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無常)!
글자상의 뜻은,
영원함 또는 항상함이 없다는 의미다.
이걸 다르게 풀이하면,
<거기서 끝이다>라는 의미다.
뒤로 계속 이어지지 않기에,
거기서 그냥 끝이다.
근데,
우리 중생들은 무상(無常)함을 모른다.
즉, 거기서 끝이라는 걸 전혀 모른다.
뒤로 계속 이어지는 줄 안다.
그래서 어떤 걸 경험하면,
그 자리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 들고 다닌다.
그래서 어떤 안좋은 사건을 기억하고,
곱씹고 또 곱씹으면서 한을 품고 증오하고 괴로워한다.
이렇듯,
우리 중생들은 존재하는 모든 게 다 무상(無常)하다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육근(六根)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육경(六境)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대했을 때, 거기서 끝이다.
그저 보였을 때 거기서 끝이나 버린다.
들린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생각나는 것도...
그래서 깨달은 성인분들께서는 그 어떤 걸 경험해도 그 자리에서 내려놔버린다.
거기서 끝인걸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내려놓지 못하고 무겁게 들고 다닌다.
설사 기분 나쁜 일을 겪었을지라도,
사실은 거기서 끝인 것이다.
물론 좋은 일도 마찬가지....
마음의 짐은 스스로 짊어지는 것이지,
누가 강제로 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려 놓는 것도 역시 스스로 내려놓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중생들은 짐을 짊어져야 부자가 돼서 행복한 줄 안다.
그래서 정신적인 고통의 짐을 한가득 짊어지고 괴로워하는 것이고!!!
왜 놓지 못하고 계속 들고 다니는가?
그 중심에는
언제나 자아/나......이놈이 있다.
어떤 걸 경험했을 때,
그 경험이 나/자아에게 이득이 오는가 손해를 끼치는가를 따져댄다.
이렇게 놓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나/자아.........이놈 때문이다.
나/자아....이 놈이 영원한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자아/나는 없다.
나/자아가 있다는 것은 마음의 착각이다.
마음 속에서 나/자아를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무아(無我)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걸 두려워한다.
자신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철저히 믿었던
그 나/자아/영혼이 없다는 걸 알게 될까봐.....
불자 분들 중에서 무상(無常)이 불교 최고의 진리라고 여기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다.
무상(無常)은 불교 최고의 진리인가?
또 절대적인 진리인가?
무상(無常)은 불교의 최고 진리도 아니고,
또한 절대적인 진리도 아니다.
무상(無常)은 상대적인 진리,
또는 세속적인 진리...즉 속제/세속제이다.
무상(無常)의 뜻은,
영원하지 않다.....뒤로 이어지지 않는다.....거기서 끝이다...라는 것이다.
항상(常)의 반대가 무상(無常)이다.
이렇게 서로 상대되기에 상대적인 진리라고 부른다.
만약 무상(無常)이 절대적인 진리라면,
즉 절대적으로 맞는 진리라면 윤회와 인과응보를 부정하게 된다.
무상(無常)이 절대적으로 맞는다고 한다면,
윤회도 없고, 인과응보도 없다는 논리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삿된 견해다.
부처님께서는 윤회도 말씀하셨고, 인과응보도 당연히 말씀하셨으니까!!!!!
윤회란 뒤로 계속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과응보란 이 생에 지은 죄를 내생에 받게 된다는 것이다.
중생들은 끝없이 윤회하고, 계속 인과응보를 받는다.
또한 무상(無常)이 절대적인 진리라면
해탈/열반도 역시 무상(無常)해야 된다는 논리가 된다.
만약 해탈/열반이 무상(無常)하다면,
해탈/열반은 영원한 행복이 아니고 고통이게 된다.
무상(無常)한 것은 고통(苦)이기 때문이다.
무상(無常)은 고(苦)다.
그러니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어찌 고통이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있겠는가?
진리를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는 것이지 고통을 가져다 주는게 아니다.
해탈/열반이 고통인가?
그렇지 않다.
해탈(解脫)/열반(涅槃)은 무상(無常)이 적용안된다.
그러므로 무상(無常)은 절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처럼 속제(俗諦)만 가지고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무상(無常)은 절대적인 진리....즉 진제(眞諦)가 아니고
상대적인 진리/세속적인 진리.....즉 속제(俗諦)이다.
속제(俗諦)의 뜻은,세속 중생들 차원에서의 진리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진리는
진제(眞諦)이다.
물론 당연히 진제(眞諦), 속제(俗諦)는 초기경전에도 나오고
대승경전에도 나오는 중요한 용어이다.
속제(俗諦)는 상대적인 진리이다.
상대적이다라는 의미는 반대된다는 뜻이다.
항상(常)의 반대는 무상(無常)이다.
무상(無常)의 상대는 항상(常)이다.
뭐든 영원하다는 항상(常)은 상주론이고,
뭐든 영원하지 않고 거기서 끝이다라는 무상(無常)은 단멸론이다.
항상(常)은 영원주의,
무상(無常)은 허무주의이다.
그래서 무상(無常)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불자분들은 이런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럼 부처님께서는 왜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를 구분해서 말씀하셨는가?
왜 무상(無常)의 진리를 설하셨는가?
왜냐면 중생들은
그 모든 게 다 항상하고 영원하다는 상주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자기를 비롯한 외부 사물들이 모두 다 영원한 것으로 철저히 믿는다.
이 지독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박살내기 위해서 무상(無常)의 진리를 설하신 것이다.
항상(常)하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박살내는 것은
그 반대인 무상(無常)을 터득하는 것이다.
뭐든 상대되는 게 있고,
그게 바로 상대를 박살내는 주체이다.
항상(常)의 반대는 무상(無常)이다.
중생의 마음 속에는 뭐든 항상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다는
그 지독한 고정관념이 있는데,
그 고정관념을 박살내야만, 진제인 공(空)을 깨달을 수 있기에
무상(無常)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매 무상(無常)만 관찰한다고 해서 해탈할 수 있는게 아니고,
무상(無常)을 관하다가 공(空)을 깨달아야 해탈할 수 있다.
그래서 공(空)이 해탈문이고,
절대적인 진리......즉 진제(眞諦)이다.
무상(無常)의 뜻/의미=거기서 끝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그럼 무상(無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먼저 중생들이 바라보는 무상(無常)과
깨달은 성인들께서 바라보는 무상(無常)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생들은 그 모든 것들에 실체가 본래 있었는데,
그게 소멸돼서 사라져 없어져 버린 것을 무상(無常)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게 단멸론이고, 허무주의이다.
깨달은 성인들께서는 이렇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 모든 것들에 본래부터 실체가 없었다고 아시기에,
순간순간의 그 모든 생멸 변화를 허깨비/허상으로 여기신다.
연기법.....즉 본래부터 실체가 없었기에 연기적으로 발생과 소멸이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금강경에 다음과 같은 멋진 말씀이 나온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무상(無常)....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들은 본래부터
그 자체에 내재된 실체/자성/영혼/자아...이런게 없다.
그러므로 허깨비와 같은 생멸변화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