敵은 내부에 있다. 식민지배체제의 완성은 식민지 피지배세력 일부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 조선의 근대화과정에서도 외세의 개입에 의한 자주적 근대화의 실패는 한마디로 봉건지배체제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했던 지배층의 반민족적 행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성장에 바탕으로 한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과 개항의 요구를 맞게 된 조선의 반응양태는 사실 세 가지의 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위정척사를 바탕으로 개항반대의 입장을 취한 봉건사회의 보수지배층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 개국통상론의 입장을 옹호한 개화파세력이었으며, 마지막은 신분차별과 지주제를 바탕한 봉건지배체제의 누적된 모순을 척결하려는 민중농민세력이었다. 이 중 앞의 두 가지 입장인 위정척사파와 개화세력은 근본적으로 지배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써, 세계사적 전환기에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항함에 있어 기존의 봉건질서에 토대한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외세의 힘에 의존하는 반민중적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이러한 대외의존적 태도는 조선의 근대화과정에 있어 봉건제 해체의 시대사적 변화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타파하려는 절박한 민중적 항쟁을 외세의 힘을 빌어 탄압함으로써 외세에 자주권을 내어주게 되고, 이로 인해 결국 조선의 일제식민지화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지주층을 활용하였고, 그들도 자신의 기득권유지를 위해 이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기존의 토지소유자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것에 토대하여 지세제도를 확립하였고, 대다수 많은 토지들이 국유지로 편입되어 사적 토지소유권에 무지한 대다수 농민들은 불리한 조세제도와 토지수탈로 농촌을 떠나고, 이에 노동자로 편입되어 노동력까지 착취당한다. 산업화에 있어서도 친일적인 예속자본가들은 독점에 의해 일제의 조선반도의 병참기지화와 식민시장확대의 식민지정책에 적극 헌신한다. 이러한 일제하의 소위 '근대화' 양상은 결국 반민중적 봉건체제의 연장과 매판자본의 형성으로 인해 자주적 민족번영의 기회를 말살한 셈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근대화'란 표현속에는 이미 식민화가 근대화에 끼친 영향을 강조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스럽게 박정희식의 개발독재를 미화하는 논리로도 연결된다. 만일 일제 식민화가 반민중적·반민족적 암울한 역사였다는데 동의한다면, 그 시기의 근대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봉건사회 해체의 세계사적 흐름속에서 조선민중의 필사적인 대응이 외세를 등에엎은 지배층의 기득권수호 행위를 극복할 수 있었다면 내부적으로는 사회개혁과 외부적으로는 개방과 근대화의 흐름에 적절히 대응함으로써, 일제식민화의 수치스런 역사도 없었을 것이고, 그 흐름하에서 민족적 번영으로 분단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는 역사에 대한 가정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이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바른 안목인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 외세의 개입과 이에 대한 사회구성체론적 불평등의 모순이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구한말 조선의 역사적 선택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일제식민화는 결국 서양 열강의 냉전이데올로기하에서 민족적 비극인 한국전쟁과 분단의 아픔으로 이어졌고, 60, 70년대 경제개발정책은 그 외면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사회경제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자본주의에 완전히 편입되어 물질문명을 향유하는 작금의 우리의 모습이 가진 부채 세계3위, IMF, 20:80의 사회, 그리고 세계유일의 분단국이라는 오명은 과연 식민지근대화가 진정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따라서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논쟁이 보여주는 역사관적 혼란은 우리 민족의 당면과제의 해결에 있어, 단지 눈에 보이는 경제적 문제를 통해서만 이해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민족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