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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18-35 무엇을 보려고? 2007. 4. 1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세례요한이 외쳤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인지 심중에 의논하였습니다. 그러자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과 불이란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이루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타작마당에서 알곡은 모아서 곳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시기에 회개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신데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신 것을 세례요한이 보고서 이 분이 바로 메시아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이 그 어느 누구도 눈치 보지 않고 담대하게 회개를 외친 사람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안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세례요한이 이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이제 더욱 담대하게 외친 것입니다. 그 당시의 통치자인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래도 아무른 염려가 없었습니다. 메시아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예수님께서 타작을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된 종교지도자들을 물리치고 완전한 개혁을 하고, 정치권력도 물리치고 완전한 독립을 하는 그런 일들을 예수님께서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이런 소문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의심이 되어 자기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묻습니다.
18-21절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자신이 세례를 베풀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한 그분이 바로 오실 분이라는 지시를 받고서도 지금 의문이 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질문을 예수님께 할 때에 마침 그 현장은 질병과 고통과 악귀 들린 자를 고치시며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시는 중이었습니다.
22절입니다. 세례요한에게 대답하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가 와서 구원을 베푸실 모습을 예언한 내용들입니다. 이사야 35:5,6절과 이사야 61:1절을 함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그리고서 추가적으로 한 말씀 더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보고서 실족할 만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실족하게 됩니까? 사람들이 평소에 기대한 메시아상이 다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인 성경에 기록된 대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의 기록된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역시나 자기중심적인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렇게 실족할 만한 일들은 구약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시편 73:1-14절입니다.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 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을 보면서 실족할 뻔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이런 항의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습니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니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언제 실족할만한 때를 만납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열심히 했는데도 예수님이 전혀 도움을 주시지 않을 때에 과연 예수님이 살아계시는가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왜 그런 의문이 드는가 하면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교회의 목사들이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대구 성서아카데미의 정용섭 목사님이 이번의 설교비평을 한기총 대표인 박종순 목사의 설교로 하였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고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들로 설교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고서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 예수님 믿지 않아서 실패한 사람들 이야기를 예화로 말 하면서 예수님이 인생 성공의 마스터키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경의 예수님을 보면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에 실패한 길이요, 망한 길이요, 저주의 길로 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모습입니다. 구약에서조차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핍박과 고난을 받고 악인은 형통하여서 이것 때문에 실족할 뻔 했다고 증거 하고 있는데 신약에서 이미 밝히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의 성공을 이야기하기에 그들이 지금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24-25절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고 나서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느냐고 물으십니다.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사람은 왕궁에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려고 교회당에 왔습니까?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좋은 옷 입고 화려하게 차려입고 사치는 것을 위하여 오셨습니까? 세상의 성공을 빌어주고 내 소원 성취하는 곳이라고 오셨습니까? 그러면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교회란 자기의 소원과 뜻이 날마다 뭉개지고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평소에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주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여도 자기 집착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26-2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선지자들보다 더 큰 선지자라고 합니다. 27절의 말씀은 말라기 3:1절의 말씀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메시아 앞에 길을 준비할 선지자가 온다고 한 그 선지가가 바로 세례요한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표 하는 것이기에 그 예언의 결국을 세례요한이 목격하였기에 세례요한이 가장 크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례요한이 누구를 증거 하였습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세례요한보다 큰 자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세례요한은 노아보다 모세보다 다윗보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 보다 엘리야나 엘리사보다 다니엘보다 더 크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세례요한의 손가락으로 모아져서 예수님을 지목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크다는 말은 개인의 권능과 역할과 일의 양의 따른 것이 아니라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보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서로 비교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는 차원에서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말씀은 28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과 성령의 임하심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직접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성도들보다 크다는 의미가 우리가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크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보든지 신약의 사도들을 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무엇을 보기 위하여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는 것입니까? 그것도 부족하다고 자꾸만 더 모으자고 하는데 과연 교회가 무엇을 보여주는 곳입니까? 세상의 영광과 자랑거리를 보여주는 곳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이 심판 받는 곳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고 전하여야 하는 곳입니까? 나의 뜻은 무너지고 주님의 뜻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저 나는 피조물로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인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증거 하는데 여러분은 아멘으로 화답이 되십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하실 때에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였는지를 29-30절입니다.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일반 백성들과 세리들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하고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은 의롭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그냥 무시한 것이 아니라 조롱하며 귀신들린 자들이라고 배척한 것입니다.
31-32절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비유로 말씀합니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노는 것입니다. 하나는 결혼 놀이이고 하나는 장례놀이입니다. 결혼놀이는 피를 불면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아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과 함께 놀기 위하여 놀이를 바꾸는 것입니다. 기분 안 좋은 일이 있는데 춤추는 일이 재미없다면 장례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곡을 할 테니 울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울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있지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것을 아주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는 무슨 도를 다 터득한 것처럼 도도하게 구는 사람들 있습니다. 함께 어울리지 않고서 콧방귀나 뀌는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이 비유를 가지고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떡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귀신들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로 모여서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아야 합니다. 누가가 왜 누가복음을 기록한 것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 사도들이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고 무엇을 하셨는지를 믿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 눈앞에 무엇이 보입니까? 율법적인 행함으로 갈라디아 성도를 꾀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만사형통한다고 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을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나와 세상이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여 지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무나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5절에서 지혜의 자녀들만이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