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반반창회—2월 모임결과
일시: 2009년 2월 12일 목요일
장소: 안동장
참석: 문상두, 권순복, 김형일, 곽영선, 원종경, 임종국(반장), 손창인, 박충서, 전영철, 김정국, 이태윤(총무) 11명
특기사항:
--윤양식이 심장 질환이 재발하여 입원했었다고 하는데 곧 활기찬 모습을 다시 보기를 바란다.
--3월 모임은 이곳 안동장에서 가지기로 하고 4월에 임종국의 시골집에서 봄의 정취를 느끼는 이벤트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탁구회 발기 모임에 참석했던 권순복이 회장인 심재희가 옛날 중학 선수 시절의 실력을 되찾으려고 맹훈련 중이라고 전했다. 규칙적 운동은 활기찬 생활을 만든다!!
--권순복이 40년 만에 다시 클라리넷을 잡았다고 한다. 연말 송년파티 즈음에 임종국과 합주도 기대해도 좋을듯하다. 하여튼 음악과 함께하면 생활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지 않을까 싶다.
형일, 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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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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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서, 창인, 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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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총무 태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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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 구수한(?) 입담의 전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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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川閑談
바보의 완전한 행복나라
요즘 TV드라마는 폭력적이고 부도덕적인 내용이 많아 흔히 막장드라마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폭력과 부도덕하다는 것의 기준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은 세월의 흐름을 따라 자꾸만 무디어져 가고 그런 감각을 자극하여 스릴을 느끼게 하려면 점점 더 잔혹하고 파괴적으로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중학시절 어릴 때 보았던 서부영화에서 보안관의 딸을 납치한 악당이 여자에게 성폭행하는 장면을 산속의 오두막집으로 여자를 끌고 들어갔다 나오는 것으로 처리하였었다. 당연히 그 사이는 여자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난 요즘의 영화에서는 거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 오두막집안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참으로 궁금했었다.
고전 서부영화를 보면 결정적인 결투장면에서 한 두 명이 죽는 것이 고작인데 지금 액션영화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의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다.
인간의 감성이 어지간한 자극에는 꿈쩍도 않아서일까? 진부하다 싶은 조그만 로맨스를 그린 영화에도 눈물을 보일 수 있으니 꼭 인간성이 상실되었다고 할 수도 없으니 꽤 혼란스럽다.
어쩌면 우리 개개인의 일생과 같이 어린 시절의 순진함을 점차 잃어버리고 이제 다시는 그러한 천진난만한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처럼 인간문명의 흐름도 어쩌면 그러하여 SF영화처럼 과거의 원시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의 흐름을 따라 선악(善惡)의 기준도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
사전적으로 선(good)은 “올바르고 착하고 도덕적 기준에 맞는 것”이라고 되어있고 악(evil)은 “옳지 않고 이기적이며 비인간적이고 또 반사회적인 것으로 결국 인간에게 해로운 자연 현상과 사회적 현상”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 기준은 시대, 체제, 소속, 신념과 신앙에 따라 양상이 다르게 마련이다.
“에덴의 동쪽”이라는 드라마는 혈연관계가 주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광부의 둘째 아들 이동욱과 광산소장 신태환의 아들 신명훈이 있다. 이 둘은 같은 병원에서 태어났는데 간호사인 레베카가 신태환에 대한 복수심으로 두 아이를 바꿔 놓았다. 이동욱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검사가 되었고 신명훈은 신태환의 후계자가 되겠지만 뒤늦게 신분이 바뀐 것을 알게 되었다.
레베카는 악을 범했을까? 이동욱이 적으로 알았던 아버지 신태환에게 복수를 한다면 선일까? 신태환이 적이었던 아들 이동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면 과거를 불문하고 선이 될까?
이런 쓸데없는 의문은 “아내의 유혹”과 “유리의 성”에서 주인공들의 갖가지 행태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선악의 구분을 명쾌하게 자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스트앤크라임”(原題=medium)이라는 영매(靈媒)가 주인공인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다.
베트남전쟁에서 포로가 된 미군들이 아사 직전에 죽음에 이른 한 병사를 죽이고 그의 인육을 먹고 살아난 군인들이 정치인, 교수 등으로 명망가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 중의 한 명은 도박에 물들어 타락하자 그를 죽인다.
영매 알리슨에 의해 살인범이 밝혀지지만 “죽은 전우의 희생을 보다 값지게 하기 위해서 가치 있는 삶을 살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그는 타락한 생활로 죽은 전우를 위한 우리의 숭고한 삶을 욕되게 하였기 때문에 죽였다.”라고 변명한다. 선과 악이 엇갈리고 있으니 그 변명이 맞을지 틀릴지 헷갈린다.
‘시드니 셀던’의 “천사의 분노”라는 소설에서 여변호사 제니퍼는 차기 대통령후보인 상원의원이자 유부남인 아담을 사귀고 있고 제니퍼의 능력과 미모에 끌리고 있는 마피아 두목 미첼이 있다. 그녀는 아담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조수아를 갖게 되는데 흉악한 살인범에게 아이가 납치된다.
그녀는 아이를 찾기 위해 고심한다. 연인 아담, 검사, FBI 등에게 의뢰할 수는 있으나 시간과 증거와 절차가 필요하니 도저히 아이를 구할 여유가 없다. 결국 그녀의 선택은 마피아두목 미첼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유괴범인 살인자를 죽이기 위해 살인자를 찾는 격이다.
미첼은 밤새 조직을 총동원하여 아이를 구하고 그녀를 애인으로 삼는다. 그녀는 미첼로부터 육체의 관능과 악의 힘을 알게 되는데 그녀에게 선과 악은 어떤 의미일까?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생활에서 과연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이분법으로 판별하기가 점점 고달파진다.
선과 악을 참과 거짓으로 딱 잘라 정의하기도 한다. 사실 속마음을 그대로 알 수 있어 거짓을 말할 수 없다고 한다면 악이 존재하기 어려운 맑은 사회가 될 지도 모른다.
예전에 “스캐너”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말 그대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초인간의 이야기다. 만약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읽는 다면 거짓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능력을 혼자 가지고 있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의 겉으로 나오는 말과 속 마음으로 하는 말이 다 듣고 있으니 도리어 그가 미칠 지경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범인(凡人)으로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확실하게 판단할 방법이 없다.
불교에서는 살생, 도둑질, 사음, 거짓말, 두말하는 것, 욕설, 꾸미는 말, 욕심, 성냄, 어리석음 등 10악업(惡業)을 들고 있어 그 반대가 바로 선업(善業)이 된다. 그 지은 업이 인이 되고 과보(果報)를 낳는다고 한다. 즉 “인이 연을 만나 과를 낳는다(因緣果報)”는 것이다.
그런데 쌓은 인이 어떤 연을 만나 어떤 과를 얻을 지 누가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무엇이 어떻게 그 하나하나를 엄밀하게 대응시키는 것일까? 그 쌓여진 인은 엄청난 양으로 축적될 것인데 어디에 어떻게 저장될 것인가? 의문은 의문을 낳고 있다.
또 “하나님이 부를 때를 준비하고 있다가 하나님이 부르면 즉시 응답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 부름이 참인지, 거짓인지 어떻게 알까? 어떤 선지자가 진실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 선지자가 진실로 선지자일지는 어떻게 아는가? 믿음으로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 믿음의 정도는? “믿음자격 일급에 증 함”과 같이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니 각자가 믿음의 정도에 따라 결정할 수 밖에 없으니 어쩌면 그 선택에는 운도 작용할 것인가?
이런 모든 것을 일일이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인생은 암중모색(暗中摸索)의 과정이다”라는 말에도 일편의 진실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을 성 싶은 “완전한 선의 세계에서의 완전한 행복”의 예증을 찾을 수는 있다.
그것은 김형기가 번역한 “바보 쿠페르티노의 성 요셉”에 나오는 바보 수사(修士)가 찾은 행복이다. 그러한 예는 착하지만 멍청하여 마당이나 쓸던 바보 행자(行者)가 짧은 “나무아미타불”만을 오로지 외우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고사와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들에게는 참 외에는 거짓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마음이 깨끗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보가 되어야 완전한 행복을 가질 수 있다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우리가 거꾸로 바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옛사람의 말처럼 정이나 듬뿍 주며 살아보자.
“겉보기에 요란해도 속정이 없으면 맛이 물리게 마련이다.”(繁采寡情味之必厭)
(양천서창에서 2009.2.15. 문상두 씀)
첫댓글 선악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善 속에도 선악이 있고 惡 속에도 선악이 있는 것을 ... 다만 사람들이 '선'이라고 '악'이라고 이름하여 분
하면서 말에 매
려 살기 때문이 아닐까
'알음알이'를 버려야 천국의 문이 열린다고 했는데 혹시나 '바보'라는 말에 매
려 그 본질을 놓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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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서창에서의 고견은 한번 읽으면 잘 이해가 팍! 들어오지 않고 한번 더 읽으면 아! 하게 되네.위의 두분의 말씀이 조금은 알 듯 한데~~~ 하여튼 나 자신의 깊이가 얕아서가 아닌가 생각드는데.잘 읽었읍니다.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양천 문박사 친구가 있어 자랑스럽고, 많은 감동을 받네. 우리가 흔히들 교만, 분노, 나태, 욕심, 음욕이 마음속에 살아 움직여 수도자는 파계를 하게되고, 범인은 악행(죄)을 저른다고 하지, 그러면 그러한 마음을 비우고 없다면(색즉공, 공즉색이면) 선한 것인가? 우자의 생각으로도 마음을 비워가면서 무엇인가를 채위가야 하는데, 그 무엇인가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 또는 부처님의 자비가 아닐까? 그래서 선악을 이분법으로 판별하기가 곤란한 세상이 되어 갈수록 더 더욱 종교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왕이면 선을 선택해야 하는데, 실천(방편)이 없는 사랑(자비)은 선이 될수 없는 것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