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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복(趙聖復)
[생졸년] 1681년(숙종 7)~1723년(경종 3) / 향년 4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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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조공 묘갈명(執義趙公墓碣銘)
아! 여기는 나의 벗 조사극(趙士克)의 묘이다. 사극은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적었는데, 숙종 28년 임오년(壬午年,1702)에 대책문(對策文)으로 별시에 급제하였으니 이때 나이가 22세였다. 나 또한 이해 봄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사극은 여러 번 승정원 주서를 대리한지라 이때 처음 서로 알게 되었다.
사극은 뜻이 고결하였으며 말은 어눌했으나 재능은 민첩하였다. 성품이 책을 좋아하였는데 특히 의리(義理)에 관한 문자를 애호하여 하루도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나는 본래 우활하고 졸렬하여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나 오직 사극과는 서로 친하였다.
사극은 처음 승문원에 분관되었다가 부정자를 거쳐 차례대로 박사에 오르고 봉상시 직장을 겸임하였다. 중간에 의정부 사록을 지내고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 사헌부 감찰ㆍ지평ㆍ장령, 예조 좌랑, 병조 정랑, 사간원 정언ㆍ헌납, 시강원 사서ㆍ필선, 봉상시 정을 역임하고 지제교에 선발되었다. 외직으로는 전라 도사(全羅都事)와 만경 현령(萬頃縣令)을 지냈다.
경종 신축년(辛丑年,1721, 경종 1), 집의로서 정사를 논하다가 마침내 큰 화를 당하였다. 경종께서 병환이 있는데 후사가 없자 여러 대신들이 자전께 여쭈어 금상을 세제(世弟)로 책봉하였는데, 공은 상소를 올려 저군(儲君)을 위한 면학(勉學)의 방도를 말하고, 이어 신료를 접견하여 정무를 재결할 적마다 세제로 하여금 곁에서 모시고 참청(參聽)하게 하여 정무에 따라 가르치는 바탕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4일 만에 비로소 비답이 내려왔는데 유념하겠다는 하교가 있었다.
그날 밤 하교에 “나의 병환이 심하여 정사가 대부분 지체되니 대소의 국사를 모두 세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라.”라고 하였는데, 곧 여러 신하들의 쟁집(爭執)으로 인하여 마침내 도로 중지되었다. 이에 군흉들이 일제히 일어나 공을 비난하며 심지어는 “몰래 임금의 자리를 옮기려고 한다.”라는 말까지 하였다.
동료 가운데 방편으로 화를 면하는 술수를 좋아하는 자가 또한독사에게 손이 물리면 팔을 잘라내는계책을 내어서, 처음에는 파직을 청하다가 끝내는 절도(絶島)에 위리안치 시킬 것을 합사(合辭)하여 청하니, 공은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조정의 벗들 가운데 아무도 감히 위문하지 못했는데, 오직 우리 중부 귀락공(歸樂公,이만성(李晩成)만 가서 전별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성상께서 또 이전의 하교대로 거행하라 명하니, 사대신(四大臣)이 마침내 백관들을 이끌고 대궐 뜰에서 호소하였다. 며칠이 지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정유년의 고사를 따르기를 청하고, 또 다시 여러 신들과 함께 입대하니 비로소 명이 거두어졌다.
12월에 군흉들이 뜻을 이루자 사대신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린 일을 죄로 얽어 법률로 처벌하기를 청하면서 번번이 공이 이 일을 시작했다고 말하였고, 또 공이 사대신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여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마침내 흔들리지 않고 항변하자 성상이 도로 배소(配所)로 돌려보내라고 명하니 흉도들이 쟁론하였다.
임인년(壬寅年,1722, 경종 2) 봄, 목호룡(睦虎龍)이 고변서(告變書)를 올려 동궁을 무함하고 핍박하였으며 이어 큰 옥사가 일어났다. 공은 다시 대계(臺啓)로 인해 국문에 나아갔는데, 최석항(崔錫恒)이 위관(委官)으로서 공을 나오게 하여 회유하기를,
“사주한 자를 이실직고했다면 어찌 이처럼 오랫동안 고초를 겪겠는가.”
하니,
공이 성을 내며 꾸짖기를
“사군자(士君子)가 어찌 생사 때문에 지조를 바꾸어 없는 사실을 있다고 날조하겠는가. 또한 이미 내가 사대신의 사주를 받았다고 말하여 사대신을 사형에 처하도록 청해놓고서, 오히려 사주한 자를 물으니, 의심하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
하였다.
이어 공초(供招)에서 말하기를
“가령 나의 말이 그때 실행되었다면 박상검(朴尙儉)의 변란과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지금에 와서 보면, 내가 청한 일이 바로곡돌사신(曲突徙薪)의 계책인데, 도리어 망측한 죄과에 빠트려 반드시 죽이고서 그만두려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하였다.
군흉들이 공초한 것이 심문한 내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침내 두 차례 엄히 형신(刑訊)하였다. 5월에 가뭄으로 인해 소결(疏決)하였다. 최석항(崔錫恒)이 줄곧 대간을 엄히 형신하는 것은 원래 아름다운 일이 아니고, 또 역적의 옥사와는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배소로 돌려보내기를 청하였다.
김일경(金一鏡)은 이전의 배소에 이미 다른 죄인이 있다는 이유로 정의(旌義)로 바꾸어 정배(定配)하였으니, 6월에 바다를 건너 배소에 도착하였다. 이때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세 대신이 이미 화를 당하였고 사류(士類)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는데도 군흉들은 여전히 계책을 완수하지 못하여 다시 공의 상소가 직접 폐립(廢立)을 청한 것이라고 하면서 거듭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10월에 공은 다시 감옥에 나아가 형신을 받았는데, 시를 지어 스스로 맹세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소루하고 어리석은 성품으로 사헌부 관원이 되어 / 性本疏愚忝憲官
험난한 길에서 제 몸 보존하기 어려운줄 몰랐네 / 危塗不解保身難
감옥에서 지금 형구를 차고 있으니 / 圓扉今日桁楊下
죽는 것이 편안히 눕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 一死何殊袵席安
또 모부인의 기일에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지난해엔 강가에 있었고 지금은 감옥에 있으니 / 去歲江潭今犴狴
매번 제삿날이 되면 슬픔이 곱절이 되네 / 每逢讎日倍傷悲
형제들은 똑같이 우환을 겪고 있으니 / 弟兄但識同憂患
부인과 아이들이 어찌 제사를 잘 지내리오 / 婦孺那能薦醴粢
죄는 크고 명분은 어그러져 사는 게 부끄러우니 / 罪大名虧生亦恥
뼈가 상하고 힘줄이 끊어졌거늘 죽음이 어찌 이리도 더딘가 / 骨殘筋絶死何遲
구천으로 갈 날이 이제 멀지 않았으니 / 泉塗此去無多日
슬하에서 모실 날 얼마 남지 않았네 / 膝下承歡倘有期
사림(士林)이 전송하며 모두들 슬퍼하였다.
계묘년(癸卯年,1723, 경종 3)에 이르러 이미 아홉 차례 형신을 받았기에 장독(杖毒)이 온몸에 퍼져 숨이 실낱처럼 이어졌지만 정신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아 선조의 기일에는 반드시 소식(素食)하였다. 형신을 받게 되면 안색을 바꾸지 않고 말하기를,
“나를 죽일 수는 있으나, 내 말을 반드시 실천한 이후에야 국사가 안정될 것이다.”
하였다.
흉당 가운데 문사랑(問事郞)이 된 자도 나와서 남에게 그가 장하다고 말하였다. 4월에 군흉들이 공이 끝내 굴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는 사형에 처할 것을 직청하였다. 공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나 온전한 몸으로 죽지 못한 것이 불효임을 생각하여 형님에게 고인의 자정(自靖자살)하는 의리를 편지로 써서 물으니, 형님이소태부(蕭太傅)의 고사로 답문하였다.
이어서 형님에게 유서를 남겼는데 집안일은 내버려두고 오직 정성스럽게 임금이 하사한 서적과 선현의 유묵에 대해서만 말하였다. 또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나는 지금 죽지만 정대(正大)한 죽음이니, 마음을 억눌러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고 아이들을 데리고 잘 살아가시게. 나는 죄를 짓고 죽었으니 제사에는 유밀과(油蜜菓)를 사용하지 마시게. 내가 살아있을 때처럼 부모님의 묘제를 빠짐없이 행하고 기제(忌祭)에는 제수를 도우시게. 창웅(昌雄)을 잘 가르치게나, 글을 배우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창웅은 아이의 이름이다.
27일에 국청(鞫廳)에서 공에게 결안(結案)에 서명하라고 재촉하자, 공은 말하기를,
“빨리 나를 죽여라. 나는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
하였다.
이날 밤 설사가 극심해져 마침내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3세였다. 처음에는 성의 동문 밖에 거적으로 싸서 매장했다가 9월에 공주(公州)의 치소(治所) 북쪽 금란동(金蘭洞) 신좌(申坐)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다.
공이 죽었을 때 옥리(獄吏)가 독약을 마셨다고 고하였는데, 사실은 독약이 들어가긴 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대계(臺啓)가 계속해서 올라와 공의 형님 진사공(進士公)도 감옥에 갇혔는데, 올린 공초에 이르기를,
“나의 아우가 아무런 죄도 없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나는 아우의 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로 하여금 자결하게 하였다. 나도 죽기를 결심하였으니 아우와 함께 돌아가 지하에 계신 부모님을 뵙겠다.”
하였다.
최석항이 용서할 만한 사정이 있고 죽일 만한 법이 없다고 하여 장형을 가해 강진(康津)에 유배시켰다.
갑진년(甲辰年,1724) 정월에 결국 법외로 ‘형이 동생을 죽였다’는 죄율을 만들어 배소에서 차율(次律)을 적용하였다.
아, 사극이여! 입고 있는 옷마저 견디지 못할 것처럼 허약하였지만 그 마음은 철석(鐵石) 같았다. 고문을 받을 적에 남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지만 나만은 다른 사단이 생기지 않으리라 보장하였는데, 이제 과연 징험되었으니 어찌 참으로 열장부(烈丈夫)가 아니겠는가.
나라를 위하는 진심어린 정성은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가 없었다고 이를 만하다. 선조를 받들고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은 위태롭고 곤란한 상황에서도 게으르지 않았으니, 평상시 효자의 소략한 예절 따위는 말할 게 못 된다. 사극은 이름이 성복(聖復)이고 호가 퇴수암(退修菴)이다.
풍양 조씨(豐壤趙氏)는 고려 시중 맹(孟)에서 나왔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는 휘 세현(世賢)이 있었는데, 중종반정 때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아 사대부가 그의 절의를 칭찬하였다. 증조 휘 박(璞)은 목사를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견소(見素)는 현령을 지냈으며, 부친 휘 시채(始采)는 선공감역을 지냈다.
모친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득일(得一)의 따님이다. 공의 부인 황주 변씨(黃州邊氏)는 호남의 명유(名儒) 망암(望庵) 이중(以中)의 손녀이고, 부친은 세구(世耈)이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창웅(昌雄)은 관례를 치를 때 이름을 정세(靖世)로 지었으니 공이 옥중에서 내린 명이었다.
세 딸은 송필용(宋必容), 정수(鄭鏽), 이광룡(李光龍)에게 시집갔다. 송필용에게 시집간 딸은 공이 화를 당한 이후로 물을 떠놓고 하늘에 기도하기를 3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진사공은 휘가 성집(聖集)이고 자가 사성(士成)이니 성품이 강직하고 기개와 절의를 좋아하였다.
공이 탐라(耽羅)로 귀양 갈 적에 상처가 극심해지면 번번이 종기를 씻어주고 고름을 빨아주면서 잘 보살피며 길을 갔으니 보는 자들이 감탄하였다. 끝내는 기꺼이 함께 죽었으니, 그 탁월한 행실과 참혹한 화는 공과 함께 전해지기에 충분하다. 1남 관세(觀世)를 두었다.
공은 사대신 가운데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과 가장 친했기 때문에 군흉들은 공이 그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여 반드시 공의 자백을 얻어 위로 동궁에게까지 미쳐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고야 말려고 하였다.
공의 죽음으로 그 화심(禍心)을 막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나라를 기필할 수 없었을 것이니, 비록 사직을 보존한 공로라 말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을사환국 때 관직을 회복시키는 명이 내려지고 후에 억울하게 죽은 여러 신하의 전례대로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되었다.
아! 공의 상소를 가지고 반역이라 말하고 잡아다 국문하기를 청한 자들은 모두 우리 임금에게 무례한 무리이니 본디 이루 다 주살할 수는 없지만 그 죄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연명으로 차자를 올린 대신의 억울함이 풀린 이후에 공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에게 응당 특별히 포장하고 은혜를 내리는 은전이 있어야 하거늘 지금까지 듣지 못했으니, 이러한 의리가 끝내 펼칠 수 있는 날이 없겠는가.
정세(靖世)는 어려서부터 나에게 수학하였는데, 변숙인(邊淑人)을 통해 공의 평소 뜻을 알았다.
장성해서는 스스로 행장을 지어 내게 와 묘비문을 청하였다. 나는 차마 사양할 수 없어 명(銘)을 덧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이 넉 자 봉분이여 / 惟此四尺之封兮
바로푸른 옥이 된나의 벗이 묻힌 곳이네 / 實吾友化碧之攸藏
열렬하게 충의에 분한 기운이여 / 烈烈忠憤之氣兮
빠른 번개 되고 무지개를 길게 뱉어내리라 / 安知不作雷迅而吐虹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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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집의 조공 묘갈:
저자가 조성복(趙聖復, 1681~1723)을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독사에게 …… 잘라내는:
육구몽(陸龜蒙)의〈이별(離別)〉에 “대장부가 눈물이 없는 것 아니지만, 이별할 때에는 흘리지 않는다오. 장검 짚고 술잔 대하니
나그네의 슬픈 얼굴 지음 부끄럽네. 독사가 한 번 손 물면 장사는 빨리 팔뚝 잘라내는 법이네.
생각이 공명에 있으니 이별을 어찌 한탄할까[丈夫非無淚, 不灑離別間. 仗劍對樽酒, 恥爲游子顔. 蝮蛇一螫手, 壯士疾解腕. 所思
在功名, 離別何足歎.]“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03] 정유년의 고사:
1717년(숙종 43) 숙종이 당시 세자로 있던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면서 마련한 절목을 이른다. 이때의 절목은 경종이 세제인 영
조에게 모든 대소사를 대리청정하도록 명한 것에 비해 세자의 결정권을 다소 제한하였다.
노론 4대신은 차마 경종의 명을 그대로 따르지는 못하고 세제의 결정권이 다소 적었던 이때의 절목에 따라 거행할 것을 청한 것이다.
[주04] 곡돌사신(曲突徙薪)의 계책: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화를 미연에 방지하라는 말이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순우곤(淳于髠)이, 옆집의 굴뚝이 곧게 뻗어 땔나무 옆
으로 나 있는 것을 보고는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며 굴뚝을 굽게 고치고 땔나무를 옮기도록 충고하였는데, 그 말을 듣지 않다
가 과연 집을 태웠던 고사가 있다. 《漢書 卷68 霍光傳》
[주05] 소태부(蕭太傅)의 고사:
소태부는 한 원제(漢元帝)의 태자 시절 사부였던 소망지(蕭望之)를 가리킨다. 소망지는 선제(宣帝) 때 조정에 있다가 삼보(三輔)의
지방관으로 나갔으며, 뒤에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임금 원제를 보필하다가 석현(石顯) 등의 모함을 받아
음독자살했다.《漢書 卷78 蕭望之傳》
[주06] 최석항이 …… 적용하였다:
《경종수정실록》3년 12월 30일 기사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조성집(趙聖集)이 자기의 아우를 독살하려 했으므로 대신(臺臣)이 잡
아다가 핵실할 것을 청하였고, 형조에서 조사하여 사실을 밝혀 낸 다음 이어 대신과 의논하여 정률(定律)할 것을 청하였다.
좌의정 최석항(崔錫恒)이 《대명률》을 인용하여 응당 죽어야 할 죄에 해당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니, 임금의 절도(絶島)에 정배(定
配)하라고 명하였다. 대관(臺官)이 간쟁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정형(正刑)에 처할 것을 허락했었으나, 최석항이 또 임금에게 아뢰니
도로 중지시켰다.
그러나 대관이 다시 극력 간쟁하니, 임금이 마침내 그대로 따랐다. 조성집이 바야흐로 배소(配所)에 있을 적에 도사(都事)를 보내어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주07] 푸른 옥이 된:
원문의 화벽(化碧)은 선혈이 푸른 옥으로 변했다는 말로, 충신지사(忠臣之士)를 칭송하는 뜻이다. 주(周)나라 장홍(萇弘)이 경왕
(敬王)에게 충간(忠諫)을 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자살하였는데, 그 피가 3년 만에 푸른 옥으로 변하여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
다고 한다.《莊子 外物》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