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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복음 8,22-26
오늘 눈먼이의 치유 이야기는 좀 특별합니다.
일반적으로 치유를 받은 이에 대한 서술은 아주 간략한데 비해 오늘 치유시키시는 과정에 대한 서술은 상세해서 다른 복음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일까요?
앞서 연이은 기적을 목격하고서도 바리사이들은 다시 표징을 요구하고(월요일 복음),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가까이에서 가장 강열하게 목격하고 참여한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8,18)고
꾸중을 듣는 장면을 어제 화요일 복음에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눈뜨는 치유의 상세한 묘사는 신앙의 여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이해됩니다. 곧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조금씩 눈뜨도록 이끄시고 계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른 복음서에서도 믿음이 없는 이들을 눈이 멀었다고 표현하고 있지요.
(요한 9장을 한번 읽어 보시길!)
여기서 자문해 보면 어떨까요?
영적으로 눈을 뜨고 사는지 아니면 이 세상을 바라보느라 또 세상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느님 이루시는 일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아닌지ᆢ
신앙은 한걸음씩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이 닿도록 다가가는 시간이며 그분께서 나의 두 눈에 손을 얹어 주시길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미 우리가운데 와있는 하느님나라를 보는 눈을 뜨게 해주십사 청해볼까요?
(천 사비나 수녀님)
2월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마르코 8,22-26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이 나의 시력을 결정한다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을 때 라이언 긱스라는 전설적인 공격수가 있었습니다.
전성기 때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선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박지성 선수도 한국 대표팀에 한 명만 데려오라면 누구를 데려오고 싶으냐는 질문에 라이언 긱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긱스는 월드컵에서 뛰는 것을 한 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조국 웨일스가 월드컵 예선을 단 한 번도 통과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아무리 혼자 잘 해도 나머지 10명의 평균을 넘을 수 없습니다.
오는 복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해주시는 사건과 장소의 이동이 겹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눈의 치유와 소경이 머무는 장소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도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바로 볼 수 있고, 또 시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선택하여 속한 가톨릭교회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로 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를 먹어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그들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십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곧 생명나무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람을 나무로 볼 수 없다면 성탄트리를 보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경의 첫 번째 눈을 띄워주시는 것은 바로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힘이 필요한데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는 행위나 그에게 안수하시는 행위가 다 성령을 주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자 그는 눈이 밝아져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어보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에 이 생명나무를 성탄트리로 장식하며 우리가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졌음을 입증합니다.
예로부터 성탄트리 맨 위에 별을 달아 다윗의 별인 그리스도를 상징했고, 불을 밝혀 빛으로 오신 예수님임을 보여주었으며, 둥그런 밀떡을 달아 이 나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죄의 동네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공동체에 속하던 그 속한 사람은 그 공동체의 시력을 물려받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개신교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면 성탄트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성체와 성혈로 볼 수 있을까요?
그 공동체는 성체성혈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가졌던 믿음의 눈을 다시 잃게 됩니다.
그 영적인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믿음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에는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막에 어떻게 수령이 2,3천년쯤 되며, 높이가 100m를 넘고 둘레도 8-9m나 되는 큰 참나무 숲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이 덩치 큰 나무들이 깊이 뿌리를 박고 그 뿌리로 다른 나무들과 서로서로를 연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동체란 이와 같습니다.
서로서로 연결되어 그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각자의 믿음이 있습니다.
혼자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그 공동체를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 머물면 그 공동체의 평균정도는 자랄 수 있습니다.
한 오케스트라에 속해있으며 혼자 다른 곡을 연주할 수는 없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하면 다른 믿음엔 다다를 수 없습니다.
각 공동체가 제공하는 시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벗어난다는 뜻과 같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 내가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결국 나의 영적인 시력을 결정함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눈의 치유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변화를 함께 이끄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8,22-26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다가오는 사순시기, 예수님께서 몸소 겪으셨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신비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으로 우리를 안내할 따끈따끈한 영적 독서책이 막 도착했습니다.
제목이 특별합니다.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로널드 롤 하이저 著, 생활성서)입니다.
로널드 롤 하이저 신부님은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 소속이시며 헨리 나우웬 신부님 이후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 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영성가이십니다.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저자의 성숙하고도 친절한 안내가 돋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고통을 면제하시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고통을 면제해주시지 않는답니다.
너무나 신박한 표현들 앞에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려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일이 벌어진 후에 굴욕,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병에 대한 면역을 만들어 주시고 죽음을 피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고통을 감내할 힘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다른 모든 이가 겪는 굴욕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똑같이 겪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은 구조하시는 하느님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부끄럽게도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인류 구원 사업의 정점인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는 고통스런 여정은 생략하고 싶습니다.
그저 현세의 지속적인 축복과 끝도 없는 치유, 나와 내 가족만의 안녕만을 갈구하는 미성숙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사회 현실은 외면한 채 고상함과 경건함, 신비함과 달콤함만을 추구하는 ‘값싼 신앙’의 천박한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는 외면하고, 승승장구와 만수무강만 추구하는 싸구려 신앙을
거부해야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 없는 구원은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분위기나 가르침은 조금 밋밋해보입니다.
가톨릭 교리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상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이성적이고 평범한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단박에 뒤집힐 것이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 눈앞에 신천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사기 치지 않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끔찍한 병고 즉시 치유시켜 주겠노라고 과장하지 않습니다.
목돈을 갖고 오라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가톨릭교회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자고 초대합니다.
기도 속에 주님의 뜻을 찾아보자고 안내합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현실,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가르칩니다.
천천히 가자고,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자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십니다.
그 과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를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십니다.
세상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접촉과 함께 그의 장애를 풀어주십니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십니다.
그의 머리 위에 손을 펼쳐 안수를 해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등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치유받은 사람입장에서 묵상해보니 얼마나 은혜롭고 축복된 순간이었는지.
놀랍게도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일인데, 그분께서 내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가는 길에 이것 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이름이 뭐냐? 어디 사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그간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예수님의 따뜻함과 자상함에 그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과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 이미 그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깨달았고, 치유 받았습니다. 구원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육체의 치유는 사실 덤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수요일 강론>
(2025. 2. 19. 수)(마르 8,22-26)
<되돌아가지 말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22-26).”
1)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한 번에 고쳐 주시지 않고 단계적으로 고쳐 주신 것은, 우리의 신앙이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눈먼 이를 고쳐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마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 마을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는 말은, ‘안수’를 해 달라고(고쳐 달라고) 청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병자나 장애자든지 간에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또는 예수님께서 손을 대기만 하시면, 다 낫게 된다는 소문을(마르 6,56)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이고, 보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동작으로 고쳐 주신 것은, 믿음이 없는 그에게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한 배려라고 해석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라는 말씀은, ‘보는 일’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고쳐 주시는 것까지만 해 주시고, 보는 것은 각자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보여 주시고,
그 길로 인도해 주시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마라.”, 즉 “이제부터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이고,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입니다.
<그가 죄 속에서 살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고, 모르고 있었으니까 안 믿고 있었고, 복음을 들을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1-24).”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예수님을 만나서 ‘새 인생’을 살게 되는 일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례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서 아무것도 안 하면,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생명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멈추어 서는 것은 사실상 뒤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걸레는 빨아도 걸레다.” 같은 말을 하지만, “예수님은 걸레를 깨끗이 빨아서 새 옷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걸레’로 되돌아갈지, ‘새 옷’으로 살아갈지,
그것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3) 복음서의 다른 이야기들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와 비슷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0-11)”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요한 8,4)
예수님께서는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자를 용서하시긴 했는데, 그 용서는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입니다.
만일에 그 여자가 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때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있는 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4-16).”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박해자들에게 예수님을 신고했습니다.
그것은 받은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입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