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萊鄭門(동래정문) 鄭昌孫(정창손):(1402~1487)-(端宗復位謀議를 막았던 領議政)
임금 世祖(세조)에게 바른말로 대 들었다가 職帖(직첩)을 回收當(회수당)해 領議政(영의정)자리를 물러난 鄭麟漬(정인지)의 뒤를 이어 빈자리에 拔擢(발탁)된 人物(인물)은 左議政(좌의정)鄭昌孫(정창손)이었다.鄭昌孫(정창손)은 그 무렵 어머니喪(상)을 當(당)해 治喪(치상)하느라 辭職(사직)하고,墓所(묘소)앞에서 廬墓(여묘)살이를 하고 있는데, 世祖(세조)가 特命(특명)으로 불러내 領議政 (영의정)자리에 앉히니, 그 날이 1458年 12月 7日, 鄭昌孫(정창손)의 나이 57歲(57세)였다. 鄭昌孫(정찬손)은 本貫(본관)이 東萊(동래), 字(자)는 孝仲(효중), 太宗(태종)2年에 中樞院使(중추원사) 鄭欽之(정흠지)의 여섯 아들 中(중)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世宗初期(세종초기에 式年文科(식년문과)에 올라 벼슬을 始作(시작)하였는데, 머리가 뛰어난 天才的(천재적) 頭惱(두뇌)의 人物(인물)로 名聲(명성)이 났다. 그러나 集賢殿(집현전)의 正4品(정4품)應敎(응교)자리에 있을 때世宗(세종)이 百性(백성)들에게 忠孝思想(충효사상)을 鼓吹(고취)하고자 頒布(반포)한 <三綱行實(삼강행실)>을 두고, 사람이 行(행)하고 行(행)하지 않음은 타고난 資質(자질)에 있는 것이지 諺文(언문)으로 飜譯(번역)하여 읽힌다 해서 모두 本(본)받는 것은 아니다”며, 한글의 不必要(불필요)함을 主張(주장)하다가 結局(결국) 罷職(파직),끝내 獄(옥)에 갇히기까지 하였다. 뒤에 世宗(세종)은 그의 氣槪(기개)와 公職者(공직자)로서의 깨끗함을 認定(인정)하여 復職(복직)시켰는데, 또 世宗(세종)의 佛經刊行(불경간행)에 反撥(반발)하고 나섰다가 左遷當(좌천당)하기도 하였다.歲月(세월)이 흘러 心氣(심기)가 어느程度(정도) 사그러진 世宗(세종)은 그를 直藝文館(직예문관)에 起用(기용)하였는데,그 무렵 鄭昌孫(정창손)은 文科重試(문과중시)에 壯元(장원)으로 뽑혔다. 이에 王(왕)은 鄭昌孫(정창손)을 集賢殿副提學(집현전부제학)에 春秋館編修官(춘추관편수관)과 修史官(수사관)을 兼職(겸직)시켜<高麗史(고려사)>等(등) 여러 歷史書籍編纂(역사서적편찬)을 主導(주도)하게 하였다. 어느덧 朝廷(조정)의 重鎭(중진)으로 우뚝선 鄭昌孫(정창손)은 周邊(주변)으로부터, 남달리 깨끗하며,節操(절조)를 지켜 自身(자신)의 産業(산업)을 일삼지 않는다는 讚辭(찬사)를 받았다. 이어 그는 文宗(문종)·端宗時代(단종시대)를 거치면서 右副承旨(우부승지)·大提學(대제학)·兵曺(병조)와 吏曺(이조)의 判書(판서)等(등)要職(요직)을 거쳤는데,世祖(세조)가 卽位(즉위)하더니 그를 右贊成(우찬성)에 世子左賓客(세자좌빈객)을 兼(겸)하고,判吏曹事(판이조사)로 人事權(인사권)까지 갖도록 職位(직위)를 넓혀 줌과 아울러 佐翊功臣3等(좌익공신3등)에 策錄(책록)하고 蓬原君(봉원군)에 封(봉)했다. 그런데 그 해 成三問(성삼문)等(등)新進官僚(신진관료)들이 端宗復位謀議(단종복위모의)를 하는데, 거기에 鄭昌孫(정창손)의 사위 金瓆(김질)이 뜻을 같이 하였다가 일이 점점 틀어지자 겁을 먹은 金瓆(김질)이,丈人(장인) 鄭昌孫(정창손)을 찾아가 告白(고백)하고 말았다.事實(사실)그들은 일이 成事(성사)되면 領議政(영의정)에 評判(평판)이 좋은 鄭昌孫(정창손)을 推戴(추대)하기로 決定(결정)했던 것이다. 이에 鄭昌孫(정창손)은 自身(자신)을 믿어주는 世祖(세조)를 背信(배신)할 수 없어 事件(사건)의 眞相(진상)을 告(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四六臣事件(사육신사건)이 터져 端宗復位謀議(단종복위모의)는 一網打鎭(일망타진)되고 말았다. 鄭昌孫(정창손)은 實(실)로 歷史(역사)의 물줄기가 바뀔뻔했던 劇的(극적)인 瞬間(순간)의 主人公(주인공)으로 떠올라 그해 10月(순간)右議政(우의정)으로 政丞班列(정승반열)에 들어 이듬해 左議政(좌의정)을 거쳐 쉽게 領議政(영의정)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鄭昌孫(정창손)은 벼슬에 慾心(욕심)이 없어 여러번 上疏(상소)를 올려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世祖(세조)는 決(결)코 許落(허락)하지 않았다.1460年 5月,겨우 자리를 물러났는데, 이듬해 4月 다시 두 番(번)째 領議政(영의정)자리에 불려나와 앉았는데, 그 무렵 恒常(항상) 몸이 不便(불편)했던 世祖(세조)에게,玉座(왕좌를 世子(세자에게 물려주고 몸을 돌보라는 建議(건의)를 했다가 그만 世祖(세조)의 心氣(심기)를 건드린 꼴이 되어 모든官爵(관작)을 沒收當(몰수당)한 채 시골 礪山(여산)에 赴處(부처)되는 困辱(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곧 풀려나온 鄭昌孫(정창손)은 蓬原府院君(봉원부원군)에 復爵(복작)되고,睿宗(예종)을 거쳐 成宗(성종)이 卽位(즉위)하자 大匡輔國崇祿大夫(대광보국숭록대부)로 昇品(승품)되어 院相(원상)으로 임금을 輔佐(보좌)하는 位置(위치)에 서니 나이 70歲(70세)였다. 임금은 한사코 그만 두려는 鄭昌孫(정창손)을 붙들고 机杖(게장)을 내리기까지 하더니,成宗(성종)6년 7月 그를 세 番(번)째 領議政(영의정)에 復職(복직)시켰다.以後(이후)鄭昌孫(정창손)은 두 番(번)이나 더 領議政(영의정)을 歷任(역임)하니 그는 世祖(세조)以後(이후)세임금을 輔弼(보필)하며 다섯番(번)에 걸쳐 15年간 國政最高(국정최고)의 職位(직위)를 누린 셈이었다.鄭昌孫(정창손)은 85歲(85세)때 領議政(영의정)자리를 물러나고 이듬해인 1487年 1月 86歲(86세)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훨씬 뒤인 燕山君(연산군)때 그는 成宗(성종)의 廢妃尹氏事件(폐비윤씨사건)에 加擔(가담)된 이른바‘廢妃尹氏關聯12間(폐비윤씨관련12간)’에 들어 剖棺斬屍(부관참시)되는 狼狽(낭패)를 當(당)했으나 中宗反正(중종반정)으로 모두 풀려 淸白吏(청백리)에 祿選(녹선)되었다.私心(사심)이 없는 至極(지극)한 忠誠心(충성심)으로 임금을 받들고 나라 일을 自己(자기)집 일처럼 여겨왔던 鄭昌孫(정창손)은,學識(학식)이 높았고 氣槪(기개)가 强(강)했다. 文章(문장)과 글씨에 매우 能(능)했고 風采(풍채)가 俊秀(준수)하였으며 수염이 길어 배에까지 내려왔다. 그에게는 忠貞公(충정공)으로 諡號(시호)가 내려지고 成宗(성종)의 廟庭(묘정)에 配享(배향)되는 禮遇(예우)를 받았다.墓所(묘소)는 처음에 京畿道(경기도)廣州(광주)에 마련되었었는데 外孫(외손)인 領議政(영의정)李元翼(이원익)이 오늘날의 京畿道(경기도)楊平郡(양평군)楊西面(양서면)芙蓉里(부용리)로 移葬(이장)하니 京畿道文化財資料第85號(경기도문화재자료제85호)로 指定(지정)되어 保護(보호)받고 있다. 그러나 한便(편)으로는 四六臣(사육신)을 받드는 儒林世界(유림세계)에서는 鄭昌孫(정창손)을 좋게 評價(평가)하지 않았다.鄭昌孫(정창손)은 价·倂·适(개,변,괄)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鄭价(정개)와 鄭倂(정변)은 僉知中樞府使(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鄭适(정괄)은 燕山君(연산군)때 右議政(우의정)에 올라 明(명)나라 使臣(사신)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七家嶺(칠가령)에서 病(병)을 얻어 숨졌다. 출처 歷史와 人物 [출처] 東萊鄭門(동래정문) 鄭昌孫(정창손):(1402~1487)-(端宗復位謀議를 막았던 領議政)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