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願)의 성취 조건 갖추는 것이 기도 / 수경 스님
간절히 관세음보살을 염(念)하다 보면
바깥으로 흐트러진 마음이 수습되어 독로(獨露)가 됩니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놈이 그대로 드러나고,
바로 그놈을 응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관세음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사람이 합일되는 경지에 이릅니다.
이것이 삼매입니다.
그 안에 모든 문제 해결의 지혜와 덕이 갖춰져 있습니다.
이것이 원의 성취입니다.
세상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마다
안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춰 놓고는 무조건 되기만을 빕니다.
기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기도입니다.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불문(佛門) 안팎을 막론하고 '기도는 하열한 근기의 소유자들이
무턱대고 복 달라고 비는 행위' 라고 오해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식자깨나 들었다는 사람들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에
타력적 기도 행위는 본질을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인과(因果)의 도리에 비추어 볼 때
기도는 비불교적인 신앙 행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견해에 대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하면
불학무식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쉽고,
옳다고 맞장구를 치면 위선이 되거나
불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부정이 됩니다.
사실 '기복 불교'라는 낙인은 비하적 의미로 쓰이고 있고,
이는 불교 외적인 시각에 기인합니다.
근대화 과정과 개발 독재 시절 불교계의 현실 참여,
즉 사회의 모순이나 비리에 대한
공분과 개선 노력의 부족에 따른 평가입니다. 수긍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기복 행위'의 방향과 내용의 오류에 한정되어야 합니다.
'기복' 그 자체는 본질적인 신앙 행위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복은 복덕(福德), 즉 자비를 베풀어
자신의 덕을 쌓는 것을 말하고, 지행(智行)과 겸전해야 할,
깨달음의 세계로 오르는 사다리의 한 축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도 기도에 대한 오해를 부추긴 측면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어느 한 순간에 전광석화처럼 다가와
열리는 신통 같은 것이 아닙니다.
깨닫기만 하면 한 걸음에 천리를 갈 수가 있고,
앉아서 천리를 보는 눈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행력이 깊으면 그러한 경지에 노닐 수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 처는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세계의 실상에 대한 통찰입니다.
연기(緣起)와 공(空)과 무아(無我)를 체득하여
일체의 차별상을 여읜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연대오(廓然大悟)가 아니면 달리 어디에 그런 경지가 있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화두를 타파하여 세계의 실상을 봤다면,
어떤 사람이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여
모든 번뇌 망상을 여의고 관세음보살과 한 몸을 이루어
관세음보살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의 실상과 어떻게 다를 수 있겠습니까.
[능엄경]에서는 염불의 참뜻을,
대세지보살이 초일 월광불(超日月光佛)로부터 들은 바를
석가모니 부처님께 아뢰는 형식으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중생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기억하고 부처님을 염한다면
현생이나 내생에 틀림없이 부처님을 볼 것이며,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하여 어려운 방편을 빌리지 않아도
스스로 참마음을 열 것 인즉,
향수를 바른 사람의 몸에 향기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처음 발심할 때부터 염불로 깨달음을 이루었고,
그 힘으로 이 세상에서 염불하는 사람들을 거두어 정토로 돌아가게 합니다.
[관음경]에는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선남자여, 만약 한량없는 중생이 고뇌를 받을 때에,
관세음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염하면 다 해탈을 얻게 되느니라.
이런 까닭에 염하는 순간순간 끊거나 의심하지 말라.
관세음의 맑고 성스러움은 고뇌와 죽음의 상황에서도 능히 의지처가 되리라."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이다.
믿음은 일체의 선법을 기르기 때문이다."[화엄경]
기도는 믿음의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강을 건너는 자가 사공을 믿듯이,
아이가 어머니를 무한정 신뢰하듯이,
불보살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것이 기도입니다.
원효 스님은 그것을 귀명(歸命)이라고 했습니다.
원효스님은 [기신론소]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명이라는 두 글자는 능히 귀의하는 모습이다.
능히 귀의하는 모습이란 공경하고 순종한다는 것이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명(命)은 목숨의 근원으로, 모든 기관을 총체적으로 제어하는 것이다.
몸뚱이에 요긴한 것으로는 오직 목숨이 주이기에
모든 생명체가 중히 여기는 것으로 이보다 앞설 것은 없다.
이 둘도 없는 목숨을 가지고 가장 존귀한 분을 받들어
신심의 지극함을 나타내기에 귀명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귀명이란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그 까닭은 중생의 육근이 일심으로부터 일어나지만,
그 근원을 등지고 육진(六塵)으로 분주히 흩어지는데,
이제 목숨을 들어 육정을 모두 수습하여
그 근본 일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므로 귀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의 전존재를 불보살님께 던져 불보살님과 일체가 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 일심불란한 삼매의 경지에서 중생심을 조복받고
세계의 실상 을 바로 보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본질이 이러하거늘, 여기에 타력과 자력이 어디 있으며,
현세적 욕망이 붙어 설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미혹에 가려져 있던 불성을 현전시켜 불보살과 일체를 이룬 마음자리에
행과 불행이 또 어디에 붙을 것입니까.
기도의 궁극은 중생심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서산스님께서도 [청허당집]에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불러 흐트러지지 않게 하라.
이렇듯 마음과 입이 상응하면 한 생각 한 소리에
죄업이 소멸하여 수승한 공덕을 성취할 것이다."
출처 : 염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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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로(獨露) : 있는 그대로를 들어내는 것,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