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녕조씨시조묘제 [2010.11.13]
창녕조씨시조 조계룡
창녕 조씨(昌寧曺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제26대,재위기간: 579∼632년)의 사위로 전하는 조계룡(曺繼龍)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傳說)이 전한다. 예향(禮香)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婚期)에 이르렀을때 우연히 복중(腹中)에 병(病)이 생겨 화왕산(火旺山)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病)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 속에 장부(丈夫)가 나타나“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龍)의 아들 옥결(玉 )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卿相)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子孫萬代) 번영(繁榮)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容貌)가 준수(俊秀)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학사(李學士)가 이상히 여겨 왕(王)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姓)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下賜) 하였다고 한다. 계룡(繼龍)은 자라서 진평왕(眞平王)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창녕(昌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계룡(繼龍)의 후손 겸(謙)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영천 思孝齋 묘제 [2010,11,6]
경산군 자인면 옥산재 묘제 [2010,11,7]
경주 안강읍 노당리-신라부마 태사공묘제[11.13]
산신제 봉향
창녕조씨(昌寧曺氏)에 대(對)하여 벼슬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상주국(上柱國) 대도독(大都督)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라 창성부원군(昌成府院君)에 봉해졌다. 창녕(昌寧)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경덕왕이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23년 창녕군(昌寧郡)으로 개칭하고 현종9년 밀성군(密城郡)에 예속되었다. 고종32년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영산군(靈山郡)을 합쳤다. 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좌시중공파(左侍中公派), 중추공파(中樞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충간공파(忠簡公派),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양평공파(襄平公派),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문익공파(文翊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장양공파(壯襄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낭장공파(郎將公派) 관향(貫鄕)인 창녕(昌寧)에 오랫동안 세거해왔다. 이래로 일부 자손들이 그곳에 터를 잡았다고 믿어진다. 시조 태사공(太師公에 관한 설화가 있다. 그는 창녕(昌寧)의 화왕산(火王山) 정상에 있는 용지(龍池)라는 연못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치병하던 중, 용자(龍子) 옥결(玉玦)과 만나 잉태, 집에 돌아가 아들을 낳았다. 이광옥(李光玉)이 진평왕에게 고하니, 왕은 이를 신기하게 여겨 아기에게 조(曺)성을 내리고 계룡(繼龍)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들을 물리쳤고, 삼국통일의 주인공 김춘추(金春秋)·김유신(金庾信) 등을 배후에서 지도한 인물이었다고 ‘창녕조씨시조기(昌寧曺氏始祖記)’는 전한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절개 높은 선비를 적지 않게 배출했다. ‘천년왕업일조진(千年王業一朝塵) 백수고신루만중(白首孤臣淚滿中) 차문수양하처시(借問首陽何處是) 토극명월자상친(吐亟明月自相親)’이란 시문을 남기고 경주(慶州) 토함산에 들어가 여생을 보냄으로써 신라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 딸 덕공공주(德恭公主)와 결혼, 태조부마(駙馬)가 되었고 대악서승(大樂暑丞)의 벼슬을 지냈으니, 그가 곧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중시조이다.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다시 6代 뒤에 조송무(曺松茂)·조송군(曺松君)·조송학(曺松鶴)의 삼형제를 위시하여 6代에 걸쳐 소감(少監)을 배출, 문중(門中)이 크게 일어났다. 여러차례 토벌한 명장(名將)으로서, 여말(麗末)에 활약했던 무장(武將) 조민수(曺敏修)와 더불어 창녕조문(昌寧曺門)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우왕 초에는 경상도 순문사(巡問使)로 도처에 들끓던 왜구(倭寇)를 토벌한 명장(名將)이었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뒤에 정권을 장악하려는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야심에 반기를 들었다가 창녕(昌寧)으로 귀양가서 죽은 지조있는 장군이기도 하다. 불렀으나, 끝내 불응하여 여조(麗朝)에 대한 절개를 고수하였다.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던 양평공(襄平公) 조익청(曺益淸)을 빼놓을 수 없다. 나라의 기둥으로 사직(社稷)을 보필한 공(功)으로 창녕조문(昌寧曺門)에서는 유일하게 王廟(恭愍王)에 함께 배향(配享)되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벼슬을 멀리하고 초야(草野)로 많이 돌아갔다고는 하나, 조석문(曺錫文)은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까지 지낸 명신(名臣)이었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 도승지(都承旨)가 되었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뒤, 영의정의 벼슬에 올랐다. 청렴한 대신으로 알려졌으며, 충간공(忠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당시 사림(士林)의 거유(巨儒)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처남(妻男)이며 수제자(首弟子)로서, ‘두시언해(杜詩諺解)’ ‘유배가사(流配歌辭)’ ‘만분가(晩憤歌)’를 지었으며 성리학에도 깊이 통달한 대표적 학자이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역관(譯官)으로 10여 차례 일본(日本)·연경(燕京) 등지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와 외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다. 창녕조문(昌寧曺門)의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사림(士林)들에게 불의(不義)에 항거(抗拒)할 줄 아는 선비정신을 심어 주었으니, 그가 죽은 지 5년만에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났을 때, 그의 제자였던 홍의(紅衣)장군 곽재우(郭再祐)를 위시한 57명의 문하생(門下生)이 의병을 일으켰던 것도 그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끝내 이를 거절하고, 경남 산청(山淸)의 두류산(頭流山) 기슭에 있는 속칭 덕산(德山)마을로 은거, 후학들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둘째아들 조신충(曺信忠)은 희천군수(熙川郡守)를 지냈으며, 조신충(曺信忠)의 다섯 아들 가운데 조상보(曺尙保)가 사의(司議)였고 조상정(曺尙貞)이 현감(縣監), 조상치(曺尙治)가 부제학(副提學)의 벼슬을 지냈다.
6. 충정공(忠正公)의 발자취 : 조상치(曺尙治) 조상치(曺尙治)는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자경(子景), 호는 단고(丹皐)·정재(靜齋), 시호는 충정공(忠正公). 1419년(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집현전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세종·문종·단종의 세 왕을 섬겨 김문기·성삼문·박팽년과 함께 총애를 받고 1455년(단종 3) 집현전 부제학에 발탁되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적극 사양하고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고 지냈다. 임종 때에는 자기의 시문(詩文)을 모두 불태워 버려 남긴 작품이 전혀 없다.
조상치(曺尙治)는 세종·문종·단종조에 걸쳐 김문기(金文起)·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왕(王)의 총애를 받다가 세조가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영천(永川)으로 은거(隱居), <노산조부제학보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는 묘비(묘비)를 미리 써놓고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스스로 밝혀 절의를 지켰다. 정조조에 충정(忠貞)의 시호가 내려졌다.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각각 정국공신창산군(靖國功臣昌山君)· 정국공신창녕군(靖國功臣昌寧君)에 봉해졌으며, 조계상(曺繼商)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이르렀다. 조계상(曺繼商)의 아들 조광원(曺光遠)이 명종 때에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했고, 증손 조문수(曺文秀)는 시문(詩文)에 능할 뿐 아니라 글씨로도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지목되어 김상헌(金尙憲)·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심양(瀋陽)까지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고초를 겪었으며, 조한영(曺漢英)의 현손 동포(東浦) 조윤대(曺允大)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명필가(名筆家)로 이름을 떨쳤다. 연암(烟岩) 조석우(曺錫雨)·하강(荷江) 조석여(曺錫輿) 등이 모두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중종조에 대구부사(大邱府使)를 지낸 조치우(曺致虞)는 청백리(淸白吏)에 올랐고 효성이 지극하기로도 이름이 났다. 모두 성리학에 통달한 대가(大家)로서 특히 조호익(曺好益)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門下)에서 성리학을 연구, 관서(關西)지방의 학풍진작(學風振作)에 기여하였다. 홍범대전(洪範大全)을 써올려 나라의 규범을 바로잡고, 태종 때 왕명으로 明나라에 가서 명제(明帝)로부터 도해배(桃亥盃)를 하사받아 지금도 전북 고창(高敞)의 정산사(鼎山祠)에 보존되어 있다. 당시에 우의정(右議政) 김안로(金安老)와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세도를 앞세워 갖은 비리와 폭정을 일삼는 것을 목격하고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들과 뜻을 모아 거듭 상소한 끝에 그 일당을 몰아내고 관(官)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창녕 대산진(昌寧 臺山陣)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뒤 형제가 순절, 그 충공(忠功)으로 정려(旌閭)되고 열(悅)은 훈정(訓正)에 서수(除授)되었다. 중종조에 왜구(倭寇)와 여진족(女眞族) 토벌(討伐)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정난선무공신(靖難宣武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는 왕에게 부흥책십조(復興策十條)를 올려 국무(國務)에 실시케 하였으며 광해군 때, 그가 소장했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진헌(進獻), 이 책을 대본(臺本) 삼아 다시 간행함으로써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데 공헌을 했다. 중종반정 때의 공신 조계형(曺繼衡), 인조 때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내고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으로 불리웠던 매호(梅湖) 조우인(曺友仁) 등도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조적(曺適)의 아들 조익순(曺益順)은 고려조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의정(領議政)이었고, 그의 후손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조광한(調匡漢)·직제학(直提學) 청구당(靑邱堂) 조계방(曺繼芳)이 배출되었다. 이판(吏判) 조수익(曺受益)과, 역시 이판(吏判)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로도 이름이 났던 조문택(曺文澤), 시중(侍中) 조목남(曺目南)의 손자이며 여말(麗末)에 신돈(辛旽)을 탄핵했던 철야군(鐵冶君) 조정통(曺精通), 그의 다섯 아들인 조경룡(曺慶龍)· 조응룡(曺應龍)·조한용(曺漢龍)·조변용(曺變龍)·조견용(曺見龍) 등이 두드러진 인물들이며, 이들에게서 비롯된 자손들이 번창하다. 판부사(判府事)로 대과(大科)급제하여 문중을 빛냈으며, 평장사(平章事) 조용기(曺用奇)의 후손인 상서(尙書) 조희우(曺希遇)에게 6대손이 되는 조홍립(曺弘立)은 문과에 급제, 병조·형조정랑(兵曹·刑曹正郞)을 거쳐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지냈고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嘉善)에 올랐다. 청애 조성환(曺成煥)과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을 꼽는다. 이시영(李始榮) 등과 더불어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군정부장(軍政部長)과 정무위원(政務委員)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20대 청년이었다. 고당(古堂)은 안도산(安島山)의 국내투쟁이론에 큰 감화를 받아 민족지도이념 노선을 결정했다. 배일(排日)독립정신함양’을 지표로 한 민족주의운동을 전개했다. 월남(越南)할 수 없다며 끝까지 북한에 남았던 민족사(民族史)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6. 집성촌 1988년 현재에는 경남 昌寧·密陽·陜川·山淸·咸安·金海·巨濟, 경북 永川·金陵·漆谷·尙州·慶山·高靈·星州·淸道, 전남 和順·珍島·靈岩·潭陽·羅州·靈光·海南, 전북 高敞, 충북 玉川·鎭川·槐山, 경기도 水原·驪州·華城·坡州, 강원도 江陵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8. 인구 1985년 현재 창녕조씨 전체인구 299,642명
끝으로 창녕조씨문중 후손들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두 손 모아 빌겠습니다.
|
첫댓글 저희 집안일을 이렇게 자상하게 올려주시어 감사 드립니다!
창녕 조씨문중의 무궁한 발전을 빌며 名家의 의례 잘 보고 갑니다.
사진 잘보앗습니다 종덕재 옥산재. 사진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여의길상 하세요
http://cafe.daum.net/chocy
창녕조씨 대종회 카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