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사평론 - 정론직필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정론직필
김영사의 박은주 사장에 대한 화제로 떠들썩한 모양이군요.
젊은 시절 김영사의 박은주씨를 정론직필도 젊은 시절인 80년대 중반에 우연히
얼핏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김영사가 무섭게 성장하길래
상당히 놀랐지요.
암튼, 85년도이던가...80년대 중반에 정론직필이 본 박은주씨는
비교적 미모도 있고, 상당히 스마트한 여성으로 느껴졌었습니다.
그런 여성이.....어떤 교주에 사로잡혀
황당한 인생을 살았다니.....참으로 황당하고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어느 젊은 여성도 늙은 어느 목사에 사로잡혀
이상한 인생을 산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얼핏 스마트해 보이는 여성들이 도대체 왜
그토록 쉽게 이상한 것들에 현혹되는 것인지?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놀랍다기 보다는...엽기 개그라는 생각이 듭니다.
'출판 여왕' 충격 폭로 "나는 노예였다"
MBN | 입력2015.07.27. 19:40 | 수정2015.07.27. 20:21
박은주 전 김영사 사장은 '출판계의 여왕'으로 통했는데요.
박 전 사장은 재직 당시 노예 같은 생활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영사 직원들의 얘기는 조금 다릅니다.
박은주 전 사장은 32살부터 25년간 김영사 사장을 맡아 승승장구하며 출판 여왕으로 불렸습니다.
박 전 사장은 김강유 현 김영사 대표이사 회장에게 '금강경'을 배우게 된 것을 인연으로 스승과 제자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 인터뷰 : 김영사 전 직원
- "사장님이 (회장님) 대하는 것 보면은 거의 사제지간? 완전히 그런 복종적인 관계? 그렇게 보였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나 박은주 전 사장은 지난해 5월 직위를 내려놓고 돌연 잠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 전 사장과 김 회장과의 갈등설이 불거졌습니다.
박 전 사장은 최근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20년간 번 돈 28억 원을 모두 바쳤고 매달 20만 원의 용돈만 받았다"며 "지난해에는 김영사 지분 등 자산 포기 각서에 서명을 강요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영사 측의 얘기는 다릅니다.
▶ 인터뷰 : 김영사 관계자
- "상황의 본질은 이게 박은주 사장님이 작년에 사퇴하셨는데 불의한 방법으로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어요. 그렇게 (손해를) 끼쳐서 감사를 받고 있었어요."
김영사는 박 전 사장을 고소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지만, 스승과 제자의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됐습니다.
이 기사 주소 http://media.daum.net/v/20150727194305548
-----------------
김영사, 박은주 전 사장…출판여왕이 폭로전 펼치기까지
기사입력: 2015/07/27 [17:53] 최종편집: ⓒ CBC미디어
박은주 전 사장은 1979년 공채로 평화출판사에 입사했다. 박은주 김영사 전 사장은 규모가 작은 평화출판사에서 출판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 그렇게 3년을 지내고 나니 출판계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여기저기에서 오르내렸다.
1982년 김영사 창업주인 김강유 회장(당시 이름은 김정섭)이 박은주 전 사장에게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그로써 김강유 회장과 박은주 전 사장의 인연이 시작됐다. 김강유 회장의 영향으로 박은주 전 사장은 1984년부터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고, 새벽에 108배를 하는 것을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89년 1월 만 31세였던 박은주 전 사장은 김강유 회장이 불쑥 건넨 김영사 사장 자리에 앉게 된다. 김강유 회장은 신년식에서 "오늘부터 박은주 주간이 사장이다"라는 말로 박은주 전 사장에게 자리를 넘겨준 것.
그때부터 박은주의 김영사가 시작됐다.
박은주 김영사 전 사장은 취임 첫해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펴냈고 이 책은 한국 최초 밀리언셀러이자 최단기간 최다판매라는 기록도 세웠다. 뒤이어 내놓은 책들도 줄줄이 대박행진을 이어가면서 박은주 김영사 전 사장 앞에는 '마이다스의 손'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박은주 김영사 전 사장이 책을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은가'다. 그렇게 박은주 전 사장은 자신의 감, 노력, 연구 등으로 김영사에서 내놓은 3000여 권이 넘는 책 중에 1000여 권 이상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식객', '만들어진 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1200만 부 넘게 팔린 '먼나라 이웃나라' 역시 김영사에서 나온 책들이다. 그리고 정점을 찍은 게 바로 2010년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정의란 무엇인가'다.
2010년 6‧2 지방선거 직전 발간된 '정의란 무엇인가'는 2000년대 이후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최초의 인문학 책이 됐으며, 7월 이후부터 부동의 베스트셀러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이 책은 많은 명사에 의해 인용됐으며 20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필독서로 자리매김 했다.
http://www.cbci.co.kr/sub_read.html?uid=243331
------------------
나는 수도자의 길을 걸어간 전(前) 사장의 작품_박은주(김영사 대표)
박은주(55) 사장이 이끄는 국내 대표적 단행본 출판사 김영사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다.
최근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학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외에 숱한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는 출판사임에도 “회사의 오너(owner)가 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토착 종교인이라는 소문도, 심지어 사이비 교주가 뒷돈을 댄다는 소문도 있다.
아침 7시 회사에 나오자마자 단체로 사무실 청소하고 ‘교주가 개발한’ 체조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싫으면 당연히 퇴사조치되며, ‘출판 사관학교’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이·전직(離·轉職)이 많은 게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Q.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김영사 지분 구조는 어떻습니까?
“제가 4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1대주주이고, 전(前) 사장님이 2대주주, 그리고 직원들의 지분들로 나누어 있는 구조이지요.”
Q. 소문과 관련해서, 어떤 종교지요? ‘대순진리회’라는 설도 있고, 마치 전지현이나 고소영처럼 신비주의 전략을 쓰는 분이 교주라는 ‘썰(說)’들이 있던데요?
“하하. 아마도 전 사장님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그런 말들이 나온 모양이네요.”
Q. ‘그분’이 박 대표님의 멘토인가 보죠?
“맞아요. 제 멘토는 그 한 분이에요.”
Q. 박 대표님이 김영사에 합류하던 때 사장이었던 분이지요?
“그렇습니다. 김영사는 1976년에 무역대리점으로 시작한 회사예요. 이름은 창업주의 성인 ‘김(Gimm)’과 젊다는 뜻의 ‘영(Young)’을 합쳐서 지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첨단과학 기자재를 국내의 연구소 또는 대학 등에 중개하던 회사였어요. 1983년에 일반 단행본 출판업을 시작하면서, 편집장으로 입사하게 되었어요.”
Q. 안정된 직장에 재직중이었는데, 뭘 믿고 신생 출판사로 옮기셨나요?
“번역자분과의 점심식사 자리에서 처음 김정섭 사장님을 뵈었죠. 짧게 자른 머리에 맑고 밝게 생긴, 수도자의 풍모를 가진 분이셨어요. 인품이 높은 분이라는 첫인상을 받았는데, ‘같이 출판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 그러시길래 두말없이 그러겠다고 했지요. 저런 훌륭한 분을 사장님으로 모시고 일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지요.”
Q. 마치 영화에 나오는 ‘운명 같은 만남’ 분위기를 풍깁니다.
“세상일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겠지요. 회사 출근해서 아침에 업무 보고하러 들어가서는 업무보고를 간략히 끝내자마자, 제가 풀지 못한 철학과제들을 사장님께 쏟아놓았어요. 그러면 귀찮다 하지 않고 하나하나 정성껏 답변을 해주셔서 보람 있는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어요. ‘사람은 왜 사나요?’, ‘내세는 있나요?’, ‘우주에 끝은 있나요?’, ‘윤회(輪回)를 믿나요?’ 등등 물음에는 끝이 없었고, 거의 6개월 문답 시간이 지났던 것 같아요. 그분의 답변을 들으면서 눈이 훤히 뜨이는 느낌을 받았어요.”
백성욱 전(前) 동국대 총장 밑에서 10년 수행
Q. 김정섭 사장의 프로필을 얘기해주세요.
“그분은 광주일고, 성균관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진학하셨어요. 거기서 당시 도인(道人)으로 명망이 높은 백성욱(白性郁·1897~1981) 박사를 학교 친구들과 찾아가 뵙고 법문을 들으면서 일생의 방향이 바뀌었지요.”
Q. 백성욱 박사요?
“동국대 총장도 지내신 당대의 불교학 석학이셨지요. 1925년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딴 학자이면서 이승만 정권에서 내무부 장관도 역임하셨지요. 당시 백 박사가 부천 소사 농장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계셨는데, 김 사장이 백 박사와의 만남에서 ‘아, 내가 학교에서 불교 공부를 따로 안 해도 되겠구나, 이분이 하라는 대로 따라서 공부하면 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겠구나’ 생각을 하고는, 그날 이후로 아예 집에도 가지 않고 수행을 했다는 거예요.”
Q. 오, 마이 갓! 역시 평범한 분은 아니군요.
“전남 고흥에서 부모님들이 농사를 짓고 계셨는데, 아드님이 갑자기 증발해버리셨으니 놀라기도 하고 화도 나서, 식구들이 상경해 데려가려 울고불고 떼를 썼지만 요지부동이었다고 합니다.”
Q. 기껏 서울로 유학 보냈다가 아들 하나 잃어버린 셈이네요.
“그렇지요. 얼마나 섭섭했겠어요.”
Q. 그래, 수행은 ‘쎄게’ 하셨답니까?
“소사 농장에서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을 했는데, 백성욱 박사의 가르침이 뭐냐면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어라, 가 전부였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 된다. 그분 밑에서 10년을 함께했다고 들었습니다.”
Q. 10년이요? 제가 그쪽을 잘 몰라서 묻는데 불경 중에서 금강경이 제일 중요합니까?
“우리나라 조계종의 교과서와 같은 경전이 금강경이니까, 중요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지요.”
Q. 아 그렇습니까? 누가 쓴 거예요?
“2,500년 전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이 모여 생전에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셨던 내용들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래서 모든 불경이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합니다. 저도 김 사장님의 감화를 받아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기 시작했고, 1984년 이후 지금까지 28년째 읽어오고 있습니다.”
Q. 하루도 안 빠뜨리고 금강경을 읽으셨나요?
“거의 그렇습니다. 출장 중이나 아주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요. 오히려 하루 두 번 이상 밤새워 읽은 적도 많았어요.”
이쯤 되면 기자 같은 평범한 사람은 공포심 비슷한 걸 느낀다. 영어단어 공부도 아니고, 삼시 세끼 챙겨 먹듯 그 딱딱한 경전을 30년 가까이 읽어오고 있다? 일찍이 박은주 대표가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럴 정도로 초인(超人)적 면모가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Q. 그 두꺼운 걸 매일 읽어요?
“하하, 두껍지 않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다 읽는데 28분밖에 걸리지 않아요. (책상 위에서 김영사에서 발간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을 꺼내 온 뒤) 저는 금강경의 여러 판본 중 구라마즙(鳩摩羅什) 삼장법사의 경전을 읽습니다. 백 박사가 돌아가신 뒤 김 사장님을 비롯한 제자분들 이 전국으로 흩어져 ‘금강경독송회(金剛經讀誦會)’ 등을 만들어 그의 유지를 잇고 있지요.”
박 대표가 김영사 대표 직위에 오른 건 놀랍게도 만 32세인 1989년이었다. 김정섭 사장은 출판사 운영을 박 대표에게 맡기고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아예 시골로 내려가 이후 불교 공부만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오래 전에 《행복한 마음》을 냈고, 2008년에 《행복한 공부》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Q. 자, 이제 오리엔테이션이 끝났으니(웃음) 본격적인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박은주 사장님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김정섭 전 사장님이 멘토인 거지요? 뭐, 마음의 위안을 준 겁니까?
“무엇보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가 지침이 되어주었고, 저로 하여금 ‘마음공부 길’로 이끌어주신 분이에요.”
Q. 수학을 전공, 철학을 부전공하셨다지요? 이과에서 문과 부전공이 가능했나요?
“당시 이화여대에선 계열이 달라도 원하면 어떤 부전공이라도 할 수 있었어요.”
Q. 대학생 때도 종교가 있으셨나요?
“네, 불교였어요. 부모님의 영향 때문이죠.”
Q. 조계종?
“네, 저의 부모님은 집 가까운 절에 다니시면서 기도하고, 스님 법문 듣고….”
Q. 평소에 경전 한번 안 읽으시다가.
“하하. 경전 공부하러 절에 가신다기 보다는 주로 소원을 빌러 다니시는 분….”
Q. 댁에 염주도 없죠?(웃음)
“절에 가서 절을 하려면 염주가 필요하니, 스님께서 주시기도 하고, 사기도 하니, 집안에 염주가 두세 개 없을 수가 없지요. 한국 불교는 ‘마음으로 하는 마음대로 불교’라고나 할지…? 하하”
Q. 그 당시 젊은 분이 특히 여성분이 가톨릭이나 기독교도 아니고 불교 쪽으로 이렇게 심성을 갖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아무리 부모님의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불교 공부에 심취하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박 대표님 자체가 삶의 근본적인 것에 대한 어떤 의문,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 걸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근원적인, 즉 래디컬(radical)한 질문을 좀 많이 갖고 사시는 타입이신 듯하네요.
“중학교 2학년 때《데미안》을 읽은 뒤 제 삶의 목표가 정해졌어요. 자아완성!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변함이 없어요. 그러니 젊은 날 좋은 책 한 권을 읽는 것이 한 사람의 일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Q. 그런데 어떻게 평화출판사를 들어가게 되셨어요? 가톨릭 계통인데..
“평화출판사가 가톨릭이던가요? 저는 대학 때 불교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자꾸만 커져가 졸업 후 동국대 불교대학원으로 진학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학부 전공이 수학이어서 대학원에 바로 진학이 안 된다고 그러기에, 3학년으로 편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을 하다가 몇 곳 공채가 있어서 응시를 했는데, 평화출판사에서 가장 먼저 연락을 받았어요. 출판사가 무엇 하는 곳인지 정확히 모르고 입사하게 된 거지요.”
Q. 실례지만 박 대표님 형제자매가 어떻게 되십니까?
“3남 2녀 중 장녀예요.”
Q. 서울에서 나고 자라신 거죠?
“아니요. 저희 아버지는 군인이셨는데, 당시 근무지가 강원도여서 대성산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홍릉으로 전근가시면서 초등학교부터는 서울에서 다녔어요.”
Q. 김 전 대표와의 대화 내용을 좀 구체적으로 전해주시죠.
“당시 신문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기사를 읽고 어릴 때부터 타고나는 능력들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 물었지요.”
Q.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시던가요?
“‘전생(前生)으로부터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럼 또 궁금해지지요. ‘전생이 정말 있는 것인가?’, ‘사람은 윤회를 하는가?’,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내세는 존재하는가?’….”
Q. 저도 많이 궁금해요.
“죽음 후의 삶은 어떻게 되나 궁금하지 않나요?”
Q. 그건 저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는 궁금했어요. 죽으면 정말 ‘나’라고 하는 존재는 완전 소멸되고 없어지는 것인가, 정말 끝인가? 그런 종류의 질문들을 많이 했어요. 전 사장님께. 그런 것들을 물어볼 사람이 있고, 시원하게 답변을 해 줄 수 있는 분이 가까이 계시니 정말 좋더군요. 하루하루 신나게 지냈어요.”
Q. ‘몸이 신체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았을 때 끝입니까?’에 대해서 김 선생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Q. 그러면 육신이 살아 있던 시기를 영혼은 기억합니까? 아니면, 그건 또 별개 문제인가요.
“아뇨, 영혼은 우리가 살아 있었을 때의 일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어요.”
Q. 불멸이라는 얘긴가요?
“불멸이죠. 우리 육신은 마치 낡은 옷 벗듯이 사라지더라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죠. 우리 영혼은 영원 이전부터 존재해 왔고 영혼 후까지도 존재합니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다시 잠깐 공포에 사로잡혔다. 진나라 시황(始皇)이 불로초를 찾아다녔다지만, 내 일가친척·친구·자식까지 다 죽어 사라진 마당에 혼자 살아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가? 골디 혼, 브루스 윌리스, 메릴 스트립, 이사벨라 로셀리니 등 초호화판 캐스팅의 〈죽어야 사는 여자〉(Death Becomes Her·1992)라는 할리우드 영화도 있잖았던가?
Q. 그러면 아주 유치한 질문이지만 만약 내세에 또 다른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러면 원래 저의 영혼이었던 사람은 그 인간으로 들어가나요? 아니면 또 다른 영혼이 생기는 건가요?
“그러니까 제가 박은주로 살았던 삶은 그대로, 영계(靈界)에 존재하고요. 영혼은 몸을 바꿔서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휴, 아무래도 이쯤에서 방향을 바꿔야겠다. 무슨 ‘영혼 특집’ 인터뷰는 아니니까.
나는 ‘부하직원 공경한 CEO’ 소리 듣고 싶다
Q. 질문을 좀 바꾸지요. 제가 김영사 박은주 대표를 찾아왔을 때는 ‘인간 박은주’도 관심이 있지만 당연히 김영사라는 훌륭한 출판사를 키워낸 CEO로서의 박은주에도 방점이 있는 거지요. 그런데 박 대표님이 나의 멘토는 김 전 사장님이다, 할 때 지금까지 나온 답변은 인간 박은주의 정신세계를 이끌어 준 분으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경영자 박은주 또는 출판인 박은주로서의 방향성,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영향을 주신 게 없는 건지요.
“그분이 사장으로 계실 때 일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도 저분처럼 밝고 지혜로운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어요. 1989년 1월 4일, 시무식에서 전 직원들, 그래봐야 10명 남짓이었지만(웃음), 직원들을 모아놓고 ‘오늘부터 이 사람이 사장이다. 여러분들이 나에게 했듯이 똑같은 공경심으로 새 사장을 모시고 일하도록 하라’라고 선언하신 거예요. 그러고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셨어요.”
Q. 사전에 언질을 받으셨어요?
“전혀 없었어요.”
Q. 이야~ 이거 웬 정말.(웃음)
“그분은 말이 없는 분이세요. 하루 종일 필요한 말만 하시고, 물어야지만 대답하는 분.”
Q. 깜짝 놀라셨겠네요?
“물론, 그 이전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어요. 제 기억에는 3번 정도 얘기하신 거 같아요.”
Q. 사장하라고?
“아니요. 나는 비즈니스에 관심이 없으니 여러분들한테 회사를 물려주겠다는 얘기를. 근데 그런 말이 마음에 와닿나요? 현실감이 없는 얘기잖아요. 수행하는 분으로서 자신의 소신을 얘기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지요. 그게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지요. 전 사장님에게서 일을 잘한다거나 사장감이라거나 모든 일을 맡길 만한 능력이 있다거나 하는 칭찬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Q. 그 비슷한 내색도 안 비쳤고?
“내색이 안 드러나지요. 얼굴에 희비(喜悲)가 그려지지 않는 무심한 얼굴을 가지신 분이세요.”
Q. 편집주간 시절이었지요?
“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사람을 어떻게 믿고 그런 중책을 주셨을까, 참 신기하고, 진심으로 감사하기도 해요.”
Q. 그야말로 폭탄선언을 한 거구나.(웃음)
“네, 폭탄선언이었는데 내심으로는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어요.”
Q. 올 것이 왔구나?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못하겠다거나, 두렵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열심히 잘 해서 그 은혜에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6년 사장님을 모시면서 출판의 전 과정을 공부하는 시간을 거쳤고 그분의 일하는 스타일을 익혔기에 못할 것도 없었지요. 그래서 그분이 근무하던 책상을 그대로 물려받아 그 책상, 그 자리에서 업무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전 사장님은 바로 집으로 들어가셨어요.”
Q. 속세를 떠나셨구만.(웃음)
“그분은 더 공부하려 시골로 들어가신다고 하셨어요.”
Q. 그때는 사무실이 어디였습니까?
“가회동.”
Q. 캬~. 저는 이 나이에 아직 차장인데.(웃음) 다시 아까 질문으로 돌아가서 CEO 김정섭은 어떤 분이었어요. 아니면 그런 개념 자체가 성립하는 게 불가능합니까?
“현자와 같은 분이었어요.”
Q. (개콘 식으로 표현하자면, 다분히 ‘빈정 상해서’) 현자가 경영을 할 수 있습니까?
“(웃으면서) 지혜로운 분이니 경영의 도를 더 잘 알죠.”
Q. (더욱 빈정 상해서) 예를 좀 들어주세요.
“(이 어리석은 자야, 좀 들어보거라 하는 표정으로) 표지 문안이나 광고 문안을 만들 때 과대 포장을 하지 마라, 본래 내용에 충실하게 써라. 일에 대한 욕심을 내거나 성과에 대해 연연해하면 과욕부리지 마라, 급하게 서두르지 마라 등 주옥같은 말씀들을 많이 해 주셨어요.
Q. 진짜? 주로 어느 분야의 책을 내셨는데요? 박 대표님 취임하기 전에는.
“불교, 뉴에이지 분야의 책들.”
Q. 아, 첨단으로, 뉴에이지로 갔군요.
“아마 김영사가 우리나라에서 뉴에이지 책들을 처음으로 소개한 출판사들 중의 하나일 거예요. 구르지에프,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 람다스 등…. 그리고 정말 좋은 불교 책들도 많이 펴냈고.”
Q. 몰랐죠. (사장 집무실을 가리키며) 여기 어디 한쪽 코너에 박물관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걸 만들어놓으셔야지.
“안 그래도 파주 본사에 이전에 김영사에서 출간한 도서들을 전시할 예정이에요.”
Q. 저도 한때 크리슈나무르티에 빠졌지요. 김영사 판매고에 저도 일익을 했겠네요.(웃음) 김 전 사장님이 그때 기준으로 대박을 친 게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잔잔한 책들을.
“잔잔한 책들. 그분은 그런 뜻있는 책을 출간하는 데 더 의미를 두셨지요. 대박치는 책들보다는. 제가 지금 느긋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분 덕분입니다.”
Q. 좋은 말씀이네요.
“제 영혼의 양식 같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이후로 회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지침이 되었습니다.”
Q. 혹시 사장은 직원을 대할 때 이러는 게 좋다, 그런 류 쪽은 얘기하신 게 없나요.
“제가 그분께 배운 것은 ‘공경심’이에요. 직원들을 공경하고, 거래처를 공경하고, 독자를 공경하고… 언행일치를 통해 실천하는 분이니까, 정말 많은 것들을 곁에서 직접 보고 배웠습니다.”
Q. 말없이도 그냥 배운 거군요. 어떤 건가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실행이 중요한 것이지요. 행(行)은 말없는 가운데 사람의 마음을 이끌고 가는 힘이 있어요. 말로 가르쳐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깨우쳐서 따라오게 하는 것.”
Q. (기자의 직장 상사들을 떠올리며) 아, 좋네. 부럽네요.
“그런 분 밑에서 제 자신을 단련시켜 왔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Q. 반말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겠네요. 아닌가요. 말투는 상관없나요?
“반말이라고 공경 안 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나라 언어 체계상 나이 어린 사람이나 서열이 낮은 사람에게는 반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거지요. 그래서 전 사장님도 제게는 반말을 하시고, 미스 박이라고도 부르셨어요.”
Q. 박 대표, 이런 거 없군요. 그냥 미스 박이군요.
“제가 사장 초기에 개선한 것 중의 하나가 회사 내에서 남녀, 직급 고하간에 존댓말을 쓰자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
Q. 오케이. 상호 공대(恭待)한다.
“그리고 미스 리, 미스터 김 안 쓰기로 했지요. 직급 있는 사람은 모두 직급을 붙여서 부르고, 직급 없는 사람은 이름에 씨자를 붙여서 부르도록 했습니다. 나이 어린 여직원에게도.”
Q. 정말 잘하신 거예요.
“네. 제가 그런 걸 개선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랫사람으로 있어봐야 아랫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이지요.(웃음) 그분이 사장인 시절에는 당시의 관행대로 지내다가 사장이 되고 나면서부터 개선하고 싶은 부분들을 열심히 개선해갔어요.”
직장은 원래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억압적인 거다. 김영사가 사이비 종교 집단의 돈을 끌어 쓴다는 둥, 준(準) 사교인(邪敎人) 단체라는 둥의 뜬소문은 역시 예상대로 다 헛소리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박 대표는 기자를 위해 앞서 말한 ‘금강반야바라밀경’ 한 권을 건네주었다. 검은 색 표지에 금색 글자를 심은 아름다운 책이었다.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무릇 모든 형상 있는 것은 본디 다 허망한 것이니라. 만일 모든 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님을 본다면, 즉시 여래를 볼 것이니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나무아미타불.
http://blog.daum.net/marinekt/925
====================
‘잠적’ 박은주, ‘김영사 미스터리’ 폭로…법정 공방 예고
“20년간 법당서 합숙 28억 바쳐”…김강유 “돈 바치라 강요 안 해”
승인 2015.07.27 16:41:45
수정 2015.07.27 16:53:40
박 전 사장은 지난 26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영사에 들어간 직후인 1984년부터 2003년까지 20년 동안 부모님도 버리고 법당에서 숙식을 하며 출퇴근했다”고 밝히면서 “그 20년 동안 월급, 보너스, 주식배당금 전액 등 총 28억 원을 김강유(현 김영사 대표이사 회장)교주에게 바쳤다”고 주장했다.
박 전 사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2014년 5월 김영사 사장직과 500개 회원사로 구성된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직을 중도 사퇴하고 돌연 잠적한 뒤 1년 2월 만이다.
박은주 전 사장은 김강유 회장과의 만남에 대해 “처음부터 스승과 제자 관계로 만났다”면서 “법당에서는 그를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떠받들었다. 그에게 삼배를 해야 했고, 그의 말을 들으려면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고 들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김강유 회장은 김영사 설립자이자 실소유주다. 김 회장은 지난 1983년 김영사를 세운 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박 전 사장에게 지분과 경영권을 물려주고 자신은 종교 수행에 전념한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515
-------------------
"20년간 法堂서 숙식.. 그때 번 28억 모두 바쳤다"
'출판 女王' 박은주 前 김영사 사장, 잠적 1년 2개월 만에 '김영사 미스터리' 폭로
朴 前사장, 김강유 김영사 회장을 350억 배임·횡령 고소
"1984년부터 20년간 용돈 20만원으로 생활..
회사일 손뗐다던 '敎主', 형 회사 불법지원 강요
재산포기·횡령 각서 들이대며 나에게 서명하라고 협박"
조선일보 | 어수웅 기자 | 입력2015.07.27. 03:00 | 수정2015.07.27. 14:47
☞박은주 사장
32세에 김영사 사장으로 발탁된 뒤 승승장구하며 '출판계의 미다스의 손' '출판 여왕' 등으로 불렸다. 25년간 사장을 했고, '닥터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먼나라 이웃나라' 등 수많은 밀리언셀러를 만들었다.
☞김영사
'정의란 무엇인가'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출판사에서 이런 송사가 벌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1983년 설립되어 지금까지 3000여종의 책을 펴냈다. 문화부 추천도서, 간행본 윤리위원회 권장도서, 이달의 읽을 만한 책 등 가장 많은 추천 도서를 가진 출판사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의문의 사퇴, 신흥 종교 관련설, 횡령 의혹, 내연남 소문 등 출판사 '김영사 미스터리'의 주인공 박은주(58) 전 김영사 사장이 26일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2014년 5월 김영사 사장직과 500개 회원사로 구성된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직을 중도 사퇴하고 언론 접촉을 끊은 뒤 1년 2개월 만의 일이다. 박 전 사장이 지난 23일 김강유(68·김정섭에서 개명) 현 김영사 대표이사 회장을 총 350억원 규모의 배임, 횡령,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사실도 이번에 처음 확인됐다.
32세부터 25년간 김영사 사장이었던 박 전 사장은 대표적인 스타 출판인. 김 회장은 1989년 그를 사장으로 임명한 김영사 대주주로, 용인에 법당(김 회장 주장은 단순한 금강경 공부 모임)이 있는 수행 단체의 리더이기도 하다. 박 전 사장은 "김영사에 들어간 직후인 1984년부터 2003년까지 20년 동안 부모님도 버리고 법당에서 숙식을 하며 출퇴근했다"면서 "그 20년 동안 월급, 보너스, 주식배당금 전액 등 내가 번 모든 돈 총 28억원을 김강유 교주에게 바쳤다"고 주장했다. 박 전 사장은 '교주'(敎主)라는 표현을 썼다.
―김 회장과 당신의 관계는.
"사제(師弟)다. 나는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진학을 꿈꿀 만큼 불교 공부에 관심이 많았다. 김 회장은 백성욱 박사(이승만 대통령 시절 내무부장관을 지낸 불교 지도자)의 제자였고, 나는 김 회장에게 '금강경'을 배웠다. 1983년 김 회장 개인 소유인 김영사의 편집장으로 입사했다. 김 회장은 내가 공부 인연이 깊은 사람이니 법당에서 수행정진하라고 했다. 그때 짐 싸들고 법당으로 들어갔고, 부모님께 보내던 월급을 모두 여기 바쳤다. 김 회장과 공동 교주인 여성 A가 나를 기도방에 앉혀놓고 '이곳은 몸과 마음과 재산 모든 것을 바치는 곳'이라고 해 그대로 따랐다."
―모든 돈을 바치면 생활은.
"용돈 20만원을 법당에서 받았다. 2003년 법당을 나올 때까지. 그곳에서 먹고 잤으니 돈 들 일도 없고."
―당신을 사장으로 임명한 사람도 김 회장 아닌가.
"내가 입사했을 때 김영사는 연매출 1억~2억원 수준의 개인 회사였다. 1989년 대우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국내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됐다. 언론의 주목을 받자 김 회장은 '박은주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나는 수행을 하러 간다'고 공표하라고 했다. 그때는 물론 고마웠다. 하지만 내가 사장을 맡은 후 출판사는 고속 성장을 했다."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박 전 사장이 법당을 나오고 '보시'를 중단한 뒤 그의 연봉은 큰 폭으로 증가한다. 1994년 8000만원, 2002년 2억 수준이었는데, 2003년에는 4억이었고, 2008년부터 2013년까지는 연 8억원을 받았다. 금융권에서도 A급 회사 CEO에게나 가능한 연봉이다.
―출판사 사장으로는 이례적인 액수다.
"2009년에는 연매출 526억, 당기순이익 166억을 달성했다. 물론 연봉이 높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를 벌었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2010년 이후 김영사 매출과 순이익은 출판계 불황, 히트작 감소 등으로 큰 폭 감소한다. 특히 2012년과 2013년은 적자를 냈다.
―적자를 낸 출판사 CEO가 연봉 8억을 받는 건 좀 과해 보이는데.
"내 연봉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주주총회에서 정한다. 2008년인가 주주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정했고, 이후에도 이의가 없었다."
―2003년 5월 법당을 나온 이유는.
"김 회장이 유부녀 B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2003년 법당이 깨졌다. 공동 교주 A와 김 회장은 법당을 팔아 절반씩 나눴고, 나는 20년 만에 법당을 나와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갈등이 시작된 계기는.
"2006년에 법당에 돌아온 김 회장은 내게 돈을 요구했다. 비자금을 만들어서 2008년부터 매월 1000만원씩 송금했다. 김 회장의 월급은 또 별도였다. 김 회장의 개인 기사 월급도 김영사에서 나갔다. 물론 김 회장은 회사에 전혀 나오지 않았다. 또 망해가는 형님 회사를 지원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블랙홀이었다. 김영사에서 그 블랙홀을 인수하라고 강요했고, 결국 그 회사에 수십억을 쏟아부었다. 손을 떼는 것이 좋겠다고 충언하자 마찰이 시작됐다."
―사장직은 왜 중도 사퇴했나.
"김 회장이 2013년 12월 나를 부르더니, 회사를 반으로 축소시키고 가회동 김영사 건물(소유 박은주) 팔자고 하더라. 출판사는 파주로 옮기자면서. 어렵겠다고 하자, '주×아리' '대×리 컸다' 등의 고함을 치며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다. 김영사는 내가 40%, 김 회장과 그의 형제자매, 신도들이 합쳐서 약 60%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주식회사다. 2014년 3월 주총에서 김 회장이 대표이사 회장이 됐고, 김 회장의 형을 감사로, 법당에서 파견한 신도 C를 부사장으로 임명했다. 새 경영진의 엄포와 협박으로 심장마비에 걸릴 지경이었다."
―김 회장 측은 당신이 200억대 횡령을 했다고 주장한다.
"김 회장에게 준 비자금과 형님 회사에 불법 지원한 게 대략 70억이다. 법인 재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꾸며서 만들고 부풀린 것이다. 하도 억울해서 10년 만에 용인의 법당을 찾아가니, 미리 만들어 두었던 김영사 주식 포기 각서와 가회동 사옥 재산 포기 각서를 꺼내며, 서명을 하라고 강요했다. 13가지 배임 횡령 리스트를 들이대며 강제 서명을 시켰다. 협박과 회유와 공갈이 반복됐다. 심지어 내게 모욕을 주기 위해 3명의 내연남까지 거론했다. 모두 터무니없는 얘기다."
―잘못이 없으면서 재산 포기 각서에 서명하고, 배임 횡령죄를 시인했다니.
"처음부터 스승과 제자 관계로 그를 만났다. 우리 법당에서는 복종을 미덕으로 한다. 불교는 옛날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를 부모 자식보다 더한 관계로 생각했다. 부모는 육신을 낳아준 사람이지만, 스승은 인간 되게 만들어준 사람이라 스승을 진짜 부모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부모를 버리고 김 회장을 따라 법당으로 들어가 20년을 산 것이다. 법당에서는 그를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떠받들었다. 그에게 삼배를 해야 했고, 그의 말을 들으려면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고 들어야 했다. 외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사퇴와 합의서 작성 후에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와서 고소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은 없나.
"김영사 경영진이 바뀌고 나서 작년 10월 3명의 직원을 208억을 횡령했다며 형사고소한 일이 있었다. 올해 4월 그 사건이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그러자 김영사 측에서 내가 그들 편을 들어줘서 그렇게 됐다며 항고하겠다고 협박 문자가 왔다. 주식, 김영사 건물, 퇴직금 등 모든 것을 포기하면 보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해서 합의서를 썼는데, 이마저도 지키지 않았다. 내가 고소했으니, 그들도 나를 이제 배임 횡령죄로 고소하겠지. 나는 고의적으로 회사 자금을 빼거나, 내 개인적으로 유용한 일이 없다. 내 과실이 나온다면 나도 법의 심판대 위에 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