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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오정희론
김화영
사람을 겁나게 하는 것은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적이다. 겁을 내는 것은 패배를 앞질러 드러내는 것이기 에 치욕스럽다. 겁을 먹은 사람은 이미 내기에서 진 것이다. 그것도 순전히 자기 자신만의 잘못으로 인하여. 그는 자신을 에워싸 고 있는 상전들과 적들의 노예다. 그의 바지가 축축히 젖어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은 다르다. 모파상은 "공포"라는 유명한 단편소설에서 겁과 두려움 사이에 가교를 놓았다. 그가 글을 쓰던 시 대는 무지의 소산인 신비가 이성과 과학에 의하여 날이 갈수록 말끔히 씻겨나가고 있다고 굳게 믿던 과학만능주의 시대였음을 상 기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오직 미신만이 우리들 주변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울 수 있다는 것이 다. 그러나 모파상은 태고 이래의 해묵은 무의식 속에서 겁을 초월하는 어떤 두려움의 세계를 발견한다 : “우리가 극도의 불안 이라고 부르는 끔찍한 영혼의 발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단순한 공포만이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수세기에 걸친 미신적인 두려움 이 약간 더 보태어졌을 때이다” 라고 그는 썼다. 그러니까 격세유전적인 공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공포는 우리들 각자의 마 음속에 잠들어 있는 생래적인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신비를 만나게 되면 해묵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 는 긴 세월 동안의 인류 전체가 우리들의 내면에서 진저리를 치는 것이다.
두려움은 명백한 대상이 따로 없다. 우리에게 겁을 주고 공포를 느끼게 하는 대상은 어떤 적대적인 존재인 반면, 두려움을 주 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부재다. 두려움의 가장 유아적인 형태는 어둠이다. 어둠은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어떤 괴물 때문이 아니다 . 어둠은 그 자체로서 공포의 대상이다. 다음으로는 텅 빈 공허가 불러일으키는 불안인 현기증이 있다. 현기증은 단순히 추락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라는 파스칼의 저 유명한 말은 침묵, 무한, 그리고 영원이라는 공포의 세 가지 원천을 손가락질해주고 있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아이는 두려움을 쫓기 위하여 노래를 지어내어 흥얼거린다. 그러나 장 콕토는 말한다. 그 방법을 써본 결과 결국은 자신이 지어내 부르는 노래 가사 때문에 그만 더 섬뜩해지더라고 술회한다.
두려움은 인간에게 스스로의 고독을 일깨워주고 그리하여 그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일깨워준다. 두려움은 반성과 문화 의 산물이다. “초월적인 사고에 길든 모든 교사들과 스승들은 물러가라. 인간에게 두려움의 영역을 넓혀놓기만 하는 모든 책들 을 없애버리라. 그리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행복한 안락으로 돌아가자”고 피에르 로티는 반어적으로 표현했다. 문명은 안도감 을 주는 보호의 누에고치인 데 반하여 문화는 무한을 향하여 열린 두려움 가득한 창문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장 폴 사르트르가 볼 때 불안은 무의 드러남이고 구토는 존재의 나타남을 가리켜 보인다. 신비주의자들은 그것이 광활한 신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좁은 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콥 뵘은 이렇게 쓰고 있다. “두려 움과 두려움의 극복을 통해서 영원한 삶이 무에서 솟아난다.” 그리고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이렇게 쓴다. “두려움에 대한 치유 방법은 오직 두 눈 딱 감고 신의 의지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뿐이다.”―미셸 투르니에, "겁과 두려움"
어두워오는 창가의 여자
하루 중에는 프랑스 사람들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부르는 시간이 있다.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하고 땅거미가 내리면서 저만큼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미묘한 시간을 말함이다. 집에 서 기르는 친숙한 가축이 문득 어두운 숲에서 내려오는 야생의 짐승처럼 낯설어 보이는 저 섬뜩한 시간, 그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바로 오정희1)1) 오정희는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40편의 중? 단편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불의 강』(1977, 문학과지성), 『유년의 뜰』(1981, 문학과지성), 『바람의 넋』(1986, 문학과 지성), 『불꽃놀이』(1995, 문학과지성), 『새』(1996, 문학과지성)에 차례로 나뉘어 수록, 출판되었다. 다만 단편 『저 언덕』 만은 위의 책들이 아닌 창작선 『옛우물』(1994, 청아출판사)에만 수록되어 있고 1975년작인 "야곱의 꿈" "동행", 1983년작 인 "멀고 먼 저 북방에"는 위의 어느 책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글은 위의 6권에 나뉘어 수록된 총 37편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반면 장편 동화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1993)와 꽁트집 『술꾼의 아내』(1993)는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의 시간이다.
이 작가가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작품 "완구점 여인"은 의미심장하게도 바로 그런 시간에 시작된다.
태양이 마지막 자기의 빛을 거둬들이는 시각이었다. 어둠은 소리없이 밀려와 창가를 적시고 있었다. 어둠이 빛을 싸안고 안개 처럼 자욱이 내려덮일 때의 교실은 무덤 속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여기에는 이미 빛에서 어둠으로의 점진적 이동, 침묵, 타자로부터의 고립, 밖이 내다보이는 창, 죽음의 연상 등 파스칼적 두려 움의 대상들, 즉 장차 오정희의 세계를 구성하게 될 전형적 요소들이 대부분 다 등장하고 있다. 바로 이 정경 속에 오정희의 상 상력의 씨앗이 묻혀 있는 듯하다. 이처럼 오정희의 인물들은 언제나 어두워오는 창가에, 혼자, 오두마니 앉아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인물과 세계 사이에는 흔히 창문이 가로놓여 있다. 창문은 투명하여 그 너머로 던지는 시선의 끈으로 인물과 세계를 맺어 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를 세계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다. 이것은 미셸 투르니에가 말하는 “무한을 향하여 열린 두려움 가득한 창문”이다. 이 창문은 무한으로 뚫린 통로인 동시에 밀려오는 어둠과 더불어 인물 자신의 고독한 운명을 되비추는 거울이 된다 . 이렇게 오정희의 인물은 세계 앞에서의 고독 그 자체인 양 앉아 있다.
강과 섬
이 고립과 단절을 강화하듯이 그의 시선 저쪽에는 으레 강물이나 섬이 가로놓여 있다. 세계는 창 너머, 그리고 강 건너 저만큼 물러나 있다. 강은 “건너야 할” 장애인 동시에 비밀에 싸인 “저 건너”의 세계를 유혹처럼, 그리움처럼, 그리고 두려움처럼 손가락질해 보인다. "직녀"에서는 주인공이 창을 열 때 “시선이 닿는 곳에 개천이 흐르고 있다”. 개천은 꽤 물이 많고 빛이 짙어 그 위에 걸린 ‘나무다리’는 “흔들릴 듯 가늘게” 뵌다. 그리고 그 “다리를 건너는 남자의 휘엿한 모습이 눈에 띄곤 한 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이쪽으로 건너오는 법이 없다. 오정희의 ‘직녀’에겐 칠석날이 없다. 오작교는 가늘고 흔들리는 일방통 행로일 뿐이다. "불의 강"에서 “어미 등을 파먹으며 산다는” 거미가 내려오는 시각, 고독 그 자체의 형식인 양 “창틀에 동 그마니 올라앉은 그”의 시선도 “창 너머 나직이 내려다뵈는 강 언저리를 더듬고 있다”. "야회"의 명희가 내다보는 창밖에도 “헐벗은 나무 사이로 산등성이 뒤를 감아 흐르는 강물은 한층 파랗게 보였다”. 최근의 작품인 "옛우물"의 경우도 예외는 아 니다. 거기에도 “연인들이 저물도록 강물을 바라보다가 돌아가는” 찻집이 있고 “강이 맞바로 내다보이는 창가의 탁자”를 차 지하고 있었던 낯선 사람의 빈 자리가 들여다보인다. 주인공인 화자는 “그가 내 어깨 너머로 바라보던 강과 강물 위에 떠 있는 갈대숲 우거진 작은 섬을 바라본다”. 이렇게 오정희의 인물들은 대부분 혼자 있고, 시선의 저쪽에는 강이 있고 섬이 있고 정적 과 어둠이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강박적으로 이 라이트 모티프를 변주시키고 있다.
불분명하고 모호하고 막연한 시간
‘교실’에 앉아 있는 "완구점 여인"의 소녀에서부터 이후 다양한 연령의 여자들과 남자들을 거쳐 최근작인 "새"의 소녀에 이르기까지 오정희의 수많은 인물들은 “저녁에서 밤에 이르는 저 불가사의한 시간”("하지")을 맞이하는 모습으로 우리들 앞 에 나타나게 된다. 멀리서 오는 죽음의 어둠이 어렴풋이 투영되고 있는 듯한 이 박명은 흔히 “푸르끼리한” 빛, “검푸른 빛” 을 드러내며 “으쓱 한기를 느끼게” 한다. 등화관제 훈련중인 "어둠의 집" 안에서는 십사 인치 텔레비전의 텅 빈 화면이 “검 푸른 빛”으로 “불투명”하게 떠 보인다. "봄날"의 ‘나’는 어두워가는 텅 빈 집안에서 남편의 고향 후배와 마주 앉아 있다. “투명한 유리컵의 표면에 형광등의 푸르끼리한 빛이 묻어 있었다. 나는 으쓱 추위를 느꼈다. 그 창백한 불빛은 조금의 온기도 없이 그와 나 사이에 완강히 버티고 있었다. 사자의 얼굴에서 빛나는 인처럼.” 오정희의 인물들은 바로 이런 불투명한 시간의 창가에 고독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보는 것일까?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지금은 고요할 때"의 여주인공은 창가에서 산을 헐어내어 평지를 만드는 공사장의 모습을 내다본다 : “어두워가는 벌판의 한 점을 뚫어지 게 응시하면서 연희는 열심히 생각해본다. 무엇이 있었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사라진, 그러나 결국 한순간 눈에서 사라 진 산의 모습은 아무리 애써도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 “저녁쌀을 씻다가 문득 눈을 들어 어두워지는 숲이나 낙조를 바라보 는”("옛우물"), 혹은 “저문날 문득 휘장처럼 드리워지는 정체 모를 우수”("저 언덕")를 느끼는 이 기이한 시간은 오정희 의 인물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열심히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다. 평범한 가정주부인 "야회"의 화자는 더욱 절실하게 말한 다. “오후 다섯시와 여섯시 사이의 " 그것은 명혜가 인생에 대한 어떤 막연한 느낌을 갖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다. 오정희 의 인물들에게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삶에 대한 각성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그것은 “천연한 몸짓 속에 미만한 독기”를 가득 담은 채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억눌린 욕정으로 소리없이 강펄로 기어나오는” 전갈의 시간이다.("전갈") 그러나 이러한 각 성은 결코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짙어지는 어둠에 의하여 촉발된, 그 박명처럼 ‘막연한’ 것이다.
그러나 막연한 채로나마 일단 솟아오르면 그 질문은 어떤 근원적인 쪽으로 치닫는다. "지금은 고요할 때"의 여자는 자문한다 . “무엇이 있었던가?” 이 의문은 존재와 부재에 대한 의문이다. 이 질문은 존재가 비존재로 이동함으로써 떠오른 질문이다. 무 엇이 있었던가? 산이 있었다. 그리고 산이 사라졌다. 있음이 과거시제로 변하는 시간. 그러나 사실은 이 시각에 어떤 ‘소설적’ 인, 혹은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다. 있다면 미묘한 변화,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선뜩한 느낌, 환상, 내면의 의식을 비추는 어떤 순간적인 섬광, 시선, 숨결, 냄새, 소리, 촉감과 같은 매우 미세하고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것들뿐이다. 그리고 간혹 벽시계 소리. “어두워진다는 느낌이 마루의 벽시계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 것인지, 벽시계 소리에 어둠을 감지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야회") "새"의 소녀는 말한다. “낮은 밝고 밤은 어둡다. 그러나 해가 지고 밤이 되기까지의 불분명하고 모호한 어스름,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우며 밀려와 가슴을 꽉 막히게, 안타깝게 하는 그 무엇에 이름 붙일 수 없 는 것처럼 그때와 지금,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그 사이를 흐르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 시간은 이미 환하 게 밝은 대낮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캄캄한 한밤의 어둠은 아니다. 오정희의 시간은 밝음에서 어둠으로 옮아가는 ‘불분명한 ’ 시간이다. 이 불분명함, 불투명함, 모호함은 무서운 전염성이 있다. 그것은 빛과 어둠, 이편과 저편,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 의 시간적 공간적 경계를 불분명하게 한다. 그래서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익숙하던 세계가 ‘낯설어지는’ 섬뜩한 시간인 것 이다. 그것은 마침내 존재에 대한 근원적 의혹을 불러일으켜 투르니에가 말하는 ‘현기증’을 자아내기에 이른다.
낯설게 하기
오정희의 많은 작품들, 특히 초기 단편들의 시작부분(incipit)을 읽는 독자들이 마치 미로 속으로 접어든 듯한 해독의 ‘혼란 ’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대개 이 같은 빛과 의미의 불투명성에 기인한다. "별사"에 이르면 그 시작부분이 보여주는 환상적 장 치의 정치함이 극에 달하지만, 독자들이 여러 작품의 초입에서 영화관 어둠 속의 암반응처럼 힘겹게 극복해야 하는 이러한 시각 적 ‘낯설음’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서술장치의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오정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가장 친근 한 일상 속에서 문득 빠끔히 열리는 저 낯설음의 시간, 낯설음의 세계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발들여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리하여 대부분이 1인칭인 화자와 더불어 돌연 불투명의 세계 속으로 들어선 독자 자신이 잠시 동안 텍스트 안의 ‘미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가령 "새벽별"의 처음 한 페이지는 문자 그대로 영문을 알 수 없는 ‘미로’의 묘사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 ‘미로’ 혹은 ‘미궁’은 알고보면 약간의 취기를 느끼는 인물이 호텔 안에서 화장실을 찾아 복도를 헤매는 과정에 불과하다. 다음은 “조명이 흐린” 호텔 디스코텍 홀 안의 장면이다.
시나브로 촛불이 잦아들고 있었다. 마지막 사위는 불꽃에 희서의 얼굴이 잠깐 붉게 일렁이며 드러났다. 누구인가? 정애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 밑바닥을 훑고 지나간 서늘함을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막다른 길에 접어든 듯한, 혹은 나는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의 느닷없음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촛불이 꺼졌다. 불분명한 빛이 거두어진 탁자는 한결 안정되고 가라앉아 보였고 무대를 향한 그의 실루엣은 다시 낯익은 모습이 되었다.
―"새벽별" 중에서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불투명함과 낯설어지기의 상관관계다. 촛불이 아주 꺼지고 “불분명한 빛이 거두어진” 어둠 속에서는 오히려 사물이 “한결 안정되어 가라앉아” 보이는 반면 “촛불이 잦아드는” 순간의 불투명 속에서는 ‘일렁임’(현기 증) 현상과 더불어 “가슴 밑바닥을 훑고 지나간 서늘함”이 느껴지고 일련의 “본질적인 물음”들이 솟아오른다는 사실이다. 돌 연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낯설어진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타자에 대한 낯설음에서 솟아오른 질문은 곧 거울에 반사 되듯 의식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가면의 속살 같은 얼굴은 단순히 낯설음 이었다. 자신의 얼굴 역시 그러하리라” 하고 "새벽별"의 정애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존재에 대한 근원적 의문이 까닭 없이 불쑥 솟아오르게 하는 것은 일종의 ‘고아의식’이다("바람의 넋") : “내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안타까움과 갈증만 남아 한자락 스쳐가는 바람에도 펄럭이며 함께 흐르곤 했다.” 이처럼 낯설어지기, 고아의식 그리고 미로체험은 연쇄적으로 서 로 맞물려 일어난다. ‘본질적 물음’은 늘 그것 특유의 강한 전염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낯설음은 근본적으로는 ‘친숙한’ 일상의 무대장치, 조명, 혹은 바라보는 시각의 돌연한 변화로 인하여 초래된 것이다 . 이리하여 오정희의 세계 속에서는 낯익고 가까웠던 존재가 돌연 ‘멀리’ 놓여 보이곤 한다. 낯설음은 습관과 무대장치의 붕괴 이며 ‘거리’의 인식이다. 카뮈는 이것을 ‘부조리’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카뮈의 시간이 정오라면 오정희의 시간은 황혼녘이 다. 어쨌든 이때 자아와 대상, 자아와 세계는 서로를 소외시키게 되어 그 사이에 섬뜩한 틈이 생긴다.
"별사"의 정옥은 묘비 사이로 까치를 쫓아 뛰어다니는 자신의 아이를 보며 돌연한 의문에 빠진다. “아이를 이처럼 남의 아 이 보듯 멀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짧은 반바지에 깃 없는 셔츠를 입고 무고하게 뛰노는 아이는 누구인가.” 어머니와 아이 사 이에 가로놓이는 거리, 이것이 낯설음이다. "전갈"의 여자도 한밤중에 같은 경험을 한다. “문 하나 건너 자고 있는 아이들이 비현실적인 존재로 아득히 떠올랐다. 물컵을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자신에게 대해 그러하듯.” 여기서는 타자에 대한 낯설음이 곧 자기에 대한 낯설음을 비추는 거울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사물도 그것이 놓인 자리가 바뀌면 낯설어진다. 가장 친숙하고 가장 일상적인 범속함 속에서 문득 낯설고 섬뜩한 것을 포착하는 데는 오정희를 따를 사람이 없다. 낯익었던 대상이 뜻하지 않은 환경 속에 놓여 돌연 ‘이물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옛우물"의 화자는 ‘눈에 익은’ 자신의 스카프가 남의 집 울타리에 걸린 것을 발견한다. “엉뚱한 장소에 놓인, 붉은 무늬가 요란한 낡은 스카프는 이물스럽고 부끄러웠다. 내게 익숙하고 내 몸에 걸쳤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사물뿐이랴. "야 회"에서 남편과 마주친 명혜는 “집 밖의, 전혀 우연한 장소에서 가족을 볼 때의 슬픔과 순간적으로 외면하고 싶은 감정을 예외 없이 맛보며 이마를 찡그린다”. "옛우물"의 화자 역시 우연히 길거리에서 남편의 차를 발견하자 “나 자신도 모르게 남편의 시야에서 비껴섰다. 남편은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순간적인 내 태도와 감정에 당황했다.” "그림자 밟기"의 화자도 집 밖에서 만난 남편 명재를 갑자기 ‘객관적’ 시선으로 보는 낯설음을 경험한다 : “경옥은 명재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그녀 자신, 앞에 앉은 민수보다 더 명재를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하는 것이다.
"바람의 넋"에서 남편은 아내가 가출하자 옛 신혼여행지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아내를 발견하자 더욱 커다란 충격을 경험한 다. “그토록 생생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낯설고 서먹서먹하다는 것이 나를 새로운 혼란으로 빠뜨렸다. 일주일이란, 6개월 동안의 생활을 무산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인가.” 낯설음은 단순한 놀라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붕괴로 증폭된 다. "바람의 넋"의 남편은 그 같은 붕괴를 아프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아내의 가출 때마다 아내의 눈에 비친 우리의 생활, 보잘것없이 초라한 내 모습 따위에 살 맞은 늙은 짐승처럼 무력하게 괴로워했다. 상처가 다시금 더 깊고 생생하게 입을 벌렸다. 상처는 나은 게 아니었다. 표면상의 무마였으며 속임수였을 뿐이었다. 마치 조금씩 새어나와 스미는 물이 어느 결엔가 지반을 무 너뜨리듯 다른 형태로 우리 생활에 배어들어 꿈이라든가, 소망, 신뢰들을 잠식해가는 것이다.”
미로체험
저것은 무엇인가? 저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낯설음이 야기하는 이런 일련의 의문들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일종의 미로체험으로 인도한다. 오정희의 많은 인물들은 길을 잃는다. 그리하여 "새벽별"의 정애처 럼 여기가 어디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의 두려움 " 그 속에서 문득 존재의 두려운 참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비어 있는 들"의 ‘나’처럼 오정희의 인물들은 대개 저물녘, 아이의 손을 잡고, 혹은 아이를 업거나 안고서, 길을 잃는다. 그는 “더이상 젊지 않은 여자로서 낯선 저녁 거리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아니면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얼굴의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내 모습을 보곤 한다”고 고백한다. "꿈꾸는 새"의 ‘나’는 아이를 업고 집을 나섰다가 “언젠가 한 번 와본 듯 낯익은 거리”에서 길을 잃는다. 골목의 특징은 “다만 어둡고 길었다는 느낌”과 “빈 우물”뿐이다. 그러나 “당숙 모의 집으로 가는 길은 물론 내가 여지껏 지나온 길도 전혀 기억할 수 없다.” "야회"의 명혜도 아이를 업고 밤길을 돌아오다 가 혼잣말처럼 아이에게 말한다. “난 가끔 아주 쓸쓸하거든. 그런데 여기가 어디쯤이더라. 집으로 가는 길을 기억하겠니?” 존 재의 고독과 미로체험은 맞물려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조건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을 유발한다. ‘아이 업은’ 여자의 길 잃음은 바로 이 같은 근원성을 의미한다. 낮 동안에는 습관과 온갖 사회적 장치들에 의하여 보호받고 있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 던 어른들도 어두워오는 시간이면 가끔 자신이 아이가 되어 그 모든 인위적 갑옷의 무력함을 느낀다. 등에 업힌 어린아이는 문득 감춰져 있던 어른 자신의 생래적 두려움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상하지? 난 어릴 때는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없 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른이 되었어도 밤이 되면 가끔 집에 가는 길도 잃어버리다니” 하고 말하는 그는 “참을 수 없는 두려움으로 눈을 감는다”. 그 눈감음은 동시에 자신에 대한 ‘낯설음’과 관련이 있다. 명혜는 겁에 질린 아들을 상대로 술주 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는 무서움”에서 도망치고자 “있는 힘을 다해” 눈을 감았던 것이다.
"바람의 넋"에서 끊임없이 “내가 누군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고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다” 라고 믿는 은수는 가출을 반복한다. 그는 아이를 데리고 유년시절에 살던 동네를 찾아간다. 옛날의 흔적을 연상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은수는 마치 장님이 길잡이를 세우듯, 어쩌면 어린날의 자신의 손을 잡고 걷듯 몽롱한 비현실감에 빠져들며 기억 속의 집을 찾아 승일이의 손을 꼭 잡고 완전히 낯설어진 골목을 기웃거렸다.” 오정희의 작품 속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장님’들은 이런 미로체험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일시적인 길잃음이 아니다. 그녀의 가출, 아니 그녀의 삶 자체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일종의 근원적 미로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순례자의 노래"에서 혜자는 “어릴 때부터, 그리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종종 꾸던 꿈” 속에서 미로 체험을 반복한다. “여기가 어딘가, 그 전에도 왔었는데, 하며 너무도 익숙한 분위기에 친근하게 중얼거리곤 했다. 시작도 끝도 종잡을 수 없는 하나의 길, 헤매임이었을 뿐이었지만 꿈을 깨임이란 또 역시 줄곧 따라가던 길의 잃음에 다름아니어서 혜자는 잠 을 깬 후에도 미아처럼 막막하고 안타까운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하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길이었 을까.” 그러나 “더 깊은 어둠을 향해 한 걸음씩 옮겨놓는” 생시의 길 역시, 혼자 따돌림당한 그 고독한 “순례자”의 길 역시 , 미아의 길임에 틀림이 없다.
미아의 울음
혜자의 ‘꿈’이 “어릴 때부터” 반복되어온 것으로 미루어볼 때 미로체험은 일시적인 이상 체험이 아니라 그의 어떤 근원적 조건과 맞물려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꿈을 깨임이란 또 역시 줄곧 따라가던 길의 잃음에서 다름아니”라고 말한다. 그 렇다면 그의 길잃음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그 길잃음은 원초적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정희 의 소설에서는 해가 질 때나, 잠에서 깰 때 “서럽디서러운 소리로 우는”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울음은 바로 근원적 미아 의 울음이다. "인어"의 순영은 “바닷가에 버려졌던” 문자 그대로의 미아로서 입양해온 첫날부터 근 1년 동안 까닭을 알 수 없게 ‘밤울음’을 울었다. "하지"의 딸아이는 “자다가 깨어 우는 버릇”이 있고 아들아이는 “어둠에 대해 병적인 공포를 갖 고 있다”. "비어 있는 들"에서 잠이 들었던 아이는 눈을 뜨며 어머니를 “서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유년의 뜰"의 동생처럼 "저 언덕"에 등장하는 아이 수방이는 “비단 잠에서 깨어날 때”뿐만 아니라 “해저물녘이면 까닭 없이 울음보를 터뜨렸다”. 아이의 어머니가 느끼는 이 울음의 의미는 매우 시사적이다. “두 살짜리 아이의 검질기고 끈덕진 긴 울음은 어미인 원단 자신을 비롯한 모든 관계에 대한 거부. ‘여기가 어디야 여기가 어디야’ 혹은 ‘아니야, 아니야’라는 강한 부정과 안타까운 헤매임처럼 들리고 어쩌면 아이가 낯선 세상에 놀라 이 세상에 오기 전의 그 어떤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헛된 원망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이의 울음에는 아마도 영원히 표현되지 못할 안타까움, 갈망, 두려움이 들어 있어 원단은 아이 와 함께 미망 속에 던져진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이러한 원단의 ‘느낌’에 의하건대, 아이의 울음은 자신이 태어난 세계에 대한 낯설음, 자기소외, 고아의식, 미로체험 그리고 미아의 근원적 두려움을 빠짐없이 다 표현하고 있다. 이는 아이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통된 조건인 듯하다. 어머니인 원단 자신도 “어릴 때 낮잠에서 깨면 마치 가위눌림과도 같은 낯설음 과 외로움에 몹시 울어댄 기억이 있다”니까 말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계집애가 꼭 저물녘이면 사위스럽게 울어댄다고” 질색 을 했다. "옛우물"의 화자 또한 같은 경험을 술회하고 있다.
왜 장엄한 황혼을 볼 때면 열패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어릴 때 해가 지고 노을이 물들 무렵이면 몹시 울었다. 계집애가 사위스럽게 청승을 떤다고 매를 맞으면서도 까닭 없이 서러워 목놓아 울게 하던 것은 어찌해볼 수 없는 운명, 어쩌면 비겁하고 허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열패감, 두려움 때문이 아니 었을까.
이제 사십대 중반에 접어든 그 여자는 더이상 울지 않는다. 그러나 또다른 아이들이 그의 눈앞에서 여전히 미아가 된 듯 울어 댄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중에 ‘그’의 전화를 받은 그 여자는 외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는” 아이 를 떼어놓으려 한다. 진저리를 치며 물어뜯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뺨을 후려치자 “불에 덴 듯이 울어대는” 아이를 이웃집에 맡기고 급히 달려나왔다. 결국 그녀의 젖먹이 아이는 한동안 어머니를 잃은 ‘미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나’는 ‘ 그’와 함께 배터의 한 간이음식점에서 “해가 지고 강물 위 하늘에 짙은 노을이 드리울 때까지 말없이 강물을 보며” 소주를 마 시고 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 음식점에서도 또다른 아이들이 우는 모습을 본다. 옆자리에 있던 손님들의 아이들이다.
잠에서 깬 아이들이 서럽디 서러운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오소리를 사러간 아이들의 부모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먼저 울음을 그친, 누나인 듯한 계집애가 작은 아이를 달랬다. 신발을 신기고는 오소리와 피와 술자국으로 더러운 차일을 벗어 나 손을 잡고 강을 따라 걸어갔다. 아이들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짙은 노을을 치받으며 피어오르는 땅거미가 조그맣게 멀어 져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웠다. 황혼과 어둠 속으로 조그맣게 지워져간 두 아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토록 극력 감추고 있던 욕망의 본질을, 허위를 단번에 꿰뚫어보는 일은 없었으리라.
―"옛 우물" 중에서
존재와 부재의 사이 : 사라짐
“돌아오지 않는” 부모를 찾아서 이 미아들은 어둠 속으로 조그맣게 “지워져간다”.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무엇인가가 지 워지고 사라지는 시간이다. 그 사라짐과 더불어 감추어져 있던 ‘욕망의 본질’과 ‘허위’, 즉 ‘진상’이 겉으로 드러나 보인 다. 오정희의 시간은 전갈이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억눌린 욕정”으로 소리없이 헤매는 시간이다. "관계"의 화자 역시 이점 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어릴 적 잠에서 깨어나면 저녁일까, 아침일까 몰라지고 맥없이 뜰을 내다보다가 문득 두려움이 생 기지. 일상사에 가려져서 잊혀지고 보이지 않으나 확연히 느껴지던, 우리가 미립자의 시절부터 잉태하고 있던 진상이 비로소 인 식되어 무서워진 탓일거야. 잠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어지러운 선회였어.” "비어 있는 들"에서 어린아이도 “ 잠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오기까지의 어지러운 선회”에서 빠져나오려는 노력으로 눈을 깜박이고 허공을 휘저었다.” “어지러운 선회”란 평소에는 가려져 있던 존재의 심연이 드러나면서 느끼게되는 ‘현기증’ 바로 그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공사장의 산("지금은 고요할 때")만이 아니다. 서서히 다가오는 어둠은 모든 사물과 존재를 사라지게 한다. "바람의 넋"에서 남편은 아내가 없어진 빈집이 “거슬거슬 피어올라 점점 짙어지는 땅거미 속에 집은 잦아들 듯 적막하게 가라 앉는 것”을 바라본다.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존재와 부재 ‘사이’에 걸려 있는 진행성 소멸의 시간이다. 이 사라짐은 지극 히 점진적인 것이다. 그 본질은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 속에 있다.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나 반과거의 시제로 우리에게 지각된다. 변화의 이러한 느림 속에 존재의 심연이 천천히 입을 벌린다. "동경"에서 하루가 느리게 흘러 그 끝부분에 이르면 어느덧 뜰이 그늘에 잠기기 시작한다. 노인은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땅에서 피어오르는 엷은 어둠으로 꽃은 짙은 빛으로 잎을 오므리기 시 작했지만 피어 있던 꽃의 공간이 침묵과 심연으로 가라앉기까지의 보이지 않는 흐름은 얼마나 길고 오랠 것인가.” 이 길고 오랜 ‘흐름’으로 지각되는 ‘사라짐’은 단순히 시각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오정희의 인물들에게 그것은 보다 근 원적인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순간 오두마니 앉아 있는 두 아이가 어슴프레한 빛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듯한 느낌 에 명혜는 저도 모르게 다급히 소리쳤다.”("야회") 자신도 모르게 존재와 소멸 사이에 가로놓인 의문이 다가드는 두려운 순간 이다. "꿈꾸는 새"의 주인공은 그 사라짐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겹겹의 어둠에 갇혀 보이지 않는 아이의 잠든 얼굴을 손 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아이의 드러난 두 발을 모두어 쥐고 뺨에 대었다”. 접촉을 통해서 존재를 확인하려는 안간힘이다. 그러 나 어둠 속으로 아이가 실제로 사라지기도 한다. "바람의 넋"에서 남편 세중이 어둑어둑한 저녁때 처가를 찾아와 아이를 데리 고 나간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은수는 “자칫 깜박이는 사이 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듯한 느낌에” 있는 힘을 다해 눈을 크게 부릅뜬다. “어떤 미미한 스침에도 고스란히 재로 무너져내릴 것 같기” 때문이다. 은수로 하여금 ‘눈을 부릅뜨 게 하는 것’은 아이를 아주 잃어버릴 것 같은 어머니로서의 구체적인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사 라짐 자체가 자아내는 형이상학적 공포에 가깝다.
“두려움을 주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부재다”라고 미셸 투르니에는 말했다. 어떤 대상의 사람짐은 곧 나의 사라짐, 그리고 모 든 존재와 현실의 사라짐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고요할 때"의 화자가 느끼는 비현실감은 바로 이런 무의 체험이다. “이제껏 존재하던 것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다는 데 대한 전율이었을까. 어제의 풍경이 사라지듯 지금의 실재도 하나의 헛보임, 가시현 상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서였을까.” "옛우물"의 ‘나’는 유리창 밖에서 찻집의 ‘비어 있는’ 의자를 들여다보면서 훅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부릅떴다”.2)2) "새"에서는 죽음의 발견과 ‘부릅뜬 눈’ 사이의 관계가 그 극단에 이르러 ‘눈에 삼이 서 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동생 우일의 죽음은 소녀에게 기이한 ‘사라짐’으로 인식된다. “우일이는 점점 조그매진다. 몸 속의 것들이 모조리 말이 되어 빠져나오는가 보았다.” 이와 더불어 소녀의 눈에는 삼이 선다. 할머니가 삼을 잡는다. “눈을 깜짝이 지 말고 해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하고 할머니가 단단히 이른다. “눈이 부셨지만 나는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 빛살이 모 아지며 해의 한가운데, 타오르는 선홍의 불꽃이 보였다. 그것은 빠르게 너울대며 다가와 뜨거워라, 외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내 두 눈을 찔렀다. 눈알이 타버릴 것처럼 뜨거워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아득하게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하늘도 산도 집도, 나란히 서 있는 나와 안집 할머니까지 모조리 삼켜버린 그 흰빛 속으로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 내가 바라보는 동안 그 새는 하나의 점처럼 조그맣게 멀어지고 사라졌다.”("새") “나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라는 존재론적 의문이 중요 한 주제로 떠오르는 작품 "불꽃놀이"에서 영조의 돋보기 유희도 ‘부릅뜬 눈’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공책장 위의 작은 동그라미가 주위의 밝음을 모조리 흡수하여 팽창하는 농밀한 흰빛으로 점차 부풀어오르고” “드디어 뜨겁게 팽창한 빛의 정점으 로부터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위의 삼 치료와 매우 유사하다.
왜 그랬을까? ‘부릅뜬’ 눈의 치열한 시선으로 존재를 비끄러매려 함인가. “그것은 텅 빈 공허, 사라짐의 공포였을까” 하고 그는 자문한다. “사과가 떨어져도 툭 소리가 나지 않는 저편의 세계”가 엿보이는 순간이다. 나는 ‘이편’에 있고 ‘저편’에 는 죽음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이편과 저편 사이의 경계는 불투명하다.
전화
그 두 세계는 맞닿아 있는 듯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기에 아주 끊어진 다른 세계 같기도 하다. 닿을 수 없는 곳이면서도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세계, ‘바람의 넋’에 사로잡힌 오정희의 인물은 삶의 창가에서 그 죽음의 세계를 건너다보고 있다. 그는 “자신은 이곳이 아닌 다른 삶, 다른 곳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때없이 덜미를 잡아내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생활 속에 생활이 아닌 다른 공간을 지니고자 하는 안간힘은 아니었던지” 자문한다.("바람의 넋") 그래서 때때로 저편에 대한 ‘무서운 그리움 ’에 사로잡힌 인물들은 어디론가 안타깝게 ‘전화’를 건다. 닿을 수 없는 곳이면서도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세계, 눈에 보이 지는 않지만 목소리는 닿을 듯한 세계, 그 세계를 향하여 ‘전화’를 건다. "옛우물"에서 찻집 빈 의자의 남자는 공중전화 박 스에서 전화를 건다. 그의 등은 보이지만 “유리칸막이가 되어 있어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밤비"의 ‘흰색 상의를 입은 남자’도 알 수 없는 곳으로 줄기차게 전화를 걸고 있다. 민자는 무심히 조제실의 유리를 통해 공중전화에 매달린 그의, “마치 수족관 속의 붕어와도 같은 소리없는 부르짖음을 바라보았다”. 이 “소리없는 부르짖음”은 “사과가 떨어져도 툭 소리가 나지 않는 저편의 세계”를 향한 부르짖음이다. 마침내 민자 역시 “전화기에 휘갈긴 알지 못할 전화번호를 보고는 전화를 걸고 싶다 는 견딜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곤 했다. 실제로 세상의 끝에서부터인 듯 아득히 울리는 신호음에 소스라쳐 놀라 수화기를 놓는 것 도 여러 번이었다”. 그녀의 소스라침은 바로 “텅빈 공포, 사라짐의 공포”이며 “두렵고 낯선 비밀” 앞에서의 두려움이다. " 옛우물"의 여주인공은 신문의 부고난에서 ‘그’의 죽음을 보았을 때부터 “그의 떠도는 전화번호를 불러내어 꾹꾹 눌러대는 버 릇이 생겼다. 어둠의 심부를 향해 신호음을 울리며 이제 그가 사용할 수 없는 일련의 숫자들은 캄캄한 공허 속으로 끝없이 퍼져 갔다”. 전화도 닿을 수 없는 그 “어둠의 심부”, 그 “캄캄한 공허”는 어떤 곳일까? 그곳은 아무도 갔다온 적이 없는 멀고 먼 곳이다.
풍선과 새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죽음이 엿보이는 시간이다. 죽음 그 자체가 보인다기보다는 삶에서 죽음으로 옮아가는 어렴풋한 경계 와 느린 움직임 자체가 보인다. 두려움인 동시에 기이한 호기심의 대상인 이 ‘움직임’의 과정은 오정희의 세계 속에서 가끔 허 공으로 날아가는 풍선이나 새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야회"의 명혜가 “인생에 대한 어떤 막연한 느낌을 갖는” 시간, 창밖의 풍경 속에서 “길게 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흰 새’는 바로 그런 경계선과 움직임을 보여준다. “한없이 느린 흐름과 불투명한 긴장 속을 흰새는 아직 햇빛이 흐르는 강으로부 터 그늘에 잠기는 숲을 향해 날개를 퍼득이며 천천히 날아가곤 했다.” 빛의 세계로부터 어둠의 세계로 수평이동하는(강에서 숲 으로라면 그래도 약간 수직성을 동반한 수평이동이지만) 이 흰새의 “한없이 느린 흐름”은 앞서 인용한 "동경"의 “피어 있던 꽃의 공간”이 “침묵과 심연”으로 가라앉기까지의 “보이지 않는 흐름”의 “길고 오랜” 시간과 다를 바 없다.
"동경"이나 "야회"에서의 이 불투명한 시간은 가슴이 선뜩해지는 쓸쓸함 같은 감정을 자아낼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이 ‘ 흰새’와 더불어 오정희가 보여주는 상상력의 역선을 따라가노라면 필연적으로 섬뜩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텅빈 공허”의 경계 선에 닿게 된다. “사과가 떨어져도 툭 소리가 나지 않는 저편의 세계”가 지척에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꿈꾸는 새"에서 여주인공은 어두워갈 무렵 낯선 곳에서 길을 잃자 풀밭에 주저앉아 업고 있던 아이를 앞으로 돌려 안는다. 그리고 아이의 잠든 얼굴을 손으로 더듬고 두 발을 모아 뺨에 대어보다가, 문득 이미 죽은 사람을 생각하 듯 아이와 남편을 먼 눈으로 보는 자신에 공포를 느꼈다. 아이의 팔목에 매달린 풍선이 둥실 떠서 흔들렸다. 나는 갑작스러운 두 려움으로 아이의 팔에서 풍선을 떼어내었다. 그것은 춤추듯 흔들리며 날아가 이내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문득’이나 ‘갑작스러운’ 같은 표현 속에 내포된 순간적 단절과 돌연함은 평탄한 땅을 밟고 걸어가던 사람이 예기치 않았 던 단애와 그 너머 허공, 혹은 심연의 존재를 만난 충격과 공포를 말해준다. 겉으로 보이는 풍선의 ‘흔들림’은 두려움으로 인 한, 보이지 않는 ‘존재의 흔들림’과 동일선상에 이어져 있다. 앞에서 본 ‘새’와 달리 어둠 속에서 “둥실 떠서 흔들리는” 풍선의 움직임은 수평이동이 아니라 수직이동의 시작이다. 어머니와 ‘죽은 사람’인 양 보이는 아이 (그리고 남편) 사이에 가로 놓인 ‘먼 눈’의 거리는 수평적 거리가 아니라 수직적 거리다. 이때의 사라짐은 허공 속으로의 ‘날아감’이거나 어둠 속으로의 ‘묻힘’ 혹은 추락이다. 날아감과 묻힘은 동일한 ‘사라짐’의 양면일 뿐이다. 진정한 사라짐은 위로 날아감인 동시에 밑으로 떨어짐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춤추듯 ‘날아가’ 이내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 풍선은 동일한 수직선상의 그 양면성을 동시 에 보여준다. 풍선이 아이를 매단 채 죽음의 세계인 ‘텅빈 허공’으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어머니는 풍선을 아이의 팔에서 “떼어내었다”. 그 분리행위로도 안심되지 않는다는 듯이 어머니는 아이를 다시 들쳐업고 “단단히 띠를 동여매었다.” 저물녘 강에서 숲으로 날아가는 ‘흰새’는 어둠 속으로 날아가는 ‘풍선’을 거쳐 마침내 "옛우물"에 이르면 어린 아이의 눈을 통하여 곧장 ‘죽음의 새’로 변한다. 이 새는 여주인공의 아버지가 운명하는 순간과 관련되어 있다. “야삼경 지붕 위에 올라가 망자의 흰 저고리를 흔들며 캄캄한 천공에 외치는 초혼제를 지낼 때 나의 어린 아들은 아주 커다랗고 하얀 새 가 날개를 펄럭이며 어두운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아이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어린 눈에 보이 는 것은 오직 “날아가는 새”뿐이다. 오정희의 최근작은 제목 자체가 "새"다. 여기서도 화자인 소녀는 동생 우일의 죽음을 죽 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어린 동생이 “창고에 사는 언니 오빠들”의 하수인이 되어 빈집털이에 가담했다가 이층에서 떨어져 머 리를 다치고 그로 인하여 목숨을 잃어가는 과정이 소녀에게는 한결같이 ‘새’의 이미지를 통해서 경험되고 있다.
1) 소녀가 자면서 꿈을 꾸고 있는 한밤중에, 집 나갔던 동생이 돌아온다 : 낭떠러지에 이르러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에 힘을 주자 신기하게도 몸이 둥실 떠올랐다. 나는 날았다. 나는 꿈속에서 이것이 꿈이라고 생각한다. 날아오르는 꿈을 밟으며 힘 겹게 질질 끄는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는 방문 앞에 멎고 문이 슬며시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온다. 얼굴이 지워진 누군가가 푸 르스름한 새벽빛 속에서 푸른 그림자로 스며든다. 푸른 그림자는 이불을 들치고 쓰러지듯 곁에 와 눕는다.
2) 동생이 중얼거린다 : 나는 무서웠어. 날개를 빳빳하게 편 커다란 새들이 모두 꼼짝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너무 무서 워서 이층에서 그냥 뛰어내렸어. 형들은 다 잡혔을 거야.
3) 우일이는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 다음날에도 우일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4) 우일이는 점점 조그매진다. 몸 속의 것들이 모조리 말이 되어 빠져나오는가 보았다.
5) 어디선가 아득하게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하늘도 산도 집도, 나란히 서 있는 나와 안집 할머니까지 모조리 삼켜버린 그 흰빛 속으로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 내가 바라보는 동안 그 새는 하나의 점처럼 조그맣게 멀어지고 사라져갔다.
6) 우일이는 아마 날기 위해 뱃속의 것을 모조리 비운 모양이었다. 숫 많은 머리털 속, 멍든 듯 부풀어오른 한가운데 조그만 상처가 입을 벌리고있었다. 그애 영혼이, 빠져나간 자리일까.
7) 저무는 하늘로 작은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새장을 어디다 놓았지? 새는 어디로 갔지?
날아가기와 떨어지기
모든 진실한 ‘꿈’은 상상력의 법칙인 양가성(兩價性)을 드러내 보인다고 바슐라르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서 진정한 사라짐은 위로 날아감인 동시에 밑으로 떨어짐이라고 말했었다. 추락의 꿈과 비상의 꿈은 같은 욕망의 양면이다. 추락도 비상도 다같이 파스칼적 두려움의 원천인 “텅빈 공허”의 두려움과 관련된 것이다. "새"에서 “언제나 나는 꿈을 꾸는” 우일이는 “ 자꾸 뛰어내리는 연습을 하면 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떨어지는 것과 나는 것은 동일한 상상력의 역선상에 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일의 누나인 소녀는 꿈속에서 “낭떠러지에 이르러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에 힘을 주자 신기하게 도 몸이 둥실 떠올랐다”. 우일이는 새가 되어 저무는 하늘로 ‘날아갔’지만 동시에 어둠 속에 파묻힌 것이다. 그래서 “새는 어디로 갔지?” 하고 철길을 따라가며 두리번거릴 때 소녀를 “부르는 소리”는 어둠 속에 “낮게 낮게 가라앉으며” 흐르는 개 천의 “물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날아감의 저 위쪽 어둠은 어쩌면 물이 낮게 낮게 흘러간 저 아래쪽 어둠과 통해 있는지도 모른다. "바람의 넋"에서 은수를 사로잡는 ‘바람’은 바로 이런 상상력의 법칙을 드러내 보인다 : “무심히 나선 걸음이 집에서 멀어질수록 마치 한없이 풀리는 연줄처럼, 바닥 모를 깊이로 소리없이 떨어져내리는 추처럼 점차 무게 없이 가볍게 등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녀를 집 밖으로 내모는 저 알 수 없는 힘은 “한없이 풀리는 연줄”의 상승인 동 시에 “바닥 모를 깊이로 소리없이 떨어져내리는 추”의 하강을 동일한 것으로 이어놓고 있다. 연도 추도 다같이 ‘어둠’과 ‘ 공허’의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상상의 동력주체일 뿐이다.
사라짐은 그러므로 위로 날아가는 것인 동시에 아래로 떨어짐이다. "옛우물"의 ‘그’는 “원근법이 모범적으로 구사된 그림 의, 점점 멀어져가는 풍경의 끝, 시야 밖으로 사라진 까마득한 소실점으로 존재한다”. ‘시야 밖’으로 사라진 ‘소실점’은 바 라보는 사람과 동일평면상이 아니라 저 위쪽인 동시에 저 아래쪽인 ‘저편’의 세계에 속한다. 그래서 "바람의 넋"의 여주인공 은 “짙은 어둠 저편의 무엇이 보일까마는 잠깐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거울
이리하여 우리는 먼 곳으로 높이 날아올라 사라지는 풍선이나 연 그리고 새의 세계는 다른 한 끝이 거울과 우물의 저 어둡고 바닥 없는 깊이에 닿아 있음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존재와 부재 사이를 넘나드는 경험으로 일상적인 삶 중에서 가장 손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거울’이다. 거울 속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가 그 속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분명히 보이지만 나는 그에게 이를 수 없다. 그리고 조금만 한쪽으로 기울이면 거울 속의 나는 사라지고 아무도 없다. 거울에 비친 영상은 눈앞에 있는 듯하나 멀고 닫혀진 세계다. 오정희 에게 거울은 죽음의 예감 같은 섬짓한 사라짐의 은유가 되곤 한다.
"옛우물"에서 화자 ‘나’가 사우나실의 샤워꼭지 밑에서 더운 물줄기에 몸을 맡기고 섰다가 “섬뜩 놀라는” 장면은 전형적 인 경우다. “거울 속에 내가 없다. 수증기 탓에 거울이 흐려졌기 때문이라고 알면서도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이 없다는 것은 두 렵다.” "새" 의 소녀는 “밤에 보는 거울에, 텔레비전의 화면이 시커멓게 사라지는 것에 느닷없이 가슴이 후드득 뛰고 불안해 지기도한다”. "유년의 뜰"에는 벽에 버티어놓은 ‘등신대의’ 거울 속에 “좁은 방안이 가득 담겨 있다”. 그 속에는 팽팽하 게 긴장된 그들의 일상이 비춰지고 있다. 때묻은 이부자리도, 등지고 앉은 오빠의 등도, 화장하며 “나팔꽃처럼 보얗게 피어나는 ” 어머니의 얼굴도 비춰진다. 이런 일상의 거울을 어머니가 약간 옮겨놓기만 하면 “오빠의 모습은 사라진다”. ‘이물감’과 더불어 방 한구석에 버티어 선 거울 앞에서 아이들은 “낯설게 만나지는 자신에게 경원감과 면구스러움”을 느낀다. “자신을 남 의 얼굴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그들은 가끔 그 거울 앞에서 “죽어서 천사와 함께 하늘에 오르는” 연극놀이를 한다.
오정희의 여주인공들은 거울 속에서 현기증 나는 심연을 들여다본다. "어둠의 집"의 경우, 소등훈련중인 방 안의 거울은 “ 더욱 검었다”. 여자는 그 앞으로 다가가 “다만 어둡고 깊을 뿐 아무것도 되비치지 않는 거울면”을 바라보다가 “문이 열리는 듯한 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문바람에 커튼이 펄럭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착각이었을까. 커튼은 움직이지 않은 채 바깥 하늘빛의 반사로 어둠이 조금 엷을 뿐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도 어깨로 으쓱 한기가 느껴졌다. 나이 탓이다. 나이를 먹으면 신경도 약해지는 법이니까. 그 여자는 소리내어 말했다.” 그 거울에 비치는 것은 “으쓱 한기를 느끼는 나”, 그리고 “나이를 먹는 나”의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필시 그 밑바닥에 죽음이 보일 듯한 거울은 어둠 저편으로 ‘열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문’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거울의 문은 ‘열리는 듯’ 하면서도 또한 ‘닫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죽음이 그렇듯이.
오정희의 인물들에게 어두워오는 시간의 창문은 자주 ‘음화상(陰畵像)’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바람의 넋"에서 ‘아내’ 는 커튼을 한쪽으로 밀어젖힌 채로 틈을 한 뼘만큼 남기고 창을 닫았다. 그리고는 어둠 저편의 무엇이 보일까마는 잠깐 창밖을 내다보았다. “검은 유리면에 아내의 얼굴이 음화상(陰畵像)처럼 떠올랐다. 아내는 창 너머 어둠 저편에서 미친 듯이 불고 있는 바람을 보고 있는 걸까.” 음화상은 ‘어둠 저편’의 ‘바람’ 속에 실린 것이기에 더욱 진저리치게 한다. "옛우물"에서는 유 리창에 비친‘나’의 모습이 ‘유령’같이 느껴지면서 앞에서 본 ‘선회’ 혹은 ‘현기증’ 현상이 일어난다. “찻집의 유리창에 바짝 붙어서서 뚫고 들어갈 듯 이마를 대었다. 밖의 내 모습이 유령처럼 그 물상 위로 비비적대며 어른거렸다.” 상점의 진열장 도 때로 그 같은 ‘음화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바람의 넋"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서성이던 은수는 자신의 몸에 “끈끈히 와닿는 시선을 느낀다”. 한 사내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그는 “뜻없이 바라보는 눈길의 덫에 걸려 차츰 자기 암시에 빠져들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관찰하는 짓궂은 장난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은수는 가면처럼 달라붙어 있는 짙은 화장 에 신경이 쓰여 정류장 앞의, 가게 유리 진열장으로 다가갔다”.(이 길고 출렁거리는 문장구조는 이미 두 인물의 의식이 서로를 빠르게 되비추는 거울놀이 특유의 어지러움을 느끼게 한다.) 유리 안쪽은 꽃집이었다. “밖의 빛으로 우물 속인 듯 어둡고 깊어 보이는 유리면에 탈 쓴 듯 하얗게 분장한 일본무극의 배우처럼 짙게 화장하고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음화상으로 낯설게 찍혀 있었다.” “탈을 쓴 듯 하얗게 분장한” 이 음화상은 자신의 얼굴이지만 동시에 죽음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산조"의 꼭두각 시 놀이꾼인 화자 역시 어두운 거리에서 가게의 유리창에 달라붙어 안을 기웃거린다. 그때 안에서 낯설게 유리 바깥쪽의 나를 바 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여윈 사내’는 다름아닌 유리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음화상이다. 다만 이번에는 그 속의 꽃들이 죽음의 꽃이라는 것이 앞의 장면과 다른 점이다. “유리 안쪽은 컴컴한,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이었다. 연화대가 현란하게 그려진 불화 와 각종 제기들, 무더기로 핀 종이꽃들이 죽어버린 시간, 어두운 공간을 채우고 있다. 맑은 유리를 타고 눈물이 모든 죽어진 것, 비현실적인 것 속에 다만 살아 있는 단 하나의 것으로 흘러내렸다.” 거울 속에서 우는 사람은 또 있다. 그들은 모두가 거울 속 에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죽음의 어둠으로 인도하는 거울인 것이다. "봄날"의 ‘나’는 어두운 방안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던 남편의 후배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는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마치 한 마리의 도둑고양이처럼 소리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어둠이 “수은처럼 무겁게 달라붙는” 것이 느껴진다. “빈 우물 속 같은 공허를, 정적”을 깨우지 않으려고 여자는 ‘손거울’을 꺼내든다. “나이 먹고 지친 여자”의 얼굴이 거울에 가득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대체 어떠한 사건이 생활 속에 끼어들었는가. 그러나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밤이 되었을 뿐이다. 나는 거울 속에서 조용 히 울기 시작했다.” 가장 오정희다운 상황이요 울음이다. 아무 일도 일어난 것이 없다. “밤이 되었을 뿐이다.” 존재의 밤이 오면 오정희의 미아들은 ‘빈 우물’ 같은 거울 속으로 들어가서 운다.
"옛우물"의 화자 역시 신문의 부고난에서 ‘그’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마치 그 어떤 “무서운 그리 움”에 이끌리듯이, “거울을 본 것이었다.” 그는 “왜 그랬는지 어떤 심리가 나를 거울 앞으로 이끌었는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거울에는 “조각조각 균열된 얼굴”이 비친다. 그후 그 역시 앞에서 본 여러 인물들처럼 거울은 노쇠와 죽음을 반사한다. ‘나이 먹고 지친’ 얼굴, ‘균열된’ 얼굴, ‘주름살진’ 얼굴. 이 모두가 죽음을 가리키는 화살표들이다. "동경" 에는 이런 거울의 진정한 의미가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아이는 “작은 악마처럼 깔깔거리며” 늙은 여자에게 눈이 부시도록 거 울을 비추는 장난을 한다. 그 빛에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짐승들’(맥)과 “구겼다 편 은박지처럼 빈틈없이 주름살진 얼굴”이 환히 드러난다. 늙은 여자는 그 빛의 공격을 받자 “무력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운다. 거울빛의 반사는 마침내 “어둑신하게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 물 속에 담긴 틀니”마저 “명석하게 반짝거리게” 한다. 화자는 말한다. “그것은 어쩌면 아득한 땅속에 묻힌 거울빛의 반사일 듯도 싶었다.” 그 거울빛은 바로 “죽은 사람의 부장품들”과 함께 “땅속에 묻혀서 천년 세월 을 산” 구리거울이 쏘아 보내는 죽음의 빛인 것이다.
우물
오정희의 작품 속에서 거울과 함께 ‘어두운 저편’의 세계를 암시하는 또하나의 신화적 존재는 우물이다. 사실 우물은 흔히 거울과 인접한 의미장 속에 출현하곤 한다. 잠시 전에 보았듯이 "봄날"의 ‘나’는 사라짐의 경험 후 “빈 우물 속 같은 공허 ”를 깨우지 않으려고 ‘손거울’을 꺼내든다. "바람의 넋"에서 음화상이 비쳐 보이는 유리면, 즉 거울은 “우물 속인 듯 어둡 고 깊어 보인다”. "꿈꾸는 새"에서 화자가 “마치 주머니 속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보듯” 기억에 투영될 골목의 특 징을 찾아볼 때 나타나는 것은 우물이다. "옛우물"의 화자도 “상점의 진열창에, 슈퍼마켓의 거울에, 물 위에 비치는 내 얼굴 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말함으로써 거울과 물을 같은 의미장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유년의 뜰"에서 화자는 한밤중에 타는 갈증으로 잠이 깨 우물로 간다.
우물은 깊었다. 둥그렇게 내려앉은 어두운 하늘은 두레박 줄을 한없이 빨아들이고 방심하고 있던 순간 마침내 철버덕 수천 조 각으로 깨어져 흩어졌다. (……) 나는 다시 끝없이 두레박 줄을 풀어내며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우물 속은 고요하고 알 수 없 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속에는 어쩌면 탄식과도 같은 누군가의 숨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도 했다.
‘우물’ 속에 내려앉은 ‘하늘’은 깊이와 높이를 서로 이어놓는다. 둘 다 한없이 먼 세상,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세계인 점 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리하여 “끝없이 풀리는” 두레박줄의 깊이는 “한없이 풀리는 연줄”("바람의 넋")의 높이와 잇닿아 이를 수 없이 먼 ‘저편’의 세계를 구체화해준다. 그 물거울 속에서 “수천 조각으로 깨어지는” 하늘은 장차 아버지의 대리자 인 오빠의 발길질에 “천 조각 만 조각의 얼굴”로 깨어지게 되는 거울이나 "옛우물"에서 ‘그’가 죽은 후 무의식적으로 집어 든 거울 속에 “조각조각 균열된” 모습으로 비쳐지는 자신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꿈꾸는 새"에서 우물은 길잃은 여자의 어둡고 긴 미로 속에 나타난다. “장차 내가 낳을 아이들이 묻힐 곳이 어디쯤일까”( 태어남과 죽음을 맞물리게 해놓은 의문)를 더듬으며 기억에 투영될 골목을 헤매던 그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꺼멓게 웅크 린” 우물이었다. “주위에는 잡초가 거의 높이만큼 자라 있어 우물은 마치 위장된 초소처럼 보였다.” 우물의 이 같은 외관은 너무나도 무덤을 닮아 있다. 어둠 속에서 아이를 업은 채 길잃은 여자는 왜 구태여 “마악 영글어가는 옥수수”를 잡아떼어 우물 속으로 집어던졌을까? “빈 우물 속에서 퍼덕이며 날아오는 날갯짓”을 기다리는 그녀의 귀에 “잠시후 우물 속으로부터 툼벙, 하고 약하고 둔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도 ‘날아오는’ 날개의 상승운동과 ‘툼벙’ 하는 옥수수의 하강운동은 한데 이어 져 있다. 그 ‘툼벙’ 하는 소리는 바로 ‘텅빈 공허’의 소리다. “사과가 떨어져도 ‘툭’소리가 나지 않는 저편의 세계”가 멀지 않았다.
거울의 주제가 가장 슬프고도 잔혹하게 그려진 작품이 "동경"이라면 우물의 이미지가 가장 신비스럽고 비장하게 그려진 역작 이 "옛 우물"이다. 태어남과 죽음을 정치하게 맞물려놓은 이 작품의 한복판에 오래 된 우물 하나가 놓여 있다. 우물은 탄생의 장소다. 우물은 물의 시작이요 생명의 시작이요 흐르는 시간의 시작이다. 순옥이 삼촌은 그 우물에서 태어나듯이 삼태기를 타고 올라왔다. 우물은 동시에 죽음의 장소다. 시간의 끝이요 삶의 종말이다. ‘염쟁이의 딸’인 정옥이는 우물에 빠져 죽었고 우물은 메워졌다. “하룻동안 굿을 하고 흙으로 메워 물귀신을 꽝꽝 묻어버렸다.” 작품은 “마흔다섯 살이 된 생일 아침”으로부터, 즉 태어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해 이른 봄 어느 날 ‘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벗어나 “시간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사람의 일생은 ‘시간의 그물’에 걸린 한동안이다. 한쪽 끝은 탄생에, 다른 쪽 끝은 죽음에 단단히 매여 쳐져 있는 것이 ‘시간의 그물’이다. 시간의 그물이 시작되는 자궁의 저편에도, 시간의 그물이 끝나는 죽음의 저편에도 다 같이 시간이 없는 텅 빈 공허 혹은 어둠. 그 세계가 바로 “금빛잉어가 살고 있다”는 우물 속의 세계다. 금빛 잉어는 “천년이 지나면 이무기가 되고 또 천년이 지나면 뇌성벽력 치는 밤 용이 되어 하늘에 올라가지”. 이처럼 깊은 ‘우물’은 금빛 잉어에서 이무기와 용으로의 신화적 변용을 통하여 높은 ‘하늘’에 이어진다.
기이하게도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탄생과 죽음을 자기 스스로는 결코 직접 경험할 수 없다. 오직 막내동생(탄생) 과 정옥이나 아버지(죽음) 같은 타자의 경험을 밖에서 관찰함으로써만 비로소 대리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면서 정작 본인은 ‘시간의 그물’ 속에 갇힌 채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탄생과 죽음, 그 두 가지 사이에 단단하게 쳐진 ‘ 시간의 그물’ 속에 발 묶인 채 우리는 ‘비밀의 세계’ 저편을 우물 속처럼 들여다볼 뿐이다. 동생이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뒤 란으로 돌아가 피묻은 짚과 태를 태웠다. “우리가 떠나온 세계는 시커먼 연기와 검댕이로 피어올라 할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은 정화수 흰 대접, 옛날의 우물물에 날아앉고 그렇게 우리는 영원한 암호, 비밀일 수밖에 없는 한 세계와 결별한다.” 오정희에게 있어서 “우리가 떠나온 세계”는 검은색이다. 유리에 비친 음화상처럼 ‘시커먼’ 먼지와 연기로 날아앉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 가 돌아갈 세계는 흰색이다. 그것은 부고라는 ‘흰’ 봉투가 되어오거나 어린 아들이 본 ‘하얀’ 새의 모습으로 날아간다.3)3) 죽음과 관련된 흰색은 오정희의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목련초" : “예전에는 집 안의 뜰에도 심지 않았다던 주술적인 초혼의 꽃. 어머니의 백골에서 피어나던 영혼. 그것은 조화의 견고성을 가지고 한밤중 전등알처럼 흰빛을 내며 소리 없이 터져, 순결한 처녀의 혼백으로 동동 떠다닌다.” "꿈꾸는 새" : “돌아앉아 파헤친 봉분을 들여다보는 당숙모의 등 너머 희게 핀 산 목련을 바라보며 나는 아득한 눈길로 내가 묻힐 곳이, 그리고 장차 내가 낳을 아이들이 묻힐 곳이 어디쯤일까를 더듬었다.” 그 러나 생전과 사후의 세계는 ‘비밀’ 속에서 서로 이어져 있다. “우리가 떠나온 세계”도 “영원한 암호, 비밀”의 우물이고 죽 음도 ‘두렵고 낯선 비밀’의 우물이다. 오정희의 소설들은 시간의 그물 속에, 즉 “우리가 소비하고 있는 시간 안의 숨막힐 듯 한 범속함”("불의 강")에 갇힌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사실상 우리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우리가 떠나온 세계” 와 우리가 사라져갈 세계, 즉 시간의 그물 저 밖, 혹은 저 건너편의 세계다. 오정희의 인물들은 어두워오는 집안의 창가에 앉아 있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은 창밖의 어둠, 강 건너의 어둠, 거울이나 우물 저편의 어둠인 것이다. “아무도 내려가본 적이 없는 깊은 우물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굉장한 것들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무서운 그리움’이 되는 세계가 오정희의 세계다.
탄생과 죽음
첫 창작집 "불의 강"에서 최근의 "옛우물"과 "새"에 이르기까지 오정희가 변함 없이, 그리고 줄기차게 다루고 있는 문제 는 탄생과 죽음, 아니 탄생=죽음이다. 가령, "꿈꾸는 새"에서 이미 보았듯이, 화자가 선산에서 면례를 위하여 조상들의 “파헤 친 봉분을 들여다보는 당숙모의 등 너머 희게 핀 산목련을 바라보며 아득한 눈길로 내가 묻힐 곳이, 그리고 장차 내가 낳을 아이 들이 묻힐 곳이 어디쯤일까”를 더듬는 장면이 그 좋은 예가 되겠다. 조상들의 봉분과 그 봉분을 바라보는 ‘일흔이 넘은’ 당숙 모를 보며 장차 닥치게 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던 화자는 곧 ‘장차 태어날’ 아이들의 탄생과 이어 ‘그들이 묻힐 곳’을 생각 한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의 ‘미래의 탄생’과 ‘미래의 죽음’이 동일한 문장 속에 묶여짐으로써 탄생과 죽음의 뗄 수 없는 표리관계를 말해 보이고 있는 셈이다. 조상의 봉분, 늙은 당숙모, 그 둘을 동시에 바라보는 나, 그리고 나의 상상 속의 아이들로 이어지는 연면한 세대의 전승, 즉 ‘죽음의 연쇄’와 "옛우물"의 사우나 안에서 본 여자들의 ‘출산의 고리’는 거울 처럼 역으로 서로를 반사하고 있다 : “앙상한 뼈 위로 남루하고 커다란 덧옷을 걸친 듯 살가죽이 늘어진 한 늙은 여자, 늙어가 는 여자, 젊은 여자, 파과기의 소녀, 이윽고 누군가, 무엇인가가 눈 틔워주기를 기다리는 씨앗으로, 열매의 비밀로 존재하는 어 린 여자아이”는 끝없이 이어지는 탄생의 사슬을 말해준다.
오정희의 단편들처럼 출산, 낙태, 갓난아이의 죽음, 영아살해, 자식잃기 등 삶과 죽음이 맞닿은 모성 특유의 고통스러운 경험 들과 그로 인한 깊은 심리적 파동으로 점철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여자이기 때문일까? 어느 면 그럴지도 모른 다. “여자에게 모성이란 생래적 본능인가. 결혼하자 나는 재빨리 모성의 자리로 옮겨앉았다”고 "옛우물"의 화자는 말하고 있 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인간은 정작 자기 자신의 태어남과 죽음에서 소외되어 있어서 오직 타자의 탄생과 죽음을 통해서 대리체 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태하는 여자의 운명”("저 언덕")으로 인하여 여자는 남자에 비하여 탄생과 죽음의 드라마를 훨 씬 더 직접적으로 경험하도록 되어 있다.
사실 이 작가의 소설에서 주인공이나 화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은 대부분이 여성들인 반면 남자들은 흔히 밖으로부터 바라 보이는 객체로서 소설의 현실 속에 부재중이거나 무력하다. 흔히 남편들은 외출중("불의 강" "안개의 둑" "봄날"의 경우처 럼 한밤중이나 일요일에도)이거나, 낚시질, 채집여행, 해외근무 혹은 외국체류 등으로 집을 비우고 있거나, "목련초" "바람의 넋" "순례자의 노래"의 경우와 같이 별거중이다. "완구점 여인" "유년의 뜰" "저 언덕" "새"의 아버지들은 아예 아 내나 아이들만 남겨놓은 채 자취를 감추었거나 간혹 얼굴을 나타내고 아니면 작품의 끝에서야 돌아오는 정도다. "옛우물"의 할 머니는 이 같은 상황을 적절히 요약하고 있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마실이나 갔다 오게. 아이야 여자가 낳는 거지. 할머 니가 손사래를 쳐서 내보냈다. 남자야 아이를 만드는 데나 소용있는 거지 하는 뜻이었을 게다.” 아주 드물게 집에 남아 있는, 혹은 화자의 역할을 맡는 남편이나 아버지들은 "지금은 고요할 때"의 남편처럼 병가를 얻어 쉬고 있거나 "관계" "적요" " 별사" "동경"의 경우와 같이 늙고 병들어서 “아이를 만들” 수도 없닝? 그러나 태어남이 어찌 여자만의 문제이랴. 그것 은 여자의 문제이기 이전에 인간의 문제다. 태어남은 과일 속의 벌레처럼 그 속에 이미 죽음의 씨앗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아이 낳기
오정희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무엇보다도 모성의 주체로서 그 ‘다산성’이 특징이다. 이는 아마도 아이를 많이 낳은 작 가 자신의 어머니와 무관하지 않을 듯한데 특히 초기작품에 많이 나타난다. 데뷔작인 "완구점 여인"에 이미 “어머니의 위치로 변한 후 끊임없이 아이를 낳고 있는” 여자가 등장한다. 아직 아이를 낳을 만한 나이가 되지 못한 소녀는 아이 대신 ‘백 개의 오뚝이’를 수집함으로써 다산성을 모방하고 있다. "중국인 거리"의 후반부에 이미 “일곱번째 아이를 배고 있었”던 어머니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어느새 “여덟번째 아이를 밀어내었”고 화자인 소녀도 초조(初潮)를 맞아 어머니의 뒤를 이을 준비 완 료. "그림자 밟기"에서 화자 경옥의 ‘일곱 형제’는 엄마를 기다리며 그림자놀이를 한다. "옛우물"의 화자는 “스물세 살부 터 십 년에 걸쳐 해거름으로 아이낳기를 한 서른세 살의, 아마 그녀로서는 마지막 출산이기를 바랐을 여자”에게서 태어났다. " 중국인 거리"에서는 심지어 고양이까지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았다가 모두 잡아먹는다.
반면에 아이를 낳고 싶으나 낳지 못하는 인물들의 잦은 등장도 주목된다. 이는 네거티브로 표현된 복제욕망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직녀"의 화자는 아이를 못 낳아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로 다리를 건너가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어 애를 태우는, ‘견우’를 못 만난 ‘직녀’다. "인어"의 ‘나’는 암으로 자궁을 들어내고 나서, 바닷가에 버려진 아이를 얻어다 키웠다. "새벽별"에서 희서의 아내 역시 자궁적출수술을 받아 “평생 자식을 낳을 희망도 없어진” 상태로 입원 중이다.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더욱 간절해지는 모성욕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중 하나가 동성애다. 반신불수인 "완구점 여인"은 소녀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아이를 낳은 적도 있어.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않는 것들 틈에 살아”라고 탄식한다. " 주자"에서 ‘나’는 동성애의 상대인 ‘그’에게 “연애를 해보라”고 권했었으나 ‘그’는 자살했고 ‘나’ 자신도 채희에게 애를 낳아달라고 청했다가 거절당한다. "새벽별"의 경해도 이웃의 여자에게 “성마른 채근”을 받는다. "새"의 공장집 문씨 아저씨 부부는 “여자들끼리 여보 당신 하면서 사는” 동성연애자들인데 이웃집 아이들을 보는 “눈빛이나 목소리가 노상 축축하 다”. 동성애 이외에 "바람의 넋" "안개의 둑" "인어"에서와 같이 신혼여행 갔던 곳을 다시 찾아가는 여자들의 행동 역시 일종의 복제욕구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신혼여행의 재연이란 아이 만들기의 반복연습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이미 육신이 늙 거나 병든 인물들이 다가오는 죽음이나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보상심리로 아이낳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다. 이는 주로 늙은 남자 들의 경우다. 반신불수상태인 "관계"의 노인은 결혼 이듬해에 자살한 아들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물기 돋은 팔이 청동빛으로 번들거리는” 수분네의 생명력을 대하며, 또 “낯모를 남자에게 자기의 젖가슴을 내어주고 자궁을 열어줄 (… …) 그네”(며느리)를 상상하며 “그네에게 아이를 낳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적요"의 “죽어야 할 나이를 훨씬 넘겨 살 고 있는” 화자 역시 수분네처럼 생명력이 왕성한 가정부(“그녀의 배는 미묘하게, 그러나 불규칙하게 내 어깨 근처에서 오르내 리고 있었다”)를 붙잡아두지 못하자 놀이터에 나와 놀고 있는 사내아이를 유괴하여 수면제를 먹인다. 복제욕구와 동성애가 미묘 하게 중첩된 심리의 발현이다.
끝으로 불가능한 모성욕구의 강박적 표현으로 오정희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수많은 인형들을 주목할 수 있다. "완구점 여인"의 화자인 소녀가 수집한 ‘백 개의 오뚝이’는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것들은 어두운 교실의 서랍을 뒤지는 “저녁마다의 작업”으로 사 모은 것들이다. 소녀는 그 인형을 의미심장하게도 “두 다리를 못 쓰는 여인”에게서 사온다. 이는 물론 불가능 한 생식능력,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은 동생에 대한 보상심리(‘나’는 처음으로 오뚝이를 산 날 “죽은 동생의 꿈을 꾼다”)와 관련되어 있다. 불가능한 보상 및 모성욕구가 동성애로 나타나는 것은 논리적이다.
잃어버린 아이, 죽은 아이를 인형으로써 대신하고자 하는 보상욕구는 "산조"에서의 꼭두각시놀음, "번제"에서 지운 아이 대신 “부활절날 유년부 아이들이 가져온 인형”에게 젖을 먹이고 싶어하는 입원환자, "동경"에서 죽은 아들 대신 밀가루 반죽 으로 ‘부장품’ 같은 맥을 만드는 늙은 아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저녁의 게임"에서 화자의 어머니는 아기를 죽이고 나서 “아기는?” 하고 묻는 화자에게 “인형을 사줄게”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신병원으로 실려간다. "순례자의 노래"는 똑같은 상 황의 앞뒤를 단순히 뒤집어놓은 이야기일 뿐이다. 주인공 혜자는 ‘잠자는 공주’의 인형을 만들다가 불시에 나타난 ‘사내’를 인두로 지져 눈멀게 하고 나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일주일 전에 퇴원한 여자다. 인형의 의미를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은 "옛우물"의 ‘러시아 민속 인형’이다. 화자는 사우나실에서 “젊은 처녀들로부터 등글고 기름진 몸매의 중년 여자, 만삭 의 임부, 다산의 주름이 겹겹이 늘어진 노파들”이 목욕하는 모습, 즉 태어남과 죽음의 연쇄 그 자체를 바라보며 그 특이한 인형 을 머리에 떠올린다.
“”‘’“오뚝이처럼 단순한 모양이지만 그 안에는 똑같은 모양의 인형들이 크기의 차례대로 겹겹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내게 인생의 중첩된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인생의 중첩된 의미란 바로 ‘태어남=죽음’의 사슬이다.
태어남이 곧 죽음, 혹은 상실로 이어지는 오정희 특유의 상황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빈번한 낙태와 아이 들의 죽음, 아이 빼앗긴 어머니의 테마다. 각기 형태를 달리하는 이 고통스러운 체험들은 한결같이 아이와 어머니의 분리라는 공 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인물들은 태어남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한다. 낙태수술 후 천주교에서 경영하는 반지하 병실에 입원중인 "번제"의 화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태내에서 살해된 아이의 모습”을 생각해내려고 애쓴다. "봄날"의 화자는 여섯 달짜리 태아를 지우고 나서 그 ‘망령’에서 놓여나지 못한 채 “일종의 잠재성 간질”을 앓는다. "밤비"의 약사는 전에 살던 소읍에서 임신 후 자살한 여자손님의 문제로 다른 도시로 옮겨와 살고 있는데 또다른 “사복차림의 여학생”이 뱃속의 아이 를 지우고자 그의 약방을 찾아온다. "파로호"의 혜순은 7년 전 “세번째 아이를 임신중”이었으나 “사단병력의 중공군을 수장 시켰다는” 파로호에 남편과 함께 다녀온 직후 “4개월된 아이를 지웠다”. "저 언덕"의 원단은 옛 애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 를 지우고 나서 “방금 없애버린 것이 자궁 속의 핏덩어리가 아닌 한 쌍의 더듬이인 양,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미아처럼 떠돌았 다”. "안개의 둑"의 아내는 세 번의 유산경험이 있으며 "불의 강"의 갓난아이는 “돌이 지나고 얼마 안 되어 심한 탈수증으 로 죽었다”. "저녁의 게임"의 엄마는 갓난애를 죽이고 병원호송차에 실려갔다. 한편 "목련초" "미명" "바람의 넋"의 여 자들은 각기 낳은 아이를 시댁이나 보호소에 뺏기고 혼자 지낸다. "관계" "동경"의 노인들은 젊은 아들을 잃었다. "꿈꾸는 새"의 화자는 조상들의 무덤 앞에서 “장차 내가 낳을 아이들이 묻힐 곳”을 생각한다.
‘죽음의 본능’
이 수많은 낙태와 영아살해 혹은 모성상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비교적 초기작이며 종교적 혹은 신화적인 분위기가 짙은 "번제"에는 이에 대한 해답의 암시가 담겨 있다. 한편 후기에 속하는 "옛우물"은 이 작품에 대한 원숙한 메아리로 읽 혀질 수 있다. 기이한 단편 "번제"는 낙태수술 후 입원한 화자가 전날 밤에 꾼 꿈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머니와 ‘나’는 바닷 가를 거닌다. 어머니는 자주 “쥐고 있던 내 손을 놓는다”. 어머니는 외조모와 외조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모든 생명의 근원 인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외조모와 외조부, 어머니, 나 그리고 “치마의 앞이 들리도록 불룩한 배”로 보아 임신한 나, 이렇 게 "옛우물"의 사우나실 장면과 극히 유사한 ‘탄생과 죽음의 사슬’이 망라되어 있다.
어머니와 같이 바닷가를 걷던 화자는 갑자기 “흰 이를 드러내며 덮치는 파도”를 만나 “끌어당기는 물살의 이해할 수 없는 힘”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자신을 맡겨버린다. “삽시간에 어머니와 나와는 한 자만큼의 거리가 생겼다. 되돌아가려 해도 파도는 나를 다시 떠밀어버렸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덫은 단단했다”. 한편 “뱃속의 아이는 목에 건 돌멩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중량감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쥐고 있던 손을 놓곤 하는 어머니, 끌어당기는 파도, 어머니와 나의 거리 이 세 가지는 어머니와 나의 분리, 어머니의 “자궁에서 벗어나기”("옛우물") 즉 ‘탄생’을 의미한다. 어머니에게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파도의 단단한 ‘덫’은 "옛우물"에서 말하는 ‘시간의 덫’ 바로 그것이다.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벗어나는 즉시 아이 는 ‘시간의 덫’에 걸려든다지 않는가. 탄생은 “아앗 소리치는” 공포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안도감이나 평화는 오정희의 경우 죽음의 본능이다. (가령 "별사"에서 말하는 “죽은 자의 절대적 평화와 외로움”이 그렇다.) “끌어당기는 물살의 이해할 수 없는 힘”과 “목에 건 돌멩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중량감”으로 끌어내리는 아이는 "옛우물" 의 정옥이를 “우물 속에서 끌어당기는 아귀 센 힘” 바로 그것이다. 즉 밑으로 밑으로 끌어내리는 죽음의 힘이다. 생명의 본능 에는 이렇게 죽음의 본능이 중첩되어 있다.
그리고 아이는 ‘나’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나는 의연히 내 목에 지렁이처럼 얽힌 두 팔을 잡아떼었다. 그리고 곧 되돌아 이젠 새털처럼 가벼워진 몸으로 어머니를 향해 헤엄쳤다.” 아이를 낳는 것은 “얽힌 두 팔을 잡 아떼는” 분리행위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탄생 이전의 세계(어머니의 목)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살려달라’는 아 이를 뿌리치는 행위, 즉 ‘태내살해’다. “새털처럼 가벼워지는”것이나 “어머니를 향해” 되돌아가려는 노력은 곧 죽음의 의 지다.
꿈에 대한 이런 해석은 화자에 의하여 그대로 확인된다. “그것은 어머니에게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내 나름의 노력이었다. 어 머니와 관련된 최초의 가장 뚜렷한 기억은 익사의 공포에서 비롯됐다. 유년시절 어머니와 갔던 바다에서 물에 빠졌을 때 나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이젠 다시 어머니에게로 갈 수 없다는, 그녀의 자궁에서 떨어져나온 이래 가장 확실히 분리되었음을 막연 한 느낌으로 자각하여 얼마나 외로웠던가. 어느 날 문득 최초로 잉태의 기미를 손끝으로 느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서 완벽하게 떨어져나온 격렬한 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나는 내 속에 또다른 하나의 알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 이리하여 낙태 혹은 영아살해의 이미지는 생명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저 언덕"에서 자고 깨어 끈덕지게 우는 두 살짜리 아이의 울음에 대한 해석과 일치한다. 아이의 어머니에게 그 울음은 “어쩌면 아이가 낯선 세상에 놀라 이 세상에 오기 전의 그 어떤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원망(願望)”처럼 들리는 것이다.
"새"의 화자의 탄생 역시 죽음과 중첩되어 있다. “비행기가 떨어졌을 때 나는 태어났다. 아버지는 꽃을 기르고 있었다. 그 해 꽃값이 좋았다. 꽃장수는 떼죽음이 있어야 돈을 번다고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나는 실제로 커다란 비행기 의 배가 물고기배처럼 갈라지고 인형처럼 두 팔과 다리를 벌린 채 떨어져내리는 사람들을 본 것 같았다. 커다란 비행기가 폭발음 을 내며 기우뚱 날개를 흔들다가 커다란 불꽃이 되어 사라지는 모습도 본 것 같았다. 그 얘기를 하도 많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 어쩌면 나도 그때 그렇게 떨어진 아이들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새") 이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탄생과 죽음의 동시 성이다. ‘떼죽음’과 동시에 ‘나’는 태어났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나의 탄생 자체가 죽음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역으로 죽음은 탄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행기의 배가 물고기 배처럼 갈라진다는 것은 탄생의 과정을 연상시키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 것은 떼죽음의 광경에 대한 상상이다. 그 갈라지는 배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자신의 태어남을 “그렇게 떨어진 아이들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탄생은 곧 죽음이고 죽음은 곧 탄생이다. 이것이 바로 유산, 낙 태의 상황이다.
“갈라지는 물고기 배”의 이미지는 탄생=죽음의 테마와 관련하여 "옛우물"에서 남편이 낚시에서 잡아온 물고기 배 따기에서 이미 강조되어 있다. “밀봉된 것을 뜯을 때의 모독감과 긴장으로 살아 있는 물고기의 배를 가를 때면, 피융 하는 약한 소리가 났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창조되고 봉인된 그리고 아무도 볼 수 없었던 내부가 드러났다. 밀폐된 공간의 어둠이 있고 최초의 빛 의 순간이 있었다. 갑작스런 외기에 놀란 붉고 푸른 내장들이 푸르르 경련하고, 찬피동물의 어둡고 축축한 몸 속에서, 의지하고 있는 세계의 무너짐을 감지한 더 작은 생물체들이 고래 뱃속에 들어간 요나처럼 고통의 몸부림으로 흩어졌다.”
매몰과 발굴
물고기 배 따기는 봉인된 내부에 파고드는 “최초의 빛의 순간”, 즉 “더 작은 생물체들”의 탄생의 순간인 동시에 “의지하 고 있는 세계의 무너짐”, 즉 죽음의 순간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밀봉된 것 뜯기”의 이미지다. 이는 오정희의 후기 작품군 속에 탄생=죽음과 관련하여 끈질기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매몰’과 ‘발굴’의 주제로 눈을 돌리게 해준다. 파묻힘과 파 헤침의 변증법 " 그것은 바로 오정희의 소설세계를 긴장된 의미의 자장으로 만들어놓는 동력이다.
"밤비"의 약국의 여자는 지진의 환상에서 출발하여 도시 전체가 고스란히 파묻혀 “자취없이 사라지는” 것을 상상한다. " 동경"에서 전도하는 아낙네는 ‘지옥’이 바로 “땅속의 감옥” 즉 ‘땅에 갇힌다’는 뜻임을 상기시키고 화자는 박물관에서 “ 땅속에 묻혀 수천 년을 산, 이제는 말끔히 목을 닦아낸 구리거울을 보자 자신이 아주 오래 전에 죽은 옛사람인 듯” 느낀다. " 바람의 넋"은 온통 “그녀의 가슴속에 깜깜하게 묻힌 단단한 바위를 헤집으려는 노력”, 즉 의식의 표피 속에 깊이 매몰된 무의 식을 향한 ‘무서운 그리움’의 서술이다. "지금은 고요할 때"에서 아이는 공사장의 흙더미 속에서 신발을 한 짝 잃고 돌아온 다. 어머니는 아이를 “우물처럼 깊어진” 구덩이에 목 깊이까지 넣었다 들어올리며 “이렇게 묻혀버릴 수도 있다니까. 그러면 아무도 찾을 수 없어”라고 위협한다. “포클레인이 또 한차례 흙을 쏟아붓는다. 그녀의 외침 역시 흙 속에 묻혀버린다.” 공사 중에 “먼지만 가득한 관”이 하나 나온다. 그런가 하면 “흙더미 속에 어린 사내아이가 거꾸로 묻혀 있던 사고”도 일어난다. "불꽃놀이"의 할아버지는 선교사에게 땅속으로 흐르는 물길 찾는 법을 배워 묘자리를 보아주고 우물자리를 가르쳐주는 “물 미 치광이”다. 관우도 장차 커서 골동품상이 되어 “옛 무덤에 실제로 삽질을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땅속 탐색의 뜻 을 깨닫는다. “단단한 땅에 꽂을대를 박으면 땅은 살 맞은 짐승처럼 푸들푸들 일어나고, 좀체 보이지도 열리지도 않는 입구를 찾아 조바심과 안타까움으로 빙빙 돌며 더듬을 때, 어두운 연도를 지나 만나는 음부의 잠, 이윽고 천년의 꿈. 닫혀진 무덤은 순 결한 처녀였다.” 앞서의 물고기 배 따기와 너무나도 닮은 매몰과 발굴의 이미지는 여기서 매우 관능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탄생의 주제로 이어지고 있다. 과연 관우의 아내는 그날 다른 남자에게서 아이를 배태한다. “그가 누구였던가, 남편이 오래 집 을 비웠던 어느 봄날, 혼곤한 낮잠 속에서 꿈결처럼 받아들였던 사내. 남편은 옛 무덤에서 녹슨 칼을 찾아 돌아왔고, 달을 채운 아이는 그녀의 자궁을 찢고 가슴을 찢고 세상으로 나왔다.” 탄생과 죽음, 매몰과 발굴이 정교하게 중첩된 욕망의 세계다.
사람의 얼굴
"옛우물"이 죽음과 관련된 ‘매몰’의 이야기라면 "파로호"는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소설가 특유의 예술적 문제와 관련된 ‘발굴’의 이야기다. 퇴적된 시간과 물 속에의 파묻힘과 그 속에 잠긴 세계를 파헤쳐 드러내는 문제, 그것이 바로 오정희의 문 제이며 예술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혜순은 미국에 남편과 아이를 둔 채 돌아와 “물을 뺀 퇴수지(退水池)”인 파로호를 찾 아가는 것이다. “가능하면 소설을 쓰고 싶어요. 어렵겠지만 소설을 쓰려고 해요”라고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었다. 오정희의 소 설 속에서 수줍은 대로나마 예술가적 의지가 이만큼 노출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30년 전, 어두워오는 교실 안에 홀로 남아 서랍 속을 뒤지는 "완구점 여인"의 소녀에서부터 공원의 나무 밑에 할머니의 깨진 비취반지를 파묻었다가 캐내어보는 "중국 인 거리"의 소녀를 거쳐 “닫힌 것은 항상 우리를 궁금하게 했다”고 고백하는 최근작 "새"의 화자에 이르기까지 매몰되어 닫 혀져 있는 거울, 우물, 호수, 무덤, 무의식 혹은 영원의 “암호로 가득 찬” 세계는 줄기차게 오정희의 인물들을 무엇에 “들린 듯이” 사로잡아왔다. "옛우물"의 정옥이는 금빛 잉어를 보기 위해 한밤중에 우물로 갔고 "파로호"의 병언은 “보이지 않는 물속에 용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미국으로 건너갔을지도 모른다. 정옥은 죽어 우물 속에 파묻혔고 남편은 실패했다. 그렇 다면 소설가 자신이 마침내 드러난 호수바닥에서 발견한 ‘사람의 얼굴’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사람의, 그것도 여자의 얼굴이었다. 단장이 손바닥으로 문질러 흙을 닦아내고 구멍을 메운 흙을 파내자 그것은 생 생한 표정으로 되살아났다. 단순히 갸름한 흰 돌에 날카로운 돌로 세 개의 구멍을 쪼았을 뿐인데 그것이 어우러져 만드는 표정은 놀랄 만치 풍부했다.
―"파로호" 중에서
혜순이 손바닥에 올려놓고 읽으려 애쓰는 그 얼굴의 ‘암호’는 바로 “수만 년의 세월 뒤 흙을 털고 일어난 여인의 눈”이다. 그 눈은 “아득한 땅속에 묻힌 거울빛의 반사”("동경")와 같이 잔혹하고 명석한 빛일까 아니면 “해질녘 가장 밝게 빛나는” 산언덕의 “금빛을 받은 채, 그러나 저 멀리 멀어져 있는” 무심하고 평화로운 빛일까? 어쨌든 그 빛은 ‘무서운 그리움’을 자 아내는 아득히 먼 곳에서 오는 빛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창가에 오두마니 앉아 강 건너를 내다보는 여자의 시선 저편, 흙 속에 파묻혀 있다가 마침내 드러나는 ‘사람의 얼굴’이 어쩐지 “불필요하게 부처를 가린 부분을 제거하 면” 드러나게 되는 ‘마애불’("파로호")을 닮아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해독할 수 없는 암호를 바라보듯 그 표정을 읽으 려 애쓰는” 독자의 고단한 노력이 자아내는 신기루라고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