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류가 바뀌면 어종이 바뀌고,
어종이 바뀌면 어선을 바꿔야 한다'
지난 20년간,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포지션은 ‘센터’일 겁니다.
90년대 농구계에는 ‘센터는 팀을 승리로 이끌고, 가드는 팬을 즐겁게 한다’는 말이 있었죠.
더블더블이 가능한 센터를 보유한 팀은 팀전력에 상관없이 일단 플레이오프는 기본이었습니다.
그 센터 신화는 2010년대에 깨집니다.
AD, KAT, 커즌스 등 리그 최고의 빅맨을 에이스로 둔 팀들은 플레이오프의 벽을 못 넘었습니다. 90년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죠.
센터 매치업의 우위가
팀전력의 우위를 담보하지 않는 시대가 된거죠.
또 다른 변화도 있었습니다. 센터들의 프레임이 얇아지고 포스트업 비중이 줄어든 대신, 외곽슈팅과 컨트롤타워 역할을 늘리게 됩니다.
이런 외형적 변화를 보고
'예전 센터들이 지금 오면 리그를 씹어 먹는다'던지 ‘요즘 센터가 예전보다 못해서’라고 결론을 내리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리그의 트렌드(조류)가 바뀌어서
센터의 역할(어종)이 바뀌었는데,
보는 시각(어선)을 바꾸지 않은 겁니다.
명태가 사라지고 오징어가 많이 나는 동해바다에서
예전에 잘나갔던 명태잡이 어선으로 어장을 휩쓸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Precision beats Power, Timing beats Speed’
“정교함이 힘을 제압하고, 타이밍이 스피드를 이긴다”
‘힘과 스피드, 높이(점프력)’는 매치업의 우위를 결정하는 재능이라 여겨졌습니다. 이중에 하나라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 리그에서 탑급선수가 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슈퍼스타들은 뭔가 달라졌습니다.
드래프트 컴바인에서 나오는 운동능력이 온전히 슈퍼스타로 치환되는 확률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니콜라 요키치, 스테판 커리, 루카 돈치치, 제임스 하든의 운동능력은 절대 좋은 편이 아니지만, 희한하게도 더 빠른 선수들을 제치고
점프가 더 좋은 선수들 위로 슛을 날립니다.
비결은 '정확도와 타이밍'입니다.
Precision beats Power
요즘 센터들은 파워만을 위해 몸을 불리지 않습니다. 대신 슛거리와 정확도를 늘렸죠.
스크린으로 미스매치를 만들어주고 패스와 핸즈오프로 본인 득점이 아닌 ‘팀득점’을 올리는데 기여합니다.
Timing beats Speed(Jump)
요즘 가드들은 스피드로 제압하지 않습니다. 높은 타점으로 슛을 하지 않습니다.
타이밍을 빼앗아 돌파하고 슛을 쏩니다.
신체 능력으로 매치업 우위를 논하는 시대가 가고, '타이밍과 정확도'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메이저 리그에서 도루가 사라지고 삼진이 늘어난 이유
= 센터의 공격비중이 줄어든 이유
야구 얘기를 좀 해보죠.
요즘 MLB에선 도루를 보기 어렵습니다.
발빠른 1번 타자가 사라지고, 슬러거들이 1,2번에 전진배치 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안타보다 삼진이 많아졌고, 평균타율은 2018년 0.248로 1972년이래 최저를 기록했습니다.
야구가 이렇게 변한 것은
‘요즘 선수들이 발이 느리고 타격능력이 형편없으며 선구안이 나빠져서'가 아닙니다.
세이버메트릭 통계분석이 발전하면서
'확률'과 '효율'의 개념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당장의 진루 1개보다 아웃카운트 1개를 아끼는 것이 추가득점에 유리하며,
당장의 1점 생산이 아니라, 경기 전체의 득점생산량을 높이는데 단타보다 장타의 가치가 높다고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3할5푼 단타자보다 2할 장타자의 기대득점이 높다는 것이 요즘 야구의 효율 원칙입니다.
다시 농구로 되돌아 가서 똑같은 질문을 ‘센터’에게 해봅시다.
과연 요즘 센터들이 90년대 센터보다 실력이 떨어져서 센터 농구가 실종 된 것일까요?
90년대 센터들이 ‘그 실력 그대로’ 지금 시대에 와도 팀승리의 보증수표가 될까요?
55%짜리 2점슛보다 35%짜리 3점슛이 생산성이 높다고 증명된 현대 농구에서,
센터가 골밑에서 30, 40점을 넣는 농구가 90년대처럼 팀승리로 직결될 확률은 낮아지고 있습니다..
축구의 하프스페이스가 중요해진 이유 = 센터의 백다운 공격이 줄어든 이유
요즘 축구 전술용어에 ‘하프 스페이스’란 표현이 있습니다.
운동장을 5등분했을때 좌중간, 우중간을 뜻하는 전술적 공간을 지칭합니다.
이 공간이 주목받는 이유는 ‘전술적 시야가 가장 많이 확보되고 운동장을 넓게 쓸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플레이메이커들이 중앙에서 패스로 공격을 지휘했다면, 요즘 각광받는 플레이메이커인 데브라이너, 에릭센, 브루노 페르난데스등은 정중앙의 약간 옆에 위치합니다. 윙어처럼 달리고 박투박의 활동 범위를 가진 플레이메이커가 인정받는 시대가 된거죠 .
다시 NBA로 돌아와서,
90년대까지의 농구 패러다임은
'림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확률은 높아진다'는 2차원적 확률농구 였습니다. 이때는 매치업 우위에 있는 센터의 백다운 공격이 ‘가장 확실한 공격 루트’로 각광 받았지요.
2010년대 농구의 패러다임은 바뀌었습니다. 빠르고 코트를 넓게쓰며 간결한 볼소유가 중요해진 '효율 농구'의 시대입니다.
로포스트에서 림을 등지는 백다운 공격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무엇보다 핸들러의 시야가 좁아져 코트 활용이 제한적 입니다.
‘스페이싱 농구로 단련된 기민한 리커버리 수비’는 90년대 빅맨스타일의 백다운킥아웃 전술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요키치급 코트비젼과 패스센스가 아니면 말이죠.
그 결과, 센터보다는 패싱능력을 갖춘 스윙맨이나 가드들의 백다운을 더 자주 볼수 있습니다.
요즘 빅맨들이 탑에서 볼을 받는 횟수가 늘고 페이스업을 시도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죠.
2대2 수비와 스위치 디펜스
- 무거운 센터가 도태되는 이유
요즘의 센터는 과거보다 더 넓은 수비범위와 전술적인 움직임이 요구됩니다.
트랜지션 농구는 센터도 달리게 하고,
스페이싱 농구는 3점 컨테스트를 강요합니다.
2대2 농구는 작고 빠른 가드의 미스매치도 막아야 합니다.
백스텝, 사이드 스텝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되죠.
무엇보다 팀디펜스에 대한 이해도가 뒷받침 되야 합니다.
하산 화이트사이드, 안드레 드러먼드, 에네스 칸터 등 20-20을 할 수있는 센터들이 저니맨으로 전락한 이유기도 합니다.
골밑에서 힘과 높이로 수비하는 것만으로 센터의 수비능력을 평가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생존에 유리한 자질을 발전시킨 종만이 선택되고 살아 남는것이 진화
인간은 진화합니다.
그리고 진화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 빅맨의 향수를 가진 분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는, 과거 선수들의 장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대농구가 요구하는 변화는 쉽게 적응할거라 판단한다는 점입니다.
진화 형질은 쉽게 습득되지 않습니다.
적자생존과 도태 경쟁을 통해 얻은 생존의 흔적입니다.
요즘 선수들의 외형적 단점을 단점 그 자체로 볼 것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경쟁의 결과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몸집을 줄이고,
슈팅레인지를 늘리고, 페이스업을 늘리고,
골밑에서 나와 스크린과 핸즈오프로 팀원을 돕는 것이 현대 농구에서 팀을 승리로 이끄는 센터의 자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가 그렇듯이,
지금 살아남은 센터들은
농구 역사상 가장 진화된 센터들입니다.
“조류가 바뀌면 어종이 바뀌고,
어종이 바뀌면 어선을 바꿔야 한다”
쿰보가 요즘 리그 MVP급으로 잘 나가는데, 하킴, 로빈슨을 쿰보보다 높고, 빠르고, 중거리 슛은 훨씬 더 좋았던걸 감안하면 충분히 통하고도 남을듯 합니다.
크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