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국가의 운명을 바꿔놓은 치욕의 사건이면서, 선생 개인으로서도 묵과할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어려서 살던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낙향 후 1년 만인 1896년에 모친을, 1899년에는 부인과 사별하였으며, 이어서 1901년에는 부친마저 떠나 보내고 말았다. 선생은 1904년 한산 이씨 이은식(李殷植)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였다. 한산 이씨 부인은 홍주의병의 동지인 이용규(李容珪)의 이복동생이며, 안동관찰사를 역임한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의 종제이기도 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선생은 편안한 생활을 거부하고 항일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처남인 이용규와 이남규는 의병의 동지가 되었다. 홍주 을미의병의 총수였던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偰)이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상경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하인을 데리고 상경하였다. 선생은 서울 전동의 여인숙에 투숙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설에게 상소문의 초안을 의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영익과 민영휘 등 여흥 민씨의 당대 고관들을 만나 상소의 일을 의논하였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상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그만 두라는 권유만 받았다. 게다가 이설과 김복한이 피체, 구금되고 이설이 작성한 상소문마저 압수당하자 선생은 충남 정산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낙향하여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마침 홍주 을미의병의 주도자로 홍주향교 전교를 맡고 있던 안병찬(安炳瓚)이 홍성·청양 일대의 재지 유생들과 함께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생은 의병의 총수 자리에 올랐다. 의병장에 오른 선생은 가산을 팔아 군자금 2천 원을 마련하여 군수품으로 제공하였다. 후일 피체되었을 때, 선생은 의병을 일으킨 동기와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항상 진충보국(盡忠報國)을 본령으로 삼고 있었더니 1895년에는 국모의 변이 있고, 4년 후에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은 일본과 비밀조약을 맺었으며, 작년(1905) 11월 한일신협약이 성립되어 위로는 성상(聖上)을 괴롭게 하고 아래로 만민은 안도하지 못하고 국가의 존망은 아슬아슬하였다. 이에 뜻을 결정하고 작년 구력(舊曆) 11월 25일 동지 김상덕(金商悳)ㆍ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5적 대신을 주륙하고 이등(伊藤) 통감과 장곡천(長谷川) 대장을 살해하고 협약을 파기하여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주를 하려 했다. 마침 상주문(上奏文)을 부탁한 동지인 이설과 김복한이 경무청에 체포되어 상주문을 압수 당해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일단 충청남도 정산군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동지 이용규·유준근(柳濬根)·이식(李侙)·남경천(南敬天)과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가산을 팔아 군자금 2천원 마련한 후 홍주 의병장이 되어 무장투쟁 준비

즉 을사늑약이 늑결되어 위로는 임금을 괴롭게 하고 아래로는 만민이 편안하지 못하여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선생은 5적과 이등박문(伊藤博文)·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를 죽여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상소문을 작성한 이설과 김복한이 피체되어 뜻을 이루지 못함에 따라, 선생은 낙향하여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것이다.
선생은 의진의 근거지를 자신이 거주하는 정산군 천장리로 삼고 의진의 편제를 정비하였다. 이때의 주요 인물로는 안병찬·채광묵·박창로·이용규·홍순대·박윤식·정재호·이만직·성재한 등이 있다. 이어서 통문을 발표하고 각국의 공사에게 청원문을 보냈다. 그 중에서 안병찬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통문만이 현재 전해진다.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나라가 망하고 땅을 잃은 일이 한없이 많지만 일찍이 군사는 있으되 한 번도 피를 흘리지 않고 활 한번 쏘아보지 않고서 담소하는 사이에 온 나라를 빼앗기는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도다. 불쌍한 우리 국민들은 농사를 지으려 해도 경작할 땅이 없고 장사를 하려 해도 기술을 쓸 데가 없으니 장차 그 놈의 노예가 되고 그 놈들의 고기밥이 될 것이다.
아! 오늘날의 화를 누가 불렀는가. 진실로 그 이유를 캐보면 6,7명의 적신(賊臣)들이 안에서 화를 만들어 나라를 들어다 남에게 준 것 아님이 없다. 동방의 피 끓는 남자로서, 누가 그 놈들의 살을 씹어서 한을 씻고자 아니 하겠는가. (중략) 우리는 조석으로 분격하지만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들 힘이 없으므로 이에 큰 소리로 외쳐 팔방의 여러 뜻 있는 군자들에게 고하노라. 원컨대 눈앞의 안일에만 끌리지 말고 바싹 다가온 큰 화를 맹성하여 하나하나가 사기를 진작하고 동성상응(同聲相應)하여 단체를 만들어 충신의 갑옷을 입고 인의의 창을 잡아 먼저 적신의 머리를 베어 저자에 걸어 조금이라도 신인의 분함을 씻으며 만국의 공사와 화합하여 일차 담판하되 우리의 자주적 국권을 잃지 말자. 장차 무너질 종묘사직을 붙들며 죽게 될 백성을 구하여 후세에 할 말이 있도록 한다면 천만 다행이리라.
의진 편성을 마치고 선생은 1906년 3월 15일(음력 2월 21일) 광수장터(현, 예산군 광시면)에서 봉기의 첫 깃발을 들었다. 이때 참석한 의병은 600여명에 달했다. 우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이튿날 바로 홍주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 밖 하우령(일명 하고개)에 진을 쳤다. 선생은 홍주성 안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잡아오면 머리 하나에 1천냥을 상금으로 주겠다고 하면서 홍주성 공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저항에 오히려 대장소마저 위태롭게 되어 다시 마을 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 다음날 이세영(李世永)이 의진에 당도하였다. 홍주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가 군대에 들어가 계급이 부위에까지 오른 그의 참여는 의진으로서는 큰 힘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