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식당 (외 1편)
김성대
그리고 잊기로 한다
밤의 먼 태양 수염 속의 연기들
테이블 위로 궐련이 타고
우리는 잊는다 외투 안쪽으로 묻히는 기침들
웅크린 귓속을 파고드는 모래들
기억을 지우러 온 자들은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다
남은 건 여기뿐인가요.
이곳뿐이네.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어야 하는 귀들로 우리는 동일해졌다
그날 번지는 불길 뒤의 두 눈
피가 불을 멈추지는 못했다
유리종을 깨뜨린 건 종소리였다
흩어진 종소리를 모으면 그날이 멎을까
유리 조각의 눈으로 멀어질 수 있을까
물이 가졌던 얼음의 기억 같은
백야가 왔다
엎질러진 지상의 발자국을 지우는 것이겠지
기억하지 않기 위해 남은 것 같은
서로를 실종하는 것이겠지
이곳을 두 번 잊은 사람은 없네.
두 번 사라진 낙타는 있어도.
종소리의 조각을 귀에 담고 있는 사람이 와서
우리는 그 귀를 파먹었다
—《현대시학》2013년 1월호, 시집『사막 식당』
딸기밭
—향정신史
그해 우리는 그를 기다리며 딸기를 먹었다 우리는 그를 팔베개라고 불렀는데 그의 팔에서 얼굴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우물 냄새라고 했고 누군가는 메아리 냄새라고 했지만 우리는 얼굴 냄새라고 믿었다 그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고집이 셌다
그해 딸기밭은 딸기농사를 망쳤고 우리는 딸기를 먹으며 그를 기다렸다 밤은 조금씩 흘러와서 금방 깊어졌고 그가 오는 걸 놓칠까봐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딸기를 먹었다 고양이들은 전생에서 덜 깨어난 눈으로 밤의 딸기를 바라보았다 전생에서 잃어버린 울음이라도 되는 듯 그 눈에 인기척이 어릴 때가 그가 오고 있을 때라고 우리는 천천히 딸기를 먹고 금방금방 그를 기다렸다
우물 속에서 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휘파람을 불어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안개 속으로 저벅저벅 누군가의 발자국이 메아리처럼 흩어져 있는 이곳은 그의 잠 속이 아닌지 우리는 그의 팔베개를 하고 누워 알알이 묻고 싶었다 안개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는 잠 속에 우리를 놓아두고 혼자 잠을 깬 건 아닌지
그럴 때마다 우리는 딸기알 속의 밤을 깨무는 서로의 뒷목을 바라보며 서로를 눈감아주었다 우리의 암묵 속에서 그는 분명히 오고 있었으므로 눈을 잃은 고양이의 울음이 선명해지는
그해 우리는 딸기밭에 남았고 딸기들은 더 오래 남았다 우리가 무수히 깨물어보아야 했던 시간, 딸기알은 그의 소실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소실점으로 이루어진 시간을 먹으며 기다린 것인지도
누군가는 우리의 원근법이 틀린 것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우리가 처음은 아닐 거라고 했지만 우리는 우리를 모방하지 않았다 누구의 잠을 띄워서든 누구의 얼굴을 괴어서든 그가 오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시집『사막 식당』,《현대시》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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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대 / 1972년 강원 인제 출생. 2005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사막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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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인 첫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시집.
농밀해진 감각적 언어와 선명한 이미지,사물의 본질과 삶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통찰력과 활달한 상상력의 세계
전통 서정의 문법에 기대어 있으나 다소 낯설고 난해한 듯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뿜어내는 시편들."
—출판사 측의 시집 홍보 내용에서 발췌함(독자로서 충분히 동의하기 어려운 홍보 문구).
* 사막의 식당- 이 시집의 표제로 내세운 작품.
* 딸기밭 - 시집 전체를 조망할 만한 시로 보임. 시집 제1부의 두 번째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