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바닥은 우리들의 교실이었다. 4/4
땅바닥 교실
1952년 4월, 나는 전쟁이 소강사태로 접어드는 시절, 금당국민학교 1학년이 되었다. 그러나 학교는 흙벽과 초가지붕으로 만든 3칸짜리가 건물이 이어서 6학년 학생들까지 2부제 수업도 하고 한반에서 두 개학년이 구역을 나누어서 수업을 하는 상황이어서 입학생들을 받아들일 교실이 없었다. 우리는 운동장 한편에서 흙바닥에 둘러앉아 글자를 배웠다. 책상과 걸상은 당연히 없었고, 분필조차 귀하던 때였다. 아이들은 뒷산에서 주워 온 곱돌이나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 맨땅 위에 글씨를 쓰며 공부하였다.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이 우리의 공책이었고, 작은 돌멩이나 나뭇가지가 연필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수업은 할 수 없어서 비를 피해 처마 밑이나 나무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이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수업중에서 가끔 하늘에서 쌕쌕이/전투기가 쌔액~~~ 하면서 하늘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면 선생님은 다급히 아이들을 이끌고 방공호로 뛰어갔다. 어린 마음에도 전쟁은 늘 하늘 가까이 있어서 살려는 본능은 예민해 졌었다. 남학생과 여학생 가릴 것 없이 어울려 앉아 글자를 익히고 숫자를 배우던 그 시절, 가진 것은 가난뿐이었지만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은 경쟁적이었다. 흙바닥에 쓴 서툰 글씨들은 비바람에 지워지고, 햇볕에 잔등이가 뜨거워져도 배움에 대한 그 향학열은 진지하여 지금도 빗바랜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1학년의 땅마당 교실에서 공부하였고, 2학년과 3학년이 되어서야 우리는 세 칸짜리 초가지붕 교실로 들어갔다. 비가 오면 처마 끝에서 빗물이 떨어졌고, 겨울바람은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교실 바닥은 마루가 아닌 흙바닥이었다. 아이들은 수업을 듣다가 목에 걸린 가래침을 교실 바닥에 뱉고 발로 문질러 흙 속에 묻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지저분한 풍경이지만, 그 시절에는 누구도 그것을 흉이라 여기지 않았다. 가난은 모두의 것이었고, 배움 또한 모두의 희망이었다. 세월이 흘러 5, 6학년 무렵에는 학교에 근대식 판자지붕 건물이 새로 세워졌다. 비록 판잣집 같은 교실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궁궐처럼 새롭고 반가웠다. 비가 새지 않는 교실, 나무 바닥 냄새, 햇빛 비치던 새 창문을 바라보며 아이들은 더 큰 세상을 꿈꾸었다. 청소당번이 정해져 있어서 수업이 끝나고 종례를 한뒤에 교실바닥에다 양초칠을 하여 번들번들하게 하여야 청소검사에 통과할 수 있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배움에 대한 마음만은 언제나 교실보다 더 넓고 밝았다.
강냉이죽
내가 국민학교 1~2학년이던 1952~53년 무렵의 농촌은 전쟁의 상처와 가난이 온 마을을 덮고 있었다. 봄철이면 먹을 양식이 떨어져 보리가 익기만을 기다리는 ‘보리고개’를 넘어야 했고, 하루 한 끼조차 잇기 어려운 절량농가가 많았다. 피난민이나 농토가 없는 비농가의 형편은 더욱 막막하였다. 농촌에서 품팔이로 살아가는데 절량농가가 많다보니 하루 한끼를 때우는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아이들 가운데는 아침도 굶고 학교에 오는 경우가 흔했고, 얼굴에는 늘 누런 기색이 돌았다. 그 시절 국제기구에서 보내온 원조 식량은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강냉이죽과 분유를 나누어 주곤 했는데, 아이들은 언제 죽을 줄지 몰라 숟가락을 품속에 넣고 다녔다. 큰 가마솥에서 퍼내는 강냉이죽 냄새가 교실 밖까지 퍼지면 아이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따뜻한 죽 한 그릇은 어린 학생들에게 밥 이상의 위로였다.
하지만 원조 음식은 모든 아이들에게 넉넉히 돌아갈 만큼 많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형편이 가장 어려운 아이들부터 먼저 먹였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양은그릇을 들고 허겁지겁 죽을 떠먹었고, 또 어떤 아이들은 그 곁에 서서 침만 삼켜야 했다. 뜨거운 강냉이죽을 후후 불어 먹는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배고픈 아이들에게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다. 먹는 아이들도 급히 삼키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받지 못한 아이들의 눈에는 그 한 숟가락 한 숟가락이 얼마나 부러워 보였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단순한 한 끼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과 가난이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 남긴 슬픈 풍경이었다. 냄새를 맡고도 먹지 못한 채 바라만 서 있어야 했던 기억, 그리고 배고픔 속에서도 학교만은 빠지지 않으려 했던 아이들의 향학열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가슴 한편에 아프게 남아 있다.
교과서 추억
1948년 대한민국 최초의 국정교과서 국민학교 1학년 1학기 ‘바둑이와 철수'이었다. 문교부에서 1948년 《한글 첫 걸음》 등, 초·중등 교과서 50여 종을 집필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나라 대표 어린이 이름을 고심한 끝에 남자 아이는 ‘철수’, 여자 아이는 ‘영이’, 강아지는 ‘바둑이’를 선택하니, 첫 국민학교 1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 이름을 《바둑이와 철수 [국어 1-1]》로 정하여 반려 동물을 사랑하는 어린이들로 꾸민 것이다. 1952도에도 국어책의 주인공은 순이, 철수, 바둑이, 영이, 아버지, 어머니이었다. 국어책 이름이 바둑이와 철수 [국어 1-1] 이었다. 영희가 아니고 영이이다. 원래 우리말 이름인 순이, 영이의 이(伊)가 그후에 희(姬)로 바뀌는데 일제의 영향의 받은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기억에 삼삼한 것은 숫자 배우기이다. 산수책을 셈본이라고 하였다. 숫자를 배우기고 쓰기를 국민학교 1학년 셈본시간에 배웠다. 셈본 공책 맨 윗줄에 “1 2 3 4 5 6 7 8 9 0” 순서로 쓰여 있었다. “0 1 2 3 4 5 6 7 8 9”의 순서가 아니었다. “1 2 3 4 5 6 7 8 9”를 배우고 학년이 높아져야 “0(영)” 개념을 따로 배우는 방식이 많았다. 1~9는 직관적이고 0은 추상적이라서 나중에 배웠다. “0부터 시작하는 숫자열” 개념보다, “하나부터 세는 생활 셈법”을 먼저 배웠다.[끝]
< 더보기>
‘초등학교’, 일제를 내 쫓고도 50년이나 지나서야 고쳐진 이름이다.
https://cafe.daum.net/dalstan/Dlrz/28
초등학교와 초등학교, 심의섭, 곰곰이 생각하는 수상록 4,
거울의 헛기침, 한국문학방송, 2022.05.10. : 51 ~ 57 쪽
https://www.youtube.com/watch?v=ZsjA3hYzQG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