을 전개한 김학순 감독은 단돈 1만원을 준다해도 어디든지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촬영 도중 전화가 걸려왔어요. 어느 할머니께서 "영화에 후원을 하고 싶다"면서 "2만원을 보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사실 영화 감독이 촬영을 하다말고 사적인 전화를 받는 건 말이 안되는 상황이죠. 하지만 전 이게 더 중요했어요. 핀잔을 주는 주위 스태프에게 "네가 내 입장 돼 봐라. 지금은 단돈 5천원이라도 절박한 상황"이라고 얘기했죠. 이런 후원자 분들의 도움이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 큰 자금이 된 겁니다.
해군 등에서 거액을 후원하기도 했지만, 5천원권 문화상품권을 보낸 고등학생 등 십시일반으로 모금에 동참한 국민들의 힘이 컸다. 해군 역사상 2번째로 바자회를 연 해군 부녀회의 활약도 대단했다.
해군에서도 아주 큰 도움을 주셨는데요. 특히 해군 역사상 2번째로 부녀회에서 바자회를 열어 저희들을 도와 주셨어요. 1948년 해군 창설 당시 미국에서 군함을 사올 때 바자회를 펼쳤던 이후로 2번째로 부녀회가 나서 주셨어요.
행사를 진행하면서 해군들도 놀랐던 것 같아요. 스스로 결속되는 느낌도 받고…. 그 분들도 애초엔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국 각지에서 "우리 물건을 기증하겠다"는 분들이 수도 없이 몰려든 거예요. 그러면서 엄청난 거금이 모이게 된 겁니다. 크라우드 펀딩 자체에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자금난으로 자칫 엎어질 뻔 했던 영화 '연평해전'은 이렇게 살아났다. 주연 배우까지 교체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김학순 감독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밤잠을 쪼개가며 시나리오를 고치고 촬영에 매달렸다.
드디어 6월 24일, 전국 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평해전'은 28일까지 무려 143만 8,311명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 역대 개봉주 스코어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8년 전 "대한민국을 지켰던 당신들을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던 한 노(老)감독의 다짐이 마침내 전국민의 마음을 뒤흔드는 기적을 연출하게 된 것.
그러나 김학순 감독은 "영화 흥행의 공은 전적으로 영화가 가라앉지 않도록 도와주신 수만명의 후원자 분들에게 있다"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제작사 로제타시네마에 따르면 무려 6만여명의 국민들이 크라우드 펀딩과 후원에 동참, 20억원이 모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학순 감독은 이들의 도움을 영구히 기리기 위해 '엔딩 크래딧'에 후원자들의 실명을 새겨 넣는 초유의 작업을 시도했다.
제작진이 '엔딩 크래딧'에 담은 개인과 단체 후원자들은 약 7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2분 가량 이어지는 '엔딩 크레디트' 역시 신기록 감이다.
김학순 감독은 "보통 다른 영화에서 엔딩 자막을 보시는 분들은 지루하게 느끼실텐데, 저희 영화에선 오히려 마지막에 관객 분들이 더 감동을 받으신 것 같다"고 밝혔다.
더욱 흥미로운 건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후원자의 이름이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김학순 감독은 '영원히 잊지 않습니다'란 익명으로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후원자를 엔딩 크래디트의 맨 마지막에 배치시켰다.
저희 영화를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저 혼자서는 결코 만들 수 없었던 영화입니다. 연평해전이 국민 여러분의 영화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일종의 트리뷰트를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영원히 잊지 않습니다'라는 이름으로 기부를 한 주인공은 경북 상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성민(25)씨였다. 한씨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회에 나와 받은 첫 월급이라서 의미 있게 쓰고 싶었는데 이름 알리기는 민망해 '영원히 잊지 않습니다'로 적었다"고 쑥쓰러운 소감을 전했다.
김학순 감독은 "이런 분들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진짜 열심히 만들었다"며 "영화를 통해 얻어진 수익은 군인을 위한 재단을 만드는 기금으로 활용할 계획"이라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청사진을 공개했다.
연평해전이 개봉 엿새째에 접어든 오늘은, 13년 전 연평도 앞바다에서 6인의 영웅들이 산화한 바로 그 날이다.
다음은 김학순 감독과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과의 일문일답
- 부모님이 평양에서 월남하신 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6.25 전이죠. 그 전에 이미 내려오셨다고 들었어요.
- 내려 오셨다면 아마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일 거예요. 45년부터 46년 사이. 지금 생존해 계시죠?
▲네, 생존해 계시고요. 저희 아버지께선 동지사 대학을 나오셨어요. 윤동주 시인과 하숙을 같이 하셨고요. 유학을 마치고 평양으로 가셨다가 남한으로 내려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부모님은 평양에서 결혼을 하셨는데요. 저는 7형제 중에 네번째로 태어났습니다.
- 원래는 미학도이셨는데, 갑자기 영화쪽으로 선회를 하셨습니다. 87년 홍익대 미대 대학원 시절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어떤 사건이 있었나요?
▲원래 인하대에서 조소를 전공했습니다. 미학을 추가로 공부하게 된 건, 조각이나 회화를 좀 더 철학적인 깊이로 파고 들고 싶어서였습니다. 미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현대 예술을 접하게 됐죠. 현대 예술에서 정점에 이른 분야가 바로 미디어와 영화잖아요? 그래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실은 저는 원래 미대보다 음대를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중고등학교 때 집에서 반대를 심하게 하는 바람에 포기했던 거죠. 그 뒤로 음악과 미술의 종합예술이 영화라는 점에서 점점 영화에도 관심이 가더라고요. 대학원 시절 미학 수업 중에 영화를 만드는 과제가 있었는데 제가 미술을 전공했으니까 필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찢기도 하면서 상당히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었었어요. 그때 카메라 없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매스컴에서 관심을 보이기도 했죠. 대학원 논문도 미학 분야 중에서 영화 음향에 관한 내용을 썼어요.
그러던 차에 저희 형님이 미국 유학을 가볼 것을 권유하더군요. 처음엔 미학이나 조각을 좀 더 공부하려고 했죠. 그런데 제 후배가 "지금 미국에선 모든 사람들이 영화를 얘기하는 분위기다. 남자라면 영화를 한 번 공부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호기로운 말을 꺼냈어요. 저도 당시에 습작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상황이었고, 어차피 비싼 돈 들여 공부하는건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하게 방향을 틀었죠.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공부하고 템플대학교 대학원(영화제작)을 거쳐 LA 미국영화연구소에 머물다 다시 필라델피아로 갔죠.
- 2002년 기획·연출·각본을 맡은 '비디오를 보는 남자' 이후 13년 만에 장편 영화에 도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단편 영화나, 다큐멘터리, 드라마 연출 등을 해오셨죠? 이런 대작을 맡은 경험이 전무하신데, 부담감이 상당이 컸으리라 봅니다.
▲5억에서 10억 정도 소규모로 찍은 저예산 영화예요. 영진위 지원을 받아서 제작했는데, 그 당시에는 거의 5억 정도가 대부분이었요. 필름으로 찍어도 많은 필름이 없으니 몇 테이크 못 찍고, 마음에 안들어도 다시 찍을 여력이 없었던 시절이에요. 부담감보다는 모든 감독들이 장편을 찍고 싶어 합니다. 다만 자금적으로 여의치가 않기 때문에 엄두를 못내는 거죠.
많은 분들이 연출을 꿈꾸고 있지만 감독을 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선 단편만을 고집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장편 영화는 모든 영화인들의 꿈이에요. 물론 운도 따라줘야 가능한 일이지요. 전 국내로 돌아왔을때 당시 제이콤 대표였던 김종학 감독이 제안을 해서 좋은 기회를 잡게 됐습니다.
- 막상 장편 연출을 해보니 어떻던가요?
▲'비디오를 보는 남자'를 찍을 때 느꼈는데요. 많은 스태프가 붙고, 제가 조명이나 촬영을 안해도 되고, 연출 준비나 서포트를 옆에서 해주니 참 편하더라고요. 무슨 왕좌에 앉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비록 저예산이었지만 전문적인 스태프가 붙으니 참 힘이 되더라고요. 그야말로 프로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았죠.
- 맨 처음 영화 '연평해전'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게 언제인가요?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2007년 전후가 될 거예요. 아는 분과 얘기를 하다가 '연평해전' 얘기가 나왔어요. '연평해전'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인데 영화인들이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게 이상하다는 얘기를 주고 받았죠. 저도 해군을 나왔는데요. 영화계에서 이를 다루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게 됐죠. 그때부터 자료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에는 다른 일도 하면서 쉬엄쉬엄 자료를 수집했어요. 2008년에 '연평해전'에 대한 소설이 나와서 그제서야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됐습니다. 다른 것보다 남아 있는 자식들, 유가족, 남은 자들의 슬픔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연평해전을 구상하기 전에는 6.25 영화를 찍고 싶었어요. 저희 부모님이 북에서 오신 점도 있지만, 최인훈의 '광장'이라는 소설을 보면서 왜 주인공은 우리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는가를 놓고 고민을 하게 됐어요. 이게 우리 민족의 운명인가? 연평해전도 남과 북의 문제잖아요? 그래서 전 6.25 전쟁 영화를 만들려했던 열정을 이쪽에 쏟아붓기로 결심했습니다.
- 제작부터 영화가 개봉하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참 많았을 것 같은데요.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나요?
▲뭐 책으로 써도 또 하나의 영화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다큐를 찍고 있습니다. 힘든 건 역시 제작비죠. 영화는 만들고 싶은데 돈이 없다? 그럼 못 만드는 거죠. 그동안 주위의 빌딩이 막 올라가고 대한민국의 경제가 엄청 발전한 것 같은데요. 왜 영화쪽은 이렇게 힘들까하는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연평해전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개인이나 기업체들을 많이 찾아다녔는데요. 이상하게 잘 성사가 안됐어요. 그때 딱 한군데서 관심을 보였어요. 영화와는 관련이 없는 회사였는데, 제가 3D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니 5억원을 투자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한달 뒤에 연락이 끊겼어요. 나중에 이 영화에 함부로 지원을 했다가 코스닥에서 미끄러질까봐 스톱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가 2012년 정도였을 겁니다. 당시 이 영화에 대해 정치적인 선입견이 있었어요. 이런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영화를 도와줬다가 정권이 바뀌면 피해를 받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를 샀던 것 같기도 해요. 그제서야 2002년에 발생한 '연평해전'을 왜 아무도 만들 생각을 안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던 상황들이 이해됐어요. 이를 민감한 소재로 받아들이다보니 엄두를 못냈겠죠.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왜 이게 민감한 소재인가요? 저는 이런 작업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민감하다는 말 뿐이었어요. 그때 진짜 우리 사회가 경직돼 있다는 걸 느끼게 됐어요.
- 기업들이 정치적인 시비가 붙을 만한 일은 쳐다도 보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그렇죠.
- 이례적으로 크라우디 펀딩(인터넷 모금)으로 제작비를 충당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3년 여름 진해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제작비도 다 떨어져가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촬영 도중 전화가 걸려왔어요. 어느 할머니께서 "영화에 후원을 하고 싶다"면서 "2만원을 보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사실 영화 감독이 촬영을 하다말고 사적인 전화를 받는 건 말이 안되는 상황이죠. 하지만 전 이게 더 중요했어요. 핀잔을 주는 주위 스태프에게 "네가 내 입장 돼 봐라. 지금은 단돈 5천원이라도 절박한 상황"이라고 얘기했죠. 이런 후원자 분들의 도움이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 큰 자금이 된 겁니다. 처음엔 이렇게 크게 모일 줄은 생각치도 못했어요.
저는 후원금이 적다 하더라도 일단 사람들의 관심만 받아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죠. 이같은 후원 운동이 일종의 국민적 무브먼트로 발전하면 영화 제작이나 상영도 가능하리라 여겼어요.
- 크라우드 펀드로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 큰일을 하셨다고 봅니다. 그런데 나머지 제작비는 어떻게 충당하셨나요?
▲소규모로 투자해 주신 분들도 계시고, 배급사에서도 투자를 해주셨죠. 무엇보다 기업은행에서 아주 큰 투자를 해오셨어요. 원래는 저희가 기업은행에 제작비 대출을 신청했었는데요. 나중에 조준희 행장께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차라리 대출보다 직접 투자를 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습니다.
- 해군 등에서 거액을 후원하기도 했지만, 5천원권 문화상품권을 보낸 고등학생 등 푼돈을 모아 기탁한 분들이 많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해군에서도 아주 큰 도움을 주셨는데요. 특히 해군 역사상 2번째로 부녀회에서 바자회를 열어 저희들을 도와 주셨어요. 1948년 해군 창설 당시 미국에서 군함을 사올 때 바자회를 펼쳤던 이후로 2번째로 부녀회가 나서 주셨어요. 행사를 진행하면서 해군들도 놀랐던 것 같아요. 스스로 결속되는 느낌도 받고…. 그 분들도 애초엔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국 각지에서 "우리 물건을 기증하겠다"는 분들이 수도 없이 몰려든 거예요. 그러면서 엄청난 거금이 모이게 된 겁니다. 크라우드 펀딩 자체에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 바자회에 참여하신 분들이 굉장히 많았군요?
▲엄청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산 부둣가에 새카맣게 사람들이 운집한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 크라우드 펀딩 모금을 하는 단계에서 영화 마케팅은 이미 끝났다고 보여지는데요. 그런데 얼핏 한 인터뷰에서 '무료로 상영할 의지도 있었다'는 얘기를 하신 것 같은데.
▲그때는 배급사가 아직 확정 안됐을 때의 얘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사비를 털어 후원을 해주셨는데,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어 보여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만약에 끝까지 배급사가 정해지지 않으면 트럭에 스크린을 달고 전국을 돌면서라도 상영을 하려고 했어요. 저는 배급사 없이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마음과 마음이 맞다보면 뭔가 연결이 된다고 믿었어요. 크라우드 펀딩도 마찬가지였죠. 그런 작은 운동들이 모여 대기업 투자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돼요.
- 실제로 길거리에서 상영을 한다면 더욱더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할 것 같은데요.
▲그렇죠. 이게 독립영화들이 하는 방식이에요. 미국에서 배운건데, 극장이 없으면 강당이나 도서관, 공원 등지에 스크린을 걸고 영화를 상영하는 거예요. 이런 식의 상영은 어느 곳에 가든지 다 극장이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현지에선 시민들의 반응도 좋았어요. 그래서 '연평해전'도 충분히 무브먼트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
- 전투 장면에 할애한 시간이 무려 30분이나 됩니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나요? 그리고 엔딩 크래딧에 후원자들 명단을 넣은 것도 두고두고 회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저희 영화 러닝타임이 130분이에요. 엔딩 자막까지 정확히 2시간 10분입니다. 엔딩 크래딧에 후원한 분들의 이름이 쭉 들어갑니다. 그게 11분이 좀 넘어요. 보통 다른 영화에서 엔딩 자막을 보시는 분들은 지루하게 느끼실텐데, 저희 영화에선 오히려 마지막에 관객 분들이 더 감동을 받으신 것 같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핸드폰으로 막 찍기도 하시고….
다시 전투신 얘기로 돌아와…. 일부러 많이 할애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길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에서 뭘 얘기해야 그날의 아픔을, 그날의 상처를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만 고민했어요. 그러다보니 30분이 됐어요. 실제 전투 시간은 약 31분이었는데요. 저는 그 당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다 구현하려고 했어요.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싸우고 다치는지 조사를 하고 자세히 묘사를 했죠. 그러다보니 실제 시간과 비슷하게 나왔어요.
- 생소한 전투 장면을 고스란히 재현하는데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으로 압니다. 고증을 위해 어떤 노력들을 기울이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생존 병사들과 만나 직접 얘기도 들어보고 가족들과도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져왔습니다. 전투에 참여했던 군인 분을 모셔다가 배우들에게 설명을 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어요. 그동안 6년에 걸쳐 계속 인터뷰를 해왔어요. 그러다가 천안함이 터졌고, 세월호까지 연결된 겁니다.
- 사실 지금도 6.25는 진행되고 있어요. 연평해전도 그 중의 하나이고….
▲그렇죠. 휴전 상태죠.
- 직접 북한 고위급 간부로 출연한 점도 참 이채롭습니다. 원래 연기 욕심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
▲출연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사실은 제작비와 관련이 있는데요. 좋은 배우를 쓰려면 개런티를 많이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스태프들이 저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북한군 포스가 난다며 저의 출연을 적극 권유했어요. 물론 미국에 있을 때 연기 수업을 다 하긴 해요.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을 잘 압니다. 배우와는 확연히 다른 길이죠. 이번엔 제작비도 줄일 겸 제가 출연했지만 여기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아요.
하긴 예전에도 감독들이 가끔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일이 있었죠. 인증샷 비슷하게요. 뭐 제가 연기에 욕심이 나는 건 아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 분량으로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감독이 스토리를 달기 때문에 대사가 없어도 어느 정도는 소화가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 될 순 있겠죠.
- 저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연극을 했었고, 대학교 때에는 미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순재, 이낙훈 같은 분들이 연극 활동을 했었어요. 이래저래 저도 연극과는 인연이 많습니다.
▲저도 한때는 연극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혼자 미술을 하다보면 너무 외롭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서양화부터 미술을 시작했는데 동적인 게 하고 싶어 조각으로 전공을 택했죠. 하지만 조각 역시 혼자 하는 거잖아요. 역시 사람들과 부딪히는, 그런 예술 활동에 목이 말랐던 거 같아요. 연극은 제가 할 줄도 몰랐고, 또 기회가 없어서 하지 못했어요.
- 참수리 357호의 정장 윤영하 대위(김무열 분), 조타장 한상국 중사(진구 분), 박동혁 상병(이현우 분)을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되는데요. 이분들의 개인사를 스크린으로 옮겨 담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처음부터 유가족 분들이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었나요?
▲처음에 제가 유가족분들을 만난 게 2009년도 였을 거예요. 유가족을 처음 만난 자리가 황도현 중사 형 결혼식이었어요. 그곳에 여섯 전사자들의 부모가 다 계셨던 거예요. 그 자리에서 연평해전 영화를 만들겠다는 취지를 설명 드렸는데요. 처음엔 쉽지 않았죠. 유가족 분들께선 소설 때 하도 인터뷰를 많이 해 진이 빠져서 힘들다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실제로 많은 가족 분들이 언론 인터뷰를 많이 해서 몹시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쉽게 허락을 안하시다가 나중엔 마음 문을 열어 주셨어요. 단 조건이 있었죠. "영화로 만들어도 좋다. 다만 우리 아들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당부를 하셨어요. 부디 영화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연평해전의 실상에 대해 알았으면 좋겠다는 게 유가족 분들의 공통된 반응이었습니다. "이왕 만드는 거 정말로 재미있게 만들어달라. 다른 건 일절 필요없다"고 하셨죠.
- 최순조씨가 쓴 소설 '연평해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알고 있습니다. 원작과 다르게 그려지거나 특별히 강조된 부분이 있다면?
▲차이가 있죠. 원래는 윤영하 소령과 아버님(윤두호 대위) 부자의 스토리가 중심이었어요. 소설에선 잠깐 나왔는데요. 제가 좀 변형을 시켰죠. 북한 684호정이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탄 357호정을 공격해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 정장은 모두 사망했죠.
공교롭게도 숨진 북한 정장의 아버지는 30년 전 남파됐던 간첩인데요. 당시 윤영하 아버지에 의해 나포됐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아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게 돼요. 윤두호 대위가 남한으로 넘어온 간첩을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살려 보내준 거죠. 뱃사람들은 하늘을 날다가 바다에 떨어진 새들도 함부로 잡지 않아요. 하물며 물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사살을 하겠습니까? 나중에 붙잡힌 간첩이 이 사실을 다 불어서 당시 연루됐던 사람들이 다 문책을 받게 되죠.
그 일로 진급이 누락된 윤두호 대위는 전역을 하게 돼요. 아들인 윤영하 소령이 군인이 된 것도,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어요. 이게 제가 처음 썼던 스토리예요. 나중에 본격적인 투자가 이뤄지면서 내용을 대폭 수정했죠. 북한을 중점으로 다룬 영화엔 관객의 호응이 적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어요. 그래서 전사자들의 얘기를 부각시키는 차원으로 고친 겁니다. 포커스를 바꾼 거죠.
- 원래 윤영하 대위 역은 배우 정석원이 캐스팅 돼 상당량 촬영까지 진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도에 하차를 했죠? 이유가 뭔가요?
▲한창 PR도 하고 촬영도 진행한 상태였는데요. 자금 문제로 2013년에 잠시 촬영을 접게 됐어요. 당장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죠. 그런데 어느 배우가 한 영화를 마냥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죠. 다들 각자 스케줄이 있잖아요? 한 작품이 언제 끝날 것을 감안해 다음 작품 스케줄을 짜기 마련이죠. 하지만 저희 영화가 너무 오래끌다보니 나머지 스케줄까지 줄줄이 꼬여버린 거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 연관된 질문일 수도 있지만, 배급사가 바뀌면서 진행 중이던 영화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배급사가 하자는대로 제가 따라갈 거면 영화 안하죠. 처음 대기업이 참여한다고 했을때 좀 우려는 됐었어요. 애당초 제가 하고자 했던 것과 (배급사 측에서)원하는 바가 서로 다를까봐 걱정이 됐던 거죠. 그래도 자본이 필요했기에 제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수용하되 그럴 수 없는 것은 어필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죠.
다행히 잘 조정이 돼서 좋은 방향으로 얘기가 됐어요. 저희 제작진 자체적으로 회의를 통해서 계속 수정을 했어요. 목표는 더 많은 관객이 영화를 보도록 만드는 거였죠. 이것은 유가족이 가장 원하는 바이기도 했어요. 영화 산업 자체가 흥행이나 경제적인 것들과 뗄레야 뗄수 없는 속성을 갖고 있어요.
- 돈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 감동을 높이기 위해 작품을 만들면 돈은 저절로 들어오기 마련이죠. 영화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만들어 수익을 창출하는 대단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헐리우드가 가장 잘 하는 부분입니다. 관객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읽어내는 거죠. 혹자는 헐리우드에선 우주에 로켓을 쏘아 올리는 머리로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만큼 관객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해 적기적소에서 울렸다 웃겼다 하는 겁니다. 저도 미국에서 이런 걸 배우고 싶었어요.
제가 관객에게 얘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객이 외면해버리면 다 소용이 없거든요. 좋은 얘기를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하게 돼요. 남북한 양측 아버지의 운명이 아들에게 대물림되는 얘기를, 6용사의 개인사 중심으로 바꾼 게 결과적으로 잘한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의 공감을 사기 위해선 이 스토리가 더 좋은 것 같아요.
- 배우들은 감독님께서 일일이 지목을 하고 컨택하신 건가요?
▲주인공, 조연, 엑스트라까지 다 신경썼어요. 저는 모든 배우가 통일성이 있어야 봐요. 한 사람만 두드러지면 안됩니다. 조연 한 명까지도, 이 역할을 누가 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캐스팅을 했어요.
- 영화를 보신 유족들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잘 만들었다고 하시던가요?
▲잘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씀들을 해주셨어요. 다만 6명의 전사자 중에서 3명의 스토리만 부각돼 그런 점에 대해선 좀 서운한 감이 있으셨을 거예요. 제가 유가족이라하더라도 6명이 다같은 자식인데 누구만 조명을 받으면 좀 섭섭한 마음이 들겁니다. 그게 좀 죄송스럽습니다. 원래 제가 6년 동안 써온 시나리오에는 6명에게 똑같이 배분된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영화화 할 경우, 보는 사람들이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야할지 모를 수 있겠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관객이 영화 주인공들에게 감정 이입을 해야하는데, 집중할 만하면 다른 사람으로 포커스가 이동되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이렇게 되면 몰입이 쉽지 않을 거란 지적이었죠. 우리 영화가 무슨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제대로 감동을 주려면 집중을 시켜야한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그래서 소개되는 인원을 좀 축소시켰죠.
- 영화 속에서 유족들의 역할도 꽤 있죠?
▲윤영하 소령 아버지, 윤두호 대위도 비중있게 나오고, 한상국 중사의 미망인, 조천형 중사의 미망인도 나와요. 그 당시에 갓난아기였던 딸 시은 양도 등장합니다.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도 중후반부에 강한 인상을 남기죠.
- 엔딩 장면이 참 인상적이라는 얘기가 많아요.
▲영결식이 끝나고 박동혁 병장이 병원으로 이송되는 장면이 나와요. 박 병장은 병원에서 3개월간 투병을 하다 세상을 떠나죠. 박 병장은 40일간 침몰한 배안에 갇혀 있다가 인양되는 한상국 중사의 모습을 병실에서 지켜본 뒤 눈을 감게 돼요. 그러면서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 한 영화에 이토록 오래 매달리는 게 쉬운일은 아니었을텐데요. 감독님께서 끝까지 손을 놓지 않도록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 같습니다.
▲크리우드 펀딩에 참여해주신 분들과 바자회에 동참하신 분들, 그리고 배급사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고마운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사실 우리가 영화를 다 만들어도 막상 배급이 안되면 곤란해지잖아요? 그런데 메이저 배급사에서 배급을 해주겠다고 나섰으니 저희는 큰 힘을 얻게 된 거죠. 정몽준 전 의원 등 국회의원들도 20여분 후원자로 동참해주셨죠.
경제인 분들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대기업은 계열사 차원에서 많이 도와주셨고, 대개 중소기업이 많았어요. 자기 이름은 밝히지 말아달라며 익명으로 후원해주신 기업들도 많았죠. 이 분들이 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해주셨던 말씀은 거의 비슷해요. 힘들더라도 끝까지 영화를 잘 만들어달라고….
이명박 전 대통령께선 재임 시절 서해교전을 연평해전으로 격상시켜 주셨죠. 당시 정홍원 국무총리께서도 큰 도움을 주셨고, 무엇보다 육해공군에서 전폭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아 주셨어요. 레바논 주둔 병사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해 주신 것도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저희가 도와드려야 할 분들인데 거꾸로 우리를 도와주셨어요. 이처럼 이 영화는 바로 국민들이 만든 영화입니다.
- 영화 말미에 김대중 대통령이 전사자 합동영결식에 참석하지 않고 일본으로 출국하는 내용이 들어갔죠? 이런 내역을 삽입한 이유는 뭔가요?
▲실제로 보여주진 않아요. 뉴스 자막으로 나옵니다. 특정 인물이나 특정 사건을 부각시키고 싶지는 않았어요. 앞 뉴스에 금강산 소식이 나오는데요. 만경봉호가 금강산 관광을 하러 들어간다는 내용이었죠. 그리고 월드컵 폐막 소식이 이어지고요. 당시 상황이 그랬어요. 한쪽에선 슬픔이 있고, 저쪽에선 월드컵 축제가 열리고, 다른 한쪽에선 금강산 관광을 가고…. 해석은 관객 분들의 자유입니다.
- 마지막에 실제 영결식 자료 화면을 사용한 이유가 뭔가요?
▲당시 성남 국군수도병원 체육관에서 전사자 합동 영결식이 열렸었는데요. 자료 화면으로 보니, 이건 도저히 연기로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더라고요. 물론 연기로 소화할 수도 있었죠. 그러나 감정이라는 게 눈에 보이진 않지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거잖아요? 관객들도 다 알아요. 그래서 실제 영결식을 찍은 자료 영상을 받아 영화에 삽입하기로 했어요.
창작에는 규범이란 게 따로 없는 거예요. 문제는 자료영상 화질이 썩 좋지 않았다는 겁니다. 당연히 반대도 많았죠. 그래도 저는 "우리의 목적은 멋있는 테크니컬한 장면을 보여드리는 게 아니다. 사람의 감정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다"라고 제작진을 설득하고 밀어붙였죠.
- 그래서 감동의 리얼리티가 훨씬 더 높아졌다는 생각입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중에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한 영화도 제작할 계획이 있으신가요?
▲생각은 하고 있어요. 지금도 자료 수집은 계속 하고 있죠. 하지만 규모도 그렇고, 정말 쉬운 작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이래요. 제가 이 영화를 꼭 만들어야 된다는 그런 차원 보다는, 우리의 아픈 역사잖아요? 우리가 겪었던 아픈 역사적 사건들이 여러 개 있죠. 종군위안부도 그런 아픈 역사 중 하나고요. 왜 우리 민족은…. 제가 어차피 영화를 하는 사람이니, 영화를 통해서 이런 아픈 역사들을 다뤄보자는 생각을 한 겁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유태인의 아픈 역사를 영화화 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아픈 역사를 스스로 기록화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치적으로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연평해전을 영화로 만들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어요. 한쪽에선 웃고 떠들고, 다른 한쪽에선 울면서 전투를 벌이고…. 똑같은 시간에 너무도 다른 상황.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게 현실이죠. 통일이 될 때까지는 이런 아니러니가 계속 될 수밖에 없다고 봐요.
-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이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후원자 분들의 성원과 격려 덕분이었습니다. 이 분들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진짜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또 한가지, 어떻게 보답을 해드릴까 고민을 하다 내린 결론인데요. 일종의 군인을 위한 재단을 만들까 생각 중이에요.연평해전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이 계시고, 또 파편에 맞아 큰 고통을 받은 생존 병사들이 계신데요. 아직까지 전투를 하는 꿈을 꿀 정도로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컸던 것이죠. 상대적으로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피해를 당한 부모님들의 경우엔 국가로부터 힐링 치료를 받았다고 들었어요. 이 얘기를 듣고 연평해전 전사자 부모님들께서 부러워 하시더라고요.
라디오를 들어보니 유럽에선 이런 재단이 있다고해요. 의무복무제를 운여하는 나라들은 아니지만, 어쨌든 제대를 한 군인들이 사회 적응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재단이 따로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은 이런 것들이 더 발달돼 있죠. 대통령 취임식 때에는 꼭 역대 참전 용사들이 참석할 정도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군인에 대한 인식과 예우가 우리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아요.
군인이란 자고로 목숨을 담보로 나라를 지키는 분들 아닙니까? 이분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위해서, 우리나라를 위해서 수고하신 분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드리고 싶어요.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은 건 반드시 사회로 환원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이게 크라우드 펀딩의 진정한 자세라는 생각도 들고요. 영화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꼭 이런 힐링 사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주고픈 메시지가 있다면?
▲이 영화를 통해 연평해전을 꼭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월드컵 축제 기간에 희생됐잖아요? 그냥 잊어버리면 이 분들의 희생과 정신이 무의미해집니다. 나라를 위해 숨진 전사자들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 안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망각하지 않도록 자꾸 되새기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영화를 만들면 영원히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겠죠. 영화를 보면서 '그래 저런 일이 있었지' 하고 공감을 하고 반성을 하게 되는 거죠. 이게 바로 연평해전으로부터 파생될 무브먼트입니다. 이들을, 연평해전을 기억하자는 겁니다.
- 연평해전에서 숨진 병사들은 전사자이기도 하지만, 국가가 살해한 피살자이기도 합니다. 안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 먼저 발포하기 전엔 쏘지마라 쫓아가지말라는 엉터리 교전 수칙 때문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입니다. 당시 정권은 군인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스톱시켰어요. 제가 보기엔 유족들이 소송을 걸면 법리적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보는데요. 어쨌든 이러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주제로도 별도의 영화가 기획됐으면 합니다.
▲중요한 부분이긴 합니다만, 이번 영화와는 또 다른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구상하면서 이것을 남과 북의 대치국면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 아니면 우리 내부의 문제를 스스로 반성하고 자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결국엔 후자 쪽으로 생각을 했죠. 회장님 말씀에 동감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