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뿜는 담배연기처럼 또 하루 멀어져가는 나이 서른. 머물러 있는 줄만 알았던 청춘을 그리워하는 나이에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난 사나이가 있다. 시련의 20대를 보내는 동안 구단에서 쫓겨나기를 두 번.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한 테스트에도 세번이나 떨어졌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서른살도 반이나 지난 8월 중순. 거듭된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마운드에 다시 선 SK 김경태는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써내려가고 있다. 4연승 끝에 아쉬운 1패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의 성공은 어려운 시기에 그라운드에 울려퍼진 '희망가'다.
▲씩씩했던 열아홉
성남고 3학년이던 93년, 김경태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투수였다. 성남고 마운드는 몽땅 혼자 지켰다. 대통령배 준우승을 차지했고 봉황기에도 준우승을 일궈냈다. 두 대회 모두 우수투수상은 김경태의 몫. 1년 동안 전국대회에서만 무려 15승을 따낼 정도로 강철 어깨를 자랑했다. 라이벌이었던 부산고의 주형광은 롯데를 택했지만 김경태는 경희대를 골랐다. 대학 졸업장이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경희대에서도 언제나 마운드는 김경태가 지켰다.
▲시련의 이십대
아무리 단단한 강철도 무리하면 깨지기 마련이다. 왼쪽 어깨 충돌증후군이었다. 대학 3학년이던 96년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졸업반 때 LG에 2차 1지명으로 선발됐다. 장밋빛 미래가 보이는 듯 했다.
주전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를 다쳤다. 공을 던지는 왼쪽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무거운 짐은 모두 오른쪽으로 메는 것은 물론 잠잘 때도 오른쪽 어깨를 깔고 잤던 것이 문제였다. 2000년 1년을 쉬었다. 2001년에는 겨우 4경기에 나와 1⅔이닝을 던진 것이 전부였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2001년 12월 아내 이은영씨에게 면사포를 씌워줬다. 교내 뮤지컬에서 열창하는 모습에 반한 그녀였다. 함께 산 지 2년만의 일. 그러나 2002년 1월. LG로부터 방출당했다.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다.
2002년 두산이 김경태를 받아줬지만 마운드에 오를 기회가 없었다. 고민하던 김경태는 2003년 7월 임의탈퇴 신청을 했다. 야구인생에 있어 '사표'를 낸 셈이다.
▲혹독한 스물아홉
2003년 8월 김경태는 대만으로 건너갔다. 보름 동안 팀을 따라다니며 죽을 고생을 했다. 대만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거의 밥을 먹지 못했다. 딱 한차례 마운드에 올랐으나 텃세가 너무 심했다.
김경태는 '트레이너'가 되기로 결심하고 야구 재활 전문 클리닉인 '한스클럽'에 취직했다. 낮에는 재활훈련을 하는 투수들을 돌봐주고 밤이면 트레이너 시험을 위해 밤샘공부를 계속했다.
부상으로 힘들어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쌓였다. 포기하는 후배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로는 뭐라고 해 줄말이 없었다. 답은 하나였다. 보란 듯이 부활해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이었다.
▲공포의 외인구단 지옥훈련
2003년 10월 SK의 공개테스트에 참가했다. 공이 빠르지 않아 낙방. 고민하고 있을 때 LG 선배 최향남으로부터 함께 운동을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12월부터 말 그대로 지옥훈련이었다. 일주일에 2∼3번씩 아침에 남한산성 입구에서 만났다. 일반인들이 1시간 넘게 올라가는 그 길을 20분만에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헬스 클럽에 다니는 대신 쪼그려 뛰기와 팔굽혀 펴기로 근육을 만들었다.
캐치볼은 구리시 입구의 한강 고수부지에서 했다. 영하 13도의 추위에 2시간씩 캐치볼을 하고 나면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이싱을 할 얼음을 구할 수도 없어서 웃통을 벗고 '자연 아이싱'을 했다.
마운드를 찾기가 쉽지 않아 배명고가 전지훈련 간 사이에 마운드를 빌려썼다. 3개월만에 밟아보는 마운드에서 번갈아 공을 던지고 받으며 서로를 코치했다.
희소식이 들렸다. 사이버대학 야구부에서 대만 전지훈련에 함께 해도 좋다는 얘기였다. 선수들을 가르쳐주는 조건이었다. 열악한 지옥훈련 중이었던 둘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3전4기. SK 유니폼을 입다
사이버대학의 코치 제의도 뿌리치고 4월초 또다시 SK 테스트를 받았다. 최고구속을 136㎞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좀 더 두고보자는 답만 돌아왔다. 4월 중순 두산과의 연습경기에서는 4이닝 동안 볼넷 1개만 내주는 호투를 했다. 그래도 입단계약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SK 선수단 정원이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는 하늘이 도왔다. SK의 이용수가 야구를 그만두는 바람에 빈 자리가 생겼다. 유니폼을 챙겨주던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서른살, 야구에 눈을 뜨다
SK 최계훈 2군 투수코치 덕분에 야구에서 새 인생을 살게 됐다. 5월말 최코치의 권유에 따라 투구폼을 간결하게 바꾼 김경태는 머릿 속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제구력이 엄청나게 좋아졌다. 6월1일 2군 경기 첫 선발출전한 김경태는 6이닝 무실점을 거뒀다. 김경태는 "슬라이더 만큼은 10개 중 10개를 모두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다"고 자신한다.
타자와 6구까지 상대를 해도 같은 구질의 공을 던지는 법이 없다. 김경태 '성공신화'의 비밀이다.
▲믿음대로 될 지어다.
김경태는 8월14일 한화전에서 2-4로 뒤진 4회 1사때 마운드에 올랐다. 3⅔이닝 동안 안타를 한개도 내주지 않았고 팀 타선이 뒤늦게 터지는 바람에 감격적인 승리를 거뒀다. 통산성적 1승3패였던 투수가 99년 이후 5년만에 거둔 승리였다. 경기가 끝난 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아내가 "그동안 고생한 것 다 잊었다"라고 했다. 덩달아 눈물이 흘렀다.
지난해 얻은 아들 성민이는 12일이 첫돌이다. 김경태는 아내와 약속했다. 내년 5월5일 어린이 날에는 반드시 마운드에 서 있겠다고. 그래서 야구장을 찾은 아들에게 아버지가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김경태의 좌우명은 성경 구절인 '믿음대로 될 지어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노력앞에 이뤄지지 않는 일은 없다. 내년 5월5일 SK 마운드에는 분명 김경태가 서 있을 것이다.
◇김경태 프로필
▲생년월일=1975년 11월6일
▲출신학교=구암초교→성남중→성남고→경희대
▲수상경력=93년 대통령배 우수투수상(준우승) 봉황기 우수투수상(준우승)
▲대표경력=93년 청소년대표
▲경력=98년 LG 2차 1순위 입단(계약금 2억원), 2002∼2003년 7월 두산, 2004년 5월 SK 연습생 입단
▲연봉=1,800만원
▲올시즌 성적=4승1패 방어율 2.10
▲통산 성적=5승4패 방어율 6.04
▲가족사항=아내 이은영(25)씨와 아들 성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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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당시 부산고의 주형광(현롯데),경남고의 손인호(현롯데), 신일고의 김재현,조인성(현LG)
, 배명고의 김동주(현 두산)등과 더불어 고교야구계를 주름잡았던 성남고의 에이스였었다.
첫댓글 성남의 에이스...우....대단해요~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밝은 미래가 김경태선수와 함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