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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한 싸움
딤전 6:11-16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딤전 6:11-16 / [믿음의 싸움] 오, 디모데여, 그대는 하나님의 사람이니 모든 악을 피하여 옳고 선한 일에만 힘쓰시오.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시오. 12) 믿음을 위해서 싸우시오.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을 굳게 간직하시오. 이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대를 부르셨고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13) 나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조금도 두려움 없이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명령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께서 그대에게 부여한 모든 사명을 수행하고 아무에게서도 비난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15) 그리스도께서는 복의 원천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적절한 때에 하늘에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고 만주의 주님이십니다. 16) 영원히 살아 계시는 유일한 분이며 너무도 눈이 부셔서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가까이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 보통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일이 없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영광과 영원한 능력과 주권이 영원 무궁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소서. 아멘.
바울은 디모데에게 의·경건·믿음·사랑·인내·온유를 따르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며, 영생을 붙들라고 권면합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이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피하고 따르고 싸워서 취하라(11-1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세속을 쫓아 욕망의 삶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믿음의 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은 소망하는 호칭인 듯 합니다. 사울은 이어서 네 가지 명령을 줍니다. 첫 번째 명령은 피함입니다. 거짓 교훈과 다른 복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특히 앞 단락에서도 언급했던 탐욕에 대해서도 경계했습니다. 다음으로 디모데가 따라야 할 것으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성품과 인성을 가지고 성도들을 섬길 것을 명령합니다. 이어지는 명령은 싸움입니다. 디모데가 감당할 믿음의 싸움은 밖으로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반박하고 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안으로는 내면의 정욕과 욕망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마지막 명령은 취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생을 취할 것을 명령합니다. 명령의 종착점은 영생입니다. 디모데의 신실한 사역은 자신을 영생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영생에 대해 증언하는 역할도 합니다.
엄중한 명령(13-14) 바울은 디모데에게 만물을 살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를 향해 자신이 메시야인 것을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명한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멈추지 말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나타나실 하나님(15-16) 사도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말합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수록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권자(신 6:4; 계 6:10), 만왕의 왕(계 17:14), 만주의 주(계 17:14), 죽지 아니하시는 분(시 36:9), 가까이 가지 못할 빛(시 104:2), 아무도 볼 수 없는 분(출 33:20)이십니다.
적용: 당신을 향해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불러 보세요. 이 호칭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감당해야 할 선한 싸움은 무엇입니까?
새 언약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든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주었습니다. 이 말씀이 행위로 나타날 때 주님을 만나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양심을 깨끗하게 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제로 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속죄 사역의 확실성을 시사합니다. 동물의 피가 아니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라는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과 담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설 교 >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1)(You, man of God)
딤전 6:11-12 / 이기복 목사
2012년 여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셋째 주일입니다. 우리교회는 지난 주간 여름 산상성회를 새성전에서 가져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 여름휴가도 거의 끝나가고 학교도 개학을 시작하는 새로운 계절입니다. 부흥회를 통하여 은혜 받고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였으니 오는 가을에는 영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 다시 새롭게 출발을 합시다.
우리는 사람을 지칭할 때 그 사람이 어디에 소속되었느냐에 따라 사람를 지칭합니다. 국적, 지방, 성씨, 연령등으로 구분을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냐 사탄 마귀의 사람이냐는 영적이고 근본적인 구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그 사람의 주인이 된 사람이고 사탄 마귀의 사람이란 그 주인이 사탄 마귀인 사람을 말합니다.
1.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구원받은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세 가지 면에서 인정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딸이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본인 자신이 확신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라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야”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야”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하나님 사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은 프랑스 말로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를 뜻하는 말입니다. 즉 남보다 무엇인가 권리가 있고 혜택을 많이 받는 사람은 그만큼 도덕적으로 의무도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와 특권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께서 디모데에게 영적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가르켜 “너 하나님의 사람아”(You, man of God)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그의 신분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 특별한 권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본래 구약시대에도 이 말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특별한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종경과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남다른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지의 삶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이 피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에게 주신 도덕상의 의무와 책임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크게 세 가지로 말씀을 했는데 오늘은 그 중의 하나인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 말씀을 전합니다.
본문 11절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피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네 가지입니다.
첫째, 이단의 유혹을 피하라(3-5절).
이단사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단의 특성을 잘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단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첫째 이단들은 다른 교훈들을 가르친다(3절)는 것입니다. 둘째 이단들은 변론을 좋아합니다(4절). 셋째, 불의와 이(利를) 추구합니다(5절). 이 시대의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말 지혜롭고 영적으로 무장을 하여 이단을 피해야 합니다. 이단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 시대에 피해야 할 적이 이단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이 피해야 할 것은 돈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이 이것들을 피하고...”라고 한 “이것들”이란 딤전 6:3-10절에 말씀한 내용들로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돈의 유혹으로 멸망의 길로 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돈과 물질의 유혹을 피합시다.
셋째, 교만한 마음입니다.
본문 4-5절에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람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교만을 피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고 패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의 덕목은 겸손입니다. 남보다 잘되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겸손해져야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시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해 주십니다.
넷째,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피히야 할 아주 중요한 덕목은 정욕입니다. 정욕이란 육신적인 욕심을 말합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이 정욕 때문에 패망의 길을 걷습니다.
성경에서 정욕을 피하라는 말씀의 핵심은 성적 욕심입니다. 딤후 2:22절에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람이 정욕을 이기는 비결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지나친 세상의 정과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정복해야 합니다. 잘 다스려야 합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옛날에는 사탄 마귀의 사람,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피해야 할 덕목인 이 세 가지를 잘 피합시다.
패러다임(paradigm)의 질적 변화
딤전 6:11-16 / 빌3:7-9 / 길승민 목사
서론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헬라어 ‘παραδειγμα 파라데이그마’에서 온 말로 ‘사례, 예제, 본보기’를 뜻합니다. 즉,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틀을 말합니다. 이 말이 지금처럼 널리 사용된 계기는 토마스 쿤이라는 철학자가 자신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부터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절대적 패러다임이 한 동안 지배하다가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앞의 패러다임은 폐기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세상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세상은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이 집어삼키고, 케플러의 면적속도법칙이 뉴턴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케플러를 뛰어넘습니다. 앞뒤를 잇는 두 패러다임은 서로 공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세상의 발전은 선형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식 발전을 하게 되는 겁니다. 정체되어있는 역사의 흐름이 어느 순간 도약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Paradigm Shift라고 합니다. 컴퓨터의 자판을 영어에서 한국어로 완전히 Shift하듯이 전체가 확 바뀌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토마스 쿤의 이런 주장은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거의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얼마나 열광적인지 역사, 철학, 사회, 인문, 과학, 문화, 종교 모든 영역에서 이 말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우리의 신앙으로 좀 적용해보자면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도발하는 것은 저 사람이 천성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많아서 그래.’,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나를 쓰시려고 훈련하시는 거야.’ 이렇게 말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이런 눈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을 이해하는 깊이나 나 자신을 향한 인식의 건강성은 확 달라져서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패러다임 쉬프트는 우리의 신앙에서도 아주 중요한 접근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말고 전혀 다른 가치와 의미의 관점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11-14절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너는 지금 겨우 생존의 문제로 안달복달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너는 그리스도의 군사다. 너는 바로 이 싸움을 최전선에서 감당하라고 콜링을 받아서 지금 바로 너의 자리 에베소에 있는 것이다. 너의 눈에는 화려한 도시, 신전, 고상한 사람들의 옷과 명품으로 치장한 외모가 보일 것이다. 하지만 너의 눈을 패러다임 쉬프트해라. 너는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 너의 존재는 coram deo 하나님 앞에 있을 때 유의미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바울은 왜 디모데에게 이런 강력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에베소라는 도시가 만만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겉보기에는 교육, 경제, 문화의 수준이나 시민들의 의식이 아주 높아서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도시였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신앙을 지켜내기가 어려운 도시였습니다. 무엇보다 화려한 신전과 그에 따른 부가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 물질적 소유욕, 제도화된 공창(公娼)산업이 만연하여 도시 사람들의 영혼은 피폐하였고,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일들이 있기도 했습니다. 행19장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서원에서의 말씀 사역을 하면서까지 영향력을 그들에게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시민들에 의해 죽을 뻔한 기록이 나옵니다.
행19:24-29입니다.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종교가 산업이 되어버린 에베소 한 가운데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있어서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하루라도 빨리 뛰쳐나와야 할 곳이 아닙니다. 대체 불가한 사명지입니다.
본론
지난주 설교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돕는 분이신가, 내가 하나님을 돕는 사람인가?’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역사의식과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야한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 가지 더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고난에 담긴 뜻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고난은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겁니다.
디모데는 연소한 목회자였습니다. 고난이 싫을 수 있었습니다. 힘든 일이 버거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21살이 되던 해 용돈을 좀 벌 요량으로 알바를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친한 친구 어머님이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좀 하셨는데, 근처 셔츠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 몇 명과 일하러 갔습니다. 미싱이 수십대가 돌아가는 조그만 공장이었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공장 한 켠에서 다 만들어진 셔츠를 투명한 비닐에 넣는 마지막 공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별 것 아니다 생각했는데 그 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비닐은 잘 벌어지지 않았고, 접착부분을 붙이는 것도 한 번에 반듯하게 붙지 않았습니다. 의자와 작업대가 높이가 맞지 않아 허리는 구부정해지고 어깨는 결려왔습니다. 문제는 미싱 수십대의 그 무지막지한 소리와 회색빛의 삭막한 공장 분위기, ‘대학생 오빠야~’들을 향한 공장언니들의 눈빛 등, 오전 작업 3시간을 버티는게 얼마나 무섭고 힘들던지요. 저와 친구들은 점심시간을 틈타 도망쳤습니다. 소개해준 친구 어머니 보기가 미안해서 그 친구집에 몇 달 동안 놀러가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니고 당연히 일을 완수했어야 했지만 당시 저는 의지박약이었고, 너무나도 연소했습니다. 저의 마음 자세, 패러다임이 온전치 않으니 내가 쓸 돈 벌러 간 일도 나에게는 고난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당연히 해야할 공부가 나에게 고난이 되고, 내가 당연히 준비해야할 나의 미래인데 나에게는 고난이 되어버립니다. 여러분! 그것은 절대 고난이 아닙니다. 그냥 안일하고 되먹지 못했고, 분수를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고난이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일은 사실 고난이 아닙니다. 누구나 겪는 일이고, 그 과정을 통과할 때 내 인생 하나 정도는 책임지고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그 정도의 일에 불과합니다. 뭐 인류를 위해 헌신한다든지, 오지에 가서 목숨 바쳐 일하는 그런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고난은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일입니다. 억울한 누명, 과도한 책임, 쫓기는 시간, 복잡해진 여러 관계들, 의롭고 고상한 사명을 위해 일하다 번아웃 되어 보는 경험, 이런 것이 고난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난은 왜 우리에게 주어집니까? 거기에 대한 답은, 내가 하나님을 돕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왕궁에서 화려한 40년을 보내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민족인 히브리인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나섰다가 애굽인들에게도 자기 동족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한 순간 이집트 왕자의 신분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도망자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런 절망감 속에서 무려 40년을 보냈습니다. 모세는 정말 고난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고난이었던 더 본질적인 이유는 그가 왜 거기 있어야하는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식, 정체성의 부재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뭐라고 짓습니까? 출2:22입니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아들이 이 이름 때문에 앞으로 놀림 받을 건 안중에 없습니다. 그냥 자기 감정, 자기 연민에 빠져 아무 의욕이 없었습니다. ‘나 지금 뭐하고 있지? 나는 누구지?’ 바로 그때 하나님은 모세가 고난을 직면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더 고통을 받게 하시고, 더 무너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모세를 어떻게 만드십니까? 하나님을 돕는 자로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다윗입니다.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로 골리앗과 싸웠다가 승리합니다. 왕의 사위가 되었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통치자의 반열에 오릅니다. 승승장구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이 일 때문에 다윗은 왕에게 미움 털이 박혔고, 광야로 아둘람 굴로, 엔게디 사막으로 심지어는 원수였던 블레셋 땅으로 내쫓기는 삶을 삽니다. 사울왕이 죽은 후에도 곧바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통치자로 세움 받은 것이 아니라 유다지파의 수도였던 헤브론 산골에서 7년 6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고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빨리, 바로바로 진행시키지 않고 다윗을 그토록 기다리고 삭히고 받아들이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을 돕는 자로 제대로 사용하시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고난을 고난이라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지는 위대한 여정으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백되어지면, 단지 관점의 패러다임 쉬프트 정도가 아니라 ‘질적인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 나를 휘감고, 전혀 새로운 결단과 선택을 하며, 주변에 영적인 영향을 끼치며 종국에는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바울은 깨달았을까요? 두 번째 본문으로 삼았던 빌립보서 말씀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내가 하나님을 돕는 자라는 분명한 확신이 들 때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이 무가치하게 여겨졌습니다. 지식과 인맥이 너무나도 하찮게 여겨지고 하나님이 그렇게 크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니 더 분명한 자기 인식이 이루어집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안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고난이 즐겁고, 비난과 배고픔과 추위가 행복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돕고 있으니까요. 가슴이 뛰고, 그 다음 고난이 오히려 기대가 됩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배설물로 버렸던 그것들이 이제는 정금같이 거룩해져서 하나님나라를 위한 위대한 도구가 되어, 다윗의 물매돌이 되어 바울의 손에 들려지게 됩니다.
바울의 해박한 지식이 거룩한 지식이 되어서 신약성경의 핵심을 이루는 서신서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인간적 열심히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으로 변화되어서 지중해 연안을 돌아다니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로마시민권을 거룩하게 사용하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남의 등골 빼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마땅히 성도들의 섬김을 받고 누립니다. 영적인 패러다임 쉬프트를 경험한 사람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고난을 주실 것입니다. 역사의식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정체성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러니 욥기에서 욥이 한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이번 학기도 아마 고난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맞서게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아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웁시다
딤전 6:11-16 / 박봉수 목사
이순신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특히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해낸 전쟁의 영웅입니다. 역사자료를 보면 이순신장군은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23전 23승을 했습니다. 싸움마다 이긴 것입니다.
당시 조선군은 무기수준이나 병력면에서 일본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세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순신장군은 원래 수군을 지휘한 경험이 일천했던 장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장군은 연전연승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전쟁을 연구한 학자들이 꼽은 여러 가지 비결 가운데 첫째는 철저한 준비입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1591년부터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전황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전략을 수립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장수들과의 소통입니다. 항상 장수들의 전문성을 존중하여 전략회의를 했고, 병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래서 조선군은 늘 이순신장군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전쟁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늘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에서는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 나라를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두 번은 이길 수 있어도 무패의 승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고, 그리고 그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신앙생활 자체가 하나의 전쟁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한두 번으로 끝나는 전쟁이 아니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계속 이어질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순신장군이 무패의 승리를 쟁취했던 것처럼 이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무패의 승리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패의 승리를 쟁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믿음이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싸움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싸움 즉 전쟁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같은 취지의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딤후 4:7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이 자기의 믿음의 한 평생이 그 자체로 선한 싸움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딤전 1:18을 보면 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바울이 자기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믿음이 선한 싸움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저절로 그 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싸워서 쟁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은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치열하게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그 싸움을 기록한 책이 여호수아서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됐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자라야 하고, 믿음의 지경을 넓혀 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쟁과 같은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빌 2:12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 그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영접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이 자라야 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저 천국에 들어가는 날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 누군가를 공격해서 피해를 입히거나 망하게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타격하거나 죽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을 지키느냐 빼앗기느냐, 내 믿음을 성숙하게 하느냐 주저앉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악한 싸움이 아니라,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
성경 여러 곳에 이 믿음의 싸움의 구체적인 성격을 가르쳐주는 말씀들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엡 6:1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상대해야 할 적이 누군가를 가르쳐줍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마귀라고도 하는 사탄입니다. 그리고 그의 휘하에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은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저명한 기독교 저술가인 C.S. 루이스가 쓴 [마귀의 지령]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마귀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해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무관심해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루이스가 볼 때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지나치게 모든 것을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사에 사탄이 관여해 있는지 여부를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마치 밤길을 걸을 때 귀신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경계하는 태도로 걷는 사람이 무슨 소리만 나도 귀신이라고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 전쟁에 대해 모르고 알아도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탄이 시험하고 있는데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인 갈등이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사탄이 함정을 파놓고 있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그 길로 갑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큰 문제입니다.
내적 치유의 권위자인 닐 앤더슨 박사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에 대한 이해도를 조사한 바가 있습니다.
전체 신자들 가운데 65%가 영적 전쟁에 대해 잘 모르거나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가 영적 전쟁에 대해 알고 있지만 영적 전쟁에서 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5%의 사람은 영적 전쟁에 대해 잘 알지만 자신은 성령충만하여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자만하다가 그만 영적 전쟁에 패하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15%의 그리스도인들만 영적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철저하게 대비하여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전쟁 즉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해 잘 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잘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시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려면
그러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잘 피하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피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려면, 먼저 이것들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려면 우선 공격을 잘 피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집요한 공격을 잘 알고, 그것을 잘 막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고대 병법 가운데 [36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부터 전해 내려온 병법을 총 망라해서 전장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36가지 계책으로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총 6가지 상황에 따라, 각각 6가지 계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36계입니다.
이 36계 중 제일 마지막 계책이 ‘주 위상’(走 爲上)이란 계책입니다. 한 마디로 어려운 상황이라 판단되면 피하는 계책입니다. 그런데 송나라 시절 명장인 단도제가 이 서른여섯 가지 계책 가운데 마지막 이 주 위상이 제일이라 하여, 36계 중 이 마지막 계책이 제일 유명하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피하는 것도 싸울 때 중요한 계책입니다. 특히 상대방이 강할 때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직접 맞서 싸울 상대가 아닙니다. 힘이나 지략이나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뛰어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피하라는 말씀부터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서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들을 피하라고 했는데 바로 앞의 3-10절에 소개되고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생각을 뒤흔드는 공격입니다.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한 마디로 말하면 사탄이 여러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생각을 뒤흔드는 공격을 가해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간파하고 우선 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께 두 가지를 피하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먼저는 이단과의 대화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 같은 이단집단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하는 공격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대답하기 힘든 공격 매뉴얼을 만들어서 철저하게 훈련시킵니다. 이들의 정체를 잘 모르거나 교역자 수준의 신학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질문과 공격을 해옵니다. 그래서 이들은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단임이 확인되면 상대하지 마십시오.
다른 하나는 인터넷이나 유튜브 등에 올라와 있는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이트나 영상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기독교를 개혁하고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도록 촉구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공격을 위한 공격이고, 이것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생각들을 흔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특정 부분의 문제를 보편적인 문제로 호도하고, 작은 문제를 침소봉대하고, 잘못된 관점으로 왜곡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리고 피해야 할 것 또 하나는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공격입니다. 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한 마디로 사탄이 우리의 욕망을 부추겨서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공격을 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간파하고 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자성어가운데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건을 보면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면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인지상정입니다. 보는 그것이 탐나는 것이면, 마음에 욕심의 파도가 칩니다. 그러면 내 힘으로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삼하 11장은 다윗에게는 그의 인생에서 삭제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밧세바를 간음하는 죄를 범한 이야기입니다.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 보았고, 유심히 보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렸고, 사람을 보내 이 여인을 데리고 오게 하여 간음을 저지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는 순간 우리 마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인가를 본 이후 우리 마음이 흔들리면, 더 이상 보지 말고 그곳을 피해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렸는데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서 그것을 보고 있으면, 사탄에게 우리의 마음이 결박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둘째, 잘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려면 이렇게 피할 것을 잘 피한 뒤에 이제 따를 것을 잘 따라야 합니다. 본문 11절 하반절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기 위해서 여섯 가지 믿음의 덕목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말은 ‘디오코’(διωκω)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추구한다’, ‘구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그리고 온유라는 여섯 가지 믿음의 덕목을 갖추려고 힘쓰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려고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구상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그릴까를 생각하고 그 모습을 먼저 마음속에 그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폭에다 그 모습의 밑그림을 그립니다. 그 후에 그 모습의 요소들을 하나씩 그려넣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결국은 내 자신을 믿음의 사람으로 완성시키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사탄과 맞서서 싸운다고 우리가 사탄을 공격하는 싸움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힘도 없고 사탄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싸운다는 것은 사탄이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서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이겨내는 싸움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이 방해하고 공격해 오더라도 우리 자신을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일을 잘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손주가 와있습니다. 21개월 된 남자 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 아이가 태어나 평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해왔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태어난 뒤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도록 양육하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무엇인가 먹을 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기도가 끝날 때 크게 아멘 했습니다. 요사이는 밥 먹을 때는 물론이고, 간식을 줘도 손 모으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 주면 큰 소리로 아멘 합니다. 그리고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이 아이 때문에 가정예배를 드리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참여시켰습니다. 요사이 가정예배 드린다면 좋아합니다. “예배, 예배”하며 신나 합니다. 그리고 삼촌, 엄마, 할머니 예배드리자고 데리고 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운다는 것은 평소의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구할 것을 구하고, 추구해야 할 것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공격에 맞서고 있습니다. 이 믿음의 선한싸움을 잘 싸워 가시기 바랍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9 / 김광일 목사
위클리프(Wycliffe) 성경 번역자이며, 브라질의 성자라고 불리었던 더그 멜란드(Doug Meland) 선교사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멜란드 부부는 인디언들이 사는 폴리오라는 오지 마을에 들어가 의료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이 부르는 선교사 부부의 호칭이 네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인디언들은 선교사 부부를 ‘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칭호에는 자신들의 땅을 강탈하고 괴롭혔던 백인들에 대한 증오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멜란드 부부는 비난을 감수하며 병들어 죽어가는 인디언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들이 ‘존경할 만한 백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멜란드 선교사 부부는 폴리오 인디언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10년 만에 인디언 언어를 배워 그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으면 인디언 풍습대로 따라하였습니다. 그러자 인디언들이 그들을 보고 ‘백인 인디언’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번은 선교사 부부가 무릎을 꿇고 더러워진 인디언 소년의 피 묻은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인디언 추장이 선교사 부부에게 말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그때부터 선교사 부부가 인디언들의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이 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멜란드 선교사 부부의 사랑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세상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였던 디모데를 향하여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의 사람’은 ‘안드로페 데우’라는 원어인데 구약에 보니 모세, 다윗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나 사무엘, 엘리야 같은 선지자인 소수의 사람에게 붙였던 칭호였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외에는 오직 본 구절에서만 사용되었던 귀한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에 담겨진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살고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려지는 평가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사명을 맡겨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요, 그 사람의 모습은 곧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사람입니까? 세상 권력 있는 사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평가 받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감격으로 섬기며 복음을 전파하는 책임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고 과도한 욕망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를 확실히 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첫째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에게 친구가 사냥개 두 마리를 선물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어느 날 토끼 사냥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냥개들이 토끼 잡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 후 사슴 사냥을 떠났습니다. 사슴이 나타났는데도 두 마리의 사냥개는 쫓아가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는 겁니다. 화가 난 알렉산더 대왕은 사냥개 두 마리를 죽여 버렸습니다. 얼마 후 사냥개를 주었던 친구를 만나 “토끼 한 마리, 사슴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사냥개를 내게 선물했느냐고?”고 물었더니 친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왕, 그 사냥개는 사자와 호랑이를 잡을 때 쓰도록 훈련된 개들입니다.” 알렉산더 왕은 사자나 호랑이를 잡도록 훈련된 사냥개의 가치를 모르고 토끼를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전혀 다른 싸움에 힘과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싸움이 어떤 싸움이며 싸울 대상은 누구입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까? 나의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싸움 상대는 악한 영과 그 세력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단과 귀신 즉 악한 영과 싸우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여기의 ‘싸우라’는 ‘아고니주’라는 원어로서 ‘힘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아고니조마이’의 현재 명령형인데 ‘계속해서 싸우며 힘써야 할 것’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앞 구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의 덕목들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본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며 신앙의 용장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사수해야 합니다. 사람과의 싸움이 언쟁인 말싸움이라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소극적으로 악한 유혹을 피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처해 싸워야 합니다.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오직 의와 진리를 따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람의 참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강철왕으로 유명한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회장의 사무실에 낡은 나룻배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그림 밑에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이 그림은 카네기가 어렵던 청년시절에 집집마다 다니며 물건을 팔던 중에 얻었습니다. 어느 노인 댁에 걸려 있던 그림을 구하여 일생 동안 소중하게 보관했습니다. 그림에 적혀있던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말은 카네기의 생활신조가 되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좌절이 될 때마다 그림에 적힌 글을 보며 “지금은 썰물 때이지만 반드시 밀물 때가 올 거야. 그래!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반드시 성공하게 될 거야”하며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소망을 잃지 않았던 카네기는 결국 세계적 철강회사를 거느리는 재벌 회장이 되었습니다. 소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소망을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둔다면 어떤 어려움과 장애가 있어도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내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여기의 ‘소망을 두다’는 ‘엘피케나이’인데 ‘엘피조’의 부정사로서 ‘신뢰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의 재물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모든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정함이 없고 영원한 구원도 주지 못하는 세상 재물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로 자신의 성곽을 삼고 그 속에서 소망을 느끼려 하지 말고 불성곽이 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물속에서도 건지시고 불 가운데서도 지키시며,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늘 떠나지 않는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영원까지 안전하고 든든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라
유대인들은 어릴 적부터 자녀들에게 기부교육을 시킵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유대인 가정에서는 어머니가 양초에 불을 붙이고, 아버지가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양초에 불을 붙일 때면 아이는 미리 받아둔 동전을 기쁜 마음으로 구제 상자에 넣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는 나눔 의식을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기부자들의 절반이 유대인입니다. 세상의 가치기준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누가 최고 갑부이냐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누가 이웃과 사회를 위해 기부하고 베푸느냐에 따라 존경심을 가집니다. 미국의 부동산 재벌 엘리 브로드(Eli Broad) 부부의 말입니다. “큰 재산이라는 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를 지역사회나 국가, 혹은 세계에 돌려줄 수 있다. 누구는 이를 기회라 하고, 누구는 이를 책임이라 하지만, 우리는 이를 특권이라 생각한다.” 넉넉하여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형편에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특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여기의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는 ‘유메타도투스’라는 원어인데 ‘대가 없이 주다, 인색하지 않게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구제나 자선을 거래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배격합니다. 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대가를 바라고 나누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물질적 나눔만이 아니라 진실된 마음까지 나누려는 태도가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아 근검절약으로 재산을 축적한 뒤 세상에 환원시켜 수많은 도서관이나 복지 재단을 만든 미국의 부호들은 실로 아름다운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손에 있는 재물을 움켜쥐려고만 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손을 펴서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처럼 외모와 신분, 소유로 사람을 구분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힘과 재물을 믿고 교만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며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 (Papa Francesco)이 쿠바의 아바나 혁명 광장에서 거행된 미사에서 “교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형제자매의 존엄성을 향상시키고, 그것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교인들은 항상 개인의 바람과 욕망, 권력 추구 의지 등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가장 취약한 이웃을 돌봐야 한다. 너희들 중 으뜸이 되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 섬김은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을 섬길 뿐, 생각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연한 것을 말했을 뿐인데도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는 까닭은 세상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확실하게 본을 보이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몹시 배가 고픈 체하면서 거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조금만 나눠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노숙자 한 사람은 자기가 먹던 피자를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적당히 믿고자 하는 유혹을 거부하시기 바랍니다. 대충 믿는다면 신앙생활의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디 육신의 싸움이 아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움켜쥐기보다는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디모데전서 6:11-12 / 안창국 목사
오늘날은 세상이 앞서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서구사회는 기독교가 사회를 이끌어 갔었습니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교회가 사회의 여러 가지를 선도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되어가고 있는데 교회는 이에 못 따라가는 바람에 교회는 사회를 이끌어가기는커녕 안타깝게도 오히려 세상을 따라가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전에는 교회교육이 앞서 갔었지요. 여러 가지 교육의 새로운 접근방법들은 교회가 앞서 갔었는데 이제는 교회교육이 일반 사회의 교육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그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었고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독립선언을 한 33인 중에도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인이었고 학교를 설립하고, 병원을 설립한 이들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양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점점 더 뒤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이나 인격이 사회를 이끌어갈 정도의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가 젊은 후배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말씀으로 권면 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유념해야 할 몇 가지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는 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권면하십니다. 두 번째로는 좇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것들, 추구해야할 것들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싸우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적 전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는 취하라고 하십니다. 영생을 취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피하십시오(11절).
(1) 3-5절/ 잘못된 교훈, 세상 풍조, 세상적 사상들을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이단들이 교묘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교훈이 만연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이단 사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도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구요. 그리고 기독교의 모양으로 교묘하게 포장된 인본주의가 잘못된 교훈입니다. 인본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인간 중심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사실은 기독교의 올바른 신앙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가장 중요한 존재로 창조하셨으며, 인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온전한 인간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인본주의에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풍조나 세상적 사상들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이원론, 세속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그러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이 끊임없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가르쳐집니다. 직장의 풍토로 그러합니다. 이 사회가, 매스컴이 그러한 것을 조장해가고 있습니다.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세상 풍조에 휩쓸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피해야 합니다.
(2) 6-10절/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돈은 정직하게 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돈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는 안 됩니다. 사기를 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거나, 사회에 악을 끼치는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것은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황과 여건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하냐는 것입니다.
또한 정직하게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 돈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왜 그러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돈이 벌리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봅니다. 농사를 열심히 짓는다고 당연히 풍작이 됩니까? 기후와 날씨가 협조를 해야지요. 열심히 노력을 하고 일했는데 지난번 미국의 테러 같은 것이 일어나면 갑자기 불경기가 되고 주가가 폭락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돈을 빼앗아 갑니다(학개 1: 3-6).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려면 우리는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6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한 번 볼까요?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야 말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족(自足)하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욕심을 버리십시오. 포기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거룩해질 것입니다.
2. 좇으십시오(11절).
두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좇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입니다.
의(義)/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경건(敬虔; godliness)/ 경건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 믿음이란 죽을 때까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바라보며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 여기에서의 사랑은 자기의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내(忍耐)/ 인내란 어떠한 역경과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굴하지 않고 온전히 믿음을 지키며 신앙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溫柔)/ 온유란 항상 사람들을 이해하는 태도로 너그럽게 대하며 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좇아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성품들과 태도들을 닮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이러한 태도를 좇아가기 위해 자신을 드리고 있습니까?
3. 싸우십시오(12절).
무슨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까? 믿음의 선한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내 생각과 세상적 지식과 과학,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신뢰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혹들과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목숨을 걸 듯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우리를 죄악으로 몰고 가는 세상입니다.
또한 여기서의 싸움은 ‘상을 얻기 위해 경쟁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마라톤을 비롯한 올림픽의 기원이 되었던 그리스의 체전(體典)을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기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웁니다. 그 당시의 운동경기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경기가 참 많았습니다. 그저 심심풀이로 경기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경기였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경기를 하지만 이기고 난 후의 상급을 바라보며 그들은 인내하며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싸우면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비밀 하나를 말씀드릴까요? 이 싸움은 이미 승리한 싸움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겨놓은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면 예선을 통과하며 본선에 올라왔을 때 맨 처음에는 16강에 들기 위해 경기를 하지 않습니까? 한 조에 4팀이 함께 싸워 두 팀이 16강에 올라가는데 일단 2승을 하면 16강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미 2승을 한 팀은 마지막 한 팀과 싸울 때에는 2진 선수들을 내보내서 2진 선수들이 경기 감각을 익히도록 합니다. 마지막 팀과 싸울 때에도 싸우기는 싸우는 것입니다만 이미 이긴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이겼습니다. 그렇다고 월드컵 축구선수들처럼 대충 2진 선수를 내보내듯이 싸워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대적하는데 대충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나라가 일본과 같은 조에 속했다고 칩시다. 마지막 팀이 일본팀이라고 했을 때 우리나라가 2승을 했다고 해서 대충 싸우겠습니까? 아니지요. 아마 다른 팀과 싸울 때보다 더욱 힘써 싸우겠지요. 사탄과의 우리의 전쟁은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철저하게 무장하고 영적 전투에 임해야 합니다. 마치 평온한 것 같다고 해이해지지 마십시오. 사탄은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4. 취하십시오(12절).
마지막 네 번째로, 영생을 취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영생을 취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이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자들이고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영생을 또 취하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취한다는 말은 영생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영어성경 NIV나 NASB에 보면 “take hold of the eternal life”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생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대표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또한 여기에서 영생을 취하라는 말씀은 영원한 것을 취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영원하지 못한 것, 유한한 것에 집착을 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이미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한 바 있습니다. 물질, 명예, 권력, 쾌락…. 이러한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버리고 갈 것들이지요. 우리는 영원한 것들을 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그리고 영혼입니다.
5.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임을 기억하십시오(12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부르신 목적에 대해서 지금까지 권면한 바대로 이 땅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으로 살도록 권면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새비전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믿음의 삶을 온전하게 살므로 인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며 주님을 높여 드리며 주님의 복음으로 속해 있는 직장과 가족과 학교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역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
딤전 6:11-16 / 손상률 목사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목회할 것인가에 대해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디모데전서 마지막 부분에서는 교회의 행정에 관한 이야기보다도 하나님의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일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을 말씀 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각기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그 사람을 대표합니다. 본명이 있고 가명이 있습니다. 별명이 있는가 하면 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끔찍이 사랑을 했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바울이 디모데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했습니다. 동역자(롬16:21), 형제(고전1:1), 하나님의 일꾼(살전3:2), 내 아들아(딤전1:2) 부르더니 오늘 본문 11절에는 ‘너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이고 싸우는 삶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외에도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당부한 바 있습니다. 에베소서 6:10-17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전투에 대하여 자세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본문과 에베소서 6장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불의와 부정과 악령들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Ⅰ. 피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주신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교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직면할 수 있는 유혹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고 있는가를 말하면서 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떨어진다,' '빠진다'하는 말은 어떤 잘못된 대상에 완전히 포로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 입니다. 이런 사실을 경고하면서 오늘 주신 말씀에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욕과 돈에 포로가 되기 쉬운 이 유혹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만 포로가 되는 삶을 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과 정욕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까? 이와 같은 세상에서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삶의 주인이 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포로가 되어 산다면 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영광입니까!
그래서 돈과 교만을 피하라고 명하였고, 20절에서는 “필요 없는 변론을 피하라”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피해야 할 것이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거짓 교훈과 모든 불경건한 행위에 대항하여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구별해야 합니다. 무엇을 피해야 합니까?
1. 이단의 가르침을 피하라!(3-4)
이단의 거짓 가르침을 피해야 합니다. 자신의 사욕을 좇는 어리석은 가르침을 배격해야 합니다. 이단은 문 안에도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은 자신만 지옥자식 될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멸망시키는 영혼의 지옥 사냥꾼들이기 때문입니다.
2. 경건치 못한 죄악을 피하라!(4-5)
교만, 무익한 논쟁, 시기함, 투기함, 훼방, 악한 생각들을 피해야 합니다. 악한 것들을 방치해 두면 자신의 신앙이 점점 무기력해지고 마침내 구원의 확신마저 사라져 버리게 되는 위기를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구별되어 선택받은 무리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건져내어 죄와는 상관이 없이 경건하게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3. 개인적 편견, 세속적 당파를 피하라!(5-6)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신의 생각이나 이익을 고려한 행동들은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끼리끼리 모이고 분당과 파당을 일삼는 것은 주의 몸 된 교회를 갈가리 찢어 놓는 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성도가 하나의 몸에 붙은 지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4. 돈을 사랑함을 피하라!(10절).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돈속에 일만 가지의 악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악의 근저에는 돈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돈을 악과 관련시키는 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돈에 대한 사랑과 혼돈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관계까지 파괴해버립니다.
Ⅱ. 좇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좇아야 할 것을 11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좇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좇아야 할 것은 바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입니다.
「의」라는 것은 공의를 뜻합니다. 모든 일을 처리 할 때 공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건」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구원에 관한 믿음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행하셨던 가장 위대한 일인 사랑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기적이지 않는 사랑입니다. 「인내」는 참을성으로서 상황이 어려울 때에 끝까지 분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온유」는 유약함이 아니라, 통제 하에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온유함이 없는 용감한 인내는 압제자가 되게 합니다. 예수님도 온순한 성품을 가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여섯 가지의 덕목을 잘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 이였습니다. 자기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40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도 오래 동안 인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선교 여행을 하면서 개척 교회를 설립하고도 온유함으로 가르쳤습니다. 사실 이 여섯 가지의 덕목은 바울이 실천했던 덕목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성품을 닮으려고 많은 고난을 당했고 사실 예수의 성품을 닮아갔습니다. 그래서 젊은 목회자 디모데도 예수의 성품을 닮도록 하기 위해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쫓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Ⅲ. 싸워야 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싸우라’의 문자적 의미는 ‘상을 얻기 위해 경쟁하라’인데 바울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이 행하는 싸움은 선한 싸움, 즉 영적 싸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이렇게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얻기 위해 디모데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실로 인간의 삶 자체는 싸움의 연속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혈과 육의 싸움을 하며,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 즉 영적 싸움을 경주합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 말씀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선한 싸움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1.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으며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웠던 싸움은 원수 마귀였거나 가난이나 질병이나 세상권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괴롭히고 가장 고통스러운 투쟁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절규하듯 한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지체 속에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는다고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 선한 싸움이란 자신을 죽이며 사는 삶을 뜻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마귀입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인류를 타락 시킨 이래 아직도 타락시킬 대상들을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찾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1절을 보면 “마귀의 궤계”라고 했고, 12절을 보면 “혈과 육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싸움의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싸움 대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이며 세상의 불의한 집권자들과 그들의 악한 꾀인 것입니다. 만일 신자들끼리 서로 으르렁거리고 교회끼리 서로 싸운다면 마귀는 손뼉을 치고 기뻐할 것입니다. 마귀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 교회의 힘을 분산시키고 한국 교회가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치명타를 가해서 파괴하려고 온갖 공작을 다 펴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휘말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마귀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3. 죄입니다.
죄는 멸망성이 있어 하나님의 축복을 방해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예수님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합니다.
전투에서 가장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그 선한 증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는데 있어서 생기는 어려움과 고통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움츠러들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전진해 나아가는 계속적인 싸움이 땅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럼 언제까지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까? 14절에서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명령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의 삶은 안락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이 땅은 우리 신앙의 적들이 기다리고 있는 적진입니다. 이 세상을 승리하며 통과하기 위해서는 항상 긴장하고 경계하며 싸우는 자세로 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영광스러운 호칭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사람 된 자는 그에 합당한 삶이 요구됨을 깨우쳤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의 썩어질 것, 멸망의 요인을 철저하게 피하여야 하며,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가운데에 영생을 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절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은혜가 임하고 모든 신앙이 제대로 되어지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마11:12)” 이라고 하였습니다.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딤후4:7). 저와 여러분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마칠 때 우리를 위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쓰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6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말씀 3절부터 우리 다같이 한번 교독을 합시다. 6장 3절입니다.
"(딤전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 하면
(딤전 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아멘.
오늘 잠깐 광고 속에 나갔습니다 만은, 내일부터 우리 후대들을 위해서 특별히 영어 다락방이 이제 진행이 됩니다. 제가 1부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일단 여러분들이 영어 다락방을 인도하는 사람을 신뢰를 해야 됩니다. 제가 신뢰의 말을 조금 드리고 싶은 것은 이번에 총신 연구원에 시험을 쳤어요. 총신 연구원에는 대학 마친 자들이 모이고 그렇게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다른 성적은 내가 구체적으로 모르겠는데 단연 영어에는 Top입니다. 그것도 만점에 가깝게 하나만 틀렸어요. 다른 사람들은 뭐 60점, 50점 이렇게 나오는데 98점이라는 점수가 나왔다 그래요. 그래서 총신에서 영어 교사가 한 사람 생겨서 좋다 그러면서 그러더라 구요. 총신에 지금 영어 훈련을 하는데 영어 교사를 지금까지 세웠습니다 만은, 단연 이 복음 위에 선 영어 교사가 잘 안 나온 것 같아요. 하나님의 인도를 좀 받기를 원하는데 여러분들이 그 영어 교사는 실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사실은 세계복음화 그럴 때에 언어가 안 되면 복음화가 안 되어요. 제가 늘 느끼는 겁니다 만은, 일단 미국 갔다! 그러면 눌려 가지고 괜히 스트레스 받아요. 먹은 것도 소화도 잘 안되고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고 이번에 LA에 가니까 그게 해결되더라 구요. 왜냐하면 LA에 가니까 전부 한국 교포들이 살아서 우리가 있는 'Wall Street' 거리에는 전부 한국사람들이에요. 그리고 뭐 백화점에 들어갔는데 전부 한국말 다 통하고요. 그래서 야! 세상에 미국에도 이런 데가 있나 싶을 정도로... 동부에 가면 그게 아니에요. 서부에는 LA에는 그건 것이 됩니다. 그런데 별로 안 눌리고 왔습니다 만은, 그래도 눌려요. 일단 비행기를 타야! 그것도 KAL기나 Asiana 를 타면 미국에서 있다가 타면 눌리면서 해방이 되어요.
그런데 언어가 되면 그런 문제가 나올 것이 없거든요.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다! 그게 언어가 안 되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자폐아들이 공포가 뭐냐하면,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 말을 잘 안 해요. 언어가 안 돼요. 이런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뭔가 너무 급히 뭘 한다. '차곡차곡!' 실력 없는 줄 다 압니다. 내 실력 없는 것 부끄러워서 아닙니다. 다 압니다. 나도 없는데 뭐 영어를 몇 십 년 동안 배웠다. 그래도 안돼요. 이게 다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는 말하는 것이 안 돼요. 읽는 것도 안 되고 그러니까 실력 없는 줄 다 아니까! 또 여러분이 못하더라도 후대들 우리 자녀들 구체적으로 좀 의욕을 갖고 공부할 수 있도록 인도를 해 주시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도를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가 조금 앞에 것을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지난 철야에 이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만은, 구체적으로 본문에 있는 내용을 좀 말씀을 못 했습니다. 오늘 그래서 제목을 '하나님의 사람아!' 그랬는데 한번 받아합시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런 내용입니다. 이걸 반대로 "나 하나님의 사람아!" 그런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이것을 행하는 사람 앞에 피할 부분이 앞에 나와요. 너무 길어서 제가 읽지는 않았습니다 만은, 피할 부분들이 3절부터 나오게 됩니다.
지난 토요일 날 제가 우리 변 상 태 군하고 진 선 미 양의 결혼 예식을 제가 주례를, 어려운 주례를 했습니다. 그 우리 진 선 미 양의 그 가문은 믿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그 참! 아버지가 부모가 어려운 결단을 해서 믿는 식의 주례를 허락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쪽에 신부측에도 많이 왔어요. 보니까 그리고 신랑측에도 뭐 우리 교인들하고 다 많이 갔는데, 그런데 전혀 안 믿는 분들입니다. 찬송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일부러 제가 참석을 하라고 광고를 철야 때 드린 겁니다. 청년들하고 우리 교인들도 많이 갔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지난 SBS에서 방송했던 사주팔자에 대한 내용을 화면에 나왔던 내용을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한달 후면 결혼할 처녀가 약혼까지 다 해 가지고 이제 결혼하기 직전인데 어느 날 갑자기 시부모님 될 사람이 불러 가지고 가보니까 뭐냐하면, 이 궁합을 본 겁니다. 시와 때를 해 가지고 양쪽 양 신랑, 신부 궁함을 봤는데 어떤 결과가 나왔느냐 하면, 이 여자가 결혼하면 네 아들이 죽는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시어머니 입장에서 '내가 다른 것은 다 양보할 수 있다.' '어렵다. 뭐 힘들다. 이런 것 같으면 내가 상관을 안 한다!' '그런데 내 아들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못하겠다.' 어머니로서 이해는 돼요. 왜? 그걸 믿는 사람에게는 이해가 되잖아요. 그래서 이쪽에 친정 어머니가 똑같은 이런 그 사주팔자를 시하고 때하고 해 가지고 어디 갔는지를 알아보고 똑같은 점쟁이에게 갔어요. 찾아가서 냈는데 너무 또 좋아! 사주팔자가 궁합이 찰떡이라! 이러면서 뭐냐하면, 사주팔자 이 속는 다 이러니까 그 이야기 듣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이에요. 안 믿는 사람들인데 너무 허무하다! 이겁니다. 여기에 속고 여기에 인생들이 인생을 망친다. 그러니 뭐냐? 고개를 끄덕이더라 구요. 맞다! 이겁니다. 고개를... 내가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여요.
왜 제가 이런 말을 드리느냐 하면요. 여러분 이 자리에 앉았다. 너무 행복하고 축복된 '너 하나님의 사람' 입니다. 그런데서 속지 않을 수 있다는 배경이 다른 길이 없더라 구요. 오직 복음이 안 되면요. 이게 다른 배경이 없습니다. 복음이 안되면 뭐냐? 자꾸 다른 걸 하게 되고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되고 다른 방법을 하게 돼요. 이것을 가지고 성령이 뭐냐하면, 교만이라 그랬더라 구요. 나는 옛날에 교만 그럴 때에 뭐 조금 높아지려는 마음에 내가 잘 안되지 싶으면 교만이다! 이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교만이라는 것은 우리 여기 본문에서 보면 뭐냐하면요. "(딤전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내용이 나오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 하면" 저는 교만하다 그랬습니다. 결국은 뭐냐하면요. 하나님보다 나으니까 안 듣는 거죠. 하나님보다 내가 나으니까 기도 안 하는 거죠. 하나님보다 내가 나으니까 말씀 안 듣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들이 주일날 말씀 붙잡고 기도한다 이게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교만하지 않다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교만이거든요. 교만하지 않다면 구체적인 축복과 은혜가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안 되고 안 믿어지니까! 이 기도도 안하고 암만 그렇게 하라고 그래도 메시지 붙잡고 그게 안 나가는 겁니다. 말씀은 반드시 성취가 되는 데도 이게 안 되더라 구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앉아서 그래도 폼이라도 딱 앉아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참 행복하구나! 얼마나 감사합니까! 행복한 자리에 앉았을 때에 행복한 줄을 알아야 축복이 되는 것이죠. 쥐가 100만 섬이 있는 창고 앞에서 굶어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꼭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제가 이걸 초기에는 뭐냐 하면요. 너무 다락방에 있는 사람들이요, 축복이 많아 가지고 축복에 눌려서 찡겨 죽을 지경이라는 겁니다. 이걸 다시 말하면 전혀 못 누려요. 너무 축복을 받아 놓고도 이 자리가 귀한 줄 모르고 이 은혜가 축복인줄 모르니! 그러니까 뭐냐하면, 사단의 통로가 되는 겁니다. 그걸 비집고 와서 사단이 눌러 버리는 겁니다. 바로 이런 문제, 참 엄청난 문제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 이런 문제가 구체적으로 안 풀리게 될 때에 결국 나에게 문제가 오고 가정에 문제가 오고 나가서 사회 문제가 옵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식에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만은, 문제는 내가 해결이 안 되면 가정에도 금방 문제가 오거든요. 그러니까 가정이 불행해 지게 되면요.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했다고 그래도 그건 결국 불행한 사람입니다. 가정이 행복하게 되면요. 세상에서 조금 어려워도 괜찮습니다. 제가 이 좀 요즘 그 IMF 통해서 오는 노숙자들의 가정을 쭉 보면서 문제가 뭐냐하면, 이 사람들의 문제가 가정이 깨어지더라 구요. 그러면 그게 문제가 되거든요. 아무리 어렵고 직장이 떨어져도 가정이 행복하면, 그 노숙자들이 돌아다닐 이유가 없거든요. 그런데 오늘날 뭐냐? 가정이 얼마나 허술하냐? 직장 떨어졌다고 가정이 깨어진다. 그건 말이 안 되거든요. 그 배경에서 자신의 문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안 되니까! 그러니 남편이 잘 벌어오던 돈을 안 벌어 오니까! 아내나 자식들이 남편 소중한 줄을 모를 겁니다. 왜? 돈을 따라가기 때문에...
그래서 오는 것이 뭐냐하면요. 교인들이 교회 나왔지 만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은혜! 오직 그리스도가 안 되고 교만에 빠지게 되면 빠지는 것이 뭐냐하면, 예수 잘 믿고 준비해 앉아 있으나 그 사실 자체가 무엇으로 변하느냐? 여기 5절에 나왔더라 구요. 5절 한번 보면요.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앞에 쭉 나오면서 "(딤전 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안 되면...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면 언쟁 불평이 나올 이유가 없거든요. 기도하면 다 되는데, 양보해버리면 되는 것인데, 왜? 하나님의 전권 속에 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 전능하신 손안에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항하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다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안 될 때에 뭐라 그랬냐 하면, 5절에 마음이 부패하여진다 그랬습니다. 교만하게 되면 마음이 부패해져서 진리를 잃어버리고 뭐 암만 잘 믿으려고 폼 잡아 봐야 그 속에, 그 마음에 진리가 없어요. 말씀이 없습니다. 진리를 잃어버리고 그럴 때에 오는 것이 뭐냐? 극단적인, 개인적인 이기주의에 빠집니다. 뭐냐하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습니다. 참 비참하거든요. 오늘 날 기독교 안에 내려오는 문제가 심각한 문제가 이런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 앉아 있는데 어느 사회 단체보다도 교인들이 진리를 잃어버리게 되면 극단적인 이기 주의에 빠집니다. 축복도 나만 받으려 그러고 이 다른 사람생각을 못해요. 이런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중직에 앉아 있으나 좋은 자리에 앉아 있으나 축복의 자리에 앉아 있으나 그것을 내 개인의 이익과 연결시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습니다.
여러분 참 마음이 간절해야 됩니다. 이렇게 되니 결국 어디에 빠지느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교회 오는 사람들이요.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찹니다. 왜? 자족하는 마음, 만족하는 마음이 없어요.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새삼스럽게 요즘 '주여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복음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복음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어느 환경이든지, 어느 자리에서 내가 감사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요즘 그 뭔가 건강 문제도 있고 그러니까 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 뭐 노후문제 이런 문제 걱정하는 분들도 있고 그래요. 그럴 때에 나도 모르게 뭡니까? '아, 그 걱정이 된다'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더라 구요. 그런데 문제는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복음 잡았다. 나사로처럼 이 땅에서 가장 비참한 자리에 앉았다.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에게 뭐가 약속됩니까? 잠시 잠깐 후면 영원한 축복과 영광이 약속됩니다. 이것과 잠시 잠깐의 이익을 위해서 내가 불 신앙했다. 엄청난 손해를 보는, 그것은 바보 중에 바보거든요.
이 바울이 이것을 알고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죽을지언정 하늘에 그 축복을 놓치지 않겠다. 그러면서 경건의, 잠시간의 이익 때문에 내가 믿음에 손상이 날까 두렵다. 그게 바울에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좀 잘 되어야 돼요. 이것이 안 되면요. 오늘 우리 탁 장로님도 기도 하셨습니다 만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내 개인적인 이런 오직 그리스도 구체적인 이런 확실한 복음이 안 되어 있으면요. 뭐든지 좋은 재료! 경건의 재료! 말하자면 이 축복의 재료가지고 개인의 이익과 연결시키게 되더라 구요. 뭐 예를 들어 봅시다. 여러분 교회 건축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 교회 건축을 하려고 그러면 내가 돈이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돈주시옵소서. 아마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 많이 있지 싶습니다. 돈을 주셔야 내가 돈을 내든지 뭘 내든지 하죠. 그런 사람 치고 절대로 돈 벌면 돈 안냅니다.
제가 지금까지 뭐냐 하면요. 목사님 제가 이 얼마에 부동산이 팔리게 되면 뭐 하나님 앞에 꼭 십일조 내겠습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기도부탁을 하더라 구요. 그런 사람 치고 나는 한 사람도 십일조 내는 사람 못 봤습니다. 팔리고 난 후에... 여러분 잘 알아야 됩니다. 우리도 모르게 복음이 안 되면 모든 축복과 은혜에 재료를 하나님이 주신 이 재료를, 경건의 재료를 뭡니까? 내 이익과 연결시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 개개인에게 개인적인 축복과 은혜가 해결되고 기도응답이 나오고 가정 교회가 회복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게 되면 그 다음에 여러분 하나님께서 세계를 살릴 증거거리를 그냥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그때 우리 마음과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께 기쁘게 드리나이다' 이게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벌써 십일조 내는 것이 어렵다! 여러분 그냥 안 되죠. 하나님 앞에 십일조 내는 것이 어렵다! 그게 힘들어요. 우리도 모르게 뭐냐하면요. 그게 안 된 상황에서 '하나님 오늘 내게 축복해 주옵소서. 그러면 교회 짓는데 헌금 많이 내겠습니다' 자꾸 이리로 돌아갑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를 살릴 축복과 은혜의 자리에 나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전할 수 있는 귀중한 축복의 자리에 세웠습니다. 먼저 내가 이 축복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내 가정이 이 축복을 회복하게 해 주옵소서. 그러면 따라 옵니다. 받아합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뭐라 구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어떻게 합니까? 풀어서 해 주겠다. 더 하시겠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경제에 축복의 공식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거의 경건의 재료를 뭡니까? 내 이익과 연결시킵니다. 많은 경우!
그래서 여러분 이것이 안 되면 일반 종교로 빠진다고 안 그랬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불교에서 기도하는 것이나 기독교에서 기도하는 것이나 똑같다 그겁니다. 맨 날, 그냥 달라는 겁니다. 이것이 해결 안 되면 그렇게 되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냐? 교만에 빠지고 진리가 그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될 때에 극단적이 이기주의로 빠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무서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자존심이 강하다는 문제보다도, 이기심이 가장 강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래서 어떤 경우가 생기느냐? 대게 보면요. 사기 당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 어떤 장로한테 당했다. 어떤 집사한테 당했다. 많더라구요.
왜 그렇게 되었느냐? 여러분 이 말씀이 나오거든요. 10절 말씀에... 그래서 결국은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요.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한다" 그랬습니다. 따라 오는 겁니다. 그 다음에... 그래서 어떤 경우에 빠지느냐? 내가 돈을 따라 가게 됩니다. 돈이 따라 붙어 져야 되는데, 복음 속에서 돈이 해결되어야 되는데, 내가 돈을 따라 갑니다. 그럴 때에 10절 말씀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에" 뭐가 된다고 그랬습니까? 뿌리가 된다고 그랬습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지금 사회 돌아가는 것 좀 보세요. 전부 뿌리가 뭡니까? 돈입니다.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른다"고 그랬습니다.
멸망이 간단합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안 되고 교만해지게 되면 다른 생각하게 돼요. 다른 방법! 오직 그리스도! 여기에 될 때에 뭐가 되느냐? 아, 맞아! 그리스도면 그 안에서 모든 문제 해결이야! 모든 문제 해결 자야! 다 된 거야! 단순해지면서 이 사실적인 믿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해결이 안 될 때에 여러분 창세기 3장에 걸렸다! 그리고 이것이 안될 때에 가정이 안 되고 이것이 안 될 때에 그 가정이 창세기 6장 아닙니까! 이게 안 될 때에 사회가 복잡해집니다. 11장, 결국 허무에 빠지고 그 다음에 모든 구조적인 모든 문제들이 구조적으로 일을 하면 할수록 허탕을 치는 이런 문제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피하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피해야 되거든요.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3장이 먼저 해결되어야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 원죄 해결이다 그랬습니다 만은 3장이 해결 될 때에 조금 순서를 조금 보셔야 합니다. 뭐냐하면요. 사단이 아담을 뚫고 들어오려고 할 때에 그 다음에 하와를 뚫고 들어올 때에 3단계에 있어서 대번 딱 뚫고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단계가 뭐냐하면 불 신앙을 심어 줬어요. '이 동산 나무에 많은 실과를 먹지 말라 했더냐?' 다 먹어라 그랬는데 불 신앙적인 요소를 싹 심어주면서 불 신앙을 심어 줬습니다. 아주 묘하게 들어오죠. 그러니까 뭐냐하면, 하와도 불 신앙의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다 다 먹어라 했다. 이래 버리면 될 건데 그게 아니에요. 그런데 '선악과 먹지 말라!' 그랬다 그러면서 먹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것도 불 신앙이 이미 들어 왔으니까! 불 신앙의 대답이 나옵니다. 먹으면 따먹으면 뭐라 그랬어요? '정녕 죽으리라!' 그랬는데 '죽을까 하노라!' 안 죽을 수도 있다 라는 어떤 그것도 불 신앙의 내용을, 말씀에 대한 불 신앙의 내용을 말하고 있죠.
바로 이 문제입니다. 사단이 교묘하게 대번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들어올 수 없어요. 사단이 감히 도전해서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먼저 뭘 하느냐? 불 신앙을 심어 줍니다. 그리고 불 신앙의 환경, 불 신앙의 말을 줘요. 불 신앙의 생각을 먼저 집어넣어 줍니다.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너무 사실적이다 싶어요. 그래서 제가 이 몸이 문제가 생기니까? 뭐가 오느냐하면요.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 불 신앙이더라 구요. 불 신앙!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 그리고 이런 불 신앙의 환경이 왔을 때에 어쩔 수 없이 이것이 가정 큰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안 되고 오늘도 안 되고 내일도 안 되고 그 다음 또 뭐냐하면, '뭐 나는 본 태생 고혈압이야! 안 되는 거야!' 이 전부 불 신앙입니다.
그러니 그런 환경 문제들은 그것을 뚫고 뭐냐하면, 그 다음에 문제는 불 신앙의 생각이 들어오면 불 신앙에 행동을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죄'라 그럽니다. 그때부터 저주가 나오거든요. 그 때부터... 그러면서 불 신앙의 행동이 나오는 그때부터, 불 신앙의 삶이 나오는 그때부터 누가 역사 하느냐? 사단이 구체적으로 장악하게 됩니다. 통로가 되더라 구요. 제일 첫 번에 불 신앙 심어주고 불 신앙으로 살아가는 순간에 사단이 그때부터 삶에 들어와서 여러분 구체적으로 가정과 그리고 개인의 마음을 휘어잡습니다. 완전히 자리 잡아요. 그러니 사단이 왕 노릇 하는 겁니다. 그때부터 이것이 너무나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요. 가장 중요한 것이 여러분 복음을 바로 이해해야 되고요. 바로 깨달아야 되고, 사실이 되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다면 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것을 알아야 사단의 역사가 나오죠. 그 다음에 이 복음은 그 냥 믿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받아야 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낳아야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낳아야 됩니다. 그랬더니만 또 불 신앙의 배경들이 나오더라 구요. 무슨 이야기가 들리느냐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데, 영접했는데 7년 동안을 아버지 소리를 안 했다 그래요. 왜 그러냐? 7년 동안을 '하나님 아버지' 소리를 안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하면, 아버지는 징그러운 아버지다! 너무 악독한 아버지! 너무 자기 어머니에게 자기에게 너무 악독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만약에 하나님 아버지 그럴 때에 그 아버지가 생각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아버지를 어떻게 아버지라고 부르느냐? 그런 아버지 같으면 안 믿는다! 그래서 자기는 7년 동안 '하나님 아버지'라 안 그러고 '하나님' 그러고 기도만 했답니다. 나는 그게 이해가 돼요. 아마 여기에서 그런 어릴 때에나 삶에 있어서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여러분 개인도 아버지가 안 되지만 그 다음에 하나님 아버지 모시고 복음 된 자들의 누리는 축복이 누려지지 않습니다. 그게 뭐냐?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7년 동안 아버지라고 말못했던 그 아버지의 배경이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악독합니까? 자기 자식에게, 자기 부인에게 왜 그렇게 악독하냐? 그게 아닙니다.
제가 옛날 일을 약간 말하면서 고백을 좀 할 수 있다 그러면요. 뭔가 아내에게 신경질을 내고 짜증을 내고 그 다음에 막 판을 엎고 그럴 때에 그때는 절대로 성령의 역사 아닙니다. 그때는 누가 들어와야 됩니까? 다른 마음이 들어와야 돼요. 그런데 나는 경험에 내 의지와 생각과 상관없이 그 행동이 나오더라 구요. 그런데 그 행동의 배경에는 항상 뭐냐? 불 신앙의 배경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 재수 없는 여자다 이런 어떤 배경이라든가 그 아내에 대한 불 신앙이 깔려있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떤 문제에 딱 부닥치면 나도 모르게 뭐냐? 판을 뒤 엎어버립니다. 그때는 내 생각이 아니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아야 될 것이 남편과 아내, 아버지가 정말 자기 자식에게, 자기 아내에게 왜, 좋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어디냐? 알 콜에 빠지고 어디 이상한데 빠져 가지고 도박에 빠지든지 완전히 중독되어서 사단이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면요. 완전 그 안에서 놓여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사사건건 문제가 터진다.' 이전에 그 냥 문제를 일으켜서 고통과 괴로움을 주게 됩니다. 사단의 역사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를 바로 알았다 만약에 그 사람이 참 사단의 권세를 꺾는 세력이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오직 하나님뿐이니까! 그 그리스도를 바로 영접하고 바로 알았더라면 그때부터 누가 꺾입니까? 흑 암 권세가 꺾여질 것이고 그때부터 자기의 아버지, 자기의 남편이 바로 될 것입니다. 그것을 몰랐다 이겁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한 여러분 돌아오지 못합니다. 해결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이 사실이 우리 바로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 이전에 정말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행복이 나와야 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은혜의 역사가 나와야 됩니다. 왜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에 누가 내 안에 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내 안에 오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말씀했느냐하면, 고린도 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그랬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고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이때부터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가는 곳곳마다 그때부터 누가 역사 하느냐? 가르치고 인도하시고 지시하시고 성령께서 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때부터 참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환경과 여건에 상관없이 이 평안이 내 안에 있다. 다 열리게 되는 겁니다. 가정이 편안해집니다. 진짜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밖에서 어떤 일을 당하고 들어와도 가정에 들어오면 행복해집니다. 축복이 여기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런 가정을 여지없이 말세에 막 깨뜨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중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만은 여러분 보세요. 미개한 그 케냐나 아프리카에는 가정이 너무 가난해 가지고 애들이 먹고 살 것이 없으니까! 거리로 나옵니다. 거리에 나와서, 거리에서 그냥 구걸하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완전히 가정이 다 깨져 버리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것이 그들의 삶만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선진국에 어떻게 합니까? 중, 고등학교만 들어가면 특별히 고등학교만 되면 집에서 다 어디로 보냅니까? 기숙사로 다 보냅니다. 전부 기숙사 생활입니다. 가정이 깨져 버립니다. 이 부모 자식간에 연결이 안 됩니다. 그러면 완전히 그때부터 뭐냐? 미국에 성인이라면 성인 나이가 되면 가정에 부모 동의 없이도 결혼도 마음대로 하고 다 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고등학교 딱 기숙사 생활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가정에 안 돌아옵니다. 그 다음부터 독립을 선언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가정이 벌써 깨어진지가 오래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이것이 지금현재 후진국 성 가정이 깨어지는 것하고 선진국 성 가정이 깨어지는 것하고 똑같이 병행이 됩니다. 사정없이 들어와 있어요. 우리나라 가정이 어떤 가정보다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회복이 안 되면, 다른 편견 가지고 다른 방법가지고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그래야 평안을 가지고 아내도 남편도 그 속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식들도 가정에 들어오면 평안합니다. 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에 들어오면요. 막 공부 안 한다고 바가지 끓고 고함을 지르죠. 못 옵니다. 그러니까 안 그랍니까? 우리 자식들이 가정에 남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 안 그랍니까? 기적이 다른 것이 아니고 진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참 평안과 안식이... 그 다음에 공부 잘하고 못한다? 그 다음에 문제입니다. 이 가정이 구체적으로 회복이 안 되면 뭐가? 교만에서 자꾸 다른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뭡니까? 사단의 통로가 되어서 엄청난 문제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렇게 될 때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요. 이때부터 가정이 구체적으로 깨어지는데 바로 이때부터 나오는 메시지가 우리 창세기 6장 아닙니까? 바로 누구의 가정입니까? 노아의 가정입니다. 여러분 노아의 가정이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딱 한가지 '방주 안에 들어오너라!' 다른 아무런 조건이 없어요. 가정에 자식이 공부 잘 한다, 못한다! 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뭐 어떤 일이 있다, 없다! 상관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길, '방주 안에 들어오너라!' 무조건 회복입니다. 온 가정이... 이것이 안 될 때에 뭐가 나오느냐? 사회가 깨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이 바벨탑의 문제입니다. 사회가 구조적으로 하면 할수록 허무에 빠져 버립니다. 벌면 벌수록 멸망에 빠져 버립니다.
저는 요즘 가끔 그 김우중씨가 TV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뭘 느끼느냐하면, 참 허무하구나! 참 허무하구나! 그 많은 돈을 벌어 가지고, 그러면서 한때는 애국자로 부각되었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전락해 버렸습니다. 여러분 정말 복음이 안 되면 결국 나오는 것은 허무입니다. 돈을 벌면 벌수록 허무밖에 안 옵니다. 이것이 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어떻게 됩니까? 허무에 빠집니다. 절대 그 사회를 긍정적으로 안 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식인들이 사회를 긍정으로 안 봅니다. 그래서 교회도 지식인들이 교회를 긍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말세에 교회 모양을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왜? 어지럽고 혼탁하다 그랬습니다. 말세에 사회가 혼란합니다. 여기 저기서 이상한 사이비들이 나오고, 자칭 하나님이 나오고, 자칭 그리스도가 나온다. 약속했습니다. 약속보다도 예언했습니다. 그대로 지금 이루어집니다. 지식 가지고 비판할 것이 아니고 맞다, 옳소이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게 보여져야 됩니다. 이게 안 되면 믿으면서도 범사에 불평입니다. 아무 게 장로 봐라! 아무 게 집사 봐라! 젊은 사람이 목사 하더니만 그렇더라! 아닙니다. 우리 인간 모습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이 성장되어져야! 이게 이루어 져야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이 자리에서 이 사실이 확인 안 되면 우리도 모르게 교만해져서 다른 방향 다른 문제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단이 교묘하게 불 신앙으로 집어넣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으로 통해서 저주가 들어오고 그러면서 사단이 완전히 우리 생활 속에 꽉 사로잡고 뭐든지 사단의 손에 놀아나게 되어 있는, 사망에 왕 노릇 하는, 그 속에 종노릇하는 엄청난 문제에 빠지는 사실을 우리가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분명히 여러분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왜? 교만하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그랬습니다. 이게 안 되면 교만에 빠집니다. 여러분 제가 이 내가 설교를 잘 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게 응답하실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뭘 깨달아야 하느냐? 교만을 떨쳐버리면 '맞아, 하나님의 말씀 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 될 거야!' 붙잡고 기도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말해도 여러분 이게 머리에 들어가지가 않아요. 왜? 교만하기 때문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어요. 여러분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에 앞으로 3월 달 또 한달 낼 겁니다. 여러분 기록을 하시고 만약에 기록을 못 했다면 언제든지 들어오면요. 그 사람과 합류해서 기록해서 예배드리는 사람과 합류해서 기도하면 됩니다. 그런데 또 할겁니다. 여러분 경건의 재료를 내 이익과 결부시키지 않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을 여러분과 교회 위에 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실 것입니다. 받아합시다. "너 하나남의 사람아 하나님은 하실 것이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결론으로 말씀을 맺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제부터 이것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을 피해놓고 이제부터 이것을 가지라 그래서 너 하나님의 사람아 그럴때에 여러분 꼭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나와 여러분은 어떤 환경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받아합시다. 그래도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아침에 자고 일어날 때에 항상 먼저 뭘 생각하느냐? 생각과 마음을 딱 붙잡아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래서 기지개를 쫙 펴면서 아 피곤해 말고 기지개를 딱 펴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새 힘을 줄 겁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십시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신문에 어떤 내용을 봤어요. 뭐냐하면 제일 빠르고 제일 민첩한 동물이 뭐냐하면, 호랑이하고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과 동물이죠. 그런데 여러분 호랑이하고 고양이가 따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더라 구요. 그런데 항상 운동하는 것이 있어요. 언제 입니까? 자고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꼭 하는 것이 있어요. 뭐합니까? 기지개 폅니다. 쫙~! 고양이 기지개 펴는 것 보면 쫙~ 폅니다. 스트레칭! 연단 시킵니다. 그것도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쫙~! 호랑이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운동 안 해요.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운동 하나만 하면 돼요. 쫙 펴면서 '하나님의 자녀다!' 여러분 인생문제 다 해결됩니다. 그러면 근육이 그렇게 윤활하게 움직일 수 있는 그것이 된데요.
왜 제가 이것을 읽었느냐하면, 뭐 운동해서 제가 신문에서 봤는가? 제가 기억이 확실히 안 나는데 뭔가 미국에서 유명한 운동하나를 개발했다고 하더라구요. 그게 뭐냐하면, 이 이론을 가지고 운동 기구를 개발했는데 사람이 기지개 켜는 게 잘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뭐 운동 기구를 가지고 이렇게 기지개를 켜도 이렇게, 뭐 곡선을 그리면서 기지개를 안 켭니까! 진짜 제대로 켤 때에... 그러니까 운동 기구를 가지고 막 하면 곡선을 가지고 제대로 기지개 형태가 나온 데요. 이것을 개발한 운동 기구가 있더라 구요.
내가 거기서 뭐 돈을 받아 가지고 홍보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침마다 딱 일어났을 때마다 항상 마음과 생각에 딱 붙들 수 있는 것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딱 붙들고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뭘 줍니까? 구원을 주시겠다.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운동이 여러분 평생에 축복 받을 운동입니다. 하나만 하세요.
그 다음에 그때부터 나오는 역사가 뭐냐하면요. 진짜 믿음의 싸움이나와요. 여기 12절에 말씀한 것을 보면요.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그랬습니다. 반드시 여러분 영생 취하고 영생 가지고 기도하게 되면 여러분 증거가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말씀 했느냐하면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분명히 여기에 약속입니다. 이 언약을 잡고 이 말입니다.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끝났습니다. 확실히 이걸 붙잡아야 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여러분 이제는 내 위치가 '뭐 아버지가 어떻다, 어머니가 어떻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의 아버지, 어머니와 비교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 이걸 자꾸 부인하니까! '혹시 부모는 너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너를 버리지 않는다' 고 그랬습니다.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 엄청난 축복과 은혜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혹시 오늘 아침에 사기를 약간 치고 왔습니까? 받아합시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사람이 살다가 보면 내 자식들한테도 사기 치는데 거짓말하는 그것이 사기치는 것 아닙니까? 걸핏하면 뭐 아이들한테 말한다는 것이 입만 열면...
그래서 제가 여러분 가만히 보니까? 그 할머니 되는 사람도 그렇고, 그 어머니 되는 사람도 그렇고, 그리고 나도 그렇고 야, 참! 우리가 사는 삶에서 완전히 체질이 되어 있더라 구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아이들이 한번 딱 말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변해 버려요. 내가 거짓말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 아이가 변한다는 데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래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실이 딱 마음에 자리를 잡아야 됩니다. 이거면...
여러분 하나님이 죽었습니까? 그러면 이게 안 된다면 하나님은 죽었다고 믿어 야죠. '사신 신학'이 정말 신학이 되어야 되죠.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죽었다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어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여러분과 제게 말씀잡고 약속잡고 기도하고 나갈 때마다 관절과 골수와 혼과 영과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꾸시는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사실적인 역사로 오늘 우리에게 약속 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단을 결박하고 사단을 내어쫓고 사단을 위해서 기도한다. 그래서 뭐 결박한다는 문제 가지고 자꾸 이의를 삼더라 구요. 결박을 하던지, 밟던지, 죽이던지! 우리가 내용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단의 세력을 기도로 꺾을 수가 있습니다. 그의 세력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흑 암들이 물러갑니다. 이 사실을 좀 바로 알고 분명히 기도할 때에 받아합시다. "기도는 100%응답이다" 다 응답됩니다. 다 응답이 되어요. 여러분 지금 임시로 응답 안 된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다 응답이 됩니다.
자 그러면 따라 오는 것이 뭐냐하면 받아합시다. "이제는 내 모든 과거가 다 끝났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 되었는데 옛날하고 똑같으면 안 되죠. 얼굴도 새 것이 되어야 되죠. 싹~! 웃어보세요. 얼마나 좋습니까? 맨 날 남편보고 눈 흘기고, 뭐 같이 해 가지고, 남편도 맨 날 성이 나 가지고 막 이러고... 싹! 한번 웃어 보세요.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황 수 관' 박사가 웃어라 안 그랬습니까? 그래도 달라지는데 복음 통해서 성령의 구체적인 권한과 능력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거요 문제가 완전 해결됩니다. 뭐. 형편이 어떻다! 사건이 어떻다! 그 말은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십니다. 역사 하시는 축복의 역사!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는 것이 뭐냐하면, 제가 늘 그런 이야기를 하도 자주해서 이제는 여러분들 귀에 너무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만은, 이것은 남아 있어도 괜찮아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 묻지 마세요. 여러분 이제는 옛날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 사람이 아닌데 자꾸 옛날 짓을 하니까 자꾸 문제가 생기거든요.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생각과 마음이 새것이 되어야 삶이 새것이 나옵니다. 그래야 사단이 들어올 수 없어요. 사단의 통로가 닫혀 버립니다. 생각과 마음이 바뀌지 않고 사상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삶에 사단이 마음대로 들어와서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이 문제가 심각하죠.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도 뭐냐하면, '된다! 된다! 그래라. 그러면 된다!' 그거요 안 믿는 사람이 '된다! 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역사가 나오는데, 여러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이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본질상 어때요 진노의 자녀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초기에 가만히 있어라 하나님이 하신다. 이 말이 점점 오늘날 우리가 보면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아요. 뭘 내가 하려고 그래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정 안 되면, 나 자빠져서 자라 안 그랬습니까! 왜 하도 답답하니까! 이 말합니다. 정 안되면 왜? 기다리기에 너무 지루하니까!
그래서 제가 옛날 생각이 납니다 만은, 산에 가서 너무 무서워서 호랑이 굴에 가 가지고, 너무 무서워서 기도가 안 나와요. 그래서 막 '까짓 거 뭐 잡혀가면 잡혀가는 것이고, 일단 모르겠다. 아버지 알아서 하옵소서' 잡니다. 실컷 자고 일어나니 아침이더라 구요. 그래도 평안해요. 그래도 거기서 기도했다고, 그래도 그 이튿날 내려오면서 참 마음이 평안하더라 구요. 여러분 옛날 올바르게 하지도 못하고 왔다갔다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뭘 하려고 발버둥치는 상황에서도 일단 잠깐이라도 맡겼다는 사실 속에 내가 평안을 얻었는데, 여러분 그리스도의 약속을 확실히 잡고, 여러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맡겼다! 하나님의 자녀다! 나올 역사가 너무 엄청납니다.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받아합시다. "이때부터 미래는 걱정 없다" 여러분이 합니까? 내가 합니까? 누가 해요? 하나님이! 누구를 역사 하셔서? 천군 천사 동원한다는 이 말까지 할 것도 없어요. 성령의 역사! 하나님이 완벽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0장 13절 보면요. 뭐라고 말씀 했느냐하면 , 한번 찾아봅시다. 같이 한번 읽어야 이해 안 되겠습니까! 10장 13절에, 고린도 전서 10장 13절 다같이 시작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어떤 면에서 학년이 올 때마다 시험 쳐야돼요. 진짜 시험치는 것은 대학 수능시험 치고, 입학시험 쳐야돼요. 여러분 시험 친다는 말은 반드시 다음 단계를 예비하고 준비한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여기에서 뜻은 그런 뜻으로 배경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초등학생에게, 초등학교 금방 들어간 아이에게 대학 시험문제를 내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냈다, 그러면 야단나요. 교육계도 야단나요. 그렇게 정신 빠진 선생이 어디에 있냐! 그러고 당장 쫓아 낼 겁니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자녀로 믿는다! 그럴 때에 확신 가져야 합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뭐라 그랬냐 하면요. "하나님은 미쁘사!" 미쁘다는 말은 하나님은 예쁘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은 미쁘다는 말이 '하나님은 믿을 수 있다!' 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직스럽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다 아시고 나를 다 아십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절대로 이 시험 줬을 때에 못 풀고 넘어지는 사람이다, 안 줍니다. 안 준다 그랬어요. 우리 미래입니다. 절대로 감당 할 수 있는 시험을 준다. 그 시험을 받을 때에 다음에 축복을 예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없다 싶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다 구요? 피할 길을 미리 예비 다 해 놓았어요. 우리 미래는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축복과 은혜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오늘 여기 무슨 이런 말, 저런 말! 많이 나올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자신이 뭐 이런 말을 벌써 몇 번했습니다 만은, 지금도 느끼는 것은 제가 철야 설교할 때도 상당히 고단하고 그랬습니다. 어저께... 그런데 박 목사님이 뭐라 그러냐 하면, '목사님 참 이상하데요. 일단 뭐 강단에 서서 메시지 할 때는 전혀 고단한 기색이 안 나옵니다.' 그래요. 그게 은혜입니다. 왜? 언제부터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가 그것을 받아 들였어요. '주여 맞습니다. 이로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약함을 통해서 주의 사역을 바로 할 수 있다면 평생이라도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겠습니다.' 이게 받아지는 것이 그렇게 힘들더라 구요. 너무 고통스럽고...
바울이! 그래서 바울에 대한 생애를 상당히 생각을 많이 해 봤죠.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말하기까지가 얼마나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약할 때에 곧 그때가 강함이라' 여러분 현실을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주여 믿습니다!' 부정하지 말고, 불 신앙하지 말고 '주여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루실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조금만 이 믿음 가져도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것을 많이 깨닫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렇게 1,2부하고 나면요. 확실히 힘들어요. 그런데 이 강단에 있는 동안에는 나도 모르게 고함도 지르고 뭐 펄펄한 것 같이 안 보입니까? 그러니까 자꾸 뭐냐하면요.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꾀병이라 그러잖아요. 확실히 꾀병입니다. 왜? 설 때는 아무렇지도 않는데 나도 모르게 힘이 나오니까! 나가면 어떻든 간에...
여러분 오늘에 형편, 연약한 형편, 고통스러운 형편! 그때 뭐냐? 믿음이 오더라 구요. 전에는 '아닙니다. 이거 아닙니다. 이게 아닙니다.' 그랬는데 '주여 옳습니다. 주여 믿습니다. 알겠습니다. 여기에서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미래를 바라보겠습니다.' 그때에 사명이 나옵니다. 그때에 우리 눈을 뜨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엄청난 축복과 은혜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역사가 나오죠.
그러면 이제 여러분과 제가 할 일이 뭡니까? 이제는 할 일이 없어요. 받아합시다. "나 개인으로 다른 할 일이 없다." 뭐 하면 됩니까? 성령의 인도 받아야합니다. 성령의 인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뭡니까? 성령이 여러분과 저를 세우시고 뭘 하라 그랍니까? 세계복음화 그러면 뭘 주겠다 그랬습니까? 여러분과 저와 상관없이 뭘 주겠다고 그랬어요. '증거 주마, 증거거리 주마, 세계 살릴 수 있는 증거 주마!' 거기에 다 포함이 안됩니까? 여러분 이걸 가지고, 경건의 재료가지고 이익을 삼고 내 개인의 이익으로 전락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하실 것입니다. 여기 조금만 눈을 뜨면요. 우리 교회 짓는다 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사람 다 와야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여기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딤전 6:17-19 / 엄기호 목사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욕심 없는 사람을 찾기 위해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길을 가다 첫 번째 사람을 만난 천사는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며 불렀습니다. 그리고 길가의 돌을 금으로 만들어 “이 금을 갖고 싶지 않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입니까? 이왕이면 더 큰 돌을 금으로 만들어 줄 수 없을까요?” 하고 되물었습니다.
두 번째 만난 사람도 마찬가지로 “더 큰 금을 갖고 싶다”고 말해 천사는 실망을 하였습니다. 세 번째 만난 사람은 앞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이 금을 갖고 싶지 않소?” 하고 물으니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더 큰 금을 만들어줄까?”그래도 그 사람은 계속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습니다. 천사는 드디어 욕심 없는 사람을 만났다며 기뻐했습니다. “그럼 무엇을 줄까?” 그러자 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돌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재주를 주십시오.”
말문이 막힌 천사는 욕심이 없는 사람 찾기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영국의 희극 작가는 돈에 대한 묘사를 다음과 같이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돈을 따라 다니면 그를 가리켜 돈에 미친 사람이라 부르고, 돈을 지키기만 하면 그를 가리켜 수전노라 부른다. 또 어떤 사람이 돈을 벌지 못하면 그를 가리켜 야심이 부족하다고 비평하고, 일하지 아니하고 돈을 버는 자가 있으면 그를 가리켜 기생충이라고 부르며, 어떤 이가 일생동안 힘든 일을 해서 돈을 모으면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돈 외에는 인생의 다른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라고 비평한다.”
실로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돈을 좋아하고 돈을 필요로 합니다. 또 누구든지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고, 돈이 자기를 지켜주고, 돈이 자기 장래를 보장해 주고,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도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금도 돈 때문에 도둑질하고, 돈 때문에 강도질을 하고, 돈 때문에 형제끼리, 친구끼리 원수가 되고, 돈 때문에 사랑에 금이 가고, 돈 때문에 전쟁도 일어납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돈 때문에 범죄행위를 하고, 끝내는 자살과 살인이라는 극한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요즘 신문에 보도된 제목만 보더라도 ‘빚 갚지 못해 사채업자 살해’, ‘빚 고민으로 자살’, ‘일가족 동반자살’, ‘주부은행강도’, ‘사채의 늪에서 헤매는 사람들’, ‘카드 빚 때문에 여자 친구 팔아 넘겨’, 등등 나열하기조차 어렵고 가슴아픈 사연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로 가난이 죄요 돈이 웬수인 시대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본능적으로 속박하는 무서운 것이 돈입니다. 돈은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노예로 만드는 강한 마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생동안 꼭 필요한 것이 돈이요, 또한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돈을 벌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 돈이 자신을 노예로 만들어 더 비참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의 축복을 받았다고 자랑은 하지만, 그 돈을 값있고 보람있게 썼다는 경우는 매우 적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돈을 버는 축복도 받고 돈을 쓰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자
재물 그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구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최고의 부요를 누리며 풍족한 삶을 살았고, 신약에 보면 예수께서도 재물을 사용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그것을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재물을 너무 사랑하고 모든 관심을 거기에 집중시킨다면, 그것은 모든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결국은 믿음생활까지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재물은 지금도 멸망의 올무를 쳐놓고 인생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 6:21),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라고 하셨습니다. 돈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악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돈은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돈이 필요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데도 돈이 필요하고, 선한 사업을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귀하고 가치있게 물질을 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돈은 벌어서 가장 적절하고 귀하게 써야 합니다. 그러나 돈은 사랑할 대상은 아닙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고, 그래서 재물을 하나님과 함께 겸하여 섬길 수는 더더욱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믿음에서 떠날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마저 재물을 얻기 위한 도구로 생각합니다. 재물이 많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평안할 것 같지만, ‘그것을 어떻게 지킬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재물을 얻을까?’ 하고 근심과 염려가 더 커지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평안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질병까지 생기게 됩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재물을 선하게 쓰자
본문 18절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격언 가운데 “물질을 다스리라. 그러면 너에게 참으로 유익한 충복이 되리라. 그렇지 못하면 물질은 너에게 폭군이 되어 너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재물을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는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특히 십일조와 헌금을 정성껏 드리십시오. 십일조는 물질적 생활 속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행위요, 천국시민의 의무인 것입니다.
레위기 27장 30절에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야웨의 것이니 야웨께 성물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를 드리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거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결국은 저주를 받게 된다’고 말라기 선지자는 말했습니다(말 3:10).
그리고, 십일조는 자신이 영의 양식을 먹는 그 교회에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떡과 포도주를 주고 축복을 해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듯이, 우리도 떡과 포도주를 먹는 교회에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을 위해서 드려야 합니다. 역대상 29장 3절에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열정으로 나온 헌물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또한 사회사업이나 구제활동 등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첫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을, 두 번째 계명으로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넉넉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은 부족하나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억대의 돈을 가졌을지언정 다른 사람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은 참으로 옹색한 사람이요, 가장 비겁한 사람입니다.
유일한 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유한양행 창업자입니다. 그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했습니다.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공부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라...”라고 했고, 딸에게는 “유한 중, 공고 구내에 있는 묘소 및 대지 5천평을 상속하되, 이를 ‘유한동산’으로 꾸며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울타리를 치지 말라.” 당시 7세였던 손녀에게는 “대학졸업시까지의 학자금으로 내 주식의 배당금 가운데서 1만달러를 마련해 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은 수백억원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을 했습니다. 딸 재라씨 역시, 2백억 전 재산을 사회 환원하였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양로원에서 혼자 외롭게 살다 몇 년 전 천국에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들은 모두 자식 때문에 돈을 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하고 노력해서 번 돈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그 자식들이 착하고 정직하게 또 고맙게 여기며 잘 살 것 같습니까? 오히려 그 재산 때문에 안 지어도 될 죄를 짓고, 그 재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좀 벌었으면 살았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회나 국가에 환원하고, 또 우리의 이웃을 위해 다 쓰고 깨끗하게 주님께 돌아갑시다. 무엇보다 우리의 자식들에게는 영적인 재산을 많이 물려주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는 사람이 받는 복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본문 1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재물을 하늘에 쌓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참 생명을 상급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놓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십니다(신 14:29).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십니다(말 3:10~12).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고후 8:15).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고후 9:6).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고후 9:7). 모든 것에 넉넉하게 하십니다(고후 9:8) .
재물의 가장 안전한 창고는 바로 하늘나라에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신앙 안에서 우리의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 일인 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재물이 여러분이 간절히 구하는 최상의 목표라면 그 재물은 잔인한 주인이 되어, 그것의 힘이 여러분의 영혼을 노예로 만들고 여러분의 생활에는 고통만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재물로, 타인의 축복이 되게 할 때 그 재물은 진정한 의미에서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얽매여 살지 말고 우리의 건강, 시간, 물질을 주님께 드립시다. 목마른 사람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한 심령이 되어봅시다. 이 시간부터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어봅시다. 예수님을 위해 가난해지는 사람이 되어봅시다.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0=9 / 최건호 목사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면서 전도자를 향해서 권면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 상실의 시대에서 인간을 다시 찾고 양심이 무뎌져가는 이 도덕적 불감증의 중태에 빠진 사회에서 죽은 양심을 살려내고 악한 문화와 생명 경시풍조에 대해 도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변화 시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혀가고 악을 선으로 정복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의 길, 하나님의 사람의 사람다운 모습을 성경에서 찾고 하나님의 큰 은혜가 넘치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신33:1). 신명기 33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라고 써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원래 하나님의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궁전에서 권세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호화와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공주의 아들로서 왕자와 같은 대우를 받는 신분이 높은 귀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가 가졌던 애굽궁전에서 배운 학술과 지식과 언변을 가지고 자기 동족을 구원하려고 하다 혈기 때문에 실패한 민족운동의 패배자였습니다. 모세는 우리와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가진 나약하고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이 같이 하신다는 은혜,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경험한 다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맡긴 일을 위해서 애굽 땅으로 순종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맡겨주신 일을 맡아서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 나그네 길에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시키신 일이라고 믿고 하나님의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하고, 가정을 지키고, 먹고 마시게 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잘 못될 때는 언제나 회개하고 돌아올 줄 아는 사람입니다(삼하12:13).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답지 못한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해서 복을 주시고 왕이 되고 호화로운 왕궁생활을 하면서 왕의 의자에 앉아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던 때에 범죄 했습니다. 그는 부하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기 위하여 부하를 전쟁터에서 희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자녀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베옷을 입고 무릎을 꿇고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죄를 통회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특별하거나 특이한 사람, 사회적으로 특별한 것이 보장 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잘 못될 때는 언제고 회개하고 돌아올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 언제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생의 방향전환 인생의 목표전환 인생의 가치를 하나님을 중심으로 바꿔놓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셋째, 인내와 온유와 겸선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입니다(왕상18:44). 하나님은 사람은 엘리야 같은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인내와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사람과 대화 할 때, 사업과 사업의 거래가 이루어질 때,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해야 합니다. 더 나가서 중요한 것은 성급하지 말고 인내하며 해야 합니다. 이사야 55장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길과 나의 길이 같지 않다”고 그랬습니다. “나의 생각이 너의 생각보다 높고 나의 길이 너의 길보다 높아서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높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높고 영원하고 완전한 뜻에 맞추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오래참고 인내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나님을 보내심을 받은 사명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뜻을 따라 회개하며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기 위해 온유와 인내와 겸손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시는 영생을 얻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딤전 6:17-19 / 엄기호 목사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욕심 없는 사람을 찾기 위해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길을 가다 첫 번째 사람을 만난 천사는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며 불렀습니다. 그리고 길가의 돌을 금으로 만들어 “이 금을 갖고 싶지 않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입니까? 이왕이면 더 큰 돌을 금으로 만들어 줄 수 없을까요?” 하고 되물었습니다.
두 번째 만난 사람도 마찬가지로 “더 큰 금을 갖고 싶다”고 말해 천사는 실망을 하였습니다. 세 번째 만난 사람은 앞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이 금을 갖고 싶지 않소?” 하고 물으니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더 큰 금을 만들어줄까?”그래도 그 사람은 계속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습니다. 천사는 드디어 욕심 없는 사람을 만났다며 기뻐했습니다. “그럼 무엇을 줄까?” 그러자 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돌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재주를 주십시오.”
말문이 막힌 천사는 욕심이 없는 사람 찾기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영국의 희극 작가는 돈에 대한 묘사를 다음과 같이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돈을 따라 다니면 그를 가리켜 돈에 미친 사람이라 부르고, 돈을 지키기만 하면 그를 가리켜 수전노라 부른다. 또 어떤 사람이 돈을 벌지 못하면 그를 가리켜 야심이 부족하다고 비평하고, 일하지 아니하고 돈을 버는 자가 있으면 그를 가리켜 기생충이라고 부르며, 어떤 이가 일생동안 힘든 일을 해서 돈을 모으면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돈 외에는 인생의 다른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라고 비평한다.”
실로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돈을 좋아하고 돈을 필요로 합니다. 또 누구든지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고, 돈이 자기를 지켜주고, 돈이 자기 장래를 보장해 주고,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도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금도 돈 때문에 도둑질하고, 돈 때문에 강도질을 하고, 돈 때문에 형제끼리, 친구끼리 원수가 되고, 돈 때문에 사랑에 금이 가고, 돈 때문에 전쟁도 일어납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돈 때문에 범죄행위를 하고, 끝내는 자살과 살인이라는 극한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요즘 신문에 보도된 제목만 보더라도 ‘빚 갚지 못해 사채업자 살해’, ‘빚 고민으로 자살’, ‘일가족 동반자살’, ‘주부은행강도’, ‘사채의 늪에서 헤매는 사람들’, ‘카드 빚 때문에 여자 친구 팔아 넘겨’, 등등 나열하기조차 어렵고 가슴아픈 사연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로 가난이 죄요 돈이 웬수인 시대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본능적으로 속박하는 무서운 것이 돈입니다. 돈은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노예로 만드는 강한 마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생동안 꼭 필요한 것이 돈이요, 또한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돈을 벌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 돈이 자신을 노예로 만들어 더 비참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의 축복을 받았다고 자랑은 하지만, 그 돈을 값있고 보람있게 썼다는 경우는 매우 적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돈을 버는 축복도 받고 돈을 쓰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자
재물 그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구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최고의 부요를 누리며 풍족한 삶을 살았고, 신약에 보면 예수께서도 재물을 사용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그것을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재물을 너무 사랑하고 모든 관심을 거기에 집중시킨다면, 그것은 모든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결국은 믿음생활까지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재물은 지금도 멸망의 올무를 쳐놓고 인생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 6:21),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라고 하셨습니다. 돈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악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돈은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돈이 필요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데도 돈이 필요하고, 선한 사업을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귀하고 가치있게 물질을 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돈은 벌어서 가장 적절하고 귀하게 써야 합니다. 그러나 돈은 사랑할 대상은 아닙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고, 그래서 재물을 하나님과 함께 겸하여 섬길 수는 더더욱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믿음에서 떠날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마저 재물을 얻기 위한 도구로 생각합니다. 재물이 많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평안할 것 같지만, ‘그것을 어떻게 지킬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재물을 얻을까?’ 하고 근심과 염려가 더 커지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평안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질병까지 생기게 됩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재물을 선하게 쓰자
본문 18절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격언 가운데 “물질을 다스리라. 그러면 너에게 참으로 유익한 충복이 되리라. 그렇지 못하면 물질은 너에게 폭군이 되어 너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재물을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는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특히 십일조와 헌금을 정성껏 드리십시오. 십일조는 물질적 생활 속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행위요, 천국시민의 의무인 것입니다.
레위기 27장 30절에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야웨의 것이니 야웨께 성물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를 드리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거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결국은 저주를 받게 된다’고 말라기 선지자는 말했습니다(말 3:10).
그리고, 십일조는 자신이 영의 양식을 먹는 그 교회에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떡과 포도주를 주고 축복을 해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듯이, 우리도 떡과 포도주를 먹는 교회에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을 위해서 드려야 합니다. 역대상 29장 3절에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열정으로 나온 헌물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또한 사회사업이나 구제활동 등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첫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을, 두 번째 계명으로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넉넉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은 부족하나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억대의 돈을 가졌을지언정 다른 사람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은 참으로 옹색한 사람이요, 가장 비겁한 사람입니다.
유일한 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유한양행 창업자입니다. 그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했습니다.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공부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라...”라고 했고, 딸에게는 “유한 중, 공고 구내에 있는 묘소 및 대지 5천평을 상속하되, 이를 ‘유한동산’으로 꾸며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울타리를 치지 말라.” 당시 7세였던 손녀에게는 “대학졸업시까지의 학자금으로 내 주식의 배당금 가운데서 1만달러를 마련해 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은 수백억원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을 했습니다. 딸 재라씨 역시, 2백억 전 재산을 사회 환원하였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양로원에서 혼자 외롭게 살다 몇 년 전 천국에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들은 모두 자식 때문에 돈을 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하고 노력해서 번 돈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그 자식들이 착하고 정직하게 또 고맙게 여기며 잘 살 것 같습니까? 오히려 그 재산 때문에 안 지어도 될 죄를 짓고, 그 재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좀 벌었으면 살았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회나 국가에 환원하고, 또 우리의 이웃을 위해 다 쓰고 깨끗하게 주님께 돌아갑시다. 무엇보다 우리의 자식들에게는 영적인 재산을 많이 물려주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는 사람이 받는 복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본문 1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재물을 하늘에 쌓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참 생명을 상급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놓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십니다(신 14:29).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십니다(말 3:10~12).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고후 8:15).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고후 9:6).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고후 9:7). 모든 것에 넉넉하게 하십니다(고후 9:8) .
재물의 가장 안전한 창고는 바로 하늘나라에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신앙 안에서 우리의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 일인 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재물이 여러분이 간절히 구하는 최상의 목표라면 그 재물은 잔인한 주인이 되어, 그것의 힘이 여러분의 영혼을 노예로 만들고 여러분의 생활에는 고통만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재물로, 타인의 축복이 되게 할 때 그 재물은 진정한 의미에서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얽매여 살지 말고 우리의 건강, 시간, 물질을 주님께 드립시다. 목마른 사람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한 심령이 되어봅시다. 이 시간부터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어봅시다. 예수님을 위해 가난해지는 사람이 되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