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일 복음의 내용은 과부의 헌금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부의 헌금 복음을 좀 이상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 우리는 액수의 중요도를 따지기보다는 정성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식의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복음을 해석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복음은 철저히 예수님과 과부 사이에서 예수님이 과부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설정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묵상할 때 흔히들 간과하는 부분이 우리의 시각에서 과부를 바라보고 자신의 입장을 과부의 입장에서 서서 자신을 변호하려는 듯이 그럴듯하게 변명하는 수단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정말 이 복음의 본질이 '정성'이라는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까요?
저도 지금까지 13년 정도 가톨릭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본당 교우들과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쩌다가 대화 도중에 이 과부의 헌금을 예로 들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 교우들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곡해를 해도 심한 곡해를 하는 것 같아 조금은 안타까운 입장입니다. 어쩌면 이 복음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경제와 관련된 개념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 베풀려고 해도 가진 게 없으면 베풀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가령 단순하고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천주교의 교무금을 납부하는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 제가 빗대어 편의상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흔히들 수입의 몇 분의 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봤습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이 방법으로 교무금을 산출하기는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면 물론 한국 천주교 교회법에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지만 명시적으로 이렇게 산출한다면 보이지 않는 차별이 전제됐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단순히 수입을 가지고 계산을 한다면 수입 이전에 가지고 있는 자산이 배제된다면 자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에게는 동등한 비율로 교무금을 낸다고 하더라도 사실상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실 실제 액수는 적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교무금을 내는 형국과 같게 됩니다.
제가 봤을 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헌금을 그런 맥락에서 보시고 해석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단적인 예가 다른 부유한 사람의 헌금을 표현할 때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 만큼'이라는 표현의 뉘앙스를 경제법칙에 대입해 보면 제가 조금 전에 해석한 방법이 전혀 틀린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소유지분의 가치를 보신 것이고 예수님을 제외한 사람은 그 액수를 보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들여다봐야 실제 과부의 헌금 복음이 왜곡되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오늘 이 복음이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왜곡해 해석한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간과해서 볼 확률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과부의 헌금 복음을 묵상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