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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의 장례 문화에는 우리 고유의 전통과 서양식이 뒤섞여 있다. 상복이 대표적이다. ① ②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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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2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황금자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대 목동병원에 차려진 빈소는 고인을 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데 빈소는 일제 35년 통치가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일제라면 몸서리칠 수밖에 없는 고(故) 황 할머니의 빈소에서 말이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중앙일보는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우리 장례문화의 일제 잔재를 추적했다.
관혼상제(冠婚喪祭)로 대표하는 우리 전통의례(儀禮)는 일제가 훼손한 대표적 사례다. 1934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의례준칙’을 발표했다.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이렇게 설명했다.
“생활양식 중 각종 의례는 구태가 의연하여 오히려 개선할 여지가 작지 않다. 그중에 혼인·장례·제사의 형식과 관례는 지나치게 번잡하여 엄숙하여야 할 의례도 종종 자질구레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쓰게 되어 그 정신을 망각하지 아니할까 우려될 정도에 이르렀다. 지금에 와서 이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민중의 피해를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발전과 국력의 신장을 저해하는 일이 실로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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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며 일부 변질된 것도 있다. 완장 ③ 과 상장 ④, 삼베 수의 ⑤ 등은 100년 전만 해도 볼 수 없던 것이다. 꽃장식 ⑥ 은 현대 일본 스타일이 그대로 들어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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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조선의 전통의례가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번잡하니 이를 개혁하겠다는 뜻이다. 김시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과장)은 “관혼상제가 우리 문화에서 차지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이를 바꿔 일제 식민통치를 더 굳건하게 하려는 속셈”이라고 분석했다. 석전대제(공자 등 성현을 제사 지내는 의식) 예능 보유자 권오흥씨는 “유교는 예를 우주의 질서로 생각했고, 의례는 예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며 중요하게 여겼다”고 설명했다.
조선총독부 의례준칙에 따라 눈에 띄게 변한 건 상복이다. 전통 상복인 굴건제복(屈巾祭服·거친 삼베로 만든 옷)을 생략하고 두루마기와 두건을 입도록 만들었다. 유족이 한복이나 일본 전통복장을 입었을 때 왼쪽 가슴에 나비 모양의 검은 리본을 달도록 했다. 또 양복을 입은 사람은 왼쪽 팔에 검은 완장을 달게 했다. 황 할머니 빈소에서 봤던 상장(喪章)과 완장의 시작이다(사진 ③④).
상장과 완장은 항일인사들이 장례식에 모여 집회를 열지 못하도록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69년 ‘가정의례준칙’은 삼베로 만든 상장을 가슴에 달도록 규정했다. 2009년 ‘건전 가정의례준칙’에도 상장 조항이 있다. 완장은 가정의례준칙에선 빠졌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박태호 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 정책실장은 “최근엔 아예 완장이 군 계급장처럼 변질됐다”며 “넉 줄 완장은 맏상주가, 석 줄은 나머지 아들들이, 두 줄은 사위가, 한 줄은 손자·형제 등이 각각 차는 게 마치 전통인 것처럼 통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장례식장의 꽃도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 26년 순종 국장 장례식 사진첩에 따르면 영좌 주변에 화환이 놓인 장면을 볼 수 있다. 서양에선 장미·카네이션·국화 따위로 만든 꽃다발이나 화환을 바치는 문화가 내려온다. 전통장례에 사용된 꽃은 수파련(水波蓮)이라고 상여에 다는 종이꽃이 전부였다. 그래서 비교적 최근까지도 거부감이 있었다고 한다. 권씨는 “70년대 안동 지역의 유림(儒林) 빈소에 지역 국회의원이 화환을 보냈는데, 어르신들이 ‘상갓집에 무슨 꽃이냐’며 짓밟은 걸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헌화나 화환 문화가 서양에서 비롯된 것이라 치더라도 요즘 장례식장에서 볼 수 있는 꽃 장식은 100% 일본식이다. 우리 전통은 영좌 뒤에 병풍을 치는 것이었다. 황 할머니의 영정 주변에 꽃을 입체적으로 배치하고 단을 높게 쌓는 스타일은 2000년대 일본 유행을 그대로 따라 했다(사진 ⑥).
이철영 을지대 교수(장례지도학)는 “영좌를 꽃으로 장식하는 건 일본 문화”라며 “80년대 일본의 상조문화가 부산에 처음 상륙했을 때 꽃 장식이 함께 유입됐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하는 장례업자는 “장례업계에선 매년 일본 전문가를 불러오거나 일본으로 건너가 최신 꽃 장식을 배운다”며 “요즘 꽃 장식이 더 화려해지고 있는데, 이 역시 일본을 따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삼베 수의가 황 할머니 장례에 쓰였다. 삼베 수의가 전통 수의(壽衣)의 대표가 돼버린 배경에도 일제가 있다(사진 ⑤). 우리 전통은 수의는 생전 입던 옷 가운데 가장 좋은 걸로 마련하는 거였다.
그래서 묘 이장(移葬) 과정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수의를 보면 화려하다. 대개 비단이나 명주로 만들어졌다. 부모를 여읜 자식이 ‘나는 죄인’이라는 뜻으로 삼베 상복을 입었다. 박성실 단국대 명예교수(의상학)는 “조선의 일부 극빈층이 삼베 수의를 썼을 수도 있지만 현재 발굴된 건 없다”며 “수의가 생전에 입던 옷이라 목덜미나 소매에 때가 탄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일제는 34년 의례준칙과 더불어 펴낸 『조선총독부 제정의 의례준칙과 그 해설의 상례』에서 “수의는 포목 등을 쓰고, 비단 등 값비싼 걸 사용하지 말라”고 썼다. 42년 ‘조선잠사통제령’을 내려 조선에서 생산된 누에고치의 일정량을 일제에 강제로 판매하도록 했다.
김 과장은 “일제가 만주사변·중일전쟁·2차대전 등 전쟁에 동원할 자원과 물자를 약탈해 가면서 조선의 경제사정은 궁핍해졌다. 그러면서 좀 더 구하기 쉬운 삼베 수의가 보급된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 실장은 “76년 대마관리법이 만들어진 뒤 삼베 값이 크게 오르면서 장례업계가 ‘삼베 수의가 고급’이라는 인식을 퍼뜨렸다”고 말했다.
하이패밀리 등 일부 시민단체는 평상복을 수의로 쓰자는 캠페인을 벌였지만 아직 큰 반향은 없다. 모시 수의를 쓰면 자손의 머리가 희어지고, 명주 수의는 시신이 잘 썩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다.
결국 황 할머니 빈소의 상장과 완장, 꽃장식, 삼베 수의는 일본 식민통치의 산물인 셈이다. 이 교수는 “국적 불명의 의례가 우리 전통으로 잘못 알려졌다. ”고 말했다.
김 과장은 “조선시대 예송논쟁으로 정권이 교체될 정도로 의례문화가 발전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이 변질된 사실조차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 실장은 “90년대 장례가 하나의 산업으로 변하면서 장례 비용이 갑작스럽게 증가했다”고 말했다.
글=이철재·곽재민 기자 seajay@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헌화는 기독교식 … 전통 장례에선 분향1982년 12월 20일자 한 신문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잠실 아파트에 사는 정모(42)씨는 어머니로부터 ‘나 죽으면 곤돌라로 관 내릴 거냐’는 걱정을 들었다. 그는 아파트에서 곡(哭)을 하면 이웃집에 항의를 살까 염려도 한다.” 2015년 현실에서 보면 정씨의 걱정은 기우(杞憂)다. 전통적인 관혼상제 행사는 집에서 이뤄졌지만 오늘날엔 전문 식장에서 치러지기 때문이다. 석전대제 예능 보유자 권오흥씨는 “예는 변하지 않지만 의례는 시속(時俗)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장례문화엔 헌화 전통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식 장례의 경우 분향 대신 헌화가 관례가 됐다. 김시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꽃봉오리는 고인의 영정 쪽으로 향하는 게 우리 예법에 맞다”고 말했다.
2013년 화장률이 76.9%를 넘어서면서 분골을 자연에 모시는 자연장이 인기를 끌게 됐다. 요즘 자연장지를 보면 ‘고(故) OOO’라는 명패를 볼 수 있다. 전통에 따르면 고인의 시신을 갈무리한 곳에선 ‘고’를 쓰지 않는다.
박태호 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 정책실장은 “아직까지 화장에 적합한 의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화장장은 의례가 실종된 ‘시체 소각소’ 역할만 한다”며 표준 화장 의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