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골이라
노루쯤은 나올 줄 알았다
사람을 보려면 한 시간은 걸어야 할 줄 알았다
한 뼘 산자락에 마을이 붙어있고
호롱불 없으면 집사람의 코도 보이지 않을 줄 알았다
청도면 두곡리 듬실 부락은
포장도로에 작은 마을이 이어진
어디에도 있는 고향 마을이었다
한옥 행랑채를 100년생 회나무가 덮고 있는 모퉁이 집
자동차 라이트에 비치는
초록 융단보다 보드라운 마당에 내려섰다
여우비가 만든 이슬에 바지 가랑이가 젖는다는 걱정은 하지 못하고
잔디를 밟으며 눈밭의 아이처럼 탄성만 질렀다
텃밭에서 갓 따온 토마토와 갖은 채소
금가루를 탄 윈저에 삼계탕을 먹으며
마을은 어떤 요지경일까 설레는 마음 감춰두고
시인 황금찬과 오탁번 이야기로 첫 날을 마감했다
주
금가루: 식용 금 분말. 순수한 분말 형태는 아니고 음식을 장식하려고 분말을 초박형의 부스러기로 가공하여 작은 콧김에도 날려가고 만지면 피부에 흡수 되어버림. 아직 한국에서는 생산되지 않음.
윈저: Windsor. 양주.
***금가루와 윈저는 장병찬 시인님이 행사용으로 특별히 준비하신 것 중의 일부임.
경남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 듬실 부락 2
2006.7.23. 솔숲 이석락
장마철 새벽 안개 밑에는
한 가정을 지켜주던 문전옥답이
감나무 묘목을 안은 채 잡초를 뒤집어 쓰고
허기진 엄마가 젖을 빨리듯 누웠고
빈 집들은 지붕과 벽이 여기저기 허물어지고
무너진 담이 비를 맞고 있었다
얼기설기 나무 문짝에 비닐을 붙여두고
사립 아래에도 잡초가 무성한 집에서는 자식 기다리는
독거노인이 낯선 사람을 내다보았다
넝쿨장미와 만수국으로 꾸며진 대문 너머로
시집가듯 단장한 집에는
두 세 대의 자동차가 주인의 나들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방귀를 뀌기만 해도 나의 집사람에게 보고되는 여기는
내 아이의 훈육은 네가 하고
네 아이의 훈육은 내가 하여
한 가족으로 묶여 산다
새벽이면 쫑알대는 새들 때문에
아침잠을 못자는 주민들이
논밭에서 부산히 움직이고
축사에는 소들이 목을 빼고 아침식사를 기다린다
역사책에 기록될지도 모르는 오늘이 깨어난다
경남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 듬실 부락 3
2006.7.23. 솔숲 이석락
본채 뒤 텃밭에서 새파란 고추가
촌에서 하던대로 오줌을 누라 한다
사람이 있으면 등을 보이고 오줌을 누라 한다
담 밑에 옥수수 한 줄, 토마토 한 줄, 고구마 한 줄
부초, 가지, 상치, 파, 들깨, 도라지가
손톱만큼 차지한 땅을 자기 영역이라고
바랭이도 걷어내고 비름도 뽑아라 한다
텃밭의 콩 이랑 너머 풋사과가
엄마의 치맛자락 뒤에 숨어서 나를 본다
담장을 기어오르던 호박넝쿨이 기지개를 켜고
할 일 없는 참새가 모양 없이 날아간다
산들은 아직 안개에 싸여 있고
아침 체조를 하던 나무들도 밥상에 모여앉을 때
마당의 잔디를 깎은 우리도 품삯 받을 일꾼처럼
당당하게 생태국을 달라고 모여앉았다
주
본―채(本―)[명사] 여러 채로 된 집에서 주가 되는 집채.
텃―밭[터빧/턷빧][명사] 집터에 딸리거나 집 가까이 있는 밭. 대전(垈田).
생태국: 잡은 그대로의 명태로 끓인 국
경남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 듬실 부락 4
2006.7.23. 솔숲 이석락
배산임수 한국 마을이지만
산자락에 잡은 집터가 개울까지 내려왔다
도심 개울가의 빈민가처럼
개울 둑에 기초한 담장이 물길따라 이어졌다
땅이 넉넉한 시골에도 빈민가가 있는가
해마다 수마水魔가 저 담장을 할퀴지 않았음도 이상하다
많은 날을 위태롭게도 견뎌낸 개울가 집들도
너덧 채를 끝으로 마을은 끝이 나고
굽이치는 골짜기가 시작 된다
에위니아가 그렇게도 세찼는데
집 아래의 다리 밑을 이리저리 보고 보아도
허름한 담이 그대로 있음은 꿈에나 있을 일이다
담장 밑 가재는 언제 나올까
밤이면 솔가지 불을 들고 나와볼 일이다
주
에위니아 (EWINIAR)
소개 : 제3호 태풍, 미크로네시아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폭풍의 신'이란 의미를 가진 태풍
현황 : 중심기압 985hPa, 이동속도 시속 약 35km (2006년 7월 10일 14시 00분)
진로 : 전남 해안지방을 따라 북상하면서 전국적으로 초속 15~20m(시속 54~72km)의 강한 바람 예상
가재: 밤에 불을 보면 물 밖으로 나온다
경남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 듬실 부락 5
2006.7.23. 솔숲 이석락
산자락 두 집을 지나면 우사牛舍가 있고
우사 뒤, 발길 끊긴 좁은 길을
빗물이 핥고핥아 돌만 남았다
장맛비가 질척거리는 산길 지나면
풀밭에서 집사람이 요염하게 웃으며 기다리리라
동료들 몰래 길 따라 갔더니 우사 끝에서
길은 형체만 남고 거미줄이 막아섰다
말끔히 단장한 잔디에 나란히 앉아
시선詩仙이 되려던 6인은 어디 가고
아세안 정상회담장도 아닌 곳에
하늘색 셔츠로 통일한 6국정상만 남았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고목 밑에서
사진 찍는 여류 시인의 무릎에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마을 개들이 다투어 기어들었다
낯선 사람도 사랑한다고 흔드는 꼬리
잠시만이라도 사랑받으려고 쳐다보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