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조선은 갓 태어난 나라였다. 그리고 건국의 기쁨을 맛볼 틈도 없이 명나라와의 외교 마찰이라는 거친 파도를 맞았다. 이 위기 속에서 칼을 든 장수가 아닌 붓을 든 학자가 나라를 구하러 나섰다.
양촌(陽村) 권근(1352~1409).
권근은 이색(李穡)과 정몽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혔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 가운데서도 경학과 문장을 두루 갖춘 인물로 꼽혔다. 그가 새 왕조에 참여한 것은 충절의 포기가 아니라 현실적 선택이었고, 그 현실에서 그는 조선의 지적 토대를 다지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가 터졌다.
정도전이 지어 명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에 불손한 표현이 있다고 명나라가 트집을 잡으면서 양국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다. 명나라는 문서 작성자를 보내라고 압박했고, 억류된 사신들이 현지에서 목숨을 잃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도전 자신은 요동정벌을 준비하며 맞섰지만, 외교적 타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권근이 자청했다. 정도전 대신 자신이 명나라로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행보였다. 명나라 남경에 도착한 그는 황제 주원장을 직접 대면했고, 표전 사건의 경위를 해명해 외교적 마찰을 수습했다. 그것만으로도 공적이 충분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을 짚어야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다. 이성계가 즉위한 직후인 1392년 11월, 예문관 학사 한상질을 명나라 남경으로 파견해 국호를 청했다.
선택지는 둘이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조선(朝鮮)과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和寧).
이듬해(1393년) 2월, 주원장은 예부 자문을 통해 답을 보내왔다.
"東夷之號, 唯朝鮮之稱美, 且其來遠, 可以本其名而祖之."- "동이의 이름들 가운데 오직 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그 이름을 근본으로 삼아 잇도록 하라."
주원장이 조선을 택한 이유는 명확했다.
오랜 역사, 그리고 그 이름이 품은 무게.
화령이 탈락한 것은 이성계의 고향이라는 점뿐만이 아니었다. 화령은 원나라 수도 카라코룸과 발음이 겹쳐 명나라로서는 허용하기 어려운 이름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조선이라는 국호는 단군 이래의 역사적 연원을 명나라 황제가 공식 문서로 인정한 결과였다.
권근이 명나라에 머무는 동안, 주원장은 그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훗날 응제시주(應製詩註) 서문에 기록된 그 물음은 이렇다.
"檀君旣往, 其後幾易世矣?"-"단군은 이미 가버렸는데, 그 후로 몇 번이나 왕조가 바뀌었는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조선의 학문 수준과 역사적 정통성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고도의 정치적 질문이었다. 권근은 막힘없이 답했다. 단군으로부터 기자, 위만, 삼국시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는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풀어냈다.
황제는 감탄했다. 그리고 그 답을 시로 지어 바치라 명했다.
권근은 그 자리에서 시를 지었다.
단군(檀君)
傳聞裔土奇 전해 듣건대 먼 동방 땅 기이하여
獨有檀君聖 홀로 단군이라는 성인이 계셨다네.
與世唐虞幷 요임금, 순임금 시대와 나란히 서서
開基自不平 나라의 터전을 여심이 예사롭지 않으셨네.
- 양촌집 권1, 응제시
단군을 중국의 요순시대와 나란히 놓은 것이다. 같은 시대, 동등한 문명이라는 선언이다. 설화나 신화의 영역에 있던 단군을 역사의 무대 한가운데로 끌어올린 것이고, 그 선언을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황제 앞에서 직접 한 것이다.
주원장은 권근의 시에 화답해 어제시(御製詩) 3수를 직접 지어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또 권근의 학문을 두고 학문이 노련하고 성숙하다는 칭찬을 남겼다. 명나라 황제가 응제시를 통해 단군이라는 이름을 공식 역사의 문맥 안에서 직접 다룬 것은, 이 사건이 단순한 외교적 성공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응제시에 달린 주석서는 권근의 손자 권람이 1462년(세조 8년)에 완성했다. 그 서문에 주원장의 단군 질문이 기록되어 있다. 권람의 응제시주는 단군에 관한 기록을 담은 중요한 사료로, 훗날 단군사화 연구의 기초 자료 가운데 하나로 남는다.
단군사화가 역사적 기억으로 이어지는 데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다. 고려 후기 일연의 삼국유사(1281)와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가 단군을 문헌에 기록한 출발점이었다면, 권근의 응제시는 조선 건국 직후 단군이 국가 공식 차원에서 인정받은 사례로 남았다. 조선 초 동국통감(1484)은 단군조선을 역사 서술의 시작점으로 삼았고, 세종은 황해도 구월산에 삼성당을 세워 환인·환웅·단군에 대한 국가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단군의 역사가 가장 험하게 시험받은 것은 조선 시대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였다.
1909년 1월 15일, 홍암 나철이 서울에서 대종교(大倧敎)를 중광(重光)했다. 단군을 교조로 모시는 이 종단은 창립 당시부터 민족 정체성의 회복을 핵심 가치로 내걸었다. 나라는 비록 망해도 도(道)는 가히 존재한다는 선언이 창립의 정신이었다.
대종교가 단군을 중심에 놓은 것은 단순한 종교적 선택이 아니었다. 일제는 신도(神道)를 국교로 삼아 조선인의 정신을 통치하려 했다. 그 구도 안에서 단군의 역사성을 지우는 것은 저항의 뿌리를 자르는 일이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신도·불교·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는 포교규칙을 시행하면서 대종교를 사실상 불법화했다. 대종교는 1914년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으로 옮기는 종교적 망명을 단행했다.
만주로 건너간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중심이 됐다. 서일을 총재로 한 북로군정서는 1920년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다. 무오독립선언(1918)의 서명자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한 핵심 인물들 가운데도 대종교인이 상당수였다. 신규식·이동녕·박은식·조소앙·김동삼 등이 그 이름들이다.
지식의 전선에서도 싸움은 이어졌다. 김교헌은 대종교의 2대 교주이면서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써 단군 역사를 학술적으로 정립하려 했다.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단군-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민족 계보를 제시했다. 정인보와 안재홍은 단군 사화의 언어학적·인류학적 근거를 파고들었다. 주시경·김두봉·이극로 같은 한글학자들 역시 대종교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단군의 역사를 지키는 것과 우리 말글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같은 일이었다.
일제가 두려워한 것도 바로 이 연결이었다. 단군을 신화로 격하하면 민족의 역사적 뿌리가 흔들린다. 그 뿌리가 흔들리면 저항의 정당성도 약해진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단군 사화를 신화로 처리한 것은 학문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기획이었다.
권근이 남경에서 단군을 읊은 날로부터 500년 넘는 시간이 지난 뒤, 대종교인들은 그 단군을 다시 들고 일어났다. 600년 전의 외교 문서와 황제 앞에서 읊은 시 한 편은,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넘어 훗날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기록이 됐다.
권근의 응제시는 사대주의적 아첨 문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명나라 황제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단군을 요순과 동격으로 놓은 구절은, 주어진 제약 안에서 민족의 역사 주권을 지키려 한 선택으로 읽을 수 있다. 외교적 위기 속에서 붓으로 싸운 사람의 방식이 그러했다.
단군사화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이 물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단군이라는 이름을 지키려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권근이 황제 앞에서 읊은 네 줄은 그 긴 흐름의 한 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