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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복음서
버튼 맥
1. Q 연구의 기원
1.1, Q란 표시
역사적인 예수를 연구하는 신약학자들 가운데 대다수의 학자들은 역사적인 예수의
전승기반이 되는 어떤 원 자료(Quelle-Q문서)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서 연구해온 지가
벌써 150년 세월이 흘렀다.
이 자료는 사해사본 두루마리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약
복음서들의 전승 층을 연구 추적하는 가운데서 그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토록 긴
시간을 필요로 했던 하나의 이유는 신약학자들이 아니라 기적 사건에만 관심을 가지고
이었기 때문이다. 또 마음을 빼앗겨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기적 사건에만 관심을 가지고
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Q 가 마태와 누가에 이용된 문서자료만 가리켰기에 단일
본문의 복원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이유는 많은 신학자들이 Q의 관념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관 복음서 연구는 Q연구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Q를
통하지 않고는 공간 복음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다.
Q에 관한 연구가 학문적 시작은 바이써가 1838년 그 시작이긴 하나 학자마다 주장이 다르다.
바이쓰는 1889년에 자신의 책에서 최초의 자료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Q의 실체를 확고하게
제시하였다.
베른러는 그의 책 Die Synoptische Frage , 1889를 통해서 공관 복음서 연구에 있어서
Q의 불가피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클로펜 보그가 말하는 Q1, Q2, Q3 과는 다른
Q1.Q2.Q3 이 있다고 제시하였다. 디벨리우스는 우리에게 Q가 독일에서 1898년에서 1901년
사이에 이미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 시켜주고 있다. 네이륑크도 Q란 표시를 제일 먼저
사용한 학자는 바이쓰로서 그의 논문을 예로 든다. 1904년에 벨하우젠의 도서를 연밀히
살펴보면 그가 Q란 표지에 Q*로 사용하나 기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바이써, 베른러 , 벨하우젠, 바이쓰가 지명된다. Q란 표지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해도 약 한 세기 반전부터 Q의 분명한 실재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일치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1. 2, Q란 무엇인가?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를 Q라 하였을까? Q란 표지가 사용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예수
말씀에 대한 초기 기독교 시대 기록이 있다. 도마 복음서와 여러 문서들 속에서 다량의
흔적들이 있다. 행11:16, 20:35 클레멘트 전서 13:1 46:7 야고보의 외경 2:7 또 100년경
파피아스의 작품 「주의 말씀들에 대한 해석」등이 초기 교회의 역사에서부터 현존했다는
유세비우스의 증언은 중요한 가치가 있다.
불트만은 예수 말씀이 마가와 Q로 확정되기 이전에 전승자료에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해 줌으로써 Q 연구의 폭을 전승단계로까지 확장시켰다. 맨슨은 1937년 Q문서의 원시적
의미의 복원을 시도한 것은 아니지만 단지 마태와 누가에 보존되어 있는Q를 드러내기 위하여
단순히 평행 구절들을 제안하는 정도의 복원을 제시하였다 Q본문 복원작업은 폴락에 의해
보다 진일보했다. 1970년대 말까지 줄기차게 Q의 연구상황은 가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89년 클레이몬트 대학원의 로빈슨 교수를 중심으로 범세계적 Q학자를 구성된
IQP의 출범 후에 Q본문의 복원을 연구작업은 가설의 영역을 넘어섰다.
클로펜보그는 IQP의 연구를 토대로 Q를 하나의 독립문서로 간주하고 단층 분석법을 통해서
Q의 편집층 (즉 Q1, Q2, Q3 )을 연구하였다. 누가가 Q를 취급한 방식 즉 자기 자신의 시대를
위해 적합성이 있는 인스트럭션의 지침서로 보존할 가치가 없는 문서로 취급한 방식이야말로
현대에 와서 Q문서를 복원할 수 있게 했다.
1994년 시카고에서 열렸던 SBL(Society of Biblecal Literature)의 연례모임에서 Q본문을
위한 복원작업이 마무리되었다. Q는 더 이상 마태나 누가 의 공통자료를 뜻하는 문서
자료로서 가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다.
Q는 무엇인가? Q는 예수말씀 복음서이다. Q는 현존하는 모든 복음서들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오래된 최초의 복음서이다. 로빈슨에 의하면 Q는 순수히 예수의 말씀들을 보존하고
있는 점에서 도마 복음서와 함께 지혜자들의 말씀들이란 가퉁에 속한다.
1.3, 구전이냐 문서냐?
바이써 베른러 바이쓰 맨슨 등에 의한 문서로 기록 되어졌으냐 논쟁거리가 예레미아스나
브레게는 구전전승이라 결론 지어졌다. 그러나 클로펜 보그는 하나님의 구전 전승을 일축하고
언어일치를 하나님의 문서 전승에 관한 강력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Q, 11:24은
마12:44-44a 눅 11:24)이로서 Q 본문의 복원 작업을 통해서 Q문서를 확실히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1.4, Q의 언어
Q가 처음에 아람어로 기록되었다가 후에 헬라어로 번역되고 회람되었다는 가설이 서기
100년경에 파피아스에 의해 제기된 후에 근래까지 공관복음 연구에 통용되어 왔으나
이 가설은 하르낙과 맨슨의 지지도 받았고 1985년 슈미탈스도 Q가 아람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입각한다. 그러나 클로펜보그에 의하면 Q의 많은 부분들이 이미 셈족어로 화한
헬라어 문체를 나타내 준다.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가 곧 Q의 번역 사실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간주하면서 Q전승의 형성에 관계된 최종 언어가 헬라어의 문화적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고 결론 짖는다. Q는 원래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Q는 셈족어를 말하는 인근
지역 즉 70인역 성서가 셈족어화한 헬라어의 영양권하에서 기록되었다.
Q에 나타난 헬라어의 관용적 표현들은 결코 아람어에서 올 수 없는 것들이다. 구약 성서를
인용하는 구절도 헬라어로 70인역 성서에 의존해 있다. Q는 예수 말씀 복음서이며 예수가
하신 말씀들 가운데 복음과정을 통하여 현존하게 된 가장 오래된 문서이다. 최초의
복음서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Q는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독자적 문서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2. Q의 내용
Q는 생동적이고 기억에 남는 말씀들로 채워져 있다. 가시 돋친 경구이며, 회화적인
이미지를 담은 것도 간결한 말로 표현된 평범한 세계에 관한 관찰은 교활한 방법으로
살아가기 위한 보다 현명한 결론과 충돌한다. Q는 자명한 진리와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수용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회적 인습에 대한 비판적인 말로 채워져 있다. Q의
독자들을 위한 도전은 자기들이 처해 있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한번 더 직시하도록 하는
일에 있으며 지금까지의 가락과는 다른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게 하는 일이었다.
예수 말씀의 전승과 발전은 갈릴리를 거점으로 시작되었다. 예수 말씀의 최초 전승은
구전형태로 전해지게 되었고 차츰 문서 형태로 전승이 발전되어 나갔다. 공생애 초기의
말씀은 지혜문학 전통에 입각해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이 사실이나 차츰 예언자적 말씀과
마지막 심판에 관한 말씀이 가미되어 후에 종말론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핵심내용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지만 제자도 율법에 대한 재해석 원수사랑, 행동하는
신앙, 세례요한의 재평가 하나님의 사랑, 회개에 대한 촉구 그리고 선교 파송등은 랍비들의
교훈과 구분된다.
Q공동체는 도시 생활보다는 농촌 생활을 선호하며 가버나움을 거점으로 신앙 공동체의
성격을 확대해 나갔다. Q는 분명한 세 층이 있음이 확인되었고 각각 Q1, Q2, Q3로 불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Q1, Q2는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분명히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Q2는 조직
면에서도 일관성이 있다. Q3은 단편적인 첨가 부분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이 단편들은
하나의 명백한 주제들을 공유하고 있다.
2.1, Q1 자료
격언, 명령형식 경구 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일상적인 세계에 대하여 비판적인
코멘트를 즐기며, 반 인습적 행동을 권한다. 단한 일상적 세계를 비판하는 그 경구에 비추어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규율을 덧붙였다. 상황을 도외시하고 인간관계에서 주고받는
일이 생길 때마다 의식을 깨어있게 만든다. 가치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프로그램을 시사하는 것도 전혀 없다. Q1은 견유학파로 널리 알려진 그 시대의
실천적인 윤리생활 방식을 말하고 있다
Q1가운데 있는 예수의 명쾌한 말씀들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를 견유학파와 같은 현인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Q1의 경구는 견유학파 적인 정신이 스며들어 있으며 그 권고는
견유학파적인 생활방식에 호응하는 강력한 소명의식을 드러낸다. 예수운동은 전쟁전의
갈릴리 즉 견유학파적 생활방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던 상황에서 자생적인 견유주의로
시작 된 것이다
Q1 전체 속에 예수운동과 그 목적에 대하여 언급한 용어가 단 하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나라는 Q에 7번 나온다. 하나님의 통치 개념과 하나님의 반문화적인 실천의
패턴사이의 연결고리는 매우 강하다.
2. 2, Q2자료
Q1의 경구적 스타일은 거의 소멸되고 그 모습이 사라졌다. Q교는 설화, 대화, 논쟁적인
이야기 서사시적 전통에 취한 사례, 묘사적인 비유, 경고, 묵시 종말적인 선포 등과 만나게
된다. 권고 대신에 선언이 나온다. 명령대신에 직접적인 진술, 간접적인 말이 직접적인 말과
함RP 자리 잡는다. 대중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장차 있을 하나님나라 안에서 일어날
일로 바뀌어져 있다. 그리고 절대적인 권위에 의해 심판, 판결, 상소는 허용되지 않는다.
예수 님의 지혜와 성령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때가 오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완전히 계시될 왕국이라 말한다. 최후의 심판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려지는 인물에
의해 된다.
예수운동의 가르침에 대한 충성심을 재는 일에 대한 관심이 예수를 그 운동의 창시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여전히 동지로서 인정하기 위한 기본적
표징이었는데 이제야 말로 예수는 교사의 역할이외의 역할을 하는 자로 상상하게 되었다.
즉 예수는 계속적인 프로그램에 의한 선교를 실천하는 운동의 창시자가 되어 있다.
Q2의 저자에 의하면 요한 은 예수를 만나 본 일이 한번도 없었다. 요한 은 심판의 주제를
도입하고 예수는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였기에 이제 예수의 가르침은 펼쳐짐에 따라
시야로부터 사라질 수 있게 된다.
2. 3, Q3 자료
Q3은 전쟁후의 하나님의 공동체를 볼 수 있는 작은 창문을 제공해 준다. Q3은 우리에게
예수 운동이 살아 남아 있었다는 증거를 제공해 준다. 전쟁 후 여러 차례 태도의 전환을
아려주고 그것은 하나님 공동체의 사람들이 취해야 할 어떤 길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 안고
있는 일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매우 대중적인 문서를 만들어 놓아 1세기의 마지막 25년동안
읽혀졌다는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Q3이후 우리는 Q라는 문서를 산출한 예수의 추종자들의
모습을 시야에서 놓치게 된다.
Q3의 단계에서는 예수가 더 이상 예언자적 인물로 정당화 될 필요가 없으며 지혜가
예루살렘에 사자나 예언자를 파견하는 신화는 이미 과거의 역사로 되어 버렸다. 지혜는
탄식하고 지혜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한 예수는 지혜의 탄식소리의 여운을 울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전 파괴는 유대교가 지혜의 주거지로 적합한 시기를 만들지 못한 상징의
기념비였다. 그래서 Q공동체는 자기들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지혜의 상속자로 간주하기
위하여 성전의 최후를 역이용했다. Q3의 새로운 점은 Q공동체의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성서의
권위에 대하여, 그 기록된 율법의 타당성에 대하여 취했던 태도이다. 유대적 감성에
적응하려는 움직임 즉 유대적 기독교로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최초의 증거인 것이다.
Q1 Q2a Q2b
들어가는 말 (QS 1-2)
요한의 설교 (QS 3-5)
예수의 가르침 (QS 11-14)
요한과 예수가 서로에 대해 생각했던 것 (QS 15-18)
예수 운동을 위한 인스트럭션 (QS 19-20)
운동을 거부하는 동네에 대한 선언 (QS 21-22)
운동을 영접하는 이들에 대한 축하 (QS 23, 25)
아버지의 돌보심에 대한 신뢰 (QS 26-27)
이 세대와의 논쟁 (QS 28)
너희는 누구 편에 있는지 확인하라 (QS 29-30)
이 세대에 대한 심판 (QS 32)
참된 계몽 (QS 33)
바리새인들에 대한 선언 (QS 34)
염려와 분명하게 말하는 것에 관하여 (QS 35-36)
공개적인 고백에 관하여 (QS 37)
개인적인 소유물에 관하여 (QS 38-40)
다가오는 심판 (QS 41-45)
하나님 나라의 비유 (QS 46)
두길 (QS 47-48)
예수 참된 추종자들 (QS 50-53)
공동체의 규율 (QS 54-55,57-59)
최후 심판 (QS 60-61)
Q 1. 공동체를 향하여 말한 일차적인 인스트럭션
Q 2a. 이 세대를 향하여 말한 심판의 말씀
Q 2b. 이 세대에 대한 심판의 말씀에 비추어 공동체를 향한 인스트럭션
Q2a : Q 2 자료가 Q1 자료 단위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것
Q2b : 공동체와 대중 사이를 오가며 말하는 형태이다.
Q3.
예수가 받은 유혹 (QS 6) 계시를 받은 사람들에 관하여(QS 24)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지키는 일(QS 31) 하나님의 나라와 율법(QS 56)
이스라엘을 심판함 (QS 62)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 (QS 49)
두려움에 관하여 (QS 36b)
3. Q의 주제
Q에 관한 표준적인 기술은 그것이 주로 예수의 말씀으로 구성된 것이며 그 길이는 적어도
225절인 것으로 알려졌다(최초한도의 본문에 근거해서) 누가는 그 똑같은 자료를 두 개의
커다란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한 경우 그 말씀 자료들의 배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었다.
누가복음의 Q자료의 순서가 그 원문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마복음서는 Q와
비슷하며, 도마의 어록의 약 35%가 Q가운데 평행 구절로 나타났다.
Q가 현인의 어록이라는 견해는 도마나 Q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 사이에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Q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언급하지 않았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도 언급되지
않았다. 타이센은 최초로 Q공동체의 사람들은 예수의 과격한 삶의 스타일을 모방한
카리스마적인 떠돌이 전도자들로서 자발적인 빈곤과 구걸등 그들에게 명령한 그 진기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를 행동화하려는 사람들이라 주장하였다.
초기의 예수 운동은 명백히 개혁운동이 아니었다. Q의 최근 연구는 곧 예수는 처음에
견유학파의 현인으로 기억되었으며 그후에 묵시 종말론적인 경고를 말한 예언자로
상상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언자 주제, 묵시 종말론적인 특수용어,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 제자직에 대한 주제,
바리새인을 향한 질책,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약간의 암시적 언급 등, Q문서의 문맥에서
해석하면 다음 같은 점을 뒷받침한다.
1) Q공동체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다.
2) Q공동체의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야라 생각지 않았다.
3) Q공동체의 사람들은 훈련받은 제자들의 특별한 집단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간주하지
않 았다.
4) 예수가 성전 숙정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상상하지 않았다.
5) 예수의 죽음을 신적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6) Q공동체의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변화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예수의 교훈을 따른 것은 아니다.
3. 1, 하나님의 나라
Q1 전체 속에 예수 운동과 그 목적에 대한 귀중한 언급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것은
통치도하고 심판도 내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 모두를 가리키는 용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현실화된 왕국이나 영역을 의미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통치는 바로 Q공동체의 사람들이 이 세계 속에서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Q공동체가
이 용어를 넓게 사용했다. Q1 말씀에 하나님의 나라는 7번 언급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묵시
종말론적이라고 한 과거의 가설은 밀려나고 하나님의 통치는 누룩, 겨자씨로 성장의
자연스러운 과정에 비유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포될 수 있고 희망할 수
있으며 확증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고, 신호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개념과 Q의 반문화적 실천의 패턴 사이의 연결 고리는 매우 강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행동으로서의 통치에서부터 영역으로서의 통치까지 그리고 개인으로부터
그룹까지, 행동에서 에토스까지, 실천으로부터 관념적 질서까지,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신적인
질서까지, 광의 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그 운동의 사회적 공동체 형성 가운데서 발견 괼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 Q1의
단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후 Q2 단계에서는 생략되어 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대안적인 생활 방식 혹은 대안적 영역, 예수 운동의 에토스가
하나님의 나라의 명백한 표명이라는 생각이 이미 중첩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Q1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라는 용어가 사회가 변하리라는 기대 없이 모험적인 생활방식을 살아 보라는
도전을 가리킬 뿐 아니라 같은 생각을 사람들의 공유하고 싶어했을 생활 방식의 모범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통치에서 그 하나님은 민족적인 전통과 문화적인 전통의 관점에서 밝혀지지
않았다. 그 당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관념은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예수 추종자들은
그것이 어떤 종파의 전통적인 생각이라거나 또는 새로운 신학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Q공동체의 사람들은 아직은 자기들을 하나의 가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친밀해지기
시작하였다.
3. 2, 심판의 주제
Q2 자료의 중요한 말씀 묶음들의 목록을 뽑으면 여기서 일어난 전환과 심판의 주제를 볼
수 있다. 심판의 주제는 묵시 종말론적인 상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후의 심판의
날에 관한 위협은 요한의 설교에서 달란트 비유에 이르기까지 저류에 흐르고 있다. 묵시
종말론적 배경에 음색을 띤 심판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강요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마지막 때에 비로소 완전히 제시될 영역으로 상상하도록 한다. 이것을 그 당시의 묵시문학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용법과 비교하면 Q2가운데 빠진 특징이 드러나는데 Q2는 하나님의
통치를 마지막 때에 나타날 영광으로 가득한 왕국으로 상상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Q2의 최후의 심판은 개인적인 해한 혹은 정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누가 하나님 나라에
포함되며 누가 포함되지 않는지를 확신시키고 있다. 최후의 심판은 공동체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그들의 원수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더 좋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마지막 때 실현될 시나리오에 매혹되는 암시가 없다. Q공동체는 개인 신앙에 관한 언급도,
위안 같은 것도 없다. 나아가 상황의 극적 변화에 대비하여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도 없다.
묵시 종말론적 상상은 Q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선교를 방해한 사람들 위에 임하기를 갈망하였던 심판의 위협을 보증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Q2는 모든 문제들이 최후의 심판으로 해결되리라는 관심보다 예수 운동의
자기 정의와 충성을 둘러싼 실제적 관심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은 묵시 종말론적 언어를
사용하였으나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그들의 심판에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이런 이유는 그들의 운동에 관한 충성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사회적인 압박으로 인해 인간적 유대와 인간 관계의 결렬 속에서 체험된
아픔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예수 운동의 가르침에 대한 충성심을 재는
일에 대한 관심이 예수를 그 운동의 창시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여전히 동지로서 인정하기 위한 기본적 표징이었는데 예수는
계획적인 프로그램에 의한 실천하는 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다.
3. 3, 포함과 배제
분열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것에 간한 주제는 포함과 배제이다 즉 영역과 경계의 개념을
전제로 하는 주제이다. Q2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운동을 회원들의 결사조직체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배제되는 일이 크게 논의되고 있다. 예수
운동에 대한 충성심이 유대인다운 점에 대한 도전과 충돌하며 이스라엘 곧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일에 관한 문제 등과 충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논쟁은 예수 추종자들의 생활방식과 바리새파가 주창하는 유대적인 정결법 규례사이에 있는
차이점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바리새파와의 충돌은 예수 운동이 유대교로 개혁하려고 계획하였던 것이 아니며 또한
성서적인 유산이나 이념을 주장하려는 것 때문에 일어난 것도 아니다.
QS 34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에 대한 고발은 마땅히 예상될 수 있는 문제이다. Q공동체의
사람들은 자기네들 형편에 좋을 대로, 자기들이야말로 참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노라고 호언
장담하는 논적들의 주장에 대하여 일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3. 4, 예언자들을 살해했다.
예수 추종자들이 사회의 현상을 바로 판단하고 비판하였기 때문에 예언자들을 살해했다는
주제는 그들의 논적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하여 끌어 올 수 있었다. 그들에게도 부당한
박해와 살상을 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하여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모세의 율법을 바로 준수하도록 하기 위하여 당시의
보수적인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친숙한 주제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래서 율법사를
고발하고 전복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그런 방식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3. 5, 거절
Q 공동체의 사람들이 체험했던 바로 그것이 거절이다. 거절이야말로 -이 세대를 향한
심판-을 그들의 담화 가운데 채택하게 된 이유였다. 아이들의 놀이에 대한 거부는 Q공동체가
체험한 거절이 아니라 요한 과 예수가 체험한 거절에 적용되어 있다.
3. 6,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
하나님의 지혜의 표상은 바벨론 포로 이후시기에 유대의 율법학자들에 의하여 창출되었다.
율법학자의 지혜는 성전 국가의 존재를 전제하며 그 성전 국가를 모델로 하는 사회를
상상하였다. 버튼 맥은 Q의 신화를 마련하는데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아들 표상에
하나님의 영이라는 개념을 더불어, 이스라엘의 서사시적 이야기 전승을 묵시 종말론적인
종국과 연결시키는데 이용되어 하나의 포괄적 비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성전국가 모델은 포로가 이후의 지식인들은 수많은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욥기는 이
세상에 찾으려는 지혜가 없는데 에 대한 탄식이다(욥기 28장)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에 다시
머물게 될 지혜가 등장한다. 헬라, 로마를 거쳐 Q공동체는 지혜의 신화를 질서를 잡기 위해
만들었다. 예수는 자신이 그 추종자들에게 주는 지식은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려 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던 지혜라는 사실을 말하면서 그의 추종자를 위로하였다.
Q1은 성령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Q2 속에서는 성령이라는 개념이 QS 37과 오실
분이 성령으로서 사람들을 압도한다고 예고한 요한의 말(QS 5)에서만 볼 수 있다. 불과
성령은 서로 다른 종류의 연설 즉 심판의 선언과 지혜의 인스트럭션의 효과에 대한 은유로서
기능 하는 것 같다. QS 43, 성령이라는 은유는 잘못 고발된 사람을 변호하는 말씀을 가리킬
것이다. 예언자의 전통적인 이미지는 성령과 예언이 함께 가는 것이기에 성령과 예고 적인
연설의 관계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효과적인 연설, 통찰력, 개념과 결합된 은유로서 지혜의
영은 창조의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나 인류역사: 사회질서, 마음의 깊은 곳에 대한 통찰을
표현하는 일에 특히 적절한 것이었다.
성령은 Q공동체의 사람들이 그들의 상황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사용한 용어였다.
성령이라는 개념이 예수나 지혜, 사람의 아들과 달랐던 것은 성령이 일차적인 주제의 위치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은 일차적인 주체인 지혜의 현시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심판을 받게 될 때 예수에 대한 충성을 확신하고 있다면 세계에 대한
공동체의 견해가 옳은 것이라고 느낀다면 자기의 발언이 현명한 답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3. 7, 사람의 아들
예수가 사람의 아들로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Q2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잇다. 예수를 최후의 심판과 관련시키기 위하여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것이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와 묵시 종말론적 신화에 결부된 인물, 둘
모두를 자칭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 이것은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니엘 7:13-14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여한 신비적 표상이 사람처럼 보였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용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후대에 신화가 넘쳐 났다. 제1에녹서,
제4에스라서 등 특정한 인물을 가르치는지, 묵시 종말론적인 표상을 가리키는 것인지 둘 다를
가리키는지 애매하다. Q1층에 완곡한 표현으로 한번 사용되었고 이것은 노숙 생활에 대한
견유학파적 주제에 대한 말장난이었다. Q2 단계는 요한 -예수 사이의 상호 대화에서
나오는데 분명히 예수 자신을 가르친다.
QS 32는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최후의 심판을 통고하는 자로서의 그의 역할과
결부시킨다. 예수와 묵시 종말론적 사람의 아들 관계는 QS 37에 서술되어 있다.
Q공동체의 사람들은 예수가 초월적인 신화적 실제로서 인간 역사 위에 등장하였다고
상상하지 않았으나 그 생각은 상황이 바뀌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한편 예수와 하나님의
지혜 사이의 차이점이,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와 사람의 아들 사이의 차이점이 매우 희미하게
되었다.
Q의 편집 단계에서 점차로 기독론적 함축성을 띠게 된 인자 칭호는 Q공동체의 박해
상황과 연결되면서 Q공동체의 정체성을 심어 주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외부공격에 내적
결속을 다지고 재림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담당해야 할 제자 도를 고취했다.
4. 최근의 연구 동향
Q는 IQ.P(Internatianal Q Project)가 1994년 시카고에서 모였던 세계 성서학회의
연례회의를 끝으로 학문적으로 복원을 완료하였던 문서이다. 1996년 미국 뉴올리안즈에서
IQP의 공식적인 연례회의는 종결되었지만 국제 성서학회에서 Q section모여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일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4. 1, 신약주석을 위한 성과들
이제 IQP-복구가 Q의 표준 텍스트를 내놓았고 앞으로 모든 연구는 비평적으로 나아간다.
마가복음과 Q는 역사적 예수의 복구를 위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마가와 Q는 당연히
비평적으로 읽어야 한다. 공관 전승의 연구를 위한 IQP-작업성과는 우선 Q를 고유의 문서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Q는 수난사화와 부활 사화가 빠진 인자 기독론, 명확한
구원론이 빠진 고유한 신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받아 들여야 한다. 토론을 통해
없애 버릴 수 없다. 총괄적인 협동작업으로 주석을 계속 펴 낼 것이다.
더 이상 Q의 정의와 기원은 문제시 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앞으로 Q는 예수 말씀
복음서와 동의어로 사용될 것이고 최초의 복음서라는 중용한 의미를 가진다. Q는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독자적인 문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5. 비판과 문제점
버튼 맥은 포스트 불트만인, 한스 콘첼만의 제자로서 그 바탕은 비신화화와 실존주의에
근거한 신학 방법으로 Q의 상황이나 본문을 예리하게 분석 도해했다. 어쩌면 원 뿌리를
발견한 기쁨에 있어 익지 못한 것을 자르고 썩은 것은 도려내었지만 너무 많은 왜곡과
곡해의 기독교의 거울은 필자까지도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 같다.
역사적 예수를 Q연구로도 다 만날 수 있을까?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은 인자(사람)가 더
절실한 시기가 아닐 까도 생각한다. 반면에 영웅적 메시야적 비젼, 금관 예수를 홀연히
버리게 하고 활력이 넘치는 예수 운동으로 성화 시키는 대안적 정체성이 새로운 사회
인류학에 근거하여 새로운 종교가 형성되는 조건과 과정을 배울 수 있게 한다. 즉 기독교
선교의 틀을 바꾸고 종교 권력의 남용을 막고있다.
사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질문은 우리가 다 문화적인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재고할 때 기독교라는 종교는 무엇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버튼 맥은 Q복음이 십자가와 부활이 없다고 마가의 기록을 비 신화화하면서 초대교회
케리그마를 부정한다. 포스트 불트만인 스승 콘첼만을 따라 역사적 예수를 연구했으나 결국은
전통 기독교에서 볼 때에 케리그마 마져, 부정하고 예수를 전제로 둔 불트만 편에 서 있다.
Q1-Q3으로 전승적 발전을 인자-하나님의 지혜-묵시 종말론의 도식을 그리면서 신화 만들기를
전개시키는 버튼 맥은 신화를 비신화화 하면 또 신화화해야 하는 우를 범하면서 종교의
신비를 지나치게 벗기고 오늘 이 시대에 신화를 창출하게 하는 모순 위에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신화를 역사화 해야 할 새 인류가 필요하다.
정경 형성에 시기와 교권과 정치적 상황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주교들의 Q의 정경 선택
배제는 주교들의 제자직과도 맞물려 있다고 하는데, 많은 전승들이 소외된 역사적 사실을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Q가 전래되지 못한 깊은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