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잠에서 깨보니 나보다 먼저 일어난 사람은 없다. 평소 집에서는 엄마가 깨워서 짜증부리며 일어날 시간인데, 여기엔 내 짜증을 받아줄 사람도 없다. 늦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더 이상 잠도 오지 않는다. 창 밖은 무척 환하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 오늘은 끄렘린과 붉은광장을 견학하게 되는데, 숙소에서 오전 10시에 나간다고 하니, 아직도 4시간이나 남는다. 먼저 씻고, 옷 갈아입고… 그래도 역시 시간은 무척 많이 남는다. 뭘 할까 궁리하다가, 가이드북을 펼쳐든다.
사실 가이드북을 미리 읽어두려고 했는데,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결국 오늘 이른 아침, 기숙사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끄렘린에 대해 더 자세히 읽어본다. …하지만 뭔 말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대회 궁전이 뭐고, 궁전 병기고랑 무기고는 뭐고, 이 많은 사원들은 전부 그게 그거 같고……. 역시 직접 가보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드디어 아침 10시. 우리 일행은 기숙사를 나와 붉은광장으로 향한다. 물론 지하철을 이용한다. 우리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운 Дмитровская(드미뜨롭스까야)역에서 Чеховская(체홉스까야)역까지 간다. 거기서 Тверская(뜨베르스까야)역으로 갈아탄 다음, 다시 Охотный Ряд(아호뜨늬 랴뜨)역까지 간다. 지하철 역을 빠져나오니 맞은 편으로 볼쇼이 극장이 보인다. 바로 그 볼쇼이! 아쉽지만 맞은 편에서 사진 하나 찍어두는 걸로 만족하고, 붉은광장으로 향한다. 조금 걷다 보니 두마 건물도 보이고, 어느 새 붉은광장에 우뚝 서있는 성 바실리 사원이 보인다. 성 바실리 사원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다.
성 바실리 사원은 이따가 다시 보기로 하고, 일단 끄렘린에 입장한다. 끄렘린에 들어가기 전, 우리를 처음 맞아주는 것은 무명 용사의 무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1966년 12월에 만들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고, 흑색바위에는 "1941년부터 1945년의 무명 전사들에게 바친다. 비록 그대들의 이름은 모를지라도 그대들의 숭고한 희생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쓰여져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스끄바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각 도시에는 이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기념물이 참 많다고 한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불꽃도 신기하지만, 두 명이 보초를 서는 모습, 그리고 교대식이 무엇보다 재미있는 구경거리이다. 비디오로만 봤던 교대식, 그리고 절도있는 그 걸음걸이. 바로 앞에서 보고 있자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무명 용사의 무덤을 떠나려 하니, 길을 따라 도시 이름들이 쓰여 있다. 민스끄, 뚤라 등등.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 전투지를 기념하여 써 놓은 모양이다.
말 타고 돌아다니는 남자들도 보인다. 군인, 혹은 감시인일 것 같다. 그러다가 거리상점을 발견하고, 우리 일행 모두 반갑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이스크림 메뉴판을 보니 외국 아이스크림도 많다. 우리는 러시아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듣던 대로 정말정말 달콤하다. 저만치 앞에는 높은 탑이 보인다. 거기엔 마르크스, 엥겔스와 같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그러고보니 레닌이 생각난다. 하지만 오늘 금요일은 레닌 묘의 휴관일이라고 한다. 아쉽다. (하지만 7월 22일에 붉은광장을 다시 찾아 레닌 묘를 견학한다.)
드디어 끄렘린이다! 러시아어로는 Кремль(끄례믈)이라고 한다. 끄렘린은 모스끄바 뿐만 아니라 全 러시아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곳이자, 러시아 역사의 줄기에 위치한 역사와 문화의 총체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지난 세기에 이 곳은 세계 정치 무대의 중심이었다. 냉전 시대의 두 축의 중심은 모스끄바와 워싱턴이 아니었던가. 물론 지금도 뿌찐 대통령은 이 곳에서 근무하면서, 어떻게 하면 러시아를 더 강하고 풍요로운 나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이처럼 끄렘린은 모스끄바의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끄렘린은 원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성벽을 뜻한다. 모스끄바 뿐만 아니라 다른 러시아의 도시에도 끄렘린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끄렘린"은 거의 고유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끄렘린, 그 중에서도 모스끄바 끄렘린은 모스끄바 공국의 시조 유리 돌고루끼 공이 1156년에 목조로 된 성벽을 쌓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영주 개인의 군사적 요새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위에 여러 건물들이 축조되고, 이반 3세 때에는 통일된 러시아의 수도로서 권력의 핵심임을 나타낸다.
지금의 성벽은 15~16세기에 걸쳐서 개축된 결과이다. 끄렘린 내의 건물 축조는 이반 3세가 초빙한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이 주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양식이 러시아만의 독특한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공후들이 러시아 정교의 문화를 건축에 반영해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끄렘린의 역사를 살펴보았으니, 잠깐 "모스끄바"라는 도시에 대해 알아보는 건 어떨까. 러시아어로는 Москва(마스끄바), 영어로는 Moscow. 모스끄바가 러시아의 수도라는 것은 동네 아이들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인구는 870만명, 거의 1000만명에 이른다. 러시아 전체 인구가 약 1억 4395만 4500명이니, 모스끄바에만 러시아 인구의 6%가 살고 있는 셈이다. 나라 전체 인구의 약 21.5%가 살고 있는 서울보다는 덜하지만, 러시아 역시 도시 집중 현상이 심하다. 물가나 생활 수준 역시 대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상당히 심한 듯 하다.
모스끄바의 면적은 약 1000㎢에 이른다. 서울(606㎢)이나 부산(762㎢)보다도 넓고, 인천(980㎢)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모스끄바가 러시아 제 1의 도시이다 보니, 임금이나 생활 수준 역시 다른 도시들보다 높다. 따라서 러시아의 전체적인 경제 통계를 접하고 모스끄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다들 놀란다. 나 역시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한편 모스끄바의 역사는 1156년 블라지미르-수즈달 공국의 공후로 있던 유리 돌고루끼(돌고루끼는 "긴 손"이라는 의미)가 두 강이 면한 삼각형 지역에 목조의 끄렘린(성채)을 세우게 되면서 시작된다. 기록에 의하면 유리 돌고루끼는 1147년에 끼예프의 공후에게 "형제여, 모스끄바에 있는 나에게로 오라."고 말했는데, 이 시점을 시작으로 모스끄바는 유리 돌고루끼에 의해 탄생한다.
바로 이 끄렘린을 중심으로 모스끄바의 거리가 발달하고, 12~13세기에는 상업과 산업의 요지가 되었다. 13세기에는 신흥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1237년부터 1293년에 이르기까지 따따르인들은 시시때때로 모스끄바를 침략하여 약탈하고 불태웠기 때문에(1240년부터 1480년까지 약 240년동안 몽골은 러시아를 지배했다), 이를 막기 위해 끄렘린 주위에 석벽을 세우고 대공의 궁전, 수도원, 행정 기관 건물, 귀족의 거처 등은 석벽의 안쪽으로 옮겼다. 14세기에 들어서 끼예프 공국은 모스끄바 공국으로 합병되었고, 1326년에는 끼예프에 있던 러시아 정교의 대주교 자리 역시 모스끄바로 옮겨졌다.
그 후, 모스끄바는 러시아의 수도로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가, 뾰뜨르 1세에 의해 1710년에 수도는 뻬쩨르부르그로 옮겨지게 된다. 모스끄바는 약 200년간 수도를 "빼앗겼"으나,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레닌이 권력을 거머쥐게 되고, 수도는 다시 모스끄바로 돌아온다.
지금 이러한 역사적인 도시 위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눈 앞에는 모스끄바의 상징, 끄렘린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망루(Троицкая Башня)가 우뚝 서 있다. 우리 일행은 여기를 통과해 끄렘린에 입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망루는 1495~99년에 알레비시오 프라지네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삼위일체"라고 불리는 것은, 끄렘린을 위에서 볼 경우에 삼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탑의 높이는 80m로, 20여 개의 탑 중에서 가장 높다. 16~17세기에 지하는 감옥으로 쓰였던 과거를 지니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 때 나폴레옹이 이 곳으로 입성을 한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맨 위에 있는 별은 지름이 3.75m이며, 1500kg으로 금도금을 하여 강한 눈보라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거대한 삼위일체 망루를 통과하고, 이제 끄렘린 견학이 시작된다.
처음에 끄렘린 대회궁전이 보이는데, 끄렘린 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현대식 건물이라고 한다. 아름답지만 고풍스러운 주위의 경관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곳에 세워놓았다면 정말 멋진 건물이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끄렘린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 듯 하다.
그리고 황제의 대포, 황제의 종을 거쳐 정말 멋진 사원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황제의 대포와 황제의 종은 관광객들이 반드시 보아야 하는 명물이다. 황제의 대포는 16세기 말, 안드레이 초호프에 의해 주조되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대포라고 한다. 구경 890m, 중량은 무려 40톤. 하지만 한 번도 발사된 적이 없다고 하고, 앞에는 포탄이 놓여져 있는데 장식용이라고 한다.
황제의 종 역시 세계 최대라고 한다. 이반 마트린과 미하일 부자의 작품이라고 한다. 직경 6.6m, 높이 6.14m, 무게는 무려 200톤. 미완성으로 종의 주조 중 큰 화재가 났는데 누군가가 종의 일부분에 물을 부어서 종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종은 파손된 그대로 1836년 지금의 자리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 종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황제의 대포와 역사가 유사하다. 그런데 떨어져 나간 종의 일부분은 아주 반들반들하다 못해 금빛이 되어버렸다. 관광객들이 모두 이 조각을 만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도 역시 슬그머니 손을 뻗어 여러 번 문질러본다.
이제 멋있는 사원 구경할 차례다. 내가 처음으로 봤던 러시아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의 사관학교 졸업식의 무대였던 사원 광장이다. 아아, 이 감동이란! 영화의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고, 그 때의 감동을 떠올려본다. 그 웅장함, 그 아름다움, 그리고 은은한 종소리……. 그러고보니 이반 대제의 종루가 있다. 기념하여 사진 한 컷 찍는다. 나폴레옹 군대는 이 종루를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일부 파손된 것이 남아있다고 한다.
사원광장에는 이반 대제의 종루 외에도, 아르한겔스끼 사원, 성모수태 사원, 우스뻰스끼 사원 등이 늘어서 있다. 하나같이 얼마나 멋있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런데 하늘이 내내 흐리다가, 이제는 아주 미쳐버렸다. 비를 마구 뿌려대는 것이다.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머리를 빼고는 온몸이 비에 흠뻑 젖고 말았다. 바람은 또 왜 그리 세게 불던지.
결국 성당 두 군데만 구경하고 얼른 빠져나오게 된다. 성당 내부는 정말 멋있는데. 이콘이 빽빽이 그려져있고. 그리고 나를 압도하는 그 분위기. 몰래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과 사진 찍지 말라고 경고하는 무서운 할머니. 그러나 저 쪽에서 또다시 관광객들이 얼른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다. 할머니는 다시 저 쪽으로 걸어가고, 이제는 이 쪽에서 사진을 찍는다.
이런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사원 밖에서는, 12시가 되자 시계 탑에서 소리가 울려퍼진다. 딩, 딩, 딩…….
우리는 무기고에 입장하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외부 입구에서도 가방이 크다는 이유로 나를 비롯한 여러 명이 입장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그 때 나는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된다. 내 신발 깔창이 뒤쪽에서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뭐, 괜찮겠지, 본드로 붙이면 되겠지, 상점에서 본드 정도는 팔겠지…….
결국 신발을 질질 끌면서 붉은 광장에 입장한다. 아아, 멋있다! 특히 성 바실리 사원… 정말 멋지다! 어찌 러시아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붉은 광장을 내 맘대로 누빌 수가 없다. 신발은 신발대로 조금씩 조금씩 뜯어지고 있고, 날씨는 날씨대로 나쁘고, 몸은 몸대로 지치고……. 결국 성 바실리 사원에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고, 굼 백화점으로 향한다. 다행히도 성 바실리 사원은 7월 22일에 붉은광장을 다시 방문할 때, 아주 자세히 관찰할 기회가 온다.
"ГУМ(굼)"은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альный Магазин(국영백화점)"의 약자이다. 붉은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한 쪽이 끄렘린의 망루와 붉은 벽돌의 역사박물관 그리고 성 바실리 성당이라면, 다른 한쪽은 바로 국영백화점 굼이 자리하고 있다. 1890년부터 1893년에 걸쳐 세워진 이 백화점은 1층 중앙에 분수가 있는 아름다운 쇼핑센터이다.
혁명 전에는 200여 개의 판매장이 있었으며, 1953년에 지금과 같이 개조하였다. 굼은 3층 건물이며 천장을 유리로 만들어 내부가 환하다. 현재는 세계적인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 따라서 우리와 같은 외국 관광객들이 쇼핑하기에는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지 않을까 싶다.
우리 일행은 굼 백화점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Ростикс(로스틱스)라는 닭고기 패스트푸드점인데, 좀 맛이 짠 것 같다. 나는 Обед Классика(클래식 세트)를 주문한다. 그런데 매장 안으로 참새들이 날아온다. 시민들은 굳이 쫓아내지 않고, 새들도 도망가질 않는다. 한두마리 계속 들어오더니, 새들이 가게 주인이 되어버린 듯 하다. 또다시 러시아의 참새에 놀랐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아르바뜨 거리로 향한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아르바이트(?)를 떠올리는 아르바뜨 거리! 그러나 나는 너무나 불행하다. 신발, 신발, 바로 신발이 문제인 것이다. 이제 신발은 망가질대로 망가졌고, 이대로 아르바뜨 거리를 일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본드로 붙이는 것도 안될 것 같다. 신발을 하나 살 수 밖에.
그러다가 신발 가게가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겨난다. 결국 다른 일행은 구 아르바뜨로 관광하러 가고, 나와 선생님, 그리고 어느 친구 하나는 신 아르바뜨로 향한다. 신발 가게를 찾기 위해서.
눈 앞에 아디다스가 보인다. 신발가게다! 우리는, 특히 나는 기대를 안고 상점에 들어간다. 하지만 몇 초 후에, 우리는 기 죽은 모습으로 나온다. 아디다스 가격이 얼마나 될지 상상해보라. 음……. 난 가격도 제대로 못봤지만, 우리 돈으로 몇십만원은 하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충북대 교수님이신 올가와 또다른 인솔 선생님과 마주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올가 교수님은 구두 수선공한테 가보라고 하신다. 다행히도 맞은 편에 구두를 수선하는 쪼마난 구멍 가게가 있다. 나는 신발을 질질 끌며 지하도를 가로지른다.
구두 수선공은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전형적인 시골 사람이다. 모스끄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주 친근하다.
그 아저씨는 내 신발 상태를 보더니, 계속 고개를 젓는다. 안될 거라고, 안되겠다고. 그냥 하나 새로 사는 것이 나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올가 교수님은 나의 상황을 설명해 주신다. 지금 여기 있는 신발 가게들은 전부 너무 비싸다고……. 결국 임시 방편으로 신발을 꾀매기로 한다. 하지만 아저씨는 이것도 얼마 가지 않을 거라고 하신다.
아저씨는 내 신발을 고치면서 삼성이니, 김일성이니 얘기를 꺼낸다. 왜 김대중이나 노무현은 모르면서 김일성은 그리도 잘 아는 것일까. 그러다가 문득 내 러시아 이름을 물어보신다. 나는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더니 내 한국 이름을 묻는 것이다. "종원, 이종원." 아저씨는 웃으면서 "쬬마! 쬬마!"하고 외치며 바로 내 러시아 이름을 지어주신다.
드디어 신발 수선이 끝났다. 그나마 마음이 좀 안정된다. 지금까지 얼마나 초조하고 긴장했는지! 혹시 지하철에서 신발이 완전히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기숙사까지는 또 어떻게 가지, 이렇게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아디다스 신발 가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돈을 지불하고, 그 아저씨와 헤어진다. 누구보다도 유쾌하고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이던 그 구두 수선공 아저씨. 지금도 아르바뜨의 한 구석에서 열심히 구두를 수선하고 계시겠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난 결국 아르바뜨 거리 구경은 포기하고, 구두 수선한 곳 근처에 있는 Дом Книгн(돔 끄니기―책의 집)에 들어간다. 돔 끄니기는 모스끄바에서 가장 큰 서점이라고 한다. (7월 26일에 다시 아르바뜨 거리를 찾아서 거리 구경을 실컷 하게 된다.)
1층보다는 2층에 책이 많은 것 같다. 1층에는 문구류, 음반, 이런 것이 많다. 그리고 2층은 순수하게 책들만 진열되어 있다. 정말 규모가 크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서울에 가서 교보문고에 들어갔을 때도 정신을 못 차렸던 기억이 난다. 돔 끄니기의 규모는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쨌든 우리 마을 서점에 비하면 백배는 넘겠지.
그런데 돔 끄니기 직원들의 태도가 나를 당황하게 한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사전을 찾고 싶어서 직원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에게 사전 코너가 어디 있냐고 물으니, 저 쪽에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 쪽으로 쭉 가보니 정말 Словари(사전 코너)라고 쓰여져 있다.
하지만 사전 코너의 직원들은 너무 무성의하다. 자기네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수다를 떨다가도, 뭐 한 마디 물어보면 표정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거참, 되게 귀찮게 구네" "그냥 알아서 하지"라고 하는 듯한 표정이다. 어쩌면 내 오해일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책이 있냐고 물어보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계속 없다는 대답으로 일관한다. 그럴 때 뭔가 하나 더 물어보면 그 직원은 아주 짜증내며 가버린다. 계속 "Нету, нету!" ("없어요, 없다니까요!") 할 뿐이다. 그러다가 다른 직원이 내가 찾던 책을 찾아준다. 고맙게도 그 책이 있는 곳까지 안내한다. 둘 다 젊은 아가씨였는데, 어쩜 이렇게 다를까.
친절한 직원들도 간혹 있으나, 돔 끄니기의 첫인상은 대체로 좋지 못하다. 다른 상점에서도 이렇게 불친절하고 무성의하진 않았는데. 오히려 부담스러우리만치 친절했지. 러시아는 이제 더 이상 불친절의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돔 끄니기의 직원들은 나의 모든 환상을 깨고 말았다. 아아,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다. 말은 통하지 않고, 찾고 싶은 책은 산더미처럼 많고…….
결국 나는 책 네 권을 사들고 나온다. 벨로루시에 관한 책, 우크라이나에 관한 책, 러시아어 사전, 그리고 러시아 지도책. 그런데 서점을 빠져나가는 데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아저씨 둘이서 계단 앞에서 고객들을 감시하고 있는데 날 붙잡더니 책을 한 권 한 권 일일이 검사한다. 우리나라에도 있는 것처럼, 혹시 물건을 계산하지 않고 가져가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 소리내는 그 기계가 내 차례에서 소리라도 낸 모양이다. 난 영수증을 보여주고 책을 모두 내준다. 그리고 아저씨는 모두 확인을 하고 난 후, 문제가 없다며 그냥 가라고 한다. 휴, 또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지만 이제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신발, 또 신발이다. 신발 깔창이 이제는 아주 떨어지고 말았다. 짜증나 미쳐버릴 지경이다. 결국 어설프게 걸으면서, "기숙사까지는 제발……."하고 비는 지경이 되었다.
오후 5시, 일행이 모두 모이고, 우리는 기숙사로 향한다. 정말 다행히도, 기숙사까지 내 신발은 더 이상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 단지 지하철이 잠깐 멈추는 말썽을 피운다. 하지만 어쨌든 이 상태로 내일 여행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신발을 새로 사야한다. 하지만 어디서, 언제 사야하지? 결국 박찬근 선생님께서 신발 시장을 알아보시고 내일 아침 일찍 같이 가자고 하신다. 아, 이렇게 고마울 때가! 드디어 살았다!
기숙사에 돌아오니,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다리가 특히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허리까지 아프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난다. 아플 때 집에서는 투정도 부리고 짜증도 부리고, 그러면 엄마는 그 모든 걸 다 받아줬는데…….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식사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빨래도 해결해야 한다. 모든 걸 전부 나 스스로 해야 한다. 집에선 엄마가 다 해줬는데.
난 친구의 국제 전화 카드를 빌려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쯤 한국은 밤이겠지. 이제 잘 시간이겠지. 이게 러시아 와서 집에 처음 거는 전화인데, 엄마는 놀라지 않을까. 그동안 내 소식이 궁금했겠지. 사뭇 기대까지 된다.
복잡한 절차를 마치고(무슨 숫자를 누르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어쩌고 저쩌고), 신호음이 들린다. 몇 번 따르릉 소리가 울리더니 털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 정말 아무 말도 나오질 않는다. 그저 눈물만이 쏟아질 뿐. 울면서 잘 있다고, 여기는 너무 좋다고 했으니 엄마가 믿을 리가 있을까. 왜 우냐는 엄마의 근심어린 질문에, 그냥 피곤해서 그렇다고 하니, 엄마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정말 울려고는 안했는데, 눈물이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다. 내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운다. 정말 실컷, 펑펑 울어버린다. 3일만에 벌써 지치다니, 나도 연약하고 의지 없는 인간인가 보다.
여전히 창 밖은 환하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환하다. 나뭇잎이 유난히 푸르러 보인다. 갑자기 고향이 그리워지고, 갑자기 엄마 얼굴이 보고 싶다. 내 방의 책상도 그리워진다. 그러다가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계속 되는 학교 생활이 떠오른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침 밥 먹고 향하는 학교… 밤 10시가 되어서야 학교 일정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11시가 다 되곤 했던 일상……. 갑자기 힘이 솟는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싫다. 끔찍하게 싫다.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일상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것도 모스끄바라니 난 너무 행복하다!
하지만 아픈건 어쩔 수 없다. 아플 때 나를 간호해주시던 어머니가 생각이 난다. 그런데 지금 난 어떤가. 강한 척, 안 아픈 척 하면서도 내 방에 와서는 이렇게 실컷 울고 있지 않은가. 그 힘들다는 러시아 유학 생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아픔보다 더 심하겠지. 과연 나중에 내가 러시아 유학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지금 이만한 아픔에도 이렇게 울고 있는데.
문득 아르바뜨 거리의 구두 수선공 아저씨를 떠올리니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 아저씨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쌈쑹, 쌈쑹!" "나쉬 쁘리지젠뜨―뿌찐. 아 끄도 바쉬? 낌, 일, 쏜?" ("우리 나라 대통령은 푸틴인데, 당신네 나라는 누구지? 김일성인가?")
김일성은 살아 있다. 그리고 삼성은 노무현을 이겼다. 이런 즐거운 생각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든다. 오늘 꾼 꿈은 기억나지 않지만, 꿈에 엄마가 나오지 않았을까. 구두 수선공 아저씨도 내 꿈 속에 나왔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