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45 ( 남해 섬이 정원 –토피아랜드 – 물건리방조어부림)
늦가을에 싱싱하고 투명한 홍시 하나를 감나무에 남기는 까닭은 나머지 추운 계절을 따뜻하게 밝히려함일까? 아니면 텅 빈 가을의 모퉁이마다 너무 허전할지 몰라 나뭇잎까지 물 들어서 가슴에 스미는 것일까? 이상기후 때문에 단풍은 늦는다 하지만 그만큼 가을이 조금이나마 천천히 오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지난 주 대전 쯤 내려오고 있는 가을의 절정을 이번 주에는 남해로 따라가 보기로 한다. 11월 하순인데 남해의 산자락마다 반 이상 들어있는 멋진 가을 풍경과 예상치 못했던 맑고 파란 하늘까지 볼 수 있었다. 특히 남해는 자동차여행에 적합한 곳이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지로 각광을 받았던 남해대교를 건너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하기에 유난히 감동스러울뿐더러 지나다 보면 때로는 이국적인 것이 문득 해외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남해는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완벽한 관광지라는 생각으로 가끔씩 단순한 휴식이 아닌 여행스럽게 다녀오고 싶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 가장 먼저 들러볼 곳은 섬이정원이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민간정원은 각 정원의 매력에 따라 <색다른 정원>과 <풍경 좋은 정원> 그리고 <쉼이 있는 정원>과 <전통과 예술의 정원>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곳 남해 섬이 정원은 정원을 거닐며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이 있는 정원> 카데고리에 있다. 무료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둘러보니 민간정원답게 매표는 무인이다. 키오스크로 알아서 결제를 하고 있으니 점점 시대적 현실에 적응하기에는 많은 학습이 필요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유럽식 정원으로 소리와 들꽃을 포함한 차분한 숲길이 유유자적하게 만들었다. 중간 중간 쉬어갈 의자와 쉼터가 준비되어 있지만 워낙 사진을 좋아하는 터라 삼각대를 세워 두고 앉았다가 섰다가 또는 뒤돌아보는 자세로 한 발작 한 발작 나를 확인하면서 섬이 정원에서 혼자 노는 일에 푹 빠져든다. 한편 가장 끝 길에 있는 하늘연못에서는 이곳의 핫한 포토죤답게 하늘과 바다와 함께 반영사진을 마음껏 담아올 수 있었다. 정원의 길은 누구라도 차분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키 낮은 꽃길로 꾸며져 있으며 저만치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함께 들어오는 가을로 물든 남해의 풍경이 편안함을 더해 쓸쓸하기까지 하다. 특별히 가을이면 인생의 계절을 느낀다. 너무 춥지 않은 가을 같은 시간 속에 인생이 끝날 때까지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늘 하게 된다. 어쩌면 지나간 여름이 청춘과도 같아서 머리카락까지 젖을 만큼 자라나는 자식을 바라보는 열정까지도 뜨거웠기에 그 무성한 여름에 열광하다가 잠시 쉬어도 좋을 인생의 계절 같은 가을이 오면 더욱 생각이 많아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자고 낙엽은 겨울까지 견디지 못하고 가을에 지는 것일까? 혹여 조금만 더 견디어 준다면 그야말로 인생의 좁쌀만한 미련도 남기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게 다시 올 수 없는 봄날이 내 아이들에게는 지금이 희망의 계절 봄이라는 현실과 그들은 그 계절에서 충분히 아름다운 꿈을 꿀 것이기에 든든하고 행복하다. 1시간여 섬이 정원에서 놀다가 약 25km떨어진 토피아랜드로 향한다. 이곳은 여러 식물을 다듬어 보기 좋은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작품 정원이라는 정보를 보듬고 들어가 보았다. 사실 오늘은 많이 걷지를 못하여 가파르고 좁은 입구를 걸어서 입장하기로 한다. 올라와 보니 주차장이 있기는 하나 그지없이 조용하다. 저 위 산중턱에서 들리는 정원관리 하시는 듯한 몇 사람들의 소리 이 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한 발 한 발 거닐다 보면 저 멀리 쪽빛 바다가 그림 같다. 가끔씩 뒤돌아보면 남해의 풍경이 걸음을 멈추게 하는 순간들이 많아 마냥 할 일 없이 깊은 생각에 빠지거나 멍 때리고 앉아 있기에 좋은 곳이었다. 바다를 내려 보며 품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4대째 이어온 정원이라는 남해 토피아랜드는 꽝꽝나무와 주목나무 또는 동백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여기도 역시 경상남도 민간정원 제 3호로 지정된 곳이다. 한편 울창한 편백 숲과 함께 아늑한 해먹에 누워 숲속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힐링이 될 법하였다. 또한 이곳은 계절마다 색다른 매력이 있을 것 같다. 풀 피는 오뉴월이면 더욱 좋겠고 잎이 무성한 한여름 역시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곳이었다. 다양한 동물 조각상과 사람의 얼굴 등을 다채롭게 꾸며놓으니 토피아랜드 안에 또 한 세상이 들어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이토록 다양하고 또는 조화로운 얼굴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어찌 바르고 매끄럽기만 하겠던가? 잘 다듬어진 토피어리 공원에서 그동안 살아온 사람 사는 굴곡진 관계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런가 하면 살면서 뼈에 박히고 가시 있는 말들도 씹어 삼킬 가슴으로 둥글려 온 이만한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아침 햇살이 살포시 내밀며 얼굴을 간질거리는 계절이 봄이라면 중천으로 올라온 햇볕이 온몸을 이글거리게 쬐이던 때가 여름이라면 사실 그때 눈부신 빛으로 하여금 볼 수 없었던 태양의 진면목은 뉘엇 뉘엇 서산으로 넘어가는 둥근 햇덩어리가 은은하게 우리의 가슴까지 파고드는 것이 가을쯤이라 하겠다. 그러니 일몰 직전의 석양이거나 낙엽 직전의 단풍을 바라보면서 드디어 석양의 낙조처럼 함께 물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단풍에 내 가을 같은 인생을 투사하고 관조해 보는 것은 어쩌면 생로병사의 리듬이 있는 사람이 되어 스스로 돌아보는 지금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이 아닐 수 없겠다. 그리고 스스로 그 순간을 묻자면 내 인생 풍요롭지는 못하였으나 아름다웠다고 말하기에는 망설임이 없을 것 같다. 물론 오늘 가을여행 역시 내게는 풍요보다는 아름다움이라 말하리라. 여럿이 움직이며 수다를 피우고 노닥거림이 아니라 혼자서 움직이는 시간도 오후 3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 해 봄날 남편과 함께 들렀던 물건리방조어부림 숲을 담아 온 기억에 잠시 들러 그 곳의 가을풍경을 다시 보고 싶어 잠깐 들러가기로 한다. 약 13km떨어져 있어서 가는 길에 가볍게 들러 가기에도 좋다. 도착해보니 처음 이곳에 와서 보았던 바다와 숲은 기억에 있는 것보다 아주 작은 규모였다. 걸어볼만한 거리도 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렇구나. 나이가 들어도 끝없이 자라고 있구나. 어릴 적 뒷동산이 오를 수 없을 만큼 높았다가 어른 되어 찾아보니 산도 아니게 보이듯이 처음 찾았던 물건리방조어부림의 어마 어마 했던 숲길과 바다는 사실 잠시 쉼을 경유할 수 있는 아늑한 곳이었다. 그동안 전국을 휘돌아 여행하다보니 이제는 내가 훌쩍 자란 것이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다 보면 전혀 생각나지 않았던 옛일이 살아 돌아오는 경우가 적잖다. 윗 지방에서부터 내려오는 가을을 만나러 왔다가 뜻밖의 맑고 높은 남해의 하늘까지 가슴에 담아간다. 그리고 옛이야기와 지금 머물러 있는 현실과 인생계절을 더 깊이 더 선연하게 기억 속에서까지 끄집어내어 들여다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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