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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산 26번지
백인걸(白仁傑, 1497년 - 1579년 9월 29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사림파 정치인이며 성리학자, 작가이다.
정암 조광조, 모재 김안국, 김식(金湜)의 문인이며,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은 그의 문하생이었다.
조광조와 김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기묘사화로 스승과 동료를 모두 잃고 실의속에 금강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뒤에 김안국을 찾아가 그로부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537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근무하다가 출사하였으나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반대하였으며, 그의 밀지 정치를 비난하다가 파직당했다.
그 뒤 을사사화 등으로 출사하지 않다가 1547년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그 뒤 윤원형의 몰락 이후 출사하여 1567년(명종 22) 70세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그
뒤 이조참판, 사간원대사간, 대사헌, 공조참판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을 지내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했다.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의 한사람으로 녹선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학문에 정진하여 후일 대학자가 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하에 배출하였다.
그의 종증조부는 백효연으로, 후일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는 그의 13대 종외손이다. 사후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되었다.
한성부 출신으로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이며 본관은 수원이다.
시호는 충숙(忠肅)이었다가 개시(改諡)되어 문경(文敬)이 되었다.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낸 백익견(白益堅)의 아들이다.
그는 구도(求道)의 뜻을 세워 일찍부터 학문에 전심하였으며,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김안국(金安國)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일찍부터 송인수, 유희춘, 서경덕 등과 친하게 지냈다.
이후 이연경, 이황, 허엽, 조식, 기대항, 김인후, 이이, 성혼 등 당대의 사림계 인물들과 폭넓게 만나 교류하였다
그 뒤 김식(金湜)이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자,
스승인 조광조, 김안국의 친구이기도 했던 김식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배움을 청했다
특히 조광조를 존경하여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그에게서 배움을 사사하였다.
그러나 1519년
그 뒤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오랫동안 청요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성균관에 머물다가 1538년
역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명단표
宣祖代
박소립(朴素立) | 박소립(朴素立) | 윤두수(尹斗壽) | 백인걸(白仁傑) | 기대승(奇大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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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작(李忠綽) | 구봉령(具鳳齡) | 이산해(李山海) | 정지연(鄭芝衍) | 양응정(梁應鼎) |
정 탁(鄭 琢) | 정 철(鄭 澈) | 구사맹(具思孟) | 김우굉(金宇宏) | 김우옹(金宇毋) |
윤근수(尹根壽) | 이산보(李山甫) | 정윤복(丁允福) | 이 발(李 潑) | 백유양(白惟讓) |
정곤수(鄭崑壽) | 김성일(金誠一) | 임국로(任國老) | 윤승훈(尹承勳) | 오억령(吳億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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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우(丁允佑) | 이수광(李수光) | 박홍로(朴弘老) | 김시헌(金時獻) | 허 성(許 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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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득(李希得) | 조 정(趙 挺) | 이정형(李廷馨) | 임몽정(任蒙正) | 김상용(金尙容) |
신경진(辛慶晉) | 구 성(具 宬) | 윤 돈(尹 暾) | 이상신(李尙信) | 신 흠(申 欽) |
이상의(李尙毅) |
백유양은 1530(중종25)~1589(선조22)
조선의 문신. 자는 중겸(仲謙)으로 白仁傑의 형인 , 府使(부사) 仁豪(인호)의 아들. 1572년(선조 5) 親試文科(친시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1581년 弘文館 校理(홍문관교리),
이어 강원도 御史(어사)·執義(집의)·典翰(전한)을 지내고 1588년 大司成(대사성)·吏曹 參議(이조참의), 1589년 兵曹 參知(병조참지)·副提學(부제학)을 역임했다
그가 예문관검열로 있을 때 예문관의 관리가 이조(吏曹)의 인사행정의 잘잘못을 기록하는 옛 관습을 복구하여 다시 실행하게 하였다.
그 뒤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나갔다.
남평현감으로 있을 때는 청렴하고 근무를 성실히 하였으며, 특히 학당(學堂)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지역의 교육에 힘쓰고 면학 분위기를 조성한 공로로 상을 받고 품계가 높아졌다.
1541년 홍문록(弘文錄)을 선발할 때 추천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인종 사후 어린 경원대군이 조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그는 이를 비판했다.
특히 문정왕후가 비밀리에 정난정 등에게 밀지를 내려서 윤임 등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비난했다가 파직당하였다.
그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 일부 외척과 함께 선비들이 처형당하자 관직을 단념하고 파주 우계로 낙향해 서당을 열고 성리학을 가르쳤다.
스승 없이 조광조를 사숙하던 이이는 조광조의 문하생인 휴암 백인걸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여 말이 많던 이이였으나,
이이의 사람됨을 알아본 백인걸은 이이를 받아들인다.
백인걸의 문하에서 이이는 우계 성혼을 만나는데, 성혼은 그의 오랜 친구가 된다.
성혼은 조광조의 다른 문하생인 성수침의 아들이자 성수침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이이와 성혼은 시류의 타락을 논하며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맹세하였다.
어머니의 오랜 병환과 죽음으로 충격받은 이이가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뒤에도 문제삼지 않고 받아준 것은 스승 백인걸과 오랜 친구 성혼이었다.
후에 휴암과 율곡이 마주 앉아서 정암과 퇴계의 우열을 놓고 평을 했는데, 율곡은 정암에 대해 타고난 자품은 훌륭하나 학문이 성숙하지 못해 일을 그르쳤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 평생 스승으로 정성을 다해 섬겨온 정암을 면전에서 학문을 이루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1] 이이의 파격적인 평에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1545년(명종 원년) 을사사화 때 윤임을 처벌하는 절차상의 문제를 강력하게 지적하여 윤원형 등 소윤의 미움을 사서 파면당하고
파주로 내려갔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그 뒤 1551년 석방된 뒤 오랫동안 고향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가르치고, 《태극도설 太極圖說》과 정주학(程朱學)의
서적들을 깊이 연구하는 등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소윤의 거두 윤원형이 죽자 복직하였다.
1565년(명종 20) 복직하고 그해 승문원교리, 1566년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등을 지내고 양주목사로 나갔다.
1567년 양주목사가 되었을 때는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등의 치적을 쌓아 그가 이임할 때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하며, 후에 고을사람들이 선정 기념비를 세웠다.
1567년(명종 22년) 71세의 고령으로 교리가 되었고 그해 재상 김명윤(金明胤)을 탄핵하여 몰락시켰다.
이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제자인 이이와 함께 다시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동인의 지탄을 받고 서인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았다.
이이에 대한 동인의 악감정은 이이의 스승인 백인걸에게도 향했다.
이듬해 기대승의 추천으로 대사간으로 승진한 뒤 공조참의가 되었다.
1569년에는 시류를 잘 타도 출세하여 이조 판서가 된 박충원을 공격하였다.
그가 공격하려 하자 박충원은 곧 병을 핑계로 이조판서직을 내놓았다.
선조 연간에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을 등을 지내고 공조참판으로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그 뒤 병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權臣) 등의 비위를 논핵(論劾)하다가 체직당하였다.
2015년에 교체 된 홍살문
1570년에는 좌의정 권철이 왕과 불협화음이 있는 것을 지적했다가 권철이 출사하지 않자 해명하여 다시 조정에 나오게 했다.
1576년 의주 목사 곽월(郭越)이 그가 화를 획책한다고 비판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아 무마되었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그해 사퇴하고, 1579년 5월 지중추부사가 되어 당시의 동서분당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하였다.
도성에 있는 사대부들이 자신을 중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그것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녹봉미와 마초값[騶直]을 모두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보내고 곤궁하게 생활하였다. 병이 들자 왕이 사람을 보내 문병하고,
병세가 위독해지자 선조가 직접 문병하고 의원과 약을 내려보내 치료하게 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해 9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산 26번지에 안장되었다.
후일 그의 학통을 계승한 잠곡 김육과 우암 송시열이 그의 신도비를 찬했다.
충숙의 시호가 추서되었고 뒤에 문경(文敬)으로 개시되었다.
나주 남평의 봉산서원(蓬山書院), 파주(坡州)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1603년 청백리(淸白吏)로 선발되어 기록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백과사전에서...
우암:송시열(宋時烈)과 잠곡: 김육(金堉)이 그의 신도비를 찬했다.
典祀廳:나라의 제사와 증시(贈諡) 등을 맡아보던 관아.
나라의 전사는 주로 외사(外祀)하는 무덤[兆], 시조에게 지내는 체사(禘祀), 지신에게 지내는 교사(郊祀), 종묘에 지내는
종사(宗祀), 조상에게 지내는 조보(祖報)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전사청은 통일신라 때 제사를 맡은 관청의 명칭으로 쓰여졌다.
제사의 의식이 다양화해지고 제례가 발전됨에 따라 전사의 기구를 예부(禮部)로부터 독립시킬 필요가 있어 처음 전사청으로 분리시켰다가
713년(성덕왕 12) 전사서(典祀署)로 되었고, 고려에 들어와서 전의시(典儀寺)·태상부(太常府)·봉상시(奉常寺)·대상시(大常寺) 등으로 바뀌었다가
1409년(태종 9) 봉상시로 개칭되었다.
또한,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종묘나 문묘, 기타 전각이 있는 곳에는 제례 때
전사관(典祀官)이 집무하면서 제사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점검하는 전사청이 있다.
백과사전에서....
백인걸(白仁傑) 신도비 -김육(金堉)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숙공(忠肅公)의 시호를 받은 백공(白公)의 신도비명 국조(國朝)에서 명현(名賢)들이 배출된 것이 공희왕(恭僖王) 중종(中宗)께서 반정(反正)한 뒤보다 더 융성한 때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문정공(文正公)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과 같은 분이 있어 나의 선조이신 김식(金湜)과 더불어 도의의 사귐을 맺었고, 성리학(性理學)을 주창해 밝혀 한 세상 사람들이 사종(師宗)으로 삼았다. 휴암(休菴) 백공(白公)은 정암 선생의 고제(高弟)이다. 처음에 공이 성균관에 있을 적에 나의 선조이신 김식이 좨주(祭酒)로 있었다. 제생(諸生)들에게 나아가 강학(講學)하다가 강학을 마치니, 공이 책을 잡고는 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어려운 부분을 물어 오묘한 의리에 대해 더욱더 많이 들었다. 그 뒤에는 드디어 정암 선생이 사는 집 곁에 서실(書室)을 짓고는 글을 배웠다. 공의 휘는 인걸(仁傑)이고 자는 사위(士偉)이며, 그 선조는 송경(松京)에서 나왔는데, 수원(水原)으로 이사해 호적을 만들었다. 고려에서 시중(侍中)을 지낸 백경신(白景臣)의 후손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백천장(白天臧)의 7대손이다. 아버지는 휘가 익견(益堅)으로,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정직한데다가 경학(經學)을 닦고 대절(大節)이 있어 왕자 사부(王子師傅)로 천거되었는데, 일찍 졸하였다. 뒤에 공이 귀하게 되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사수(思粹)로, 승문원 참교를 지내고 예조 참판공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효삼(效參)으로, 사헌부 지평을 지내고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사직(司直)을 지낸 우종은(禹從殷)의 딸로, 고려조에 시중을 지낸 우현보(禹玄寶)의 후손이다. 판서공의 계실(繼室)이 되어 2남을 낳았는데, 공은 둘째이다. 공이 태어난 지 1년도 채 못 되어 판서공이 세상을 떠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효성과 우애를 천부적으로 타고났다. 조금 자라서는 힘써 공부하여 스스로 수립하였는데, 개연히 도(道)를 구할 뜻을 가졌다. 모부인을 섬김에 있어서는 뜻을 어긴 적이 없었고, 형을 섬기기를 엄한 아버지를 섬기듯이 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이 왕위에 있으면서 정사를 황란(荒亂)하게 해 민가를 철거하여 궁실을 넓히었다. 중사(中使)가 공의 집에 오자, 공은 이때 나이 8세였는데도 나아가서 응대함이 어른과 같았다. 이에 중사가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내 마땅히 너의 집은 면제해 주겠다.” 하였으나, 끝내 면하지 못하였다. 모부인이 집을 세내어 살면서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길쌈을 하여 생활을 꾸려갔다. 어떤 때는 밤새워 길쌈을 하였는데, 공은 반드시 곁에서 모시고 앉아 있었다. 이에 부인이 매번 등불을 끄고 거짓으로 자는 척하면서 공으로 하여금 먼저 자게 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뒤에 공은 사문(斯文)의 불행을 통탄스럽게 여겨 풍악(楓岳)에 가서 유람하다가 한 해가 지난 다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바깥 사람들과 교유를 끊고 문을 닫은 채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 지 몇 달 만에 친구인 신거관(愼居寬)이 그를 보고는 놀라서 말하기를, “그대의 용모와 말투가 지난날과는 크게 다르니, 무엇을 수양하여 그렇게 되었는가?” 하였다. 대부인의 나이가 많아질수록 집안이 더욱 가난해지자, 공은 드디어 과거 시험 공부를 하였다. 25세 때인 신묘년(1531, 중종 26)에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정유년(1537)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시배(時輩)들이 기묘인(己卯人)이라는 이유로 헐뜯어서 성균관에 분관(分館)되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예원(藝苑)으로 천거되어 들어갔다. 고사(故事)에 조정에서 제수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사관(史官)이 정청(政廳)에 나아가서 그 잘잘못을 쓰게 되어 있었는데, 이를 오랫동안 폐지한 채 거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공이 붓을 잡고서 부지런히 나아가자, 전관(銓官)이 이를 몹시 꺼렸다. 신축년(1541, 중종 36)에 예조 좌랑으로 있다가 모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해 남평 현감(南平縣監)이 되었다. 현감이 되어서는 사방에 서당(書堂)을 세운 다음 늠료(廩料)를 주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매달 초하루에는 친히 나아가서 권강(勸講)하였다. 부역을 고르게 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면서 백성들 보기를 자식과 같이 하였으며, 옥사(獄事)를 처결함이 공평하여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온 도내의 처결하기 어려운 옥사는 모두 공이 나아가 처결하였다. 그리고 무너진 관청과 창고를 수리하여 새롭게 하였는데, 백성들을 부역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녹봉을 희사해 완성시키자 백성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방백(方伯)이 공의 치적이 가장 뛰어나다고 아뢰자, 상께서 포상하여 자급을 올렸다. 대부인을 위하여 풍악(風樂)을 베풀고 잔치를 열고는 자손들로 하여금 번갈아 가면서 앞에 나아가 축수하게 하였으며, 날씨가 화창한 명절날에는 가마에 태워서 유람시켜 드렸고, 친구분들을 초청해 모친의 얼굴빛을 기쁘게 해 드렸다. 갑진년(1544, 중종 39)에 조정에서 헌납으로 불러들였는데, 공을 꺼리는 자가 상께 말하여서 옛 임지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을사년(1545, 인종 1)에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호조 정랑으로 전보되었다. 이해 7월에 인묘(仁廟)께서 승하하였다. 이해 8월에 헌납에 제수되었는데, 문정 왕후(文定王后)가 윤원형(尹元衡)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윤원형으로 하여금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 세 사람을 제거하게 하였다. 이에 정순붕(鄭順朋),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등이 대궐에 나아가서 직계(直啓)하여, 윤임을 유배 보내고 유관을 파직시키고 유인숙을 체차하였다. 그러자 공이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밀지로써 다른 사람을 죄주는 것은 아주 옳지 못한 짓이다. 내가 장차 조정에 나아가 쟁론할 것이다.” 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리고는 감히 응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공이 홀로 아뢰기를, “국가의 일은 마땅히 광명 정대한 데에서 나와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안에서 밀지를 내려 윤임 등 세 사람을 죄주면서 조정에서 의논하지 않고 죄명도 열거하지 않은 채 외척(外戚)이 밀지를 받들어서 일을 행하였으니, 어떻게 후세에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윤원형은 내지(內旨)를 받아서 국가의 일을 광명 정대한
데에서 나오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은 내지가 내려졌다는 말을 듣고서 두세 재상들의 집에 가서 눈치를 살펴 마치 명령을 전달하는 군졸과 같은 짓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대간들은 머뭇거리면서 관망하여 모두 언관(言官)의 책임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모두 치죄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러자 문정 왕후가 크게 노하여 공을 하옥(下獄)시켜서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정순붕의 아들 정렴(鄭)이 그의 아버지에게 간하기를, “백인걸은 충직한 사람인데, 지금 만약 살해당한다면 아버지께서는 장차 만세에 죄를 얻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정순붕이 상소를 올려서 구원함에 문정 왕후가 노여움을 거두었다. 이에 공이 드디어 석방되어 파주(坡州)에 있는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정미년(1547, 명종 2) 가을에 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를 가져다가 위에 올렸는데, 그 벽서에 쓰여 있기를, “여주(女主)가 정권을 잡고 간신이 정권을 농락하니,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로 인하여 을사년의 죄인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냈는데, 공은 안변부(安邊府)로 귀양갔다. 다음 해 3월에 대부인이 서울에서 병으로 졸하자, 공은 유배지에 있으면서 통곡을 하고는 상복을 입었다. 신해년(1551)에 왕세자가 탄생하여 대사면(大赦免)이 있음으로 해서 공은 석방되어 파주로 돌아왔다. 오두막집은 쓸쓸하고 살아갈 길은 더욱 어려워졌으나, 공은 오직 한가로이 지내면서 유유자적하였다. 그러면서 매일 한밤중이면 태극도설(太極圖說), 《주역(周易)》, 사서(四書)를 외우며 걱정하거나 겁내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을축년(1565, 명종 20) 여름에 윤원형이 패하여 죽자, 공은 바로 복관(復官)되었으며, 다음 해에 선공감 정으로 승진하였다. 정묘년(1567, 명종 22)에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붕어(崩御)하고 명묘(明廟)가 승하(昇遐)하여 세 명의 조사(詔使)가 나옴에 따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부담지우게 되었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백성들을 거듭 곤핍하게 할 수는 없다.” 하고는, 창고에 있는 쌀을 꺼내어 비용에 충당하였다. 이에 고을을 다스린 지 몇 달 만에 치화(治化)가 크게 행해지자, 백성들이 노래 부르기를,
흰 눈의 흰빛은 / 白雪之白 님과 더불어 똑같이 희네 / 與君同白 마음으로 사랑하니 / 心乎愛矣 그 어찌 웅걸차지 아니하리오 / 胡不爲傑
하였으며, 고을에서 떠나가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공의 덕을 기렸다.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처음 즉위하여 어진 이를 구하기를 몹시 급하게 하였는데, 7월에 교리로 공을 불러들였다. 8월에 직학사로 승진되었고, 9월에 동부승지에 특별히 제수되었다가 전례에 따라 우부승지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인해 체차되었다. 무진년(1568, 선조 1) 1월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대사간으로 옮겼다. 인순 왕후(仁順王后)가 조정에 임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얼마 동안 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 신하들에게 묻자, 대신이 대답하기를, “1년으로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공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사군(嗣君)께서 어리지 않으시니, 여주(女主)가 오랫동안 수렴청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인순 왕후가 좋아하지 않는 기색으로 회의를 파하였다. 얼마 있다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공이 가장 먼저 차자를 올리기를, “조광조(趙光祖)는 걸출한 인재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을 천명하여 사문(斯文)을 흥기시키고 임금을 만나 다스림을 폄에 따라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성대함을 거의 다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간신인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사악한 마음을 멋대로 부려서 마침내 원통하게 죽게 되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원통해함이 날이 갈수록 더욱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현재 임어하신 처음이라 사방에서 바람에 휩쓸리듯이 따르고 있으니, 국론(國論)을 정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사습(士習)을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진유(眞儒)를 뒤미처 장려하여 높은 관작과 아름다운 시호를 추증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한다면, 어찌 맑은 시대의 성대한 거조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임금의 한 마음은 조정의 근본입니다. 옛날의 거룩한 임금들은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근본을 세웠습니다. 이른바 정일집중(精一執中)이란 것이 바로 그에 대한 학문입니다. 정일집중의 도리를 체득하여 황극(皇極)을 세운다면, 겉이 단정하고 그림자가 바르게 되어 뭇 아랫사람들이 법칙을 취하여, 모두가 한 마음을 정백(精白)하게 해서 크게 응하여 뜻을 기다릴 것입니다.” 하면서, 수천 마디의 말을 올렸는데, 상이 답하기를, “진계(陳戒)한 말을 내가 어찌 감히 잊겠는가. 마땅히 좌우(座右)에 두고서 스스로 경계하겠다.” 하였다. 5월에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부인(夫人)의 소상(小祥)에 조정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제사지내는 것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공이 나아가서 말하기를, “예(禮)라는 것은 인정을 말미암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이었지만 사은(私恩)을 폐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관원을 파견하여 제사지내어 지극한 정을 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는데, 법관이 안 된다고 하여 논박을 받아 체차되었다. 공조 참의와 대사성으로 옮겼다가, 드디어 파주(坡州)로 돌아갔다. 그 뒤 병조 참지와 대사간으로 다시 징소(徵召)의 명을 받았으나,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기사년(1569, 선조 2) 1월에 특별히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재차 상소를 올려 사면(辭免)되었다. 상이 수찰(手札)을 내려 하교하기를, “경의 충성은 해와 달을 꿰뚫으며, 절의는 얼음과 서리를 능가한다. 그러니 속히 소명(召命)에 달려오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에 공이 조정에 나아갔는데, 추부(樞府)로 옮겨졌다가 또다시 대사헌에 제수된 것이 두 차례였다. 공조와 병조 두 조의 참판을 역임하면서 경연(經筵)과 금부(禁府)의 직책을 겸임하였다. 경오년(1570)에 가뭄이 들어 구언(求言)을 하자, 공이 상소를 올려서 진상(進上)하는 공물(貢物)을 감하여 일족(一族)과 절린(切隣)의 폐해를 제거하고, 열읍(列邑)에서 명목에도 없는 세금을 거두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적체되어 있는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명하셨는데, 오늘날의 원통한 죄인 가운데 어느 누가 을사년과 기유년의 죄적(罪籍)에 오른 자들보다 더 원통하겠습니까. 적몰(籍沒)한 것을 되돌려주고, 직첩(職牒)을 모두 환급하소서. 영의정에 추증된 조광조는 참소하는 말에 걸려들어 제 명에 죽지 못하였는데, 유풍(流風)과 유택(遺澤)이 죽은 뒤에 더욱 드러났으며, 끊어졌던 학문을 천양한 공이 정몽주(鄭夢周)나 김굉필(金宏弼)보다도 훨씬 더 큽니다. 그를 종사(從祀)한다면 많은 선비들이 모범으로 삼아 교화를 펴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인물로는 이황(李滉)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다스림을 도모하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께서 많은 것을 채용하여 을사년과 기유년에 적몰한 재산을 되돌려주고, 죄적에 들어 있는 어진 선비들을 신원(伸冤)시키고 등용하였다. 이 해 겨울에 부제학에 제수되고, 신미년(1571) 여름에 또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시원시원하여 가슴속에 담아 두는 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에서도 매번 조정 대신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면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꺼렸다. 인근에 이원경(李元慶)이란 자가 살고 있으면서 때때로 찾아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홀연히 유언비어가 떠돌기를, “이원경이 척리(戚里)에게 글을 보내어 ‘백공(白公)이 장차 조정 신료들을 논핵하려고 하면서 그대와 더불어 힘을 합하고자 한다.’고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온 도성이 시끌시끌하였는데, 공이 그 말을 듣고는 말하기를, “나의 심사(心事)는 청천 백일(靑天白日)과 같으니, 이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한 바이다. 내가 일찍 물러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고는, 즉시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그 뒤에 의주 목사(義州牧使) 곽월(郭越)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백인걸이 사림(士林)을 모함하고자 하다가 성사되지 않자 물러갔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백인걸의 정충(精忠)은 해를 꿰뚫는데, 곽월이 감히 이런 논의를 한단 말인가.” 하면서 끝까지 캐물으려고 하다가, 대신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여 중지하였다. 공은 집 안에 쌀 한 가마니 저축해 놓은 것이 없어서 관가에서 주는 쌀에 의지하여 조석 끼니를 이어갔다. 감사 윤근수(尹根壽)가 공의 가난한 실상에 대해 아뢰자, 상이 특별히 명하여 두 차례나 보살펴 주게 하였다. 그러자 공은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들과 이를 나누어 먹고는 상소를 올려서 사은(謝恩)하였다. 그러면서 이로 인하여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를 종사(從祀)하라는 뜻을 아뢰었다. 이보다 앞서 양주 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도봉산(道峯山) 아래에 정암서원(靜菴書院)을 세웠는데, 공이 대궐에 나아가 종사(從祀)하고 사액(賜額)하기를 청하고자 하여, 무인년(1578, 선조 11) 7월에 병을 무릅쓰고 도성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서원의 유생들이 이미 사액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집으로 돌아갔다. 대신이 공이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위에 아뢰어 조회(朝會)하는 것을 면제하게 하였는데, 공은 이미 시골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상이 특별히 우참찬에 제수하고는 교서를 내려 불러들이니, 공이 상소를 올려 사직하기를, “신이 늙어 물러난 몸으로 다시 도성 문 안으로 들어갔던 것은 단지 조광조를 종사하는 일을 다시 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서원에 사액하는 것조차도 아직까지 허락하시지 않고 있다고 하기에, 아무 말도 못하고 방황하다가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헛된 평판을 인하여 높은 자리에 발탁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이 아무리 못났다고는 하지만, 죽을 날이 가까운 다 늙은 나이에 스스로 비난과 비웃음을 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였는데, 재차 비답을 내려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 들어와 굳게 사직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나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이 아주 많기에 특별히 발탁하여 제수한 것이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공이 드디어 사은하고서 입시하니, 상이 얼굴빛을 바로하고 맞아들여 치도(治道)를 물었는데, 예를 갖춤이 매우 융숭하였다. 공이 나아가 시무(時務)에 대해서 수백 마디를 진달하였는데, 몸이 쇠해 피곤한 탓에 다 진달하지 못하였다. 이에 물러나와 개탄하면서 상소를 올려 다 진달드리려고 하였다. 기묘년(1579, 선조 12) 5월에 구언(求言)함을 인하여 드디어 상소하였는데, 먼저 조종조 이래로 재변을 불러 온 것 가운데 큰 것을 진달하고, 그 다음에 현재 재변을 불러 오게 한 이유에 대해 진달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경연 석상에서 모시었을 적에 늙고 혼모하여 우러러 답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러나서 그때 함께 입시했던 사람의 말을 들으니, 성상께서 ‘지금 조정이 어떠한가?’라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신이 말씀드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당파(黨派)를 나눈다는 설이 있어 이를 근심하는 대신(大臣)과 근신(近臣)이 경연 석상에서 이를 아뢰자, 둘 다 외직에 보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조정이 맑아지지 않고 부박한 의논이 구름처럼 일어나, 심의겸의 무리들을 서인(西人)이라고 지목하고, 김효원의 무리를 동인(東人)이라고 지목합니다. 사류된 자들이 비록 강개하여 이들을 논핵하고자 하나, 위에서는 서로 공격한다고 의심하고, 아래에서는 자기와 당파가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고 의심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에 서로 돌아보면서 걱정하고 탄식만 할 뿐 감히 발언하는 자가 없습니다. ‘동서(東西)’ 두 글자는 바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화의 씨앗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조화시키고 진정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함께 공경하면서 협력하게 만드는 것이 군자다운 의논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성혼(成渾)과 이이(李珥)는 쓸 만한 선비입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조광조는 어려서부터 이미 끊어진 학문에 종사할 뜻을 분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으로써 근본을 삼아 오래도록 노력을 기울여 참공부를 하였는바, 안에 충만하여 밖으로 흘러 넘쳤습니다. 그리고 사문(斯文)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며, 도를 행해 세상을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덕으로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켜서 지극한 다스림을 거의 이룰 뻔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서원에 사액하는 것조차 윤허하지 않고 계시니, 이 때문에 신이 그의 일과 공만을 진달하면서 감히 종사하자고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군정(軍政)과 병기(兵器) 및 서남쪽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였는데, 모두 수천 마디나 되었다. 그러자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한 통을 베껴 써서 안에다가 두었다. 공이 상소의 초고를 작성할 때에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으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대신 서술하게 하였는데, 손님이 와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이 일을 숨기지 않았다. 율곡의 상소가 올라감에 미쳐서 동서분당설(東西分黨說)에 대해 논한 곳이 대략 같았다. 그러자 말하는 자가 율곡을 공격하기를, ‘백인걸을 꾀어서 자취를 숨기고 임금을 기만하였으니 속셈을 알 수가 없으며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상소를 올려서 말하기를, “신은 글재주가 이이(李珥)만 못하여 그로 하여금 문장을 다듬게 하였습니다. 옛날에 정자(程子)가 여공저(呂公著)를 대신하여 상소를 지었으니, 선유(先儒)도 역시 일찍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늙은 신은 머지않아 곧 죽을 것인데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의심을 풀고서 위로하였다. 공은 도봉서원(道峯書院)에 가서 문정공의 옛 자취를 찾아보고는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묘우(廟宇)가 막 완성되자 제생(諸生)들을 모아 놓고는 크게 잔치를 열어 낙성식을 한 다음, 보름 동안 머물러 있다가 돌아왔으며, 녹미와 마초 값을 모두 서원으로 보내 주었다. 9월에 병이 위독해지자, 상께서 듣고는 번갈아 가면서 의원을 보내어 병세를 물었다. 이 달 29일에 경사(京師)의 우사(寓舍)에서 졸하였는데, 임종할 때 정신이 어지럽지 않아 죽을 사람 같지가 않았으므로, 자녀들과 더불어 영결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공은 홍치(弘治) 정사년(1497, 연산군 3) 7월에 태어나 만력(萬曆) 기묘년(1579, 선조 12)에 이르러 졸서하였으니, 춘추가 83세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께서 2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이르기를, “어진 재신이 졸서하였기에 내 마음이 몹시 놀랍고 애통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조제(弔祭)하도록 명하고 부의(賻儀)를 더하도록 명하였으며, 시호를 충숙(忠肅)이라고 추증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강개하고 기절(氣節)이 있었다. 도를 희구하고 어진 이를 사모하였고, 명분과 의리를 갈고 닦았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 위해 몸을 바칠 생각은 흰 머리가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고상한 말과 바른 얼굴빛으로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일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곧은 소리가 한 시대를 진동하였다. 공이 헌납이 되어 계사(啓辭)를 기초할 때 정언으로 있던 유희춘(柳希春)이 보고는 혀를 내두르면서 장하다고 말하였으며, 한림(翰林)으로 있던 조박(趙璞)은 사책(史冊)에 쓰기를, “백인걸은 한(漢) 나라 조정의 급암(汲黯)과 같은 위풍이 있다.” 하였으며, 민제인(閔齊仁)은 글을 읽다가 ‘명령을 전하는 군졸’이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확론이다.” 하였다. 공은 평소에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없어서 한 가지 물품도 자기가 소유하지 않았다. 벼슬살이를 하면서는 마초(馬草) 값을 받지 않았으며, 병조에 있을 적에는 이를 가져다가 가난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의복과 음식은 거칠고 소탈하여 자리에 먼지가 가득 엉겨 붙었는데도 덤덤하게 보았으며, 스스로 휴암(休菴)이라고 호하였다. 말년이 되어서도 오히려 성명(性命)에 관한 학문을 좋아하여 밤낮없이 사색하면서 이를 글로 저술하였으며, 유생들이 찾아오면 그들과 더불어 강론해 밝히면서 스스로 즐거워하여 피곤한 줄도 몰랐다. 공의 전부인(前夫人) 임씨(林氏)는 1남 백유공(白惟恭)을 낳고 죽었다. 후부인(後夫人) 안씨(安氏)는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공에게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섬김에 몹시 효성스러워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물어서 하였다. 공이 뜻을 얻지 못하고 있을 적에는 말을 삼가도록 공을 경계시켰으며,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시대와 천명에 순응하였다. 항상 여러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벼슬살이를 함에 있어 족하면 그칠 줄을 알아서 제때에 물러나야 한다.” 하였다. 전부인이 낳은 아들을 자기가 낳은 아들처럼 잘 길렀다. 공보다 13년 먼저 졸하니, 향년이 55세였다. 자식은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백유항(白惟恒)으로 창평 현령(昌平縣令)이고, 차남은 백유함(白惟咸)으로, 병자년(1576, 선조 9)의 문과에 급제하여 대각(臺閣)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피하지 않고 감언(敢言)하자, 선조(宣祖)께서 “백인걸에게는 아들다운 아들이 있다.”고 칭찬하였으며, 관직이 승지에 이르렀다. 딸은 다섯이다. 장녀는 경력(經歷) 조감(趙堪)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안수기(安守基)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진사 신세영(辛世英)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의령감(義寧監) 이윤조(李胤祖)에게 시집갔고, 오녀는 목천 현감(木川縣監) 임색(任穡)에게 시집갔다. 창평 현령 백유항은 2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백효민(白孝民)으로 현감이고, 차남은 백제민(白悌民)으로 생원이며, 장녀는 예조 정랑 김기원(金期遠)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사인(士人)의 처(妻)가 되었다. 승지 백유함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녀의 남편인 김흥록(金興祿)은 바로 나의 숙부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숙모는 지금 나이가 80여 세인데도 아직 아무런 병이 없다. 장남은 백해민(白海民)이고, 차남은 백선민(白善民)으로 현감이고, 삼남은 백신민(白信民)으로 도사(都事)이고, 사남은 백현민(白賢民)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 장군(折衝將軍)이고, 오남은 백헌민(白憲民)이다. 경력 조감의 1남은 첨정(僉正) 조의도(趙毅道)이고, 1녀는 현감 성문준(成文濬)에게 시집갔는데, 우계 선생(牛溪先生) 성혼(成渾)의 아들이다. 신세영의 1녀는 진사시에서 장원한 김의원(金義元)에게 시집갔다. 안수기의 2남은 안건(安鍵)과 안호(安鎬)이고, 2녀는 이경진(李景震)과 정상의(鄭尙義)에게 시집갔다. 의령감 이윤조의 1남은 첨정 이춘영(李春英)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1녀는 조대굉(趙大宏)에게 시집갔다. 목천 현감 임색의 1녀는 현감 이중기(李重基)에게 시집갔다. 내외(內外)의 손자와 증손자는 모두 170여 명으로, 대사성 신민일(申敏一), 승지 이시해(李時楷), 우윤 이시매(李時楳), 동지중추부사 이행건(李行健), 우의정 이행원(李行遠), 장령 신상(申恦), 정언 정언벽(丁彦璧), 한림 조사기(趙嗣基) 등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현달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일일이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묘소는 양주(楊州) 석적리(石積里) 묵방촌(墨坊村) 사좌(巳坐)의 언덕에 있는데, 참판공의 묘역에 있으며, 판서공의 묘에서 남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있다. 정부인(貞夫人) 안씨는 부장(祔葬)되었다. 우계 성 선생이 공의 행장(行狀)을 찬술하였으나, 신도비(神道碑)는 미처 세우지 못하였는데, 이시해가 호백(湖伯)이 되어 돌을 떠서 다듬었다. 공의 손자인 백신민, 백현민 등이 숙모(叔母)의 뜻으로 나에게 신도비명을 지어 주기를 요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선생의 행장이 이미 상세하여서 모두 다 말하였는바, 만대토록 새겨 전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어찌 비석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다가 한 마디 말을 덧붙이겠는가.” 하였다. 그러면서 재삼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드디어 선생이 지은 행장을 인해서 짓되, 글자 수를 줄여 새기기에 쉽게 하였으며, 이어 명을 지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군자가 학문을 함에 있어선 / 君子之學 연원이 있는 것이 귀한 법이네 / 貴有淵源 돌아가서 의지할 곳을 얻으면 / 得其依歸 도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네 / 道之所存 온 정성 다하였던 백공께서는 / 竭竭白公 천성에 도달할 뜻을 품었네 / 志躡天根 성균관서 공경스레 스승 모셨고 / 摳衣國庠 스승의 집 곁에 집을 지었네 / 築室師門 조정에 나아감에 미치어서는 / 逮乎登朝 사간원서 직분을 다하였다네 / 盡職薇垣 천만 명도 혼자서 대적하여서 / 千萬吾往 한 마디 말로 간흉 들이쳤다네 / 誅奸一言 북쪽의 변방 땅에 유배를 감에 / 投荒塞北 몸은 비록 굴했으나 이름 높았네 / 身屈名尊 권세 높던 간흉이 죽은 뒤에는 / 權兇旣斃 거룩하신 임금께서 등극하셨네 / 聖主臨軒 어진 사람 찾아서 등용시킴에 / 渴賢任耈 조정으로 부르는 명 자주 내렸네 / 召命頻繁 재신의 반열에 뛰어오르고 / 超升九列 크나큰 임금 은혜 거듭 내렸네 / 荐被洪恩 뜬소문 갖가지로 쏟아져 나와 / 百車浮言 악기를 울리듯이 화답하였네 / 和唱篪壎 공께서는 뒤도 아니 돌아보시고 / 公邁不顧 훌쩍하니 시골로 떠나가셨네 / 浩然丘樊 스승을 높이려는 한 가지 생각 / 尊師一念 끝끝내 잊어버릴 수가 없었네 / 終不可諼 지성이면 반드시 감동하는 법 / 至誠必動 남긴 한을 삼켜 버릴 수가 없었네 / 遺恨莫呑 죽은 뒤에 공이 한 말 행해졌으니 / 言行身後 구천에서 두 눈을 감았으리라 / 瞑目九原 공께서 착한 행실 쌓으셨기에 / 公積其善 그 복이 자손에게 흘러 넘쳤네 / 福流子孫 벼슬아치 줄줄이 연이어 나와 / 簪組蟬聯 귀하게 된데다가 번성하였네 / 旣貴且蕃 신도비명 비석에다 새기어서는 / 文追刻石 뒷날의 후손들을 권면하노라 / 勗于來昆
贈左贊成諡忠肅白公神道碑銘
國朝名賢之輩出。莫盛於恭僖王改玉之後。時則有若靜菴趙文正先生。與我先祖爲道義之交。倡明性理之學。一世共師宗之。休菴白公。靜菴之高弟也。始居太學。我先祖爲祭酒。進諸生講學。講畢。公執冊獨留。從容問難。益聞義理之奧。遂就靜菴宅傍。構書室而學焉。公諱仁傑。字士偉。其先出於松京。徙籍水原。高麗侍中景臣之後。政堂文學天臧七世孫也。考諱益堅。孝友正直。治經學有大節。薦爲王子師傅。早卒。後以公之貴。追贈吏曹判書。祖諱思粹。承文院參校。贈禮曹參判。曾祖諱效參。司憲府持平。贈承政院都承旨。妣丹陽禹氏。司直從殷之女。高麗侍中玄寶之後。爲判書繼室。生二男。公其季也。生未期月而判書棄世。幻穎異。孝友出天。稍長。力學自立。慨然有求道之志。事母夫人無違。事兄如嚴父。燕山君在位荒亂。撤民家以廣宮室。中使至公家。公年八歲。出而應對如成人。中使異之曰。吾當免爾家。竟不得免焉。母夫人僦屋食貧。執女工以爲生。有時達夜。公必侍坐。夫人每韜燈假寐。誘令先寢。己卯禍作之後。公痛斯文之不幸。往遊楓岳。歷年乃還。謝絶交遊。閉門靜坐。居數月。友人愼居寬見之。驚曰。君容貌辭氣大異昔時。何修而致是乎。大夫人年益高。家益貧。公遂治擧子業。年二十五。中辛卯司馬。丁酉。登文科。時輩詆以己卯人。分館成均三年。始薦入藝苑。故事。朝廷有除拜。則史官詣政廳。書其得失。久廢不擧。公執筆往唯謹。銓官甚憚之。辛丑。以禮曹佐郞。爲養乞外。出宰南平。建書堂于四境。頒廩課學。月朔親到勸講。均賦薄斂。視民如子。決訟平正。不用請托。一道難斷之訟。皆就決焉。官廨倉厫之破壞者。葺而新之。役不及民。捐俸集事。民皆嘆服。方伯以治行第一聞。上命陞資以褒之。爲大夫人張樂設宴。令子孫。迭前爲壽。佳辰令節。板輿遊觀。迎致親舊。慰悅慈顏。甲辰。以獻納召。忌之者言於上。歸舊任。乙巳。拜持平。轉戶曹正郞。是年七月。仁廟賓天。八月。拜獻納。文定王后降密旨于尹元衡。使除去尹任,柳灌,柳仁淑等三人。於是鄭順朋,李芑,林百齡,許磁詣闕直啓。竄任罷灌遞仁淑。公謂同列曰。以密旨罪人。不正甚矣。吾將廷爭之。聞者皆縮頸。無敢應。公獨啓曰。國家事。當出於光明正大。今內降密旨。罪尹任等三人。而不廷議。不列罪名。外戚奉密旨行事。何以示後世。元衡承順內旨。使國家事。不出於光明正大。大司憲閔齊仁。聞內旨之下。伺候於二三宰相之家。有同傳令軍卒。諸臺諫。逡巡觀望。皆失言責。請俱治罪。文定震怒。下公于獄。事將叵測。鄭順朋之子。諫其父曰。白某忠直。今若見殺。父將得罪萬世。順朋疏救之。文定霽威。公遂得釋。歸坡州田舍。丁未秋。鄭彥愨取良才驛壁書上之。書曰。女主執政。奸臣弄權。國之將亡。可立而待。朝廷因論乙巳罪人。或死或流。公謫安邊府。翌年三月。大夫人以疾卒于京。公在謫中。號擗服喪。辛亥。王世子誕生。有大赦。公蒙宥歸坡。斗屋蕭然。生事益薄。唯以閑淡自適。每中夜。誦太極圖說,易,四書。不見愁居懾處之容。乙丑夏。元衡敗死。公卽復官。明年。陞至繕工正。丁卯。拜楊州牧使。時世宗皇帝崩。而明廟升遐。三詔使出來。供億之費。當賦於民。公曰。民不可重困也。出庫米以充用。居數月。治化大行。民歌之曰。白雪之白。與君同白。心乎愛矣。胡不爲傑。去官。樹碑而頌其德。宣祖大王初卽位。求賢甚急。七月。以校理召公。八月。陞直學士。九月。特授同副承旨。例陞右副。以疾遞。戊辰正月。拜吏曹參議。遷大司諫。仁順王后臨朝。問群臣以垂簾久近。大臣對曰。期月可矣。公進曰。嗣君不至幼沖。女主不可以久聽政。仁順不悅而罷。未幾。撤簾。公首爲上進箚曰。趙光祖以傑出之才。闡明程朱之學。興起斯文。得君致理。庶幾復見二帝三王之盛。而姦臣南衮,沈貞等。肆其鬼蜮。竟致冤死。朝野之痛。久而彌新。當今臨御伊始。四方風動。國論不可以不定。士習不可以不正。追奬眞儒。贈以高官美諡。從祀文廟。則豈不爲淸時之盛擧乎。又曰。人主一心。朝廷之本也。古之聖王。必先正厥心。以立其本。所謂精一執中。卽其學也。體精一之道。皇建有極。則表端影正。群下取則。莫不精白一心。丕應徯志矣。凡累百言。上答曰。陳戒之辭。其敢忘諸。當置座右。以自警焉。五月。復拜大諫。德興大院君夫人之小祥。朝廷議遣祭未決。公進言。禮緣人情。殿下雖入繼大統。私恩不可廢。宜遣祭。以伸至情。上從之。法官以爲不可。駁遞。轉工曹參議大司成。遂歸坡州。以兵曹參知大司諫。再徵之。皆不起。己巳正月。特拜大司憲。再上章辭免。上手札敎曰。卿忠誠。可以貫日月。節義。可以陵氷霜。宜速赴召。公乃趨朝。移樞府。又拜大憲者再。參判工,兵兩曹。兼經筵禁府之職。庚午。天旱。求言。公上疏請減進上貢物。除一族切隣之弊。禁列邑無名之稅。且曰。殿下旣命疏放滯囚。今日之冤。孰有大於乙巳,己酉罪籍者乎。請還給籍沒。悉復職牒。贈領議政趙光祖。橫罹讒口。不得考終。而流風遺澤。沒世愈著。丕闡絶學之功。優於鄭夢周,金宏弼遠矣。使得從祀。則足以矜式多士。裨益風化矣。當今人物。無出李滉之右。如欲圖治。非委任斯人則不可。上多採用之。還給乙巳,己酉籍沒貲產。賢士之在罪籍者。伸雪收敍。是年冬。拜副提學。辛未夏。又拜大憲。公洞達無城府。於稠人廣坐中。每道朝貴得失。不少回互。人益憚之。隣有李元慶者。時來陪話。忽有飛語。指元慶移書戚里言。白公將論朝貴。願與君協力。洛下喧動。公聞之曰。吾心事如靑天白日。不容於世。固其所也。恨我不早退耳。卽棄官而歸。其後義州牧使郭越上疏言。白某謀陷士林。不售而退。上怒曰。白某精忠貫日。而郭越敢爲此論。欲究問。大臣不可而止。公家無儋石之儲。資官糶以度朝夕。監司尹根壽以貧窶聞。上特命周急者再。公分與鄕黨親舊。上章謝恩。因及趙文正公從祀之意。先是。楊州牧使南彥經。立靜菴書院於道峯山下。公欲詣闕。請從祀及賜額。戊寅七月。力疾入城。聞書院儒生已請額而上不許。卽還家。大臣聞公之入。白上除奉朝請。而公已歸矣。上特除右參贊。下書徵之。公上章辭曰。臣以老退殘齡。再入脩門。只爲申請趙某從祀。竊聞書院賜額。尙阻兪音。彷徨悶嘿而歸。豈意因緣觀聽。遂叨峻擢。臣雖駑劣。不欲以晩節餘生。自取譏笑。再批不許。乃入朝控辭。上曰。卿弼違弘多。肆特超授。勿辭也。公遂謝恩入侍。上動容延問。禮意甚隆。公進陳時務數百言。衰憊不能盡述。退而慨歎。欲具疏畢陳。己卯五月。因求言。遂上疏。先陳祖宗以來所以召變之大者。後及當今致災之由。又言。臣前侍經席。老耄昏暗。不能仰答。退而聞同時入侍者之言。聖敎有曰。今時朝廷何如。此臣所欲言者也。臣竊聞有沈義謙,金孝元分黨之說。大臣,近臣有憂之者。啓於經席。兩出補外。然猶朝著不靖。浮議雲興。義謙儕輩。指謂之西。孝元儕輩。指謂之東。爲士類者雖欲慷慨論劾。而恐上疑其相攻擊也。下疑其斥異己也。相顧憂歎。莫敢發言。東西二字。是亡國之禍胎也。必欲調和鎭定。使之同寅協恭者。其君子之論乎。又言成渾,李珥爲可用之士。又言趙光祖自少奮志絶學。以孝悌忠信爲本。眞積力久。充於中而溢於外。以興起斯文爲己任。以行道濟世爲己責。以德化人。幾成至治。而書院賜額。亦不允許。此臣所以只陳事功。而不敢以從祀爲言也。又言軍政器械。西南兵事。凡數千言。上優答之。書其一通。而置之內。公草疏時。使栗谷李先生述己意。客至談說。亦不隱。及栗谷之疏上。論東西處略同。言者攻栗谷。誘白某。匿跡欺君。詭祕不直。公乃疏言。臣文墨不如李珥。使修潤其辭。昔者。程子代呂公著作疏。先儒。亦嘗爲之。老臣將死。不敢欺罔。上釋然慰諭。公往道峯書院。俛仰文正公舊迹。爲文祭之。以廟初成。會諸生。大宴以落之。留半月而還。祿米騶直。皆歸之書院。九月。疾篤。上聞之。醫問交道。是月二十九日。卒于京師寓舍。臨終。神思不亂。無怛化之意。無一語與子女訣。公生於弘治丁巳七月。至是萬曆己卯而歿。春秋八十有三。訃聞。上輟朝二日。曰。賢宰卒逝。予極驚慟。命弔祭而加賻。贈諡曰忠肅。公爲人慷慨有氣節。慕道希賢。砥礪名義。忠君許國之念。白首不渝。危言正色。指斥時忌。無所顧藉。直聲振一時。獻納草啓時。正言柳希春見而吐舌曰。壯哉。翰林趙璞書諸策曰。白某。有漢廷汲黯之風。閔齊仁讀至傳令軍卒之語。曰。誠確論也。公平居。無嗜好。未嘗畜一物爲己有。居官不受騶直。在兵曹。取以施諸親舊之貧者。服食麤疏。凝塵滿席。而視之泊如也。自號休菴。晩年。猶喜性命之學。晝思夜索。輒述于文。儒生來訪。與之講明。自以爲樂而不知疲也。公前夫人林氏。生一男惟恭而卒。後夫人安氏。文成公之後也。歸于公。事姑極孝。事無大小。悉稟命。公在明夷。戒公謹言。通曉大義。順時委命。嘗語諸子曰。爾輩仕宦。當知止足。急流勇退可也。撫養前夫人之子如己出。先公十三年而卒。享年五十五。子男二人。長曰惟恒。昌平縣令。次曰惟咸。登丙子文科。歷揚臺閣。敢言不避。宣祖稱之曰。仁傑有子。官至承旨。女五人。長適經歷趙堪。次適安守基。次適進士辛世英。次適義寧監胤祖。次適木川縣監任穡。昌平二男五女。曰孝民。縣監。曰悌民。生員。女長適禮曹正郞金期遠。餘皆爲士人妻。承旨五男一女。長女壻金興祿。卽我叔父。早世。而叔母今年八十餘歲。猶無恙。次男海民。曰善民。縣監。曰信民。都事。曰賢民。武科折衝。曰憲民。趙經歷一男。僉正毅道。一女。適縣監成文濬。牛溪先生之子也。辛世英一女。適進士壯元金義元。安守基二男。曰鍵。曰鎬。二女。李景震,鄭尙義其壻也。義寧監一男。曰僉正春英。以文章名於世。一女。適趙大宏。木川。一女。適縣監李重基。內外孫,曾。凡一百七十餘人。大司成申敏一,承旨李時楷,右尹李時楳,同知李行健,右議政李行遠,掌令申恦,正言丁彥璧,翰林趙嗣基。皆以文科顯。餘不能盡記。公之葬。在楊州石積里墨坊村巳坐之原。參判兆次。判書南五里。貞夫人安氏祔。牛溪成先生撰公之行狀。而神道則未及碑也。李時楷爲湖伯。伐石以營之。公之孫信民,賢民等。以叔母之意。徵余銘。余曰。先生之狀。旣詳且盡。足以不朽於萬世。奚以碑爲。且余何敢贊一辭於其間哉。讓之至三而終不獲。遂因先生行狀。而約其字。使易於鑱。繫之銘。銘曰。
君子之學。貴有淵源。得其依歸。道之所存。竭竭白公。志躡天根。摳衣國庠。築室師門。逮乎登朝。盡職薇垣。千萬吾往。誅奸一言。投荒塞北。身屈名尊。權兇旣斃。聖主臨軒。渴賢任耇。召命頻繁。超升九列。荐被洪恩。百車浮言。和唱篪塤。公邁不顧。浩然丘樊。尊師一念。終不可諼。至誠必動。遺恨莫呑。言行身後。瞑目九原。公積其善。福流子孫。簪組蟬聯。旣貴且蕃。文追刻石。勖于來昆。 |
가족 관계
조부 : 백사수(白思粹)
첫댓글 백인걸(白仁傑)-삼남:백유함(白惟咸) -손자:현민(白賢民)-----저는 14세손 며느리입니다...
홍살문 교체 비용이 일천오백만원이며 전사청은 십오억정도.....
부지가 약 8,265(m²)
매년 봄.가을 4월 첫주와 음력 8월 첫주에 행사...
달력 1부에 3000원 기본이 1000부 택배비 1300원 정도...
그런데 이 달력을 받는순간의 감동이란 말로 표현이 안됩니다...
동생집의 가계도 인가봐// 대가족이네?
안녕하세요
저희 본가 파조 사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