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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위인 초상화 남긴 친일경력 시비 月田 장우성 (1912-2005 한국화ㆍ동양화)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863
"시인 서정주와 함께 수학한 동료 화가 김기창처럼 작가적 성취와 별개로 친일경력 시비는 그를 평생 따라다닌 족쇄였다. 이당 김은호를 사사하면서 일본풍 채색화로 선전 등 일제 관전에 다수 입상했고, 해방 뒤 문인화풍으로 돌연 화풍을 바꾼 이력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를 큰 어른으로 존경했지만 재야미술계는 그를 친일 경력을 덮은 처세주의자로 비판했다."(한겨레)
대부분의 언론에게 그의 친일행각은 그의 명을 재촉한 원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일부 언론은 '일부'라는 표현을 써 그의 친일을 한때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보거나 철저히 그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등 친일전력을 감싸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동아일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친일'이라는 단어를 아예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친일전력을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대신 동아일보는 <일 영향 벗은 독자적 한국화 개척>이라는 제목을 부각시키며 민족문화를 일군 민족화가의 면모를 강조했다.
이밖에도 "일제 강점기 한국화의 정체성 혼란 속에서도 전통에 대한 강직한 신념과 한국화의 예술적 가치를 근대적 발상으로 재창조하여 동양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그의 노력은 1942년 선전 최고상에 빛나는 '창덕궁상' 수상으로 한국화 거장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다"(세계) 등의 보도에서는 최소한 역사의식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지난 2001년 친일화가인 운보 김기창 화백의 부음기사와 비교해 월전의 부음기사에서는 그의 병세악화 원인으로나마 '친일'을 언급하긴 했으니 진일보한 것이라고 해야할까?)
각 신문의 제목을 보면 언론의 각별한 애정을 걸러내더라도 그 누구도 그가 한국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언론의 찬사일색 보도에는 사자(死者)에 대한 예의도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를 차리는 데 바빴던 걸까? 그의 부음기사에선 '사실'이 빠져 있었다. 월전의 '90년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그의 친일활동인데, 언론은 지면 할애에 지나치게 인색했다. 한 사람의 공과를 엄정하게 다뤄야하는 책무를 저버린 것 같다.
"친일 시비에 휘말리며 불편한 만년을 보내기도 했다."(경향)
"…친일작가 논란이 불거지며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한국)
"최근 친일작가라는 논란까지 불거져 병세가 더욱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시비는 장 화백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안겨줬다."(서울)
"일본 총독부의 요청으로 수상자를 대표해 답사한 것을 빌미로 친일파라는 오명을 받는가 하면…"(국민)
"최근 일부에서 친일시비로 유관순 영정 교체 논란이 일기도 했다."(세계)
"일제시대부터 활약한 월전은 역시 친일 시비를 피해가지 못했다. 1980년대 초 친일화가 파동 때는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경기도 이천시가 추진중인 월전미술관 건립 계획 발표 직후, 또 삼일절을 앞두고 유관순 열사 영정 문제를 놓고 다시 친일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이미 병석에 누운 상황이었다."(조선)
"월전은 광복 전 선전에서 각광받는 등 일제시대에 활동한 전력 탓에 광복 후 '친일미술가'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이에 대해 "광복이 되자 민족문화를 이루려는 거대한 각성이 일었다. 나 또한 '이제까지 바른 길을 오지 못했구나'싶어 일본 그림의 요소를 지워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중앙)
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이순신 영정
무수한 위인 초상화 남긴 한국 화단의 거목 장우성 화백
비에 엉망이 된 그림
장우성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때를 든다면 ‘선전’에서 연속적으로 네 번 특선하고 추천작가가 되었을 때라고 했다.
당시 민족적 색채가 짙었던 순수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있었다. 서화협회는 고희동, 안중식, 오세창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일제는 서화협회를 흡수하기 위해 ‘선전’을 만들었다.
서화협회 회원들은 ‘선전’ 참가를 거부했다. 장우성도 서화협회 회원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선전’에 대한 민족 감정도 흐려졌다. 장우성은 '선전'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앞서 설명한 대로 네 번 연속 특선하고 추천 작가가 되었다.
특선은 일석, 이석, 삼석으로 구분했는데 일석은 ‘창덕궁상’, 이석은 ‘총독상’, 삼석은 ‘정무총감상’으로 불렸다. 장우성은 ‘푸른 전복(戰服)’, ‘청춘일기’, ‘화실’, ‘기(祈)’로 특선을 받았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일제는 ‘반도총후미술전람회(半島銃後美術展覽會)’를 개최했다. 이 전람회는 유난히 시국을 강조하는 작품을 요구했다.
산수화를 그려도 군인들이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모습을 넣어야 했고, 농가의 사립문에도 일장기를 꽂아 넣어야 했다. 일제는 장우성을 초대작가로 위촉하고 작품을 출품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장우성은 일제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호국불(護國佛)이었던 ‘부동명왕상(不動明王像)’를 그렸다.
작품은 무척 커서 버스에 실리지 않아 트럭에 싣고 서울로 왔다. 그런데 운반 도중에 비가 많이 내려 그림이 엉망 되었다. 도저히 전시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러한 사정을 글로 써서 출품 불가 사유를 밝혔다.
일제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해방이 되자 서울대학교로 새롭게 출범했다. 미술대학 초대 학장으로 장발이 임명되었다. 장발의 부탁으로 장우성은 동양화과에서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장우성은 후에 서울대를 그만두고 홍익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미술학부장을 맡았다. 그 뒤로 국전 심사위원과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5·16 민족상 수상, 금관문화훈장 수상, 원광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 등을 받았다.
장우성이 그린 충무공 영정
장우성은 우리나라 위인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가장 힘들게 그린 작품은 현충사의 충무공 영정과 행주산성 충장사의 권율 장군 영정이었다. 충무공 영정은 충무공기념사업회의 회장이 의뢰했다.
당시 현충사에는 청전 이상범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초상화가 있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낡았으며, 크기도 작았다. 충무공이 손에 지휘봉을 쥐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인데 퇴색해서 얼룩덜룩했다. 그래서 충무공 영정을 새롭게 장우성에게 의뢰한 것이다.
장우성은 쾌히 승낙하고 충무공에 대해 더 많이 알기 위해 「충무공전서」와 「징비록」을 읽기 시작했다. 육당 최남선을 만나 충무공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온양 현충사에 내려가 충무공 후손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오랜 시간 작업 끝에 충무공 영정이 완성되었다.
또한, 장우성은 낙성대 안국사의 강감찬 장군, 경주 남산 통일전의 김유신 장군, 중국 산동성 법화원의 장보고 장군, 포은 정몽주, 의병장 사명대사,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 진주대첩의 김시민 장군, 문익점, 다산 정약용, 3·1 운동의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등 수많은 인물의 영정을 그렸다.
장우성이 그린 대형작품으로는 세종대왕기념관의 ‘집현전 학사도’, 고려대학교 도서관 벽화 ‘군록도(群鹿圖)’, 국회의사당의 ‘백두산 천지도’가 있다. ‘백두산 천지도’에는 스토리가 담겨있다.
당시 여의도에 새 국회의사당이 준공되었다. 국회 사무총장이 장우성에게 국회의사당 벽화 제작을 의뢰했다. 국회 벽면의 크기는 길이 7m, 높이 2m였다. 장우성은 통일을 대비한 전민족적인 국회의사당의 이미지를 그려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백두산 천지 그림이었다.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백두산을 등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고, 백두산 흑백사진도 구했다.
그리고 남북회담 때 평양을 다녀온 사람이 갖고 있던 백두산 천지 천연색 사진도 보았다. 그림이 워낙 커서 홍익대 강의실 한 개를 통째로 빌어 제작했다. 꼬박 다섯 달 동안 작품을 완성했다.
서울대 김원룡 교수는 “‘백두산 천지도’는 장우성의 평생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회화사에 길이 남을 기념물임이 틀림없다.
세상에 이렇게 맑고 티 없고 큰 그림이 또 있을까. 천부(天賦)의 재(才)와 노심각고(勞心刻苦)의 산물이며 작가 월전의 정진과 노력, 청순불염(淸純不染)의 인품과 예술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세기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고 찬탄했다.
장우성은 한국 화단을 위해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려는 뜻을 세우고 장우성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고,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에 정원이 있는 월전미술관(寒碧園)을 건립했다.
‘한벽원’이란 이름은 “대나무같이 맑고 차며, 물빛처럼 투명하고 푸르다(竹色淸寒 水光澄碧)”라는 시구에서 가져왔다.
장우성은 자신의 얼이 담긴 작품들과 애장품 등 총 1532점을 고향 이천에 기부했다. 이천시는 이러한 장우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봉산 자락에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을 건립했다.
선비와 같았던 화백
장우성의 장례 미사가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봉헌됐다. 미사는 유족과 제자 그리고 지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추도식과 함께 거행됐다. 미사에서 유족들은 장우성의 유언에 따라 소장했던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귀한 인장 한 점을 봉헌했다.
선비와 같았던 화백 장우성의 장례 미사가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봉헌됐다. 이날 미사는 아들 장학구(도미니코), 딸 정란(베로니카), 성란(소피아), 혜란(크리스티나) 등 유족과 제자 그리고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과 함께 거행됐다.
딸 장정란(가톨릭대 교수)은
“유명한 인장 수집가이기도 했던 아버님은 정약현과 약전·약용·약종, 그들의 아버지인 정재원 등 정씨 일가의 인장 다수를 소장하고 계셨습니다. 특히, 정약종의 인장은 단 하나뿐으로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 특별전을 계기로 순교자의 위상과 유품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히 아시고 교회에 봉헌하길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라고 밝혔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 형이며 성인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이다. 초대 조선 천주교회장을 지냈고 가톨릭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집필하기도 했다. 정약종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집전한 시복 미사에서 복자로 추대되었다.
이렇듯 장우성은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큰 가치가 담긴 인장을 교회에 봉헌한 것이었다.
“월전은 언제 보나 그의 ‘집현전 학사도’에 나오는 단아한 조선시대의 선비와 같다.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시서화를 겸비한 전통적인 작가는 월전이 유일이고 월전으로서 아마 마지막이 될 것이다.”(김원룡)
“월전 장우성은 화단의 백학이요, 텍스트적인 존재다.”(김동리)
참고자료
▲장우성. 월전 회고 80년사. 호암미술관. 1994.
▲장우성. 月田 張遇聖. 지식산업사. 1981.
▲장우성. 畵脈人脈. 중앙일보사. 1982.
▲장우성. 月田隨想. 열화당. 2011.
▲가톨릭신문 2004.9.19., 2005.3.13., 2009.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