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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이대로 둘 것인가
선진국도 연금제도의 개혁을 시도한 경우 예외없이 정권이 교체되면서 어느 나라 정부도 쉽게 손대려 하지 않는 난제로 꼽히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연금개혁을 하고 난 뒤 정권을 유지한 적은 없으며 전 정권의 희생을 바탕으로 다음 정권에서야 개혁을 추진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적게 내고 많이 받는 수혜자 중심의 고성장 다출산 시대에 만들어진 제도를 일시에 뜯어 고치는 개혁은 대부분 국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등 선진국들은 선거 때마다 연금정책이 선거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1. 연금개혁 해외 사례
유럽에서는 이탈리아가 연금개혁에 실패한 대표적인 국가로 손꼽힙니다. 1919년부터 연금제도를 도입한 이탈리아는 1970년대 이후 기금의 고갈문제가 꾸준히 제기됐으나 정치권에서는 국민에게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연금지급을 위해 국가재정을 한꺼번에 투입하면서 1992년 외환위기를 맞았고 급기야 유럽연합(EU) 통화권에서 축출됐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연금적자가 매년 400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15.7%를 차지할 정도로 이탈리아의 연금개혁은 미완성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는 1994년 중도우파정부가 ‘많이 내고 적게 받는’ 형태로 연금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했다가 노조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정권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여야 합의로 연금개혁을 이뤄 낸 독일과 스웨덴도 진통을 겪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은 급여 수준의 하향 조정, 지급개시연령의 상향 조정 등을 주요 내용으로 1992년 연금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독일통일에 대한 비용 부담 가중과 경기침체에 따른 실업률 상승 등으로 연금재정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노조의 지지로 정권을 창출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사민당 정권은 여야 합의를 전제로 2000, 2001, 2004년 등 3차례에 걸쳐 급여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고쳤습니다. 하지만 2005년 슈뢰더 총리는 연금개혁에 대한 지지층의 이탈로 정권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스웨덴도 급여 축소에 대한 불만으로 집권당이 총선에서 참패(1991, 1994년)하는 유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결국 1985년 시작된 스웨덴의 연금개혁은 모든 정파가 참여한 정당 간 합의를 통해 14년 만에 1998년에야 완성됐습니다.
일본도 3년 전 연금개혁방안을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여당은 연금제도 일원화문제를 앞으로 5년 내에 결론짓고, 향후 급여 수준이 50% 이하로 하락할 경우 개혁 재검토를 약속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제도개혁을 밀어붙였습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입니다. 1987년부터 연금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정치권은 표를 의식해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알랭 쥐페 총리 내각은 1995년 공공부문 연금개혁을 추진했으나 노조의 반대에 부딪쳐 실각하고 말았습니다.
볼리비아를 비롯한 남미 각국도 연금제도 개혁안을 놓고 정권의 운명이 뒤바뀌는가 하면 인기 정책이 계속되면서 국가재정만 나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2. 우리나라 국민연금 실태
국민연금발전위원회는 2003년 6월 재정추계보고서에서 2047년 기금이 모두 고갈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출산율 저하 속도가 빨라지면 2030년경 기금이 고갈될 것이란 분석도 나옵니다. 이는 ‘덜 내고 더 받는 구조’ 때문입니다. 65세부터 평균소득의 60%를 연금으로 받으려면 평균소득의 19.97%를 보험료로 내야 하지만 현재 9%만 내고 있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기금이 고갈되는 2047년 1년 동안, 183조원의 준비금이 있어야 연금을 지급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기금이 고갈되는 해 뿐이 아닙니다. 그 다음 연도부터 정부는 매년 수백조 원의 돈을 마련해야 연금을 지급할 수 있습니다.
정부를 믿고 보험료를 내왔던 수천만 명이 연금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 막으려면 정부는 부족한 기금을 국고나 보험료를 올려 메워야 합니다. KDI는 기금고갈사태를 막으려면 장기적으로 보험료율을 20~40%로 올려야 할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재정고갈문제는 국민연금제도를 불신하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정부는 꾸준히 보험료를 높이고 수급액을 낮출 작정입니다. 정부안대로 해도 기금고갈시기를 30년 정도 연장할 분 기금고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3. 곪을 대로 곪았다
서울 관악구에 사는 강모(37) 씨는 요즘 영세사업자들 사이에서 ‘공포의 노란딱지’라고 불리는 국민연금 가입독촉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강 씨는 2004년부터 운영해 온 인터넷 쇼핑몰이 지난해부터 장사가 부진해 한 달 수입이 80만원이 채 안됩니다. 세 식구의 생계를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강 씨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국민연금은
ü 기금 고갈에 대한 불안
ü 자영업자의 불성실한 소득신고 및 미가입
ü 공무원 연금 등 다른 연금과의 형평성
ü 미숙한 제도 운영
등이 겹쳐 ‘불만 정책 1호’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2003년 6월 정부안이 나온 뒤에도 인기영합에만 치우쳐 입으로만 개혁을 외칠 뿐 이렇다할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4년 대기업에서 부장으로 퇴직한 박모(58) 씨는 하청업체로 인연을 맺었던 중소기업에 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날 때가 몇 년 안 남았지만 더 늙은 후 자식에게 손벌리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60세가 되는 내후년부터 사망 때까지 국민연금에서 매달 75만원(매년 물가만큼 상승)씩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88년에 가입해 20년간 매달 평균 12만1,500원식(회사도 같은 금액 납부)을 낸 반대급부입니다.
박 씨는 행복한 경우입니다. 문제는 박 씨처럼 국민연금에 대해 만족하는 국민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으로 소득이 많아도 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자영업자가 적어도 100만여 명에 이를 것이라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추산입니다.
연금개혁이 늦어지면서 큰 피해를 보는 당사자는 설문조사나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말 못하는’ 우리의 자녀세대입니다. ‘적게 내고 많이 받는’ 현행 제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2040년대에 국민연금기금은 바닥을 드러냅니다. 그래도 정부는 약속한 연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올해 태어난 자녀들이 한창 생상활동을 할 40대에 소득의 20% 정도를 보험료로 내놔야 합니다.
한 달에 200만원을 벌면 국민연금 보험료로만 40만원을 내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이와 별도로 건강보험료, 고용보험료 등 다른 납부금과 소득의 20%가 넘을 각종 세금을 합치면 정부에 내야 하는 돈이 소득의 절반을 훨씬 넘습니다. 이 정도까지 가면 국민도, 나라 경제도 견딜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게 연구기관들의 공통된 분석입니다.
국민연금개혁은 쉬운 작업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만 늦어질수록 훨씬 힘든 작업입니다. 지금과 같은 ‘저부담, 고급여’ 체제에서 연금을 납부해 연금을 타고 있는 중이거나, 곧 타게 될 ‘연금 기득권자’인 50세 이상을 설득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통계청의 장래인구 추계에 따르면 17대 대선이 치러졌던 2002년 말 50세 이상 인구는 전체 유권자의 29.3%로, 다음 대선이 있는 2007년 말에는 35%에 이를 전망입니다. 2012년 대선 때는 40%를 넘어섭니다.
4. 손실 없이 복지 없다
국민연금제도의 최대 맹점은 적게 내고 많이 받는 구조에서 파생되는 ‘재정불안’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당초 국민연금제도가 의도했던 복지사회가 달성될 수 없습니다.
당초 의도했던 복지사회가 달성되기 어려운 이유는 국민연금이 이름과는 달리 국민의 절반 정도만 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 연금개혁특위에 참가한 야당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진정한 연금개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전체 국민연금 가입대상자 3명 중 1명은 미가입 상태입니다. 특히 봉급생활자를 제외하면 지역가입 대상자 2명 중 1명이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중 일부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도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고 있는 자영업자들입니다. 하지만 상당수는 연금부담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순청향대
국민연금은 한국사회가 초단기 급성장 과정에서 간신히 마련한 복지시스템입니다. 유지시키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경험 부족과 사회 각계각층의 이해가 충돌하고 있어 해결이 간단치는 않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김모(38, 경기도 고양시) 씨는 일당이 3~6만원으로 한 달에 버는 돈은 100만원 남짓입니다. 4인 가족 기준 최저생계비인 117만422원에도 못 미칩니다. 현행 제도대로 김 씨가 국민연금에 가입한다면 한 달에 8만1,000원 정도를 국민연금 보험료로 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김 씨는 “지금 벌이로 네 식구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8만원을 어떻게 내느냐”고 반문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03년 12월 기준으로 국민연금 가입 대상자는 1,688만여 명입니다. 이 가운데 국민연금에 가입한 사람은 1,112만여 명(65.8%)이고 나머지는 가입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들 중에는 본인이 선택해 노후를 대비한 사람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스스로를 챙길 수 없는 사람입니다.
특히 영세사업자와 비정규직 근로자 대부분은 국민연금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부산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는 박모(39) 씨는 직원 명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박 씨는 “직원들이 연금 가입을 원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월급이 120만원 남짓인데 10만8,900원 정도의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면 생활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정책의도가 당사자들에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근로자 548만여 명 가운데 국민연금 가입자는 200만 명 남짓으로 가입률은 36%대에 불과합니다.
복지국가의 국민연금제도가 의도하는 주요 기능 중 하나는 계층간 소득재분배 효과입니다. 보통 낸 돈의 2배 안팎을 받고 저소득층은 부담한 돈의 4~7배를 연금으로 받습니다. 그런데도 저소득층의 국민연금 미가입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가장 좋은 노후보장시스템인데 불신을 받기 때문입니다.
월평균 소득이 176만원인 A씨와 80만원인 B씨를 비교해 봅시다. 나이는 같은 40세입니다. A씨는 매월 15만8,400원을 내고 65세 때부터 48만8,660(현재가치 기준)을 받습니다. A씨가 받을 연금은 자신이 낸 돈의 2.35배입니다. B씨는 매달 7만1,100원을 내고 65세 때부터 34만3,160원(현재가치 기준)을 받습니다. B씨의 연금소득은 낸 돈의 3.29배입니다.
현재 A씨의 소득은 B씨의 2배를 웃돕니다. 다른 소득이 없고 연금을 받을 나이가 되면 A씨의 1.4배 정도로 좁혀집니다. 국민연금의 소득재분배 효과입니다. 그러나 B씨가 생계가 어려워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2005년 현재 60세 이상 노령인구 중 국민연금을 받지 않고 있는 비율은 78%입니다. 현행 제도를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40~50년이 흘러도 노인 3명 중 1명은 국민연금의 울타리 밖에 남게 됩니다.
이들 중에는 본인이 경제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국민연금을 무시한 사람도 있고 아예 가입할 여력이 없어서 가입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처럼 방치하면 사회안전망을 훼손시켜 사회 자체가 불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모든 사람을 보살펴 주자면 덜 내고 많이 받아 쌓인 국민연금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집니다.
국민연금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은 상당수는 빈곤층이어서 자체적인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재정고갈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지원만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연금보험료를 낼 수 있는 여기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 “연금은 최소한의 노후대책’이라는 점을 인식시켜 가입률을 높이는 방안도 강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국민연금이 안고 있는 최대 고민 중 하나입니다. 이래저래 ‘솔로몬의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한국의 노인들은 국가에서 얼마나 ‘노후’를 보장해 주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 일부 극빈층 노인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혜택을 전혀 못 받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노인들에 대한 지원은 크게 ‘소득보장’과 일자리 마련’ 등입니다. 소득보장은 국민연금, 경로연금,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 대한 소득 지원 등 3가지입니다.
이 가운데 현행 국민연금제도는 젊었을 때 돈을 납입하지 않으면 나이 들어서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국가가 직접적으로 노후생활을 보장해주는 시스템과는 차이가 많습니다.
실제로 국민연금의 수급권 대상이 되는 60세 이상 노인(전체 약 625만 명) 중 국민연금 수급권자는 유족연금까지 합쳐 135만여 명(약 21.6%)에 불과합니다.
경로연금은 이 같은 국민연금의 허점을 메우기 위해 1998년 7월 도입됐습니다. 1988년 국민연금 도입 장시 가입요건(60세 미만)에 해당되지 않은 노인(당시 65세 이상)에 대해 한시적으로 노후소득을 지원하기 위한 대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경로연금 지급액은 3만630~5만원에 지나지 않아 노후보장수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용돈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열악한 현실에 대한 노인들의 불만은 높습니다. 과거와 달리 노인들은 가족이나 자녀보다는 국가에 대해 높은 기대수준을 갖고 있습니다. 2004년 보건사회연구원의 노인생활실태 및 복지욕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상적인 노후생활비 마련 방법’을 묻는 질문에 40.9%가 ‘국가’라고 답변했습니다.
이 같은 점을 의식해서인지 정치권에서는 노후보장에 대한 각종 대책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유시민 복지부장관은 지원대상자를 약 60만 명(경로연금)에서 90만 명 정도로 늘리고 지원금액도 최대 6만원에서 단계적으로 높여 10만원 이상 지급하는 내용의 효도연금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야당에서는 대부분의 노령인구에게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원하는 기초연금제 도입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5. 등 돌리는 중상류층
“고소득 자영업자의 신고소득은 믿을 수 없다. 결국 근로자가 낸 연금으로 거짓신고한 자영업자만 배불리는 것 아니냐.” (봉급생활자)
“국민연금은 믿을 수 없다. 차라리 저축이나 개인연금 등으로 노후를 준비하겠다.” (일부 전문직 종사자)
자영업자의 소득파악문제는 국민연금제도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힙니다. 자영업자 중 의사, 변호사, 연예인 등 고소득자는 수적으로는 일부이지만 그들의 소득축소신고는 국민연금의 형평성 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소득자나 성실신고자의 피해의식과 반발을 불러 국민연금제도 자체를 불신하게 만듭니다. 자영업자도 불만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소득을 성실히 신고할수록 우리만 손해”라면서 아예 연금가입과 납입을 기피하기도 합니다.
중견기업 과장인 김모(38, 대구시 달서구) 씨는 국민연금만 생각하면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자영업자인 친구와의 형평성 때문입니다.
김 씨의 월급은 240만원 남짓입니다. 월 연금보험료는 21만6,000원입니다. 친구 박모 씨는 백화점에서 의류점을 운영하며 월소득이 900만원을 웃돌지만 보험료는 김 씨와 비슷합니다. 박 씨가 소득을 크게 줄여 신고했기 때문입니다.
김 씨는 “소득이 친구의 4분의 1가량인데 보험료를 비슷하게 내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국민연금의 전 국민 확대 실시 첫해인 1999년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등 12개 전문직 종사자 3만4,535명이 새로 지역가입자로 등록했습니다.
이 가운데 938명은 자신의 월소득을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88만5,000원 이하로 신고했습니다. 당시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최저생계비로 신고한 사람 외에도 상당수가 실제 소득에 비해 낮게 신고한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이 2005년 국회에 제출한 ‘2001년 전문직 종사자 월소득 신고명세’에서도 고소득자가 불성실하게 신고한 점이 엿보입니다. 전체의 37.3%인 1만2,548명이 직장인 평균 소득과 비슷한 287만원으로 신고했습니다. 이 가운데 절반은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등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고소득자가 소득을 줄여 신고하면 저소득자가 상대적으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순천향대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 탓에 돈이 있어도 내지 않는 중산층도 많습니다. 김모(38) 씨는 지방을 돌아다니며 재고의류를 처리하는 이른바 ‘땡처리’ 업자입니다. 월 소득은 평균 1,000만원. 하지만 국민연금에는 가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 씨는 “국민연금을 열심히 내봐야 내게 돌아오는 게 있을지 의문이다. 다른 사람 좋은 일만 시킬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국민연금 대신 개인연금과 종신보험 등에 매달 100만원 정도를 넣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연구원
2005년 보건복지부 조사에서는 국민연금 보험료 납부 예외자 700여만 명 가운데 27%가 종신보험 등 사보험에 가입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개인연금 가입자도 8.3%였습니다.
보험료 체납자에 500명에 대한 표본조사에서는 39%와 12%가 각각 민간보험과 개인연금에 가입돼 있었습니다. ‘국민연금을 못 믿겠으니 내 살길은 내가 찾겠다’는 얘기입니다.
이에 대해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사례를 들어 자영업자 소득파악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습니다. 자영업자가 소득을 숨기려 들면 정부가 아무리 적극적으로 나서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연금연구원
국민연금 도입 당시 실무를 맡았던 한 관계자는 “총리의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니 앞으로 개혁의 앞길은 보나마나 뻔하다”면서 허탈해 했습니다.
현행 국민연금법의 토대를 제공한 한국개발연구원(現 한국개발원, KDI)의 ‘국민연금제도의 기본구상(1986)’이라는 보고서는 이미 재정고갈사태를 놀라울 만큼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보고서는 “시행 첫 해 보험료율을 3%에서 2020년 15%까지 단계적으로 높이더라도 2049년에는 연금이 고갈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보고서는 “정부가 보험료 인상과 보험급여하락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총리의 주장과는 달리 출발 당시에는 나름대로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안까지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연금제도가 본격적으로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한 계기는 선심정책으로 소득파악이 안 되는 농어민, 저소득 도시민, 전문직을 포함한 자영업자를 ‘유리알 지갑’인 봉급생활자와 한 덩어리로 섞었기 때문입니다.
보건복지부가 막상 제도를 시행하자 저소득 도시민과 고소득 중상류층은 그들 나름대로 집단 반발하고 봉급생활자 등 성실납부자의 상대적 박탈감이 이어지면서 ‘反 국민연금’ 성향만 키우게 됐습니다. 결국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근본적인 개혁을 미룬 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가입대상만 늘리는 선심정책이 불러일으킨 측면이 더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지적입니다.
6. 문제만 키운 정치권
“한나라당이 제시한 기초연금제는 무책임한 안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재정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안으로 개혁만 지연시키고 있다.” (국회 국민연금제도개선특위 열린우리당 간사
“사각지대 등 연금제도 전체가 부실한 데 재정문제만 약간 손질하려는 정부 여당 안은 일단 지금 순간만 넘기자는 땜질 처방이다. 이번에는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손질할 수 있는 전면개혁안이 나와야 한다.” (국회 국민연금제도개선특위 한나라당 간사
정부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국회에 넘어간 지 거의 3년이 넘어가도록 여야는 견해차를 전혀 좁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폭탄돌리기’ 식으로 개혁을 미루는 사이 자식 세대의 짐만 매일 800억원 씩 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올해에는 본격적인 대선국면에 접어들어 연금개혁안이 자칫 정쟁의 도구가 될 소지가 크다”면서 “이렇게 큰 틀에서라도 합의를 보지 못하면 연금개혁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동안 정치권이 보인 행보를 보면 국민연금을 개혁할 의사가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정부가 개정안을 국회에 처음 제출한 것은 16대 국회 때인 2003년 10월. 2004년 10월과 12월에 당시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과 한나라당도 각각 개정안을 냈습니다. 이후 몇 차례 법안 심사소위가 열렸으나 여야의 견해차가 워낙 커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정치권은 2005년 10월 국민연금제도개선특위를 구성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로 하고 지금까지 3차례 회의를 열었습니다.
1차 회의는
3차례 열린 특위 회의시간은 인사말을 하는 시간을 합쳐 2시간에 불과합니다. 2년 4개월 동안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정부가 2003년 10월 국회에 넘긴 개정안은 재정안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40년 가입했을 경우 매달 소득의 9%를 내면 나중에 평생 평균 소득의 60%를 받는 현행 제도를 ‘더 내고 덜 받는’ 방안으로 고친 것입니다.
보험료는 2010년부터 단계적으로 올리기 시작해 2030년에는 15.9%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보험료는 2007년까지는 55%로 낮췄다가 2008년부터 50%로 내리도록 했습니다. 열린우리당에는 아직 확정된 당론이 없지만 정부안과 유사하고 다만 보험료는 올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한나라당 개혁안의 핵심은 기초연금제 도입입니다. 한나라당안은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의 2층 구조를 택하고 있습니다. 기초연금이란 65세 이상 모든 노인과 일정 조건의 모든 장애인에게 매달 31만원(전체 국민연금가입자 평균소득의 20%)을 지급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돈이 없어서 가입하지 못하는 국민연금 사각지대 문제는 해소됩니다. 소득비례연금은 소득재분배기능이 없이 가입자가 낸 만큼 타가는 방식이어서 형평성 논란도 사라집니다.
반면 이 같은 기초연금제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다는 비판이 뒤따릅니다. 보건복지부는 당장 시행 첫해 8조원 이상이 들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나라당의 추산은 2조3천억원 가량입니다.
연금제도는 경제 사회적 상황에 따라 나라마다 크게 다른 형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연금제도 개선방안도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 등의 연금제도 개선 권고안을 보면 공통된 원칙이 있습니다.
OECD와 세계은행은 노후보장의 수준에 따라 연금을 3단계로 나눕니다. 이들 기관은 1단계로 기초연금을 제시합니다. 이는 국가가 세금으로 재원을 조달해 전 국민에게 같은 금액을 연금으로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기초연금의 소득대체율은 20%로, 연금가입기간 중 평균소득의 20%를 노후에 연금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2단계는 기업연금, 직역연금(공무원연금, 사학연금 등) 등입니다. 2005년 12월 도입한 퇴직연금처럼 근로기간 중 개인과 기업(기관)이 돈을 적립해 노후에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기초연금과 마찬가지로 전 국민 강제가입이 원칙이어서 공적연금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역시 소득대체율은 20%입니다. 1단계 기초연금과 합치면 소득대체율은 40%로 높아집니다.
3단계는 개인연금입니다. 말 그대로 개인이 선택해 민간 보험회사 등에 가입하는 연금입니다. OECD는 개인연금의 적정 소득대체율을 20%로 제시합니다. 개인연금제도가 활성화하면 다수의 국민이 노후에 60%(1~3단계 합계)의 소득대체율을 적용받습니다.
그러나 OECD와 세계은행의 권고안을 받아들이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기초연금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재정부담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OECD는 3단계 기본 골격과는 별도로 한국에 몇 가지 사항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OECD는 ‘2005년 한국경제검토회의 보고서’에서 한국 국민연금의 재정 안정을 강조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우선 재정안정을 위해 보험료 인상을 권했습니다. 또 장기적으로 기초연금이 바람직하지만 이 제도를 시행하기 전까지는 경로연금 등 고령 빈곤층에 대한 공적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기초연금을 도입하더라도 고소득자에게는 기초연금을 지급하지 않는 방안도 제시됐습니다. 전국민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면서 소득이 일정수준 이상인 사람에게는 기초연금만큼을 세금으로 환수하는 방안입니다. OECD 한국경제검토회의에 참석했던 국민연금연구원
7. 공무원 연금 Vs. 국민연금
“국민연금 가입자만 봉인가?” 제약회사 임원인 50대 초반의 이모 씨는 공무원연금 얘기만 나오면 화가 치밉니다. 이 씨는 대뜸 “재정안정을 위해 국민연금은 보험료를 올리고 급여는 줄인다는데 공무원연금도 손질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정모(37) 씨는 매달 12만6,000원씩 국민연금 보험료를 냅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 따르면 정 씨가 60세까지 보험료를 경우 그 후 매달 98만원 정도를 받게 됩니다. 만약 정 씨가 공무원연금 가입자라면 어떨까. 120~160만원은 받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산입니다. 국민연금가입자 사이에 공무원연금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국민연금에 비해 공무원연금은 너무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는 형평성 시비입니다. 이에 따라 대다수 전문가는 “국민정서를 감안할 때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은 그대로 두고 국민연금만 먼저 개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50대 중반의 국민연금 가입자 공모 씨는 “공무원연금은 기금이 이미 고갈돼 모두 세금으로 메우고 있다. 내 연금보험료 내기도 힘든데 공무원연금까지 책임져야 하나?”라고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의 형평성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2000년 개정된 공무원연금법은 향후 적자가 발생하면 전액을 국가에서 부담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분노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국민연금에 대해서는 보험료 인상과 급여 축소 등 자구책을 요구하면서 정작 공무원들은 고통 분담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찌감치 기금이 고갈된 군인연금 역시 정부에서 적자를 메워주고 있고, 사학연금도 기금 고갈이 되면 적자보전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해 공무원들은 이른바 ‘새경론’을 제기합니다. “걸핏하면 공무원을 국민의 ‘머슴’이라고 하는데, 새경을 제대로 줘야 할 것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공무원연금의 급여 수준이 국민연금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도 논란의 도마에 오릅니다. 현재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가입기간 소득 대비 노후에 받는 소득)이 60%인 반면 공무원연금의 소득대체율은 최대 76%에 이릅니다.
관동대 국제경영학부
지급기준도 판이합니다. 국민연금은 가입 기간 전체 표준 소득월액의 30%를 지급합니다. 공무원연금은 봉급이 최고조에 달하는 퇴직 전 3년 평균보수의 50%를 지급합니다.
또 국민연금은 2033년부터는 65세가 돼야 급여를 받습니다. 그러나 공무원연금은 지급개시연령이 20년 근속기준에서 단계적으로 올라가 2020년에 가서야 60세로 됩니다. 이 역시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행정자치부 공무원연금 담당자는 “공무원은 민간기업처럼 퇴직금도 없는 데다 보험료율이 국민연금의 4.5%보다 높은 8.5%이기 때문에 급여액만 가지고 많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습니다.
또 그는 “공무원의 월평균 보수도 2004년 기준으로 197만6,000원으로, 100인 이상 사업장과 비교했을 때 96%에 그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무원들은 공무원연금은 국민연금과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논쟁이 활발합니다. 과거에 공무원의 급여가 낮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2000년 공무원 보수현실화 조치 이후 이런 주장은 시대착오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대부분 민간 직장인들이 고용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 안정된 직업인 공무원만 국가에서 노후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공무원연금은 1993년 처음 적자가 발생한 이후 1996년과 2002년을 빼고 매년 큰 폭의 적자가 발생했으며 적자폭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의 추정에 따르면 재정적자는 2005년 6,096억원에서 2010년 2조7,932억원, 2020년 13조8,126억원으로 늘어나며 2030년에는 32조4,810억원으로 불어납니다. 지금대로라면 2030년에는 정부 예산의 5% 정도를 퇴직공무원의 연금지급에 써야 하며 공무원연금 지급액의 75%를 정부에서 부담해야 합니다.
그러나 특수직연금 개혁은 당사자의 반발이 워낙 거세 공개적인 토론 자리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 대학교수는 “일전에 공무원연금 개혁을 주장했다가 ‘밤길 조심하라’는 등 협박 전화에 밤낮으로 시달렸다”고 털어놨습니다.
특수직연금의 모델은 공무원연금입니다. 군인연금과 사학연금은 모두 공무원연금의 틀을 거의 그대로 따왔습니다. 따라서 공무원연금 개혁에 성공하면 다른 모든 특수직연금의 개혁이 자동적으로 이뤄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공무원연금을 개혁해야 한다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습니다. 만약 국민연금만 손을 댄다면 국민정서상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고 이는 결국 연금개혁의 총체적 실패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혁의 순서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엇갈립니다.
대다수 전문가는 연금개혁을 한다 해도 이미 연금을 받고 있는 사람들까지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기존 연금 수급자의 반발이 사회적 혼란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예 기간을 충분히 두고 점진적으로 급여 수준을 줄여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관동대 국제경영학부
그러나 공무원의 반발이 워낙 크기 때문에 먼저 국민연금부터 개혁하고 나서 공무원연금을 손보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8. 원칙없는 연금운용
“주식투자를 더 늘려 국민경제 전체에 기여했으면 좋겠다.” 재정경제부
기금운용에 대한 공식최고결정기구인 운용위원회 자체가 1년에 4번 밖에 안 열리는 비상근기구로 한 번 회의시간도 2시간이 채 안 됩니다.
위원 21명 가운데 전문가로 분류되는 인사는 국민연금관리공단이사장, 보건사회연구원장,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등 관변기관대표 3명이 전부입니다.
회의도 형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매번 회의정족수인 과반수 11명을 가까스로 채웁니다. 농림부, 산업자원부, 노동부 차관은 최근 3년 동안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정부는 정부 위원 6명, 관변 측 전문가 3명과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든 농협 등 지역단체 3명을 확보해 사실상 과반수의 투표권을 갖고 있습니다.
인제대
국민연금기금은 정책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는 정부의 ‘쌈짓돈’이 아니라 무엇보다 연금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운용해야 할 자금이라는 점을 정부 당국자들은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약 80조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삼성생명은 부채(지급해야 할 돈)가 언제 돌아오는지를 따져 중장기 자산배분계획을 짭니다. 이를 토대로 매년 말 다음 해의 전략적 자산배분계획을, 다시 매달 전술적 자산배분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기금운용규모가 삼성생명의 2배인 국민연금기금에는 1988년 처음 운용되기 시작한 이후 공식적으로 채택된 중장기 투자계획이 없습니다.
2004년 말 수립한 ‘중장기 마스터플랜’도 기금운용위원회의 의결을 받지 못해 수많은 보고서 중 하나에 그쳤습니다. 마치 헌법도 없이 법령을 만들어내는 꼴입니다.
KDI 국제정책대학원
그나마 기금운용실적은 양호한 편입니다. 1991년 이후 기금운용수익률 평균 10.04%로 주식과는 달리 안정성을 추구하는 기금운용성격을 감안하면 지금까지는 나쁜 성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급속도로 비대해지는 기금 규모를 보면 낙관만 할 수는 없습니다.
국민연금발전위원회의 2003년 추계를 보면 기금규모는 현재 160조원 대에서 2010년에는 2배로 불어납니다. 2035년이면 지금의 10배인 1,715조359억원의 기금이 쌓일 것으로 전망됩니다.
2005년 상반기 상장기업 상위 30개 기업 중 21개 기업에서 국민연금이 5대 주주 안에 포함돼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이 앞으로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경우 간접 국유화, ‘연금사회주의(Pension Fund Socialism)’에 대한 우려마저 나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적립기금규모가 정점을 찍고 줄어들기 시작하는 2036년 이후 발생합니다. 이 때부터는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집니다.
국민연금이 주식을 수백억 원만 팔아도 증시가 휘청거리는 판에 1년에 수집조 원을 팔아치우는 사태가 발생하면 증시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기금운용이 비교적 잘 되고 있다고 평가를 받는 나라들을 보면 전문가 집단이 소수 정예로 정부나 정치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금규모로 2004년 세계 3위인 캘리포니아주공무원퇴직연금(CalPERs)의 관리위원회 인원은 13명입니다. 이 위원회는 보험료율 산정부터 자산배분결정까지 모든 업무에 대해 독립적인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는 40명으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입니다. 4개의 분과위원회를 거느리고 있는데 분과위원들이 이사회의 구성원을 겸하고 있어 조직의 효율성이 높습니다.
“대통령비서실장이 왜 연금운용에 관여해야 합니까. 정권의 입맛대로 운용하겠다는 겁니까.”
정부기관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기금 운용체계 개선안에 대해 이같이 비판했습니다.
국회 국민연금제도개선 특위가 앞으로 다룰 운용체계 개선안은 2004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법안심사소위가 정부안을 기초로 작성한 것입니다. 실제로 운용체계 개선안은 대통령비서실장이 참여하는 국민연금정책협의회 신설 등 우려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금운용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높여야 할 개선안이 외부 입김에 흔들릴 여지만 늘려 놓았다는 비판입니다. 이 개선안은 민간 운영위원장을 선출하고, 운여우이원 중 전문가를 늘리는 방안을 담고 있습니다. 운여위원회를 상설화하고 기금운용위원 수를 줄이는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평가는 냉담합니다. 우선 국민연금정책협의회 신설, 국민연금신의위원 역할 강화 등이 문제점으로 꼽힙니다. 국민연금정책협의회는 기금운용위원회보다 윗선에서 정책방향을 협의하는 기구로 국무총리가 의장을 맡도록 돼 있습니다. 위원으로는 재정경제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국무조정실장,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장, 총리 지명 2명 등이 참여합니다. 한 연금전문가는 정책협의회에 대해 “입장이 서로 다른 정부 최고위 관계자들에게 기금운용위원장이 포위돼 있는 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협의회 위원 구성을 보면 정치가 연금운용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꼬집었습니다.
개선안에 따르면 국민연금심의위원회의 권한에 중장기 기금운용계획과 연도별 기금운용계획에 대한 사전심의권 등이 추가됩니다. 이 위원회도 복지부 차관 등 정부인사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정부 주도의 모임(정책협의회, 심의위원회)이 ‘옥상옥’의 모양새를 띨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개정안은 신설할 사무국에 공무원을 파견할 수 있도록 명시했습니다. 이는 복지부의 인사적체해소에 이용될 수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