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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4 -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 이전인 이슬람시대의 시리아!
1. 고대 이슬람 시대
마호멧이 이슬람교를 창시한후 핍박을 피해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주하니 헤지라인데 마호멧은
세력을 길러 630년에 메카를 점령한후 죽으니.... 선거로 뽑힌 후계자들을 칼리프라고 하는데, 아부
바르크 - 오마르 - 오스만에 이어 알리가 4대 칼리프에 오르자 내분이 생겨 암살당하고, 수니파라고
불리는 우마이야가 권력을 잡은후 시리아 다마스크스를 수도로 661년에 "우마이야 왕조" 를 세웁니다.
당시 동로마 비잔틴제국 지배하에 있던 시리아는 7세기 초반 사산 제국의 점령기를 지나 634년
부터 이슬람 정통 칼리프들인 아부바르크와 오마르 및 오스만등이 집권한 라쉬둔 칼리파조
의 침공에 직면하였으니, 그해 남쪽의 다마스쿠스가 점령되었고 636년엔 북쪽 에메사(홈스)
의 함락과 더불어 야르무크 전투 후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는 시리아를 포기하고 철수 합니다.
마침내 637년 4월 예루살렘을 함락한후 이슬람 제국군은 세 방향으로 흩어져 진군했는데 총사령관
아부 우바이다 아미르는 전임자이자 야전 사령관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와 오론테스 강을 따라
북상하였으니 6월 칼키스를 손쉽게 접수한 아부 우바이다는 8월 베로이아(알레포) 를 포위합니다.
포위는 별다른 공성전 없이 2개월간 이어졌고 마침내 10월 도시는 항복하였으니 도시는 헬라
(그리스)식 "베로이아" 대신에 현지 이름인 "할랍(알레포)" 으로 돌아왔고 그 직후 수비대장
요아킴은 4천의 병사들과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으며, 뒤이어 할랍의 북쪽 거점인 아자즈 점령
시에 활약하는데, 10월 말엽 안티오크 역시 항복하니 "시리아는 이슬람 제국의 땅" 이 됩니다.
할랍(알레포) 은 이미 532년을 끝으로 기독교 주교에 대한 기록이 전무했음에도
다수의 기독교도들이 평화롭게 거주하였으며.....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와
다음 압바스 왕조를 거쳐 10세기 무렵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안티오크와 할랍 사이의 로마 비잔틴 시대의 빌라들은 안티오크 쇠퇴와 무역로
의 변화 등을 겪으며 유령도시가 되어 현재에 이르며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할랍은 제국의 중심인 시리아의 주요 도시 중에 하나로써 안정과 번영을 누립니다.
750년에 바그다드의 이슬람 압바스 조가 우마이야 조의 14대 칼리프인 마르완 2세 의
군대를 격파해 90년간 이어진 우마이야 왕조를 멸하고 시리아를 장악하자 동쪽에서
온 후라산 군대가 시리아에 군정을 실시했으니 그들의 가혹한 통치에 대해 시리아에선
킨나스린 총독 아불 와르드 마즈자 이븐 알 카우싸르를 필두로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발리스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여인들이 압바스조의 병사들에게 희롱당했다는 소식에
봉기한 마즈자는 무아위야 1세의 직계인 아부 무함마드 지야드 수피아니와
합류하였고 할랍(알레포)에서는 지야드의 조카 알 압바스 이븐 무함마드가 거병합니다.
그러나 압바스조의 반격은 신속했으니 시리아 총독 압둘라 이븐 알리가 750년 말엽 마즈자
를 전사시켰고, 지야드는 팔미라를 거쳐 사막으로 도주했으며 할랍의 알 압바스
역시 자지라 총독 압둘라(후의 알 만수르)가 파견한 토벌군에게 진압되었으며.....
이후 압바스 조의 통치는 150여년간 이어지다가 9세기 후반에 재차 혼란기가 도래합니다.
750년에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조를 멸하고 바그다드에 도읍한 압바스조가 150년후 900년
경에 들어 힘을 잃자 이란에서 사만왕조, 이집트에서 시아파 파티마왕조 그리고 이라크
에서는 부와이조가 세워지니 바그다드의 압바스조 칼리프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게 됩니다.
이 무렵에 할랍(알레포)의 강 건너편인 자지라에서는 동로마 시대 부터 거주하던 아랍
부족인 바누 타글립이 득세했으니.... 본래 기독교를 믿었던 이들은 9세기 무렵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에 압바스 조의 중앙 집권에 반발하여 수차례 반란을 일으킵니다.
2. 함단 왕조
함단 가문이 일으킨 반란은 바그다드의 압바스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가문의 일원인
후세인 이븐 함단이 칼리파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며 모술 총독으로 봉해졌으니,
이후 바그다드의 권력 투쟁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로잡혀 처형되었지만
그 동생인 압둘라는 승자의 편에 선 덕에 925년에 모술 총독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929년 모술 총독 압둘라는 칼리파 계승 분쟁에 개입했다가 살해되었고 6년간의 내분 끝에
그의 장남 하산이 집권하였는데...... 942년 칼리파 알 무타키가 바그다드의 내분을
피해 피신해오자 하산은 동생 알리와 함께 바그다드를 점령해 칼리파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공로로 형제는 칼리파로 부터 각각 나시르 앗 다울라(왕조의 방어자) 및 사이프 앗 다울라
(왕조의 검)이란 라캅을 하사받았으며..... 이후 동생 알리는 튀르크 장군 투준과 와시트를
수복했는데 봉급 지불을 미루다가 결국 후자의 반란에 직면하여 형과 함께 모술로 돌아갑니다.
이후 시리아로 시선을 돌린 하산은 사촌 후세인을 파견했고 그는 944년 2월에 익시드 왕조로 부터
할랍(알레포)을 점령하였는데 그 무렵 칼리파가 재차 모술로 피신해오자 튀르크의 투준이 북진해
두차례에 걸쳐 하산을 격파하고 모술을 점령하니.... 형제는 칼리파와 라카로 도주하는데 하산은
이라크에 대한 불간섭 및 350만 디르함의 연공을 낸다는 조건으로 모술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타협에 분노한 이슬람 칼리파는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익시드 왕조의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가 북상하자, 함단 군대는 라카와 할랍에서 철수하였으며 다만 무함마드는 칼리파가
이집트 체제 제안을 거절하자 회군했고 칼리파는 바그다드로 돌아갔다가 투준에게 폐위됩니다.
한편 이라크 원정 후에는 잠자코 지내던 알리는 형의 지원 하에 이집트 군대의 철수 직후
시리아로 향하였으니 이집트 익시드 왕조의 알레포 총독 아불 파스 우스만은 동맹인
바누 킬랍의 배신 소식에 저항을 포기하였고 944년 10월에 알리는 할랍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로써 시리아 북부와 자지라에 걸쳐 형제가 경영하는 함단 왕조가 세워졌으며, 이후 알리는 시리아
통일을 위해 남하했으나..... 이집트의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가 친정에 나서자 대패하게 됩니다.
945년 10월 현상 유지 조건으로 휴전을 맺었는데 그럼에도 이듬해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알리는 재차
남하하지만 이집트의 실권자 카푸르의 반격에 연패하고 947년 7월에는 할랍까지 점령을 당합니다.
장거리 지배의 한계를 느낀 이집트의 카푸르는 알리와 945년 때의 휴전을 갱신하고 철수하니 할랍을
되찾은 알리는 955년 까지 바누 칼브 등을 위시한 아랍 부족들의 반란을 강경 진압하며 내부를
결속했는데, 934년 말라티야, 949년 에르주룸을 수복하는등 동로마 '제국의 역습' 이 가시화 됩니다.
모술에 있던 때부터 말라티야, 아르메니아 방면 원정에 나섰던 '사이프 앗 딘' 알리는 할랍
(알레포)을 거점으로 946년 동로마 영토에 대한 습격을 재개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동로마 군대의 반격에 알리는 연패하였고..... 이에 950년 대군을 모아 카파도키아를
약탈했지만 회군 도중 동로마 장군 레오 포카스에게 8천의 전사자를 내는 대패를 당합니다.
그럼에도 동로마측 평화 제의를 무시하며 습격을 지속하던 알리는 953년 마라쉬 전투
에서 동로마 대군을 격파하였으며 이후 2년간 동로마군의 반격을 막아낸 알리는
국경 성채들을 재건하였으며....... 955년 마라쉬 전투에서 부상당한 동로마 사령관
바르다스가 해임되고 그의 장남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동로마 사령관으로 부임합니다.
956년 봄, 재차 습격에 나선 알리는 요안니스 치미스케스 휘하 동로마 군의 매복에
걸렸으나 싸워 이겨냈지만 동시에 레오 포카스가 시리아를 침공해 함단 군대를
격파하고는 그 장군인 알리의 사촌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957년에는 알리가
친로마 세력을 숙청하는 동안 니키포로스가 국경 성채 하다스를 파괴하였습니다.
958년 요안니스는 다라를 점령해 함단 대군을 격파하였고, 알리가 반격에 나섰지만
라반 전투에서 패했으며 960년, 니키포로스가 크레타 수복으로 부재한 틈에 알리
는 카파도키아를 습격했는데 회군 도중 레오 포카스의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습니다.
알리는 간신히 3백의 잔존 병력을 수습해서는 도주하는데...... 961년에 재차
킬리키아 정복을 개시하였고 이듬해 알리는 결국 킬리키아를 포기 합니다.
마침내 962년 가을, 마라쉬를 점령한 동로마의 니키포로스는 7만 대군과 할랍으로 진격했으니
12월 할랍(아레포) 외곽에서 마지막 함단 군대를 격파한 니키포로스는 저항하는
시타델을 버리고는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후에 1만의 포로를 붙잡아 의기양양하게 회군합니다.
알리는 동로마 비잔틴군대에 파괴된 수도에 킨나스린의 난민들을 들이는 것 외에 할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 부관 카르쿠야에게 할랍을 맡기고 제2의 수도인 마야파리킨으로 물러납니다.
3. 동로마와 이집트 사이에 줄타기
963년, 니키포로스가 동로마 황제로 즉위하는 틈에 알리는 킬리키아를 수복하였고 나아가 이코니움
(콘야)까지 습격하니 이에 니키포로스의 후임인 요안니스가 반격에 나서 킬리키아의 함단 군을
격파하였고 965년 타르수스를 점령하며 킬리키아를 평정한후 카르마트군이 시리아를 습격합니다.
디즈바리등 킬리키아 출신 아미르들이 안티오크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할랍(알레포)을 점령
하는 등 난관은 이어지니.....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966년 알리는 들것에 실려 할랍으로 돌아옵니다.
알리는 바누 킬랍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였지만 동로마 군이 재침해오자 샤이자르로 도주하니
동로마군은 시리아 북부를 약탈한후 로마측에 전향한 안티오크 총독과 회군하였으며 그 후에야
할랍으로 돌아온 알리는 그곳에서 967년 2월에 병사하자 아들 샤라프는 치세의 시작부터 홈스
총독인 숙부 아부 피라스의 반란에 시달렸고 968년 후자가 사망할 때 동로마 군이 침공해 옵니다.
샤라프는 재상 카르쿠야의 조언대로 홈스로 피신했는데, 후자는 스스로 할랍을 장악했고 그틈
에 동로마 장군 페트로스는 969년 10월 안티오크를 점령하였으며 970년 1월에는 할랍에
입성하니 카르쿠야는 동로마 봉신이 되어 연공 70만 디르함을 내는 조건으로 도시를 유지합니다.
봉신이 되어 동로마 총독으로 평화를 유지하던 카르쿠야는 975년 부관 바크주르에게 폐위
되는데, 2년후 샤라프는 바누 킬랍의 도움으로 후자를 패배시키고 할랍을 되찾습니다.
이미 취약해진 국가 함단왕조에서 샤라프가 할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으니 북쪽의 동로마 외에도
남쪽에서는 이집트의 익시드 왕조를 대체한 파티마 왕조가 북진하고 있었고 동쪽에선 부와이
왕조가 자지라를 노렸으니 979년 그는 모술을 장악한 부와이 왕조에 복속해 혼란기
도중 모술에게 잃은 영토를 돌려받고 칼리파로 부터 라캅 '사드 앗 다울라' 를 하사 받습니다.
하지만 981년 동로마 군이 할랍에 당도하자 재차 그에 복속했으며 이에 983년 파티마군이 할랍
을 공격했지만 동로마 장군 바르다스가 개입하자 철수하였고 바르다스는 샤라프에게 반기를
든 홈스를 점령하였고..... 이를 돌려받는 대가로 샤라프는 연공을 2만 디나르로 올려야 했습니다.
그러던 986년에 이집트의 파티마군이 북상하자 샤라프는 재차 동로마에 대한 연공을
거부하였고 바르다스가 침공하자 보복으로 할랍 인근 성 시메온 성당을 파괴했으나
동로마-파티마 휴전이 추진되자..... 샤라프는 다시 기존의 조건대로 전자에 복속 합니다.
하지만 986년 말엽 바르다스가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 반란을 일으키자 샤라프는
그를 원조하며 3년간 이어진 내전동안 평화를 누렸는데 그러던 991년, 재차 할랍을 노린
파티마군을 동로마령 안티오크 총독 미카일의 도움으로 격퇴한 샤라프는 그해 12월
병사하였고 아들 사이드 앗 다울라가 계승하였지만 재상 룰루가 실권을 지닌 상태였습니다.
룰루가 친로마 경향을 이어가자 992년 파티마 장군 만주타킨이 할랍을 포위하였고 미카일 원군도 격파
하였지만 할랍은 포위를 견뎌냈고 보급품이 바닥난 만주타킨은 이듬해 철수했지만 994년, 만주타킨
은 재차 할랍을 포위하였고 미카일의 동로마-함단 연합군을 격파하고는 할랍 주변 도시들을 점령합니다.
도시를 봉쇄하던 만주타킨은 995년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친정에 나서자 철수하는데 사이드
앗 다울라는 친히 황제 앞에 출두해 엎드렸고... 이에 바실리오스 2세는 연공 의무를 면제해 줍니다.
996년 바실리오스 처럼 친정에 나서려던 파티마 칼리파 알 아지즈가 병사하며 할랍은 안정을 회복
할 수 있었으니 실권자 룰루는 파티마 칼리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며 중립 외교를 추구하였는
데.... 998년, 함단 군대는 남쪽의 아파메아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동로마 군이 나타나자 철수합니다.
그러자 도시 아파메아는 이집트 파티마 측에 도움을 청하였고 이어진 아파메아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대패했으며 999년 바실리오스 2세는 재차 침공하여 샤이자르를 점령했으나 1001년 칼리파 알
하킴과 10년 휴전을 맺었고 이듬해 사이드 앗 다울라는 알리와 샤리프의 두 아들을 두고 사망합니다.
재상 룰루는 두 왕자들의 섭정을 자처했는데 1004년 그들을 축출하고 아미르가 되었으며 룰루는 이집트
파티마 조에 복속했음에도 여전히 동로마에 연공을 납부하며 양쪽 모두의 인정을 받았는데 비록
1007년 누마이르 왕조에게 라카를 상실했지만 1008년 룰루가 사망할 때까지 할랍은 평화를 누렸습니다.
룰루의 사후 그의 아들 만수르가 계승하였으며 한편 동로마로 피신했던 사이드 앗
다울라의 동생 압둘라는 마르완 왕조 및 바누 킬랍의 도움으로 할랍에 함단 왕조
를 재건하려 시도하자 만수르는 바누 킬랍을 매수하고 파티마 군대의 도움으로
그를 격퇴하였는데 후자에게 대가로 할랍 시타델을 넘겨준다는 약속을 어깁니다.
이에 1011년 파티마 군은 함단 왕자 샤리프와 북진했는데 마라트 알 누만의 바누 킬랍이
저항하여 후퇴하지만 만수르는 바누 킬랍에게도 약속된 영지를 주지 않았고 1012
년에 그들은 할랍을 봉쇄하자 만수르는 협상을 제안, 부족 지도부를 초청한후 학살합니다.
1014년 여름 할랍을 탈출한 바누 킬랍의 일원인 살리흐 이븐 미드라스가 부족
을 재규합, 할랍 근교의 전투에서 만수르를 사로잡고는 할랍을 포위
했지만 만수르의 동생들이 버텨내자 5만 디나르의 몸값으로 그를 석방합니다.
석방 후 만수르는 파티마 조에 복속하면서도 동로마 측에 도움을 청하는 등 살리흐와의 대립을
이어갔는데 할랍 시타델의 수비대장 파스 알 칼리가 적과 내통한다고 의심하여 제거하려
자 이 모의를 들은 파스가 정말 살리흐와 결탁하였고 1016년 1월 만수르는 동로마에 망명합니다.
이후 할랍(알레포)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함단 왕조의 왕궁이 약탈되었고 부속 도서관의 2만 8천
필사본이 소실되었는데 파스는 살리흐와 파티마 조 중에 고민하던 중 전자에게 설득되었으나
후자의 진격에 칼리파 알 하킴가 하사한 티레 총독위에 만족하고는 1016년 10월에 항복 합니다.
이후 파티크가 총독으로 봉해졌는데 그는 살리흐와 화해하고 파티마 장교들을 축출한 후 자립해
버리자 칼리파 알 하킴은 할랍 원정을 준비했지만 1021년 사라져버렸고 섭정 시트 알 물크는
파티크와의 화해를 가장하며 할랍 시타델 수비대장 바드르를 설득해 1022년 7월에 암살시킵니다.
이후 밀약대로 바드르가 할랍의 총독으로 봉해졌으나 불과 몇달만에 해임되었고.... 파티마 조의
핵심 세력인 쿠타마 베르베르인 무함마드로 교체되었으니 이때부터 기존의 아미르가 부관
에게 시타델을 맡기던 전례 대신 도시의 총독과 시타델 성주가 중앙 정부에 의해 따로 임명됩니다.
다만 무함마드 역시 1023년 4월 해임되었고 그 후임자인 사나드 앗 다울라는 이듬해 7월 병사
하였으니 후자의 동생 사디드 알 물크 투반이 부임하였는데 이내 살리흐가 이끄는 바누
킬랍의 도전에 직면하였으니 1024년 10월 파티마 군을 격파한 살리흐는 다음달 할랍을
포위하였고 두 달간의 공성전 끝에 1025년 1월 성내의 민병대가 배신하며 도시를 점령합니다.
사디드 알 물크 투반은 아지즈 앗 다울라가 세운 요새화 된 궁전과 시타델 에서
버텼지만 각각 3월과 6월 말엽 함락되었는데 시테델이 포위되는 동안 살리흐
는 이집트 파티마 조로 부터 주변 도시인 홈스, 바알벡, 시돈 등지를 점령하였습니다.
4. 미르다스 왕조
시리아 원정 후 바누 칼랍의 살리히는 1025년 9월 할랍(알레포)에 개선하였는데 그는 몸값을 받고
파티마조의 총독 투반을 석방하지만 시타델 성주 마우수프는 처형했고, 이후 살리히는 카이로
에 사절을 보내 칼리파 앗 자히르에게 복속을 표하고 예복을 하사 받으며 평화를 구가 하였습니다.
또한 살리히는 할랍의 기독교도들을 와지르에 임명하고는 무슬림들과의 사안을 공정히
처리하는 등 공명정대한 통치로 지지를 받았으니 이는 기독교도들을 자기 지지 세력
으로 삼는 것 외에도 동로마와의 친선을 위한 것이기도 했으니 내치는 성공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외치는 1029년 5월 살리히(살리흐)는 팔레스타인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랍 부족들을
도와 파티마 군과 맞섰으나 일부가 이탈하니 알 우쿠와나 전투에서 대패하고.... 와지르,
막내아들 등과 함께 전사하니 그의 수급은 카이로에, 몸통은 시돈 방면 길에 전시되었
으며 살아남은 장남 나스르가 기존 후계자였던 동생 티말과 공동으로 알레포를 통치합니다.
한편 살리흐의 전사 후에 파티마군은 바알벡, 홈스, 시돈을 수복하였고 미르다스
왕조는 준드 킨나스린(할랍 주) 으로 축소되자.... 동로마령 안티오크 총독이
로마노스 3세의 인가도 없이 간 크게도 1029년 7월 할랍 정복을 시도하게 됩니다.
할랍(알레포)의 지배자 나스르와 티말은 도중에 매복하여 이를 격파하자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3세는 2만 대군과 친정에 나섰고 나스르는 티말을 할랍(알레포)에
두고는 1천의 바누 킬랍- 누마이르 군과 출정해 1030년 8월 동로마 대군을 격파합니다.
승전 후 나스르는 동생 티말이 할랍을 떠나 있는 틈에 시타델을 장악하고는
단독 군주가 되는데 그는 동로마가 동생 티말을 지지할까 두려워 연공
50만 디르함과 함께 1031년에 재차 동로마 비잔틴 황제에게 복속하게 됩니다.
1036년 동로마 비잔틴제국은 이집트의 파티마 조와 재차 10년 휴전을 체결한 후로
할랍(알레포)에 대해 신경쓰지 않게 되니...... 이후 나스르는 동로마 황제 미카일
4세의 중재 하에 홈스를 할양받는 대가로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에 복속 합니다.
내치에 있어 나스르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인 알 무암말을 와지르로 봉하였고 그는 이어진
전란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수용을 위해 시가지를 확장하였으며 또한 나스르는 기존 할랍 군주들
처럼 궁전에 머무는 대신 시타델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는데 이는 향후 군주들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한편 1033년 파티마령 트리폴리 총독이 히신 이븐 아카르를 점령하자 나스르는 그 건너편
의 히신 알 사프를 요새화했는데, 이는 향후 히신 알 아크라드(크락 데 슈발리에)
가 되었으며 그외에 나스르는 하란의 누마이르 왕조와의 동맹을 강화했고
동생 티말과도 결국 화해하여 그에게 라흐바 등 유프라테스 동안의 영지를 주었습니다.
1038년 봄, 다마스쿠스 총독 아누쉬테킨이 카이로 파티마조의 승인도 없이 북진해오자 나스르는
티말과 함께 그와 대적했으나 텔 파스에서의 두 번째 전투에서 동생이 이탈해 버리니 대패
하고 전사하였으니 그의 수급은 아누쉬테킨에게 보내졌고, 몸통은 하마 시타델에 못박혔습니다.
티말은 할랍을 장악했지만 아누쉬테킨이 북상해오자 사촌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가족들과 라흐바
로 도주하니 1038년 6월 파티마조 다마스커스 총독 아누쉬테킨은 짧은 포위 후 할랍의 항복
을 얻어내며 시리아를 통일하였는데 이후 심복 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다마스쿠스로 돌아갑니다.
그후 파티마 와지르 알리의 사주로 반란이 일어나자 할랍으로 피신하였으나 1042년 1월 그는 상심한
채로 사망하였고, 아내의 영지인 라카에 머물며 파티마 조의 승인 하에 할랍 공격을 준비하던 티말
은 손쉽게 도시를 수복하는데 아누쉬테킨의 용병들이 저항하던 시타델은 7개월 후에야 점령되었습니다.
그동안 티말은 동로마 측에 사절을 보내 재차 연공 납부 및 복속을 표하였고 1045
년에는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의 책봉 역시 받았는데 그러나 2만 디나르
의 연공을 중단하며 후자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048년 파티마 군대
가 북상해 할랍을 포위했지만...... 때마침 홍수로 진영이 붕괴되자 철수를 합니다.
이후 티말은 이집트 파티마조 측과 평화를 수복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049년
리파크 휘하3만 대군이 재차 북상하는데 리파크의 진격이 지연되는 동안 티말은
동로마와 동맹하는 등 철저히 준비하였고 그해 8월 할랍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
에서 파티마 대군을 격파하였으며 부상당한 채로 사로잡힌 리파크는 며칠 후에 사망합니다.
승전후 티말은 포로들을 석방하며 재차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고 티레의 카디가 중재에 나섰으니
1050년 티말이 부인 앗 사디야와 아들을 포함한 사절단을 카이로에 보내 2년치 연공인 4만
디나르를 납부하고 라흐바 할양을 제시하자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는 그의 지배권을 승인합니다.
티말은 동로마와 파티마 양 제국에 연공을 바치며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는데 할랍(알레포)
은 적지 않은 조공 부담에도 불구하고 매우 번영하였으며 많은 건축물들이 지어졌고
시민들 역시 낮은 물가에 만족하였다는데 평화가 유지되던 1058년 8월, 티말은
돌연 파티마 조에 할랍을 넘겨주고 대신 해안가인 베이루트- 아크레 영지를 얻었습니다.
하산 이븐 물힘이 할랍 총독으로 봉해졌는데 반발한 바누 킬랍은 티말의 조카 마흐무드 이븐 나스르
를 지도자 삼아 두차례의 시도 끝에 1060년 9월 할랍을 수복하였으니 이로 인해 카이로에 있던
티말의 영지는 압수되어 하산에게 주어졌고 티말은 할랍으로 돌아가 바누 킬랍 유지들의 지지
를 얻었으니 저항하던 마흐무드는 1061년에 생모인 앗 사디야의 중재로 보상금을 받고 물러납니다.
다만 티말은 이듬해 말엽에 사망하니 그는 라흐바의 독립 영주인 동생 아티야를 후계자로 삼았는데
조카 마흐무드가 반발해 내전이 터졌으니 1063년 7월의 전투는 무승부였고 아티야는 분할안
을 거부하며 북쪽에서 남하하기 시작한 튀르크인들을 고용해 맞섰지만 튀르크인들이 마흐무드
에게로 배신하며 1065년 2차전에서 패하였고 할랍에서 3달간 농성하다가 그해 8월 항복하였습니다.
2년의 내전후 새로운 분할안이 제시되었는데 마흐무드는 할랍과 홈스, 아티야는 기존
라흐바와 라카가 주어졌는데 그러나 1067년 마흐무드가 라흐바 원정을 준비하고
1068년 아티야가 홈스를 공격하는 등 대립은 이어졌으니 다만 후자의 원정 동안
자지라의 우카일 왕조가 라흐바를 점령해버렸고 상심한 아티야는 동로마로 망명합니다.
이집트의 이슬람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쇠퇴하던 11세기 후반, 팔레스타인의 총독이던 아트시즈
이븐 우바크 라는 호라즘 출신 튀르크계 용병이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점거하고는
1071년에 바그다드의 이슬람 압바스 칼리파에게 충성을 서약하며 사실상 독립 하였습니다.
이후 다마스쿠스의 지배자 이븐 우바크는 이집트 본국을 공격하는 모험을 감행하였으나 패배하고
파티마 군대의 반격을 받자 셀주크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자.... 이에 셀주크 투르크의 말리크샤는
1078년에 동생 투투쉬 1세를 파견하니, 다마스쿠스를 포위한 이집트 파티마조 군대를 격퇴한
투투쉬는 1079년에 아트시즈를 감금해 살해했고 시리아 남부는 "셀주크 투르크 영토" 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