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엔 잠을 잤다.
어제의 산행이 길고 험했다지만 지리산행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닌데.
아침엔 일어나 책도 보고 거실의 카펫도 공기를 쐬었다.
깔개를 깔고 벼루뚜겅을 열고 붓을 잡아보니
새삼스럽다.
한글 획을 연습하다가 꼴에 한자를 쓰고 싶어 서가를 훑어본다.
예전에는 집사람의 책도 몇 권보이더니 보이지 않는다.
영대의 말도 생각 나
석보상절을 꺼낸다.
세종어제훈민정음 중 '세'자를 몇 번 써 본다.
도저히 흉내낼 수 없다. 당연하지 임마!
정제문 선생이 가르쳐준(아니 안내해준) 이 책이 이렇게 쓰이다니!
라면을 한 봉지 끓여 밥을 말아 점심을 먹고 나선다.
555번 버스를 타고 증심사 정류장에 내리니 3시 45분이다.
맹렬한 햇볕이 목덜미를 때린다.
모두들 내려오고 있다. 어쩌다 올라가는 이들 중에는
치마를 나풀거리는 여인과 그 동행이거나 어린 아이 손을 잡은 가족이다. 어쩌다 산행차림도 있다.
증심교 부근 식당에는 사람들이 그득하고 마냥 기꺼운지 소리도 크다.
서둘러야겠다.
용추폭포 쪽 계곡에서 몸을 씻고 노래부르거나 책을 읽으려면
시간이 바쁘다. 6시까지만 놀다오려고 나온 길이다.
증심사 오르막길에 숨이 가쁘고 어제의 여파인지 다리도
팍팍하지만 송풍정 길을 잡고 계단을 오른다.
내려오는 이들도 뜸해지고 햇볕만 쎄다.
불판 위에 익어가는 빈대떡이나 파전, 돼지고기는 나를 끌지 못한다.
난 그 냄새에 유혹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등짝에 따가운 해를 등지고 오른다.
산에서 죽은 이의 기념비 있는 곳에서 잠깐 물을 마신다.
금방 출발한다. 오르막은 급해져도 숲속이라 오히려 편하다.
우리의 문명이란, 우리의 편안함이란
얼마나 자연에서 떨어져 나왔을까?
중머리재에 이르니 4시 40분을 지나고 있다.
팍팍한 다리로 1시간만에 주차장에서 올라왔다.
땀이 흘러내린다. 벤치이 앉아있는데 드문드문 가족과 연인들
그리고 혼자인 남자와 또 여자가 지나간다.
계곡을 찾아 내려간다. 젖은 길 지나 왼쪽으로 평평한 길을 따라가는데
오른쪽 아래로 길이 나 있다.
지난 번 처음 선교에서 올랐을 때 지났던 길이다.
꼭 그 만큼한 돌들이 계단의 거리만큼 편하게 길을 이루고 있다.
10분쯤 내려갔을까? 물소리가 들린다.
중머리재에서 식힌 땀이 다시 솟지는 않았지만 주저없이
옷을 벗고 폭포 속으로 들어간다.
주먹만한 물방울이 등짝을 치자 아프다. 참고 버텨본다.
차가움과 물의 무게가 나를 때린다.
금방 나온다. 몇번 들락날락한다.
무슨 노래였던가 노래를 목청껏 외쳐본다.
소리공부를 하던 이들은 이 물의 뒷쪽에 앉아 소리를 했을까?
아껴 둔 캔 맥주를 딴다.
차가워진 몸은 맥주맛을 깊이 느끼지 못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24.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CabX%26fldid%3D4meQ%26dataid%3D282%26fileid%3D1%26regdt%3D%26disk%3D6%26grpcode%3Dshsrestroom%26dncnt%3DN%26.JPG)
각도가 낮아진 햇볕이 나뭇사이를 지나와 작은 폭포수 아래
고인 물을 번쩍이게 한다. 옷을 입고 리코더를 불어보지만
흥이 나지 않는다. 몸은 씻었는데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고
나의 끝없는 욕심이 어디까지인지, 진정 이 ?識?을 버릴 수 있기를
기도아닌 기도를 한다.
주역강의를 펴도 맑아지지 않는다.
챙겨 일어난다.
5시 50분이다. 누군가 간절하게 기도를 했을 것 같은
간절하게 의지하며 염원했을 모습이 그려지는 돌 계단을 다시 올라
숲을 걷는다. 땀이 다시 밴다.
나의 땀냄새는 어떻게 이 세상으로 퍼져갈까?
어제 '속리'산에서의 땀을 머금었던 속옷이 그대로이니.
중머리재에서 서인봉에서 정상쪽을 보니 오랜만에 파란 하늘이 보인다
서남쪽은 여전히 뿌해 광주시내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새인봉 쪽으로 걸음을 세듯 서서히 내려온다.
싸구려 등산화가 발바닥에 울퉁불퉁한 느낌을 그대로 전해온다.
맨발도 아닌 데---
나이지긋한 3부자가 바삐 내려간다.
한 사나이가 올라온다. 아직은 늦지 않았으니.
새인봉 첫 바위에 이르니 6시 50분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