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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선連絡船
1.
따뜻하고 포근한 음력 시월이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모래사장을 뒹굴고 있었다. 십리가 넘는 물가는 흰 반원의 고독을 그리고, 흰 모래사장과 소나무 숲이 그 물가와 나란히 평행을 이루고 있다. 서쪽에는 아득하고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산허리가 이어져 있다. 어디로 가는 배인지 연기를 토해내며 지나가고 있고, 멀리 있는 모래밭에서 망을 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도대체 왜 조선인인 내가 이런 곳에 흘러 들어와 육척의 외로움을 이 대자연에 의지하며 무언가를 번뇌하고 있는 것인가. 여하튼 천지에 홀로 남겨진 나는 고향을 생각하고 장래를 고민하며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외롭고 너무 슬펐다. 나의 은인이자 마음의 친구인 우동가게 주인이 출정出征한 지금, 이제 흉금을 터놓고 얘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이봐’하며 어깨라도 두드리고 싶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될까, 무엇을 해야만 할까, 대답을 하는 것은 왔다가 되돌아가는 파도소리와 갈매기의 외로운 울음뿐이었다.
그것은 3년 전의 봄. 정확히는 1938년 4월 10일. 나는 연락선의 갑판에서 비 때문에 부옇게 보이는 산길을 응시하며 ‘조선이여 잘 있어라!’고 말했다. 집안일은 젊은 내가 감당하기 힘든 문제였다. 정말이지 집주인은 지독한 놈이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있든 사정이 어떻든 상관 않는 자비도 정도 없는 자였다. 연공미年貢米로 쇠고리까지 걷어가고 빌린 돈의 이자도 전혀 깎아주지 않았다. 원체 깎아달라는 등의 치사한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지만 늙으신 부모님이 불쌍했다. ‘여동생에게 기대하기는 어려우니 나라도 뭔가 해서 이 곤경에서 벗어나보자.’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이영식, 그는 내 오촌 숙부인데 그가 내지(일본) 남쪽에 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를 설득해서 북조선의 시골마을을 떠났다. 이영식이 왜 이곳에 왔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하여간 나는 돈이 필요했다. 잘 되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을 구해드리고 싶었다. ‘조선 같은 데 뭔 미련이 있을쏘냐, 내지다, 내지에 가면 단번에 어떻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와서 보니 현실은 내가 공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이 G읍에는 이백에 가까운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초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조선인이 가난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고향에 있는 사람들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주변의 마을과 내 고향은 마치 왕과 평민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모든 농가와 집에 절처럼 크고 웅장한 대지와 저택이 있었다. 깨끗하게 정돈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거리도 북조선의 읍내처럼 혼잡스럽지 않았다. 큰 점포가 깔끔하게 정렬되어 있고, 주택에는 깨끗하고 품질 좋은 울타리와 정원이 있었다.
내가 이 곳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대략 일본에서도 이 주변에 남조선의 부랑자들이 많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기는 했으나 확실히 기분은 좋지 않았다. 훌륭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장 곤란했던 것은 의지하고 있던 이영식이 이미 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일이었다. 오사카에서 거의 바닥을 보이던 돈이 여기에 도착하자 완전히 다 떨어졌다. 하룻밤을 지낼 숙소도 야숙野宿할 장소조차도 변변치 못한 타국에서의 저녁이었다. 괜히 더 외롭고 비참해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잊혀지지도 않는 4월 11일. 나는 우두커니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마을에서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마귀 두세 마리가 서산西山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웃의 얘기에 의하면 이영식은 매일 술에 취해 살아서 이 부근에서도 기피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알아보니 내가 온다는 소식에 흔적도 없이 옆 마을로 도피한 듯 했다. 그들의 얘기로는 영식이 토목공사판 노동자의 보조로 일을 한 것 같았다. 다행히 사정에 밝은 남자가 나를 그가 살았다는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정말 그들이 말한 대로였다. 그 중에서도 유달리 초라한, 겨우 몸을 누일만한 판잣집이었다. 나를 안내해준 남자가 하룻밤을 재워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거절하고 영식의 누추한 집에서 밤을 지새었다. 다행이 달빛이 좋은 밤이어서 램프도 전등도 없었지만 판자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 때문에 어렴풋하게나마 분간할 수 있었다. 남쪽南國인 덕분에 옷은 입은 것 밖에 없었지만 춥지는 않았다. 나는 담배를 한 대 붙이고 그 이상한 방안에 꼿꼿이 앉아있다가 구질구질한 거적때기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몸보다도 마음의 서늘함이 몸을 파고들었다. 곯아 떨어져 자다보니 옆집에서 나누는 말소리와 아이의 우는 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려온다. 기차의 기적소리도 멀리서 들려왔다. 고향의 일,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내일부터 당장 먹을거리조차 없는 몸이었다. 만약 일을 구한다면 괜찮겠지만 그것은 낯선 이 땅에서는 꿈과 같은 일일 것이다. 이에 생각이 미치자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될지,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오도가도 못할 처지가 된 것 같았다. 새삼스럽게 사람 하나 믿고 멀리서 온 것이 후회스러워 잠을 청하려 해도 좀체 잠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란 궁지에 몰리면 의외로 차분해진다. 자신의 계획이 어떻게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으면 될 대로 대라며 하늘에 운을 맡겨버린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 경우는 결코 자포자기한 게 아니다.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결심이다. 해탈의 경지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믿는 것은 이 용맹심 외엔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그렇게 결심하자 의외로 안정이 되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달빛이 내리쬐는 밖으로 나왔다. 미풍도 없다.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은은한 달빛에 드러난 도로의 길이 마치 내 앞길을 가리키는 듯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쫓는 것처럼 길을 따라 걸었다. 가다보니 다리가 나왔다. 조용히 흐름을 멈춘 강에 달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 있는데 강 한가운데서 물고기가 톡 하고 뛰어 올랐다.
다리 맞은편에 방적공장이 있었다. 공장 앞에 있는 솔밭이 어둠 때문에 새까맣게 보였다. 나는 어슬렁어슬렁 공장 쪽으로 걸어갔다. 왕래하는 사람 하나 없었고 개 짖는 소리도 없었다. 그런데 다리 옆에 환하게 불을 밝힌 집 하나가 있었다. 다가가 보니 처마에 걸린 큰 초롱에 ‘우동 좋구나!’라고 써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신기해서도 아니고, 특별히 우동이라는 것을 먹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이러한 때 일어났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어쩐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조금 용기를 내어 불빛이 환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다행히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중년의 아주머니가 조금 계면쩍게 머리를 숙이고,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하며 낯선 차림새의 나를 쳐다보았다.
“우, 우동주세요.” 나는 조금 더듬거렸다. 말문이 막힐 만도 했다. 나는 이 때 처음으로 우동이라는 단어를 알았고 처음으로 입밖에 내보았으며 처음 먹어보는 모험을 했던 것이다. 어떠한 음식인지, 그리고 과연 먹을 수 있을지. 그런데 나온 음식은 정말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고 한 입 먹어본 맛은 뜨거운 물을 부은 조선의 국수 정도 되는 너무너무 평범한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이지? 그러나 다행히 테이블 위에 고춧가루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안심했다. 나는 고춧가루와 잘게 채를 썬 가지를 잔뜩 뿌렸다. 그리고는 ‘이제 좀 낫군.’ 하며 다 먹어치우고 한숨을 돌렸다. 좀 대담해졌는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저기 좀 여쭤보겠습니다. 이 공장에서는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까?” 하고 용기를 내어 아주머니에게 물어 보았다. 정말 큰 용기를 내서 물어본 것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반짝하고 비치는 것이 우동을 다 먹고 났을 때 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글쎄요,” 하고 아주머니는 자신이 없는 듯 말하다가 뭔가가 생각났는지,
“저기요, 공장에 사람이 필요한가요.” 하고 구석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주방 쪽에서 위엄스런 눈을 가진 남자가 불쑥 얼굴을 내밀며, “잘 오셨습니다.”라고도 말하는 듯한 눈으로 “이 분인가.” 하고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그는
“자네 공장에서 일해 본 경험은 있나.” 묻고는 담뱃대에 불을 붙이며 상단에 앉았다. 자네라는 말에 조금 불끈했지만 이런 하찮은 일에 화를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없습니다.” 나는 멋쩍게 주인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렇군.” 하며 혼잣말을 하고는 “포장일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고 물었다.
“무엇을 포장하는데요? 전 조선에서 방금 왔습니다만.” 나는 주인이 나를 내지인으로(일본인) 착각하고 있는 듯해서 덧붙여 말했는데 주인은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투로 대꾸도 없이,
“자네는 정직해서 좋군. 한 번 해보려나?” 하며 처음으로 약간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은 간단하지만 좀 힘들 게야. 그래도 자네는 체격이 있으니까.”
당시 국어(일본어)가 미숙했던 나였지만 남자의 말투에서 찌푸려져 있는 얼굴과 상반된 따뜻함을 느꼈다. 남자는 느닷없이 찾아온 구직자의 신상을 물었다. 나는 고향의 주재순사가 특별히 나를 위해 애써준 도항허가증도 보여 가며 상세하게 얘기를 해주었다. 남자는 내 얘기에 감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참 말을 잘 하는군. 그래도 그렇게 닳고 닳은 사람은 아닌 것 같군그래. 이런 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지 모르겠지만 이 주변에 사는 조선인은 오래 가지를 못해서 말이야. 기껏 공장에서 일자리를 줘도 일이 손에 익을만 하면 나가버려서 모두 애를 먹으니까. 자네는 안 그러겠지.” 남자는 뻑뻑 담뱃대를 빨았다.
나는 기뻤다. 정말이지 지옥에서 만난 부처와 같았다. 남자는,
“난 자네가 정직해서 마음에 드네. 자네가 타지사람이라 도와주는 게 아닐세. 내가 조선인을 많이 알고 있지만 ‘난 반도인(조선인)입니다.’하고 솔직히 말한 사람은 자네 하날세. 뭐 지금이야 ‘조선인입니다’ 하는 게 ‘큐슈九州 사람입니다, 관동關東사람입니다’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만. 말하지 않는 건 잘못이지. 안 좋은 건 감추고 싶어 하니까. 뭐 그런 한심한 놈들과는 별로 얽히고 싶지도 않고.”
나는 정말 주인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사리분별이 분명한 듯해서. 말이 거친 것은 성격일 것이다. 그는 우동 한 그릇 먹은 것 외에 일면식도 없는 나를 떠맡아주었다. 나는 여태껏 이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 외모와는 달리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날 밤, 덕분에 나는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숙면을 취했다. 나는 일본에 온 첫날밤에 직장과 친구를 얻었다. 내 행운이 지옥에서 극락으로 하룻밤 사이에 뒤바뀐 것이다.
다음 날, 주인은 나를 공장으로 데리고 갔다. 월급은 일원십전, 많지는 않지만 지금은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앞길이 트인 것이다. ‘정말 열심히 일할 것이다.’ 나는 채용이 결정된 후 공장 문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오늘도 따뜻한 봄날이었다. 주인과 나란히 공장 문을 나서면서 나는 주인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주인어른, 정말 고맙습니다. 뭔가 감사를 드리고 싶은데 부끄럽지만 지금은 제가 가진 게 없습니다. 나중에 갚겠습니다.”
주인은 내 얼굴을 무섭게 쳐다보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게.” 하고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나는 흠짓해서 멈춰 섰다.
“감사라니, 자네는 내가 뭔가를 바라서 돌봐준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친절을 돈으로 받는 그런 사람 아닐세.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게나. 그럼 난 이쪽으로 갈 테니 내일부터 일하러 나가게.”
그렇게 말을 하고 주인은 공장의 판자울타리를 따라 지체 없이 걸어갔다. 나는 망연히 주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터벅터벅 이영식의 판잣집을 향해 걸으면서 사람의 불가사의한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친절을 돈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건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네.’ 나는 그런 부분에서 뭔가 일본과 조선 사람들의 차이를 느꼈다. 내가 일본을 가는 데 애를 써준 선생과 이 주인은 상통하는 데가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주인은 어떠한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일까. 그렇게 유복하지도 않고 교양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일개 우동가게 주인에 불과한데도 이렇단 말인가.
다음 날부터 나는 공장에 출근했다. 내 일은 손수레로 운반된 끈과 치즈를 하도롱hatoron1)지로 포장한 후 다시 대자리로 싸서 새끼줄로 묶는 것이었다. 이 일은 상당히 격한 노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일했다. 동료 중에 조선인은 나 밖에 없었다. 그 만큼 내 존재는 눈에 띄었다. 동료는 나를 “어이, 요보ヨボ2)”라고 불렀다. 그 호칭이 그다지 존칭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최대한 열심히 일했다. 조선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잘 하겠다고 생각했다. 우동가게 주인은 조선인임을 당당히 밝힌 사람이 나 하나였다고 칭찬했지만 사람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계속 외치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런 상황이 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두 달 석 달이 지나면서 차차 사람들이 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갔다.
“이봐, 이李씨 좀 쉬자고.”라기도 하고,
“이런 말하기 좀 뭐하지만, 조선인 중에서 자네 같은 사람은 처음이야. 정말일세. 전에 이 공장에 다닌 여공女工 중에 15년 근무해 잔뜩 돈을 벌어서 돌아간 사람이 있지만, 그 이후로는 이씨가 처음이네. 다른 놈들은 이렇지를 않았지. 아무튼 일하러 와도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를 않았어. 책임감 따위는 전혀 없었으니까.”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듣고 있었지만 귀가 따가웠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할 만큼의 자신감이 없었다. 이미 짧은 기간에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만으로도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스스로 부끄러웠으니까 말이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말보다 행동이다. 나는 소학교小學校에서 배운 묵묵히 일하라는 교훈을 상기하고 ‘바로 이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묵묵히 일하라, 묵묵히, 라고 매일 다짐했다.
2.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내가 그러한 비상시의 책임을 온 몸에 짊어지고 힘을 내고 있는 동안, 황국皇國은 성전聖戰으로 성전으로 일로一路 진군하고 있었다. 서주徐州가 함락되었다. 숨도 돌리지 않고 남경南京으로. 황군皇軍은 대륙의 진창길을, 산을, 강을, 진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읍邑에서 촌村에서 출정하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공장에서도 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무언無言의 개선凱旋도 있었다. 공장에서도 세 사람의 전사자가 나왔다. 물론 나는 배웅에도 무언의 개선 환영에도 참석했다. 그런 경험은 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출정하는 사람도 배웅하는 사람도 모두 침착했다. 우는 사람도 없었지만 아우성치는 사람도 없었다. 거기에는 거대한 힘에 대항하는 엄숙한 영靈의 움직임이랄지, 일종의 장엄한 분위기가 있었다. 늙으신 부모 사랑하는 자식을 뒤에 남기고, 아내와 헤어져 생사生死의 기로에 들어서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아니 오히려 환희의 도가니에 뛰어드는 듯한 표정이었으며, 배웅하는 사람도 역시 생기에 넘치는 숭고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의 개선을 맞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슬픔이나 환희를 초월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위대한 신을 맞이하는 듯 했다. 나는 이러한 위대한 광경을 접할 때마다 일찍이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역시 부족하다. 나는 더욱 더 이 사람들처럼 수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직장 일이나 일상생활은 어쨌든, 이런 일을 경험하면 나는 무조건 머리가 숙여졌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공장출신의 전사자의 위령제가 열렸던 때였다. 전사자의 미망인이 어린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검은 상복을 입고 참석했다. 일개 직공의 미망인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단정했다. 예배도 분향도 귀부인처럼 침착하게 했다. 나는 그녀가 자리에 일어서면서부터 앉을 때까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위대함과 여자다운 차분한 표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작품이었다. 살아 있는 작품이었다. 나는 어느새 자신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그 숭고한 힘에 끌리고 있었다. 이것은 고향인 조선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일본에 온 것을 아주 절실하게 기쁘게 생각했다.
내가 그러한 것을 우동가게 주인에게 말하니,
“이씨는 정말 솔직해서 마음에 든다니까.” 했다.
나는 처음 만난 이후부터 월급을 받을 때마다 보고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의 집에 들렀다. 그는 굉장히 기뻐하며,
“우동 한 그릇 먹고 가게.” 했다. 물론 우동값은 받지 않았다.
“나는 말이지 연인이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사족을 못 써. 반면에 싫어하는 사람은 도저히 참질 못하지.” 하며 웃었다.
내가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을 때 조금이라도 그의 후의에 보답하고 싶어서 고민 고민하다가 값싼 메리야스셔츠 상하의를 사들고 갔었다. 그는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이렇게 두 개는 필요 없으니 바지는 반품하자고 하며, 내가 가면 바보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며 자신의 딸을 시켜서 반품시키고 돈을 돌려주었다. 내가 여러 번 만류했지만,
“마음은 고맙지만, 실례일지 모르나, 이씨 무리하지 말게나. 이러지 말고 어머니에게 뭔가 보내주게.” 했다.
늘 그가 ‘나도 때가 되면 출정出征한다’고 얘기했었는데 드디어 그 때가 오고야 말았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그는 태연했다.
“이씨 부탁이 있네. 어차피 나는 나라에 바친 목숨이니 살아서는 낯을 들고 돌아올 수 없을 거야. 부탁함세. 자네도 열심히 살게나.”
주인은 그 날 밤, ‘술 한 병 데워 주게, 사양하지 말게나, 마지막이 아닌가.’ 하며 아주 만취해서는 ‘이별하는 마당에 조선노래라도 들려주게나, 내가 죽으면 향이라도 한 대 꽂아주게’ 하고 웃으며 내 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라 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적거를 두르고 환호소리를 들으며 떠나갔을 때 나는 눈물을 훔쳤다. 나는 또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옆에는 같은 조선인들이 있었지만, 직장도 다르고 모두 각자 처한 입장이 있어서 마음을 터놓지 않았고, 나는 그 이후부터 저자에 있는 집 한 칸을 빌려 살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공장에서 먹었고, 목욕도 공장에서 했다. 완전히 달랐던 일본의 식사는 처음에는 너무 싱거워서 빈번히 자극적인 것이 먹고 싶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번도 목욕탕에 들어가는 맛을 느끼지 못했던 나이지만 요즈음은 탕에 들어갈 수 없게 되면 참지를 못했다. 공장에 있는 목욕탕은 매우 컸다. 항상 보일러의 남은 물이 수영도 가능한 큰 욕조에 찰랑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 욕조에 몸을 띄우고 천정을 바라보는 기분은 뭐라 표현할 말이 없었다. 여기에 부모님이 계시고 마음껏 얘기를 나눌 친구만 있다면─그것은 적잖이 사치스러운 생각이지만─ 단지 이것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단 한 사람 있던 우동 가게 주인은 출정해버려서, 나는 목욕 후에 달아오른 볼에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무덤처럼 휑한 내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출정하는 사람의 숭엄한 심경을 떠올리며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기는 했지만.
3.
나는 한참을 모래밭에 드러누워 있다가 휙 하고 일어나 물가로 다가가 돌을 주워 힘껏 바다로 던졌다. 돌은 첨벙하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나는 몇 번이고 자신의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내던지는 것처럼 돌을 던졌다. 그리고 몹시 피곤해지자 다시 모래 위에 드러누웠다.
그 때 데츠코鐵子가 다가왔다. 물론 그때는 그녀가 데츠코라는 것은 몰랐다. 어쨌든 나는 모래밭에 드러누운 채로 어느새인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듯하다. 문득 눈을 떠보니 그녀가 내 옆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난감한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긴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내가 국방색의 공장복을 입고 머리는 텁수룩한데다 그 외에도 그다지 감탄할 만한 남자의 모양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자는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간혹 있다면 십중팔구 그 사람은 거지일 것이다. 때문에 데츠코처럼 사지serge3)에 북을 매고 옅게 화장한 아가씨에게는 당연히 내가 기이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윗몸을 일으켜 두 세 걸음 앞에서 나를 보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내 쪽으로 걸어와서,
“아, 어디서 본 것 같더니만, 이씨 맞죠.” 하며 웃고는
“이런데서 뭘 하고 있나요, 자고 있었죠? 호호호 태평하시네요. 조선인이 무사태평하다고 듣기는 했는데 정말이네요.” 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말을 하는 넌 대체 누구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나오지가 않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거참, 하긴 나라고 해도 만만하게 볼 만하다.’
그녀는 나와 같은 공장의, 내가 일하는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치즈쪽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아주 검은 인견으로 만든 작업복을 입고 흰 면모자를 달랑 쓰고 있는 모습을 가끔 지나치며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똑같은 모습을 한 여자들이 몇 백 명이나 있으니 정말이지 오늘과 같이 다른 복장을 하면 분간이 안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도 이렇게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니, 나는 ‘도대체 당신은 누구냐’는 말을 못한다기보다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기뻐서,
“산보하십니까.”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요. 하지만 여공의 산보라니 좀 우습네요.”
그렇게 말하고 데츠코는 그 자리에 앉았다. 당시 내 국어의 소양素養으로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하며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호호호, 참 재미있는 분이네요. 아무 뜻도 없어요. 그보다 이런 곳에서 자고 그러면 감기 걸려요.”
“괜찮습니다.”
“어째서요.”
“어째서라니, 제가 강해서죠.”
“그렇군요. 그런데 왜 조선에 있지 않고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곳에 온 거죠?”
가만히 듣자니 그녀는 느닷없이 이상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약간 화가 치밀었다.
“그럼 당신은?”
“저요? 저는 돈 벌러 왔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조선 같은 먼 곳에서 오다니, 조선에는 돈 벌 데가 없나요?”
“없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왜냐고요.”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일본이 좋기 때문입니다.”
“어디가요.”
“어디라뇨, 모든 문화가 발전되어 있잖아요.”
“문화라는 게 뭔데요. 당신 어려운 것을 알고 있네요. 조선에서 학교를 다녔나 봐요.”
“네.”
“중학교?”
“농담이시겠죠? 소학교만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똑똑하시네요. 저 공장에 오래 있을 작정이세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현재로는 그렇습니다.”
“따분하지 않나요, 포장일 같은 거.”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데츠코는 어째서 오늘 이 모래밭에 왔는지, 나는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공장은 이 솔밭 건너편에 있고 여공들은 돈이 있는 사람은 읍에 있는 영화관이나 음식점에 가니 데츠코는 분명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여기로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상투적인 여공의 생활이었다.
데츠코는 공장의 여러 가지 일들을 알고 있었다. 여기 제 일 제 이 공장을 합해서 천 백 명의 여공들은 가고시마鹿兒島 미야자키宮崎의 미나미큐슈南九州와 오키나와 그리고 동북지방에서 왔다는 것, 모두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라는 것, 사변 이래 인적자원이 바닥나서 여공 지원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요. 요즈음은 농업도 사정이 나아져서 공장에서 60전이나 70전 받는 것 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게 훨씬 좋으니 당연한거죠. 60전 받아봤자 한 달에 18원이에요. 공휴일을 빼면 16원도 안 되고요. 식대비 6원을 제외하면 10원이죠. 용돈으로 3원을 쓰면 남는 게 얼마 안 돼요. 보험이나 유치적금 같은 것도 있고요. 게다가 요즈음 물가가 점점 올라서 살 수가 없어요. 하지만 공장 쪽도 요즘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원료가 들어오지 않아서겠죠. 방적실 따위를 만드는 것보다 군수품을 제조하는 게 제일 좋은데. 실 같은 건 없어도 되잖아요. 그래도 일이 줄어도 일손이 부족하다고 조수가 그러더군요.” 했다.
원료 문제나 인적자원의 부족 같은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문제이지만, 여공이 일급 60원으로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여공들 모두 말끔한 차림새인걸 보면 부자인 것 같던데요.”
“농담이시죠. 색만 화려하지 싸구려에요. 그것조차 모두 무리를 하는 거고요. 바보 같은 짓이지만 젊으니까요. 고향집에도 송금해야만 하고. 내 친구는 고향의 어머니가 편찮으신데 돈 보내달라는 편지만 와요. 어제도 30원 보냈어요. 물론 빌려서요. 회사에서 빌리긴 했지만 30원 갚으려면 몇 개월 걸릴 거예요. 게다가 다른 빚도 있고. 어제도 근심투성이였어요. 대부분 마찬가지예요. 나도 티는 안내지만 똑같은 걸요.”
얘도 쟤도 하며 데츠코는 손꼽아 헤아렸다. 여공들은 일하는 중이나 끝나고 쉴 때 명랑하고 아무 걱정도 없는 것 같았는데, 모두 제 각각 고민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도 링(방적기)에 있는 시마島 양의 아버지가 일부러 이와테岩手에서 왔어요. 참 불쌍했어요. 시마 양이 회사에 오기 전에 아버지 눈이 좋지 않았대요. 그런데 돈이 없으니 의사를 찾아갈 수가 없었겠죠. 그러던 차에 회사의 모집인이 온 거죠. 그래서 시마 양이 모집인에게 50원을 빌리고 공장에 왔대요. 그 아이 열다섯 살이에요. 병원에 가도 아버지 눈은 고치기 어렵대요. 만성 야맹증이래요. 아버지는 시마 양이 마음에 걸려서 일부러 데리러 온 것이죠. 게다가 돈까지 빌려서 회사에 50원을 갚고 말이에요. 시마 양은 일하겠다고 했지만 데리고 가버렸어요. 아버지가 좀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불쌍하더군요. 50원이라는 돈과 여기까지 오는 여비를 합하면 큰 돈이잖아요. 그래도 이씨는 형편이 낫겠네요. 왜냐하면 자기 몸 하나 먹고 살고 부인을 맞을 때까지 돈을 모으면 되니까 말이에요.”
“농담이시겠죠.” 그런 얘기를 듣자 나는 엉겁결에 말했다.
데츠코는 내 얼굴을 의아한 듯이 보고 있다가,
“당신도 고생스러운가요? 아, 조선은 결혼이 빠르다고 하니 이미 이씨도 부인이 있나보군요.”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 해도 나는 데츠코란 여자가 상당히 별나다고 생각했다. 조선여자 중에는 이러한 부류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 역시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보였다. 돈 따위 필요 없다고도 말했다. 이유를 물으니, 돈이 많다고 해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고, 그보다는 전사하는 장병이 제일이라고 했다. 단 하나의 목숨을 국가에 바치니 이것보다 위대한 일이 없다고. 부자는 이런 시절에도 돈만 모으려 하고 있다고.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과 돈을 벌려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훌륭한 것 같냐고 물었다.
“과연.” 나는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긴 해도 우리처럼 가난하면 실상은 돈을 원하기는 해요. 그래봤자 별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긴 해도. 하지만 전사한 분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조차 부끄러워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요. 즉 우리들은 열심히 실을 짜니 이것만으로도 여자로서 훌륭하다고. 빚이 있든 뭔 일이 있든 그런 일은 어찌되어도 상관없어요. 그저 일하는 거죠. 일하면 그만인 것이죠. 그것도 국가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언젠가는 나아지겠죠. 안 그래요? 이씨.”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새로운 내면의 동요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외롭다고 생각한 것은 돈이 없기 때문에, 친구가 없기 때문에, 장래가 불투명해서이다. 그런데 데츠코 말을 들으니 그러한 심경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바보의 견본 같았다. 진정으로 전사자의 일을 생각하고 유가족의 일을 생각하니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저런 일로 그렇게 감격했던 내가 어느새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깨달았다. 데츠코는 그런 내 마음을 모르니 “뭘 보고 있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아무것도.”
“저 배를 보고 있었나 봐요.”
과연 동쪽에서 큰 기선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멈춰져 있는 것인지 잘 모를 정도의 속도로 나오고 있었다.
“아니요. 당신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떤 말이요?”
“돈, 기타 여러 가지에 대해서.”
“아…….”
그녀는 웃었다. 우리가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 사이 멀리 떨어진 모래밭에서는 그물을 걷고 있고,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솔밭을 향해 걸어갔다.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4.
나는 그 날 이후 완전히 감상적인 기분을 청산하겠다고 결심했다.
여하튼 일하자, 생각하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그저 자신의 운명을 국가에 맡기고 염연恬然4)해지자. 그것이 일본의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데츠코에게 여공들의 내부 얘기를 들은 이후, 그녀들이 가련하고도 사랑스러웠다. 그녀들의 몸에서 그녀들의 괴로움이 배어나오는 듯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러한 일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직장을 확고하게 지키자. 그것이 아랫사람인 나의 제 일의 의무이며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때, 고향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왔다.
「……네가 일본에서 건강하게 일하고 있다고 하니 나는 정말 기쁘다. 게다가 매달 많은 돈을 보내줘서 우리들은 아주 기뻐하고 있다. 빚도 매달 갚고 있고 저금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네가 일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듯한데 결코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직장을 알아봐 준 우동가게 주인에게는 제대로 예를 올려야 한다. 이번에 밤을 조금 보냈으니 갖다 드려라. 모쪼록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면 한다.
그리고 너도 이제 결혼할 나이고 제대로 직장도 잡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며느리를 들이려고 열심히 알아보고 계신다. 일본에 있는 형식이 백부가, 김지연의 딸, 그 아이는 바느질도 잘하고 체격도 좋고 게다가 일본어도 곧잘 하니 너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고 하는데, 나도 아주 찬성이다. 아버지는 벌써 혼자 결정을 내리셨지만, 나는 우선은 너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이 편지를 쓰는 것이다. 설마 일본에서 너 마음대로 결혼하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바로 답장해 주기 바란다.」
내가 낮 휴식시간에 공장의 판자울타리에 기대어 읽고 있는데, 데츠코가 돌연,
“어머, 부인에게서.” 하며 바람처럼 날아왔다.
그 날 이후 나는 직장이외에서는 데츠코와 만나지 않았다. 공장 내에서 만나도 긴 얘기는 나눌 수 없었고 그저 인사를 할 정도였지만, 그 때 이후로 마치 몇 년이 지난 지기知己처럼 친해져 있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내 편지내용을 알아보려는 듯,
“어머, 이상한 글자네.” 했다.
“이건 조선 글자네, 부인한테 왔나보군요.”
“틀렸어요, 어머니한테 온 거예요.”
“거짓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천천히 보세요.” 하고는 지체 없이 달려갔다.
나는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끼고 한참동안 서 있었다.
가을의 태양은 따뜻하고,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그 구름을 보고 있자니 먼 북조선의 고향이 떠올랐다. 허름하고 지저분한 조선옷을 입고, 마치 이 세상에 일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즐거운 일 하나 없이 하루종일 일만 하는 어머니가 비춰졌다. 아버지가, 산이, 밭이, 집 앞의 밤나무가, 그 나무 아래에 복숭아 색의 저고리에 자색의 치마를 입은 여자가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환영을 떨쳐버리려고 ‘난 더욱 더 공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일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날 밤 나는 다다미 위에 엎드려서 어머니에게 답장을 썼다. 물론 아내에 대한 일은 이 년 삼 년 훨씬 더 뒤로 미룰 작정이다.
5.
동료인 나오直 씨는 평소 나를 귀여워한다. 전에 한두 번 나오 씨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부인은 오동통하고 귀여운 얼굴로 나오 씨에게는 아까울 정도로 성격도 좋고 다람쥐처럼 잘 움직이는 여자였다. 사택 끄트머리에 살고 있었는데, 청어를 구워 저녁을 해주었고 빈번히 조선에 관한 얘기를 물었다. 나오 씨의 친척 중 조선에 가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부인은,
“그런데 이씨는 조금도 조선인 같은 데가 없어요.”라고 나오 씨에게 말했다.
“그거야 조선 사람에게도 여러 부류가 있으니까. 이씨는 우익右翼이지 그렇지? 열심히 일하고 사람도 좋고, 난 아주 흠뻑 빠졌다니까. 본인 앞에서 이런 말하는 게 그렇지만.”
“맞아요. 나도 알겠는걸요. 감感이란 건 정확하니까. 결혼도 맞선결혼이라고는 하지만 한번 보면 알 수 있는 거니까.”
“그럼 부인도 다치하나立花 씨를 한 번 보고 파악했군요.” 세 사람은 웃었다.
나오 씨는 그날 밤 상에 올라온 청어가 조선청어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대단하지 않아? 이씨 고향에서 잡은 생선이 산 채로 이 곳에 와서 우리 상에 놓인다는 것이.” 하며 나오 씨는 감탄을 했다.
나오 씨에 의하면 여기서 아래쪽에 이씨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발동선을 다섯 척 갖고서 대대적으로 어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최근 5천원이나 국방헌금으로 냈다고 한다.
“훌륭하지 않은가. 나는 맨 몸으로 일본에 건너왔으니 원래의 그 상태로 돌아가도 좋다, 크게 어업으로 보국報國을 할 것이라면서 전 재산을 쏟아 부어 트롤trawl5)어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군. 이씨도 부디 잘 되겠지.” 했다. 그날 밤 우리들은 그 조선인의 얘기에서 자신들도 힘을 합하여 크게 장사를 해보자, 뭐가 좋을까, 자본이 적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며 욕심이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물론 하룻밤 자고 나서 다 잊어버릴 실없는 얘기에 불과했다.
나는 어젯밤 일을 나오 씨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스스로 창피스러워서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나오 씨는,
“몸이 안 좋으면 좀 쉬지 그래.” 했다.
나는 부끄러워져서 기분을 새로이 하고 간신히 그 날 근무를 했다. 그리고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다리 언저리에서 데츠코와 딱 마주쳤다. 멀리서부터 웃으며 다가와,
“이제 끝났어요? 난 오늘 쉬었어요.” 했다.
“왜요.”
“몸이 안 좋아요. 선생이 쉬라고 하더군요. 뭐 큰 병은 아니지만 설사를 해서요.”
“안됐네요.”
“괜찮아요. 밥을 먹을 수 없어서 우동을 먹고 오는 길이에요.”
그러고 보니 어제도 그녀는 거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뭔가 좋질 않았었구나 생각했다.
“이번 공휴일에 꼭 다시 모래밭에 가요. 모래밭이 가장 좋아요. 마음이 편하고 느긋해져서 기분이 좋아져요.”
“그럽시다. 그리 하려면 몸을 잘 돌보셔야죠.”
“네. 끄덕 없어요.” 그리고 헤어졌다.
나는 거기서 곧장 우동가게를 방문했다. 물론 주인이 출정한 후에도 나는 잊지 않고 우동가게를 찾아갔다. 우동가게 아주머니는 상당히 건강했고, 출정유가족의 집이라는 이유로 여공들이 다른 우동가게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장사는 예전보다 더 잘 되었다.
나는 가끔 읍에 나가야 하는 심부름을 해주거나 운반물을 전부 도맡아 날라주었다. 아주머니는 언제나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를 반복했지만 이 정도의 일은 간단한 것이었다. 그 무렵 주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드디어 00방면으로 출정, 뒤를 부탁함, 무엇보다도 열심히 일할 것, 돈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말 것, 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반드시 영광이 있을 것…… 」이라고 적혀 있었다. 자신이 생명을 걸고 출정하면서도 배려하는 이 마음, 나는 감사했다. 나는 몇 번이고 편지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용기백배했다. 영식에게 속임 당한 정도로 뭘 끙끙거리나, 나에게는 이러한 지기도 있다. 나는 담대해지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밤 영식 때문에 소식이 끊어진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내려갔다. 나는 단연코 결혼을 늦게 할 것이다. 아직 그런 사치스러운 시기가 아니라고 결심했다.
6.
그 날 우리들은 솔밭 부근의 모랫길을 걸어갔다.
소나무 사이를 통해 겨울 바다가 흰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날씨는 따뜻했다. 아침이라 해도 벌써 열시가 지나고 있었다. 혜택 받은 송림의 음력 10월에 모래사장에 나갔다. 오늘 나는 잼을 바른 빵을 잊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공장 앞에 있는 송림을 통과하자 모래사장이 펼쳐져있었다. 모래밭에 있는 오두막집 앞을 천천히 걸어가는 데츠코를 보았다. 나는 달려가서 그녀를 따라잡고는 그녀를 재촉해 아득히 먼 서쪽의 해변까지 가자고 권유했다.
어쨌든 젊은 남자와 여자가 같이 걷는 일이 조선에서 자란 나에게는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만한 것이 없었다. 공장의 솜먼지와 소음 속에서 열흘을 일하고 나서 은혜로운 하루를 바다의 공기에 담그는 일은 크게 장려할만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당당히 천천히 걸었다. 겨울의 태양이 환하게 송림을 비추고 작은 새가 울고 있었다. 북조선의 시골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여유롭고 한가한 기분이 들었다. 데츠코도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북쪽출신이기에 이 남쪽의 초겨울의 정서가 그리웠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병에서 완전히 회복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 때부터 계속 일을 쉬다가 이틀 전에야 겨우 출근했다. 나는 그녀에게 쉴 것을 권유했지만,
“그럴 수 없어요. 우리 집은 가난해서 일전이라도 벌어서 보내지 않으면 엄마가 곤란해져요.”라고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집은 동북의 한촌寒村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아버지는 이미 안계시고 세 명의 형제를 양육하느라 어머니가 힘들어하신다고 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그다지 건강한 몸이 아니라고 했다.
“당신이 장녀군요. 오빠는 없어요?”
“뭐 그런 셈이죠.”
그녀는 불분명한 대답을 하고 살짝 웃다가,
“이씨니까 말할게요. 사실은 오빠가 있어요. 하지만 오빠가 오빠노릇을 못해요.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걸요.” 데츠코는 거북한 듯이 말하고는 ‘잠시 쉴까요.’하며 소나무 밑둥치에 앉았다. 나는 뭔가 그녀의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다른 성격을 느꼈다. 이는 오늘은 마치 지금까지의 데츠코에게 있었던 명랑함이 사라진 채 처연해보였기 때문이다.
“징병검사를 마치고 나서 도쿄로 일하러 나간 후로 연락이 끊겼어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 일이 있기 전까지의 오빠는 성실하고 착했었는데.”
나는 바다 쪽을 바라보면서 침묵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염려해보았자 소용없으니까. 힘들긴 하지만.”
“그렇겠지요. 그런데 어디 물어볼 만한 데는 없습니까.”
“해보기는 했지요.”
데츠코는 갑자기,
“어머, 이씨 동박새예요.” 했다.
과연 태양이 환하게 쏟아지는 송림의 가지에서 가지로 동박새 무리가 울며 건너고 있었다.
“뭐라도 좋아요. 이제 이런 얘기 그만해요. 중요한 건 내 일을 착실하게 하는 것이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갑자기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앉은 채로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멀어져가는 동박새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데츠코는 어째서, 특히 조선인인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이상했다. 고향인 조선에 있을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좌우 전부 일본인뿐인 곳에 단 한 사람의 조선인인 나였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비하감卑下感을 느낀다. 게다가 나는 능력도 없는 일개 직공이다. 데츠코의 우정에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데츠코에게 그 점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동가게 주인의 마음도 의심해봐야 한다. 그러자 나는 안심이 되었다. 사람의 친절에 대해 ‘당신은 왜 나에게 친절을 베푸느냐’고 물어 본다면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만약 그 사람이 나였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자신의 좀스러움에 소름이 끼쳤다.
정월이 지나고 봄이 왔다.
그 후, 우리는 공장에서 얼굴을 마주치기만 하고 지내왔는데, 어느 날 데츠코가 점심을 마치고 식당을 나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씨,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흥분으로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운동장 쪽으로 걸었다.
“무슨일입니까.”
“다른게 아니라 오빠가 왔어요. 깜짝 놀랐어요.”
“왜요.”
“그게 이제 와서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해서요.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렇겠지요.”
“그런데 공장에서는 친오빠라는 걸 믿지 않고 수상하게 생각해요. 사람을 뭐로 보고. 어쨌든 방법이 없으니 당신이 하룻밤이라도 괜찮으니 재워줬으면 해서요. 미안해요.”
데츠코는 멈춰 서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정도쯤이야. 오빠는 어디에 있나요.”
“입구에요. 잠깐 만나 볼래요.”
“그러지요.”
나는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조금 기쁘기도 해서 부리나케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과연 문에는 데츠코와 닮은 오빠 같은 사람이 서 있었다. 살펴보니 말끔히 양복을 입고 있었고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데츠코가 폐를 끼친다며 예의를 차렸다. 나는 데츠코의 오빠를 데리고 내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나는 공중목욕탕으로 안내하며 누추한 곳이지만 천천히 쉬시라고 말하고는 공장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퇴근을 하려고 하는데 탈의실에 면모자를 쓴 채로 데츠코가 달려 와서,
“오늘 밤 찾아뵐게요. 그런데 만약 공장에서 내보내주지 않으면 못가요. 미안하지만 오빠 잘 부탁해요.”
“…….”
“그게 공장에서는 오빠가 나를 퇴사시키려고 온 줄 알고 경계하고 있거든요. 어이가 없어서.” 데츠코는 화를 냈다.
“저런, 잘 부탁해 보세요. 정직함은 통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만일 못 가게 되면 잘 부탁해요.” 하고 그녀는 뛰어나갔다.
요즈음 일손이 부족한 상태였다. 여공은 귀향하는 사람이 많고 입사하는 사람은 적었다. 부족상태라 해도 아직은 그럭저럭 원면을 돌리고 있는데 자꾸 여공이 나가면 실은 짤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불합리한 퇴사방지에 기를 쓰는 것이 예로부터의 방직공장의 습관이었다. 하물며 이러한 시대에 면회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공들도 그러한 무리無理를 알고 있는 만큼 퇴사이유를 날조하지만 이런 이유든 저런 이유든 쉽게 허락해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데츠코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집으로 갔다. 데츠코의 오빠는 휑한 내 방에서 누워있다가 나를 보자 일어나며,
“미안합니다.” 했다. 나는 그를 재촉해서 읍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아직 데츠코에게는 말하지 않았는데 실은 소집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나는 놀라며 차분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이번에 나가면 테츠코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조금 일도 있고 해서 들렸는데, 방직공장이란 데가 좋지 않은 곳이네요. 댁의 직장을 폄하할 뜻은 없습니다만. 상당히 불효를 저질러 왔는데 지금 이렇게 출정할 줄 알았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 효도를 해둘 것을.”
“자 그럼 거하게 용사를 위해 축배를 들어야겠군요.”
“아닙니다. 그런 배려는 필요 없습니다. 출정이야 당연한 일이고, 젊은 사람은 나중에 가느냐 먼저 가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는 매우 침착했다. 나는 그럭저럭 믿을만한 식당이라고 생각하는 읍에 있는 수사옥壽司屋으로 들어갔다. 잔을 주고받는 와중에 우리들의 마음이 점점 풀려갔다. 언뜻 과묵해보이지만 데츠코와 마찬가지로 개방적인 성격 같았다.
“실은 제가 제재製材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만, 좀 신세를 망쳐서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그래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고생하고. 정말이지 볼 것 없는 인생이지요. 이번 소집을 계기로 갱생하려는 결심은 하고 있습니다만, 좀 늦은 듯합니다. 효도하고 싶을 때에 부모는 이미 떠나버리신다고, 하긴 부모가 아니라 이미 나 자신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건 그렇고 이씨 여자는 잘 선택해야 해요. 하하하, 실은 보잘것없는 여자에게 홀려서. 아니,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둡시다. 자, 한잔 더.”
“어쨌든 이씨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제 일의 의무는 소집에 응하는 것이니 내가 거기에서 열심히 하면 남자가 될 수 있겠지요. 좀 아전인수적인 논리로 응소자應召者가 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해주시는 말이니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내 어머니만 해도, 유키치雄吉 궁핍하든 어쨌든 걱정 안 한단다, 너의 불효 따위 나는 책망하지 않는다. 똑바로 정신 차리고 일해서 훌륭한 남자가 되어다오. 분명히 내 어머니는 그렇게 말해 줄 거예요. 나는 믿고 있어요. 이것도 이씨 천황폐하 덕분이라오. 그런데 이씨, 정말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털어놓겠는데 나 돌아갈 여비가 없어요. 잘도 이런 말까지 하고 있네요.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군요. 그래도 이해 좀 해줘요. 아무리 동생이라도 그런 건 말 못하니까 말이에요. 아니 이런 일은 당신에게도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술이 말을 하게 하는지 원. 이거 미안해서.”
오빠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데츠코에게는 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데츠코와 매달 고향에 돈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회사에서 빌리는 것도 이미 한도까지 빌려 쓰지 않았을까.
“아닙니다. 이 일은 데츠코 씨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네요. 실례입니다만 제가 대신 드리지요. 이런 것도 저로서는 국가를 위하는 길이니까요.” 나는 주저 없이 떠맡았다.
“그 그건 옳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일을 말한 제가 잘못입니다. 이씨, 지금 얘기는 취소합니다. 직접 데츠코에게 말할게요. 자아 한 잔 더 드세요.”
오빠는 손을 흔들고 머리를 저으면서 술을 권했다.
스시가게에서 나온 것이 9시 넘어서였다. 집에는 데츠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이씨.” 내 얼굴을 보자 테츠코는 말했다.
그날 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그녀를 불러내 여비에 관한 얘기를 하고 돈은 내가 낼 테니 데츠코가 오빠에게 주는 것처럼 하라고 말했다. 데츠코는 놀라면서 미안하다는 소리를 반복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그날 밤, 데츠코 남매를 내 집에 재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랜만이니 그들끼리 못 다한 얘기가 많을 것이라 생각해서 나는 옆의 이층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오빠는 고향으로 떠났다. 나는 데츠코와 함께 역까지 배웅하고 우리끼리 조촐히 만세를 외쳤다. 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데츠코는,
“실은 오빠는 지금까지 엉망이었어요.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남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건 그렇고 정말 죄송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서든 갚을게요.” 했다.
나는 은혜갚음 따위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만족스러웠다. 우동가게 주인이 나에게 베푼 후의를 생각하면 지금 같은 밥을 먹고 있는 데츠코를 도운 일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대단치는 않지만 좋은 일을 해서 기뻤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점심식사 후에,
“저기요.” 하며 데츠코가 내 어깨를 갑자기 툭 쳤다. 돌아보니, “이거”라고 말하고는 이내 달려가 버렸다. 나는 손에 건네 준 한 통의 편지와 그녀의 뒷모습을 똑같이 쳐다보았다. 편지는 오빠가 그녀에게 보낸 것이었다. 나는 운동장의 양지를 걸으면서 열어보았다.
「……무사히 고향에 도착,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 어머니도 매우 기뻐해주셨다. 이제 와서야 오랫동안 불효한 것을 후회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구나. 앞으로는 오직 황국을 위해 일해야만 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배웅해 주었다. 물론 생환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거라. 어머니와 동생들 잘 부탁한다. 이씨에게는 감사할 뿐이다. 언제 편지를 보내겠지만 부디 인사를 전해다오. 이 돈은 전별餞別로 받은 돈 중 남은 것이다. 이씨에게 갚아주길 바란다. 」
나는 편지를 읽으면서 데츠코 형매兄妹를 위해 크게 기뻐해야만 하는데 웬일인지 그 반대로 심장이 뛰는 것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창고 구석에 잊혀진 듯 벌어지기 시작한 붉은 매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홍매화는 찬란히 빛나는 봄빛을 받아 이제 막 피어나려는 약동躍動을 수줍게 전하고 있었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외롭고 뭔가 답답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분격憤激을 가만히 음미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어느 날,
결국 데츠코는 그 돈을 갚기 위해 들고 왔다. 데츠코는 그녀가 내민 돈이 바람에 날아갈 듯 한데도 불구하고 쳐다보지도 않은 채 모래를 응시하고 있는 내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왜 받지를 않나요.”
“누가 돌려달라고 했습니까.”
나는 불끈하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에게 폐를 끼치는 게 미안해서요.”
“어이가 없군요.”
나는 벌떡 일어나서,
“내가 나의 후의를 타인에게 강요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데츠코 씨 생각해보세요. 당신의 오빠도 우동가게 주인도 모두 목숨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각자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만은 이 세상에서 무가치한 인간처럼, 마치 동물처럼, 초라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대로 당신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 나에게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 그런 것도 알아주지 않고, 그저 나를 돈에만 집착하는 인간처럼 여기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나도 남자입니다.” 하고는 갑자기 걷기 시작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이씨.”
그녀는 뭔가 말하려고 나를 불렀지만 나는 달리듯이 모래사장을 걸어 나왔다. 모래밭의 아름다운 백사白砂가 유쾌한 소리를 내며 신발 틈새에 파고들었다.
4월이 되고, 나는 한 번 고향을 방문하기로 했다. 특별히 공장에서는 나에게 십 일간의 휴가를 허락했다. 데츠코는
“나 연락선 한 번 타고 싶은데 데려가 줄래요.” 했다.
나는 삼등열차의 창문에서 손을 내밀었다.
“언젠가 꼭 그럴 날이 오겠지요.”
“돌아올 때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꼭 전보를 치게.”
나오 씨가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홈에 내렸다. 데츠코의 얼굴이, 우동가게 주인의 얼굴이, 데츠코 오빠의 얼굴이 내 머리 속을 뱅뱅 돌았다.
나는 그 다음 날, 속력을 내는 연락선의 갑판에 서서 멀어져 가는 일본의 산들을 응시하였다. 일년 전과 지금의 나, 동일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심경의 변화에 놀라며 평온한 해협의 대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구보타 유키오 / 와가야마현에서 태어났으며 중학졸업. 소학교 교원 및 국민학교 교원으로 15년을 종사했다. 1940년 4월 조선으로 건너와 목하 함경도 영흥군 목흥 공립국민학교장으로 재직했다. 1941년 조선국민총력연맹에 「밝아오는 하늘」이 입선작으로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