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개척하여 부자마을 이룩
경남 거제군 거제면 법동리 산전 지도자 최 재림
성공내용
이 마을은 거제 만에 위치하고 있는 연안 어촌 섬마을로서 호당 경지면적 2.6반의 영세한 농토와 갯가에서 해초와 패류의 자연산 채취에 의존하여 살아온 가난한 마을이었으나, 육지의 어느 마을보다 잘 살아 보겠다는 최 재림 지도자의 끊임없는 끈기와 전 주민의 과감한 개척정신에 의한 피나는 노력으로 마을환경을 개선하고 생산기반시설인 소류지 신설과 바다의 보고를 찾아 수하식 굴양식시설 600대 설치 및 바지락, 꼬막 등을 양식한 결과 이제는 77년 말 호당 평균소득 300만원을 돌파하여 도내에서 우수하게 잘사는 마을을 이룩한 어촌 섬마을이다.
마을현황
가 구 : 99호 (농어가 77, 비농가 22)
인 구 : 615명 (남 333, 여 282)
경지면적 : (논 9.8 밭 16.9)
가난하기만 했던 섬마을
이 마을은 거제만 입구에 위치하여 군청소재지인 고현으로부터 26km, 거제면 소재지에서 약 4km 떨어져 있으며 통영군 한산면과 근접한 군내에서도 가장 낙후되고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어촌 섬마을이다.
몇 해 전만해도 바다의 무진장한 보고를 개발하지 못한 탓으로 가난을 숙명처럼 생각하며 우물 안 개구리의 생활태도로 소득원 개발과 상호 협동하여 새마을운동을 벌려보자는 주민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마을로서, 재래식 영농방법과 원시적인 고기잡이와 조개 채취로 살아온 주민은 빈한하기 그지없었다.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끈기
그러나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다시 농사를 짓게 된 최 재립 지도자는 이대로 이 마을이 계속된다면 낙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항상 가습 속 깊이 생각하고 언젠가는 잘사는 마을을 만들겠다는 굳은 신념 속에 살아 던 중 때마침 새마을운동의 열풍이 일기 시작할 때 자원하여 지도자가 되었다.
막상 지도자라는 무거운 임무를 맡고 보니 옛날부터 내려오는 생활방식과 의식구조를 일시에 변혁시켜 새마을운동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겹고 어려운 일들이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마을청년들과 합심하여 퇴폐하고 무질서한 일들을 차근차근히 주민을 설득하며 꾸준한 끈기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일이 지나자 앞장서서 일하던 최 지도자를 따라 전주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열심히 소득사업을 추진한 결과 77년 말 호당 평균 소득 300만원을 돌파하여 도내에서 부자마을로 성장되었다.
시험사업을 토대로
1970년 4월 22일 박 대통령 각하께서 제창한 “새마을운동”의 열풍이 전국 각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할 무렵 이 마을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긴장에서 아직도 깨어날 줄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최 지도자는 71년도 정부지원 양회 350대로 주민의 현동정신을 고취하고 환경개선을 위하여 안길확장 50m, 교량 2개소, 공동 빨래터 2개소를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집을 헐고 땅을 희사 받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토지편입 대상자를 달래도 보고 설득도 시켜보았으나 끝내 협조의 기색이 보이지 않자 청년회원 20명으로 조직된 “새마을돌격대원”들이 끈기 있게 설명하고 권유하여 주민의 동의를 얻고 토지를 희사 받아 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처음 시작한 시험사업은 무사히 마쳤으나 72년에는 정부지원 대상에서 제외되어 주민들은 지원이 없다고 처음에는 당국에 대하여 불평을 하였으나 의욕 없이 새마을사업을 추진하여 마을개발정신이 미약하다하여 지원에서 누락되었다고 생각 된 주민들은 이것이 한 촉매제가 되는 게기가 되어 다시 참다운 협동단결의 의지를 남에게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순수한 주민의 자력으로 마을회관 28평 규모를 126만원을 투자하여 건립하였고 담장 180m, 지붕 28동을 개량했으며 71년도에 마무리 지우지 못한 안길확장을 200m나 개설함으로서 단합되고 노력하는 마을이라는 좋은 인상을 심어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이 면내 어느 마을보다 협동심이 강한 마을로 인정을 받게 되어 계속적으로 정부의 지원혜택을 받아 거제군에서 가장 우수하고 앞장서는 마을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타처 마을에서까지 견학을 오게 되었다.
비운의 그날을 딛고
모든 일에는 반드시 호사다마가 뒤따르는 것인지 그렇게도 순조롭게 진행되던 새마을사업이 어려운 난관에 봉착되고 말았다.
74년 정부의 지원과 주민부담으로 숙원사업이었던 소류지 신설작업 중 60%의 공정에서 불의의 산사태로 인하여 현장에서 2명이 죽고 15명이 중상을 입는 커다란 비운의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인하여 일체의 노력부담이 중단되고 사업추진도 중단된 채 결국은 주민과 지도자간의 거리는 멀어지고 말았다. 모든 일이 마을의 발전을 위하고 부촌을 이룩하여 가난을 다시는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자는 것임에도 오직 지도자만이 잘 살고 잘되기 위한 것인 냥 지도자를 험담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지도자는 굴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끈기 있는 사명감으로 어떻게 하든지, 다시 전주민이 협동 단결할 수 있는 대책을 조속히 강구하여야 된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책이란 이 사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주민들이 힘을 내어 다시 일어 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업비의 추가 책정을 강력히 수차 건의한 결과 그 다음 해에 추가지원을 받음으로서 새로운 마음으로 사업을 착수하여 마무리 지워 주민은 옛날같이 협동하고 서로의 오해가 해소되어 다시 종전과 같이 일할 수 있는 분위기로 돌아갔다. 시련의 극복을 거울삼아 전주민은 마을 발전을 위하여 중단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열과 성의를 다하여 새마을 가꾸기에 정성을 쏟았다.
바다를 향한 집념
소류지 사업과 환경개선사업을 거의 마무리 지움과 동시에 새마을의 뜻을 알게 된 주민은 소득증대를 위하여 넓은 바다의 보고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세한 농토를 아무리 활용한다 해도 식량해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주민들은 무한히 펼쳐져 있는 바다를 다각도로 개발하는 것만이 잘 살 수 있다는 길이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충무근해에서 한참 불이 일고 있는 굴양식사업을 현지견학하기로 하고 어촌계원 10명이 굴의 채묘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견학하여 배움으로서 이 마을에도 전망이 밝은 사업임을 확인 한 후 즉시 추진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자본금 부족과 실패의 우려로 2세대만 시험사업으로 착수하였으나 계획대로 잘 되어 점차 확대되어 갔으며 외국의 수출전망과 특히 밝고 깨끗한 청정해역지구로 세계 어느 것보다 우수한 품질이라는 호평을 수산당국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현재는 30호에 600대의 양식장으로 확대 되었으며, 연간 마을소득만도 1억 원에 가까울 정도가 되었다.
한편 양식을 하기 위하여 종묘를 외부에서 구입하던 것을 마을 앞 연안에서 시험 실시한 결과 성적이 양호하여 이제는 마을의 공동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현재 4,146m²를 설치하여 자체 종묘확보는 물론 잉여분은 타지에 판매하는 실정이다.
그동안 굶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육지로 나간 청장년들과 권현망어업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내의 소향선박 16척을 꼬막 채취 선으로 개조하여 멀리는 전라도 방면까지 가서 척당 연간 1천만 원 이상의 소득을 올림으로서 수산업소득이 마을 총소득의 90%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마을공동기금 확보를 위해 마을 앞 갯벌을 이용하여 바지락, 꼬막 등을 양식하여 연간 400여만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계속적인 수자원 개발에 온갖 정열을 다 쏟고 있다.
부럽지 않은 육지 마을들
어촌의 섬사람이라 괄시를 받으며 못산다고 천대 받던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부러움을 받는 부자마을이 되었다.
한편 조금의 가뭄에도 식수를 얻지 못하여 육지에서 배로 싣고 오던 고달픈 날이 허다 하였으나 76년 각하 특별하사금 150만원으로 간이상수도를 설치하여 식수난을 해결했을 때 부녀회를 주축으로 한 이 마을 주민들은 큰 잔치를 베풀었고, 그렇게도 주민들의 숙원이었던 전기불이 77년도 농어촌 전화사업으로 어둠을 밝혔을 때, 다시 한 번 경사 날이 되었다.
육지와의 연락이 고작 배편으로만 전달되고 그나마 바람 부는 날이면 제 아무리 시급한 일이라도 발만 동동 구르던 이곳 주민들, 이제는 무선국설치로 전국 어디서라도 소식을 전할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되어 육지의 어느 마을도 부럽지 않고 잘사는 마을이 되었다.
원대한 내일을 위하여
이 마을 지도자와 전 주민은 “하면 된다.”는 굳은 신념 속에서 어처럼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마을의 소득을 큰 보람으로 느끼고, 풍요한 어촌건설을 위하여 낡은 주택을 표준농촌주택으로 아담하게 개량하고, 마을 주변 공지에는 유자, 호두, 대추 등 민속유실수를 식재하여 아상적인 어촌마을로 가꾸어 갈 것입니다.
또한 규모가 작은 공동구판장을 확대시켜 모든 생활필수품을 공동구매 함으로서 얻어지는 이득금은 공동기금을 조성하여 번영하는 경제적 마을공동체를 육성할 것이다. 마을 뒷산 30ha를 개발하여 축산을 위한 사료작물재배와 과원을 조성할 것이며, 주 소득원인 굴양식용 어구가 마을주변에 아무 곳이나 무질서하게 방치되어 경관을 흐리게 하고 있어 공동관리를 할 수 있는 창고 건립과 어선 건조, 선착장을 연차적으로 시설하여 80년대 호당 400만원 소득을 달성시키고 그간의 새마을운동으로 익힌 지혜와 슬기를 한데 모아 살기 좋은 새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