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야고보서 2장 1-13절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7문에 보면 “주의 성찬을 합당하게 받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란 질문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소요리문답은 “주의 성찬에 합당하게 참예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님의 몸을 분별하는 지식(고전11:28-29), 주님을 양식으로 삼는 믿음(고후13:5), 회개와(고전11:31) 사랑과(고전10:16-17) 새로운 순종이(고전5:7-8) 있는지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만일 합당치 않게 오면 그들은 자신에게 임할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고전11:28-29).”라고 답합니다. 지난주에 살핀 말씀 가운데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요7:24a)는 주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성찬을 앞두고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할 때 믿음에 합당한 열매로서 사랑과 순종이 있는가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1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나 외모로 취한다고 할 때 오늘 본문의 구체적인 예를 통해 보여주는 것처럼 단순히 부자에게만 경의를 표한다는 것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멸시로 나타나고 있는 차별에 대하여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5계명과 관련하여 말할 때 윗사람 그리고 아랫사람, 나아가 동료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 아랫사람은 윗사람에 대하여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데, 나이가 적은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지위가 낮은 사람은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높고 낮음은 아닐지라도 주의 권위를 따라 누간가를 세웠다면 그 권위 때문에 윗사람, 아랫사람으로 이해되는 바가 있습니다. 이때 아랫사람은 윗사람에 대한 공경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 받는 자가 있다고 할 때 가르치는 자는 주의 권위로 세워진 자이기 때문에 가르침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계명은 여기서 더 나아가 윗사람 역시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가르치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경의를 표하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바는 부자에게는 경의를 표하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는 도리어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이 차별에 대하여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8절에서도 밝히는 바와 같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이런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성도된 너희는 결코 외모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을 때 이웃 사랑의 근거가 자기 사랑에 근거한 것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사이에 이 ‘네 몸과 같이’라는 말 때문에 자기 사랑을 넣어 이해하는 사람이 있지만, 전 성경의 사고는 자기 사랑이 아니라 자기 부인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는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있을 것인데, 이 때 대표되는 내용 중 한 가지가 자기 사랑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딤후3:2).
이런 점에서 보자면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기를 사랑하는 정도에 따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기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 사랑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 여러 군데서 말씀하시지만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즉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것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런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이웃에 대하여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과 관련하여 말씀하실 때 왜 굳이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 사랑의 최소한의 규범이 네가 받고자 하는 만큼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도 같은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왜 우리가 차별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요, 그런 사랑을 받은 자가 이웃 사랑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순종하는 자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텐데, 우선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앞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고,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까지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근원적으로는 이런 믿음의 선물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시는 것으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 전부터 택하시되 창조 이후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한 자가 되었지만, 그래서 그 스스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런 우리를 영원 전부터 택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시되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결과 믿음을 주시되 믿음을 받을 수 있는 마음까지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런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결코 사람에 대하여 차별하여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있는가? 참된 믿음이 있다면 그런 믿음의 마땅한 열매로서 참된 사랑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야고보서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에 합당한 열매, 다시 말해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죽은 믿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참된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고,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열매로서 사랑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이런 사랑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을 선물로 받기 전 우리의 모습은 죄와 비참함으로 죽어야 할 자로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영광의 주를 믿음으로 받았다는 것은 본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맨 처음 창조될 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광이 아니라 너무나도 초라하고 형편 없고 매우 누추한 모습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외모로만 보자면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괜찮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전적으로 타락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썩은 냄새가 나는 시체와도 다를 바 없는 자들이요, 부패하고 부패하여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선물로 받은 후로는 더 이상 죄와 비참함 아래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까지 하시는 내용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영광의 주님을 모시며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영광의 주를 모신다는 것은 그분만 영광의 주로 있는 게 아니라, 그분의 영광이 우리의 영광이 되도록 보장해 놓으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우리가 하나님께 이런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로 있는데,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소위 인권운동이라 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는 차별을 하면 안 되고 언제나 평등하다는 사상을 내놓지만 사실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존엄하게 여긴다는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물론 인간의 존엄성이 좋은 것이긴 하나 지금 성경은 하나님 지식에 근거하여 우리를 설득하고 있는 겁니다. 같은 인간이기에 차별을 두지 말아야 된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조명하여 우리로 하여금 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참된 경건이란 단지 종교적인 모양만 있는 게 아닙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죽도록 교회 일에 충성하는 것,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여 차별이 없어졌는가? 전도하여 원수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구원 받아야 할 자로 여기고 있는가? 교회 일에 충성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충성한 일에 유익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가? 여기에 참된 경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 외모를 취하지 않는 것, 이것이 경건이요, 경건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조차 이런 능력을 상실하고 있기에, 이미 사도들이 있던 시대에도 그런 모습이 있었기에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2절 이하 4절에서는 좀 더 실제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교회는 부한 자가 들어오든, 아니면 가난한 자가 들어오든 차별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조차 어떤 사고 아래 놓여 있느냐 하면 회당에 오면서도, 오늘날 우리말로 하자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오는 가운데서도 이런 차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 없이,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자유자건 노예자건, 가진 자든 가지지 못한 자든 다 받아주셨는데, 그런 분 앞에 나아오면서도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이 교회 안에조차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 바꿔서 생각해 보자면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와서 등록할 때 소위 유능한 직업, 돈을 잘 버는 직업이면 귀한 사람이 온 것처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오면 반갑게 맞이하긴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별하게 되는 그런 일이 있더란 것입니다. 실제로 직분자를 뽑을 때 신앙의 연륜이나 그가 가지고 있는 내용을 보기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는 재력에 따라 직분자를 세우는 일이 더러 있지 않습니까? 물론 신앙의 연륜을 보기는 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장로를 세우든, 집사를 세우든 교회를 통해서, 노회를 통해서 검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형식적일 뿐, 이미 장로나 집사를 세우기 위한 부분에서부터, 특별히 장로를 세우는 데 있어서는 뭔가 재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도록 하는 일이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다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요, 차별하여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의 지적은 4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런 것은 다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5절을 보시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귀 기울여 들으란 것입니다. 듣고서 잊어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길 정도로 마음을 다하여 들으란 것입니다. 무엇에 대하여 들으란 것인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죄와 비참함 가운데 있었던 자였습니다. 썩은 시체와도 같은 자였고, 부패하고 부패하여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영광의 주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시고, 그 영광의 주를 믿음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5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이것은 마치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것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29절을 읽어드리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물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가난한 자들만 부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도 부르시고,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람도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보다 가난한 자,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 없는 자를 택하신 것은 그 반대되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된 목적은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거나 미련한 자를 똑똑하게 하거나 약한 자가 세상적인 의미에서 강한 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자랑하지 못하도록, 세상의 것으로 자랑삼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자들을 불러 오히려 믿음에 있어서만큼은 부요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많은 부분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있어 부요하게 하시려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가난한 자만이 아니라 부자여도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목적은 어디 있느냐? 세상적으로 부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어 부요한 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교회의 가르침은 어떠합니까? 믿음에 있어 부요한 자가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도록 가르칩니다. 세상의 복이 하나님의 복인 양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세상의 가난이 하나님의 복이 아닌 양 생각하도록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다 외모로 취하고 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핵심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에 있어 부요함인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가를 알고 그것으로 능히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은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을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좀 더 영생을 사모하도록 하여 더욱 주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세상의 것을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고보서 1장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온갖 좋은 은사,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오며, 또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신 분이시기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만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약1:17).
때문에 이 땅에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이미 그것 자체가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모르기에 부자를 존대하게 여기는 반면 가난한 자를 홀대하며 멸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6절 초반부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부한 자들의 실상을 드러내시는데, 6절 중반부터 7절을 보시면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모든 부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또 사도들이 활동하던 당시 그런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를 다음과 같이 드러냅니다. 즉 너희는 부자들에 대하여 존대하게 여기지만 실제 그들은 존대하게 여길만한 그런 자들이 아니란 것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부자인 자신을 존대하게 여길 때 그것을 받아 누리는 자들은, 그리고 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신 그 은혜와 사랑,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분의 뜻을 안다면 비록 외적으로는 부자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보자면 자신도 가난한 자요,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한 자인 줄 알고 겸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이 아니라 당연히 존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모르는 자이며, 나아가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모르는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존대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과 어떤 문제가 있게 되면 얼마든지 상대방을 법정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게 부자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 세상 법정에 선다고 할 때 성도라는 그 아름다운 이름이 비방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교회의 교회다움, 성도의 성도다움이 어디 있으며, 나아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히려 교회와 성도로 인하여 비방을 받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8절과 9절을 보시면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의 전 내용은 율법의 첫 번째 돌판 부분에 근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근거해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이 자기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심으로 네가 받고자 한다면 너도 역시 남에게 대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율법을 순수하게 이행하는 것이면 잘하는 것이지만, 만일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면 혹은 외모로 사람을 취한다면, 다시 말해 부자들에게는 잘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는 괄시하는 그런 형태가 단지 부자들의 환심을 사서 자기에게 뭔가 이익을 바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요, 율법 자체가 범죄자로 정죄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4절에서 악한 생각이 죄의 성격으로, 그래서 범죄자로 낙인 찍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사람들은 외모로 취하여 차별을 두는가? 방금도 말했지만 많은 부분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로 판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 이익이 되면 가까이 하지만 내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으면 멀어집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이익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익 관계 때문에 차별을 한다면,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약간 다른 성격의 문제이지만 누군가 죄악 된 방향으로 나를 끌고 가고자 한다면 그때는 그들과 함께 멍에를 메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는 그들로부터 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결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익 관계에 따라 차별하는 일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한다,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환경의 어떤 변화, 예를 들어 계절과 관련해서도 생각해 보면 각자가 좋아하는 계절은 다르겠지만 왜 좋아하는지, 왜 그 계절은 싫은지를 다 내 쪽에서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무덥고 찝찝한 걸 싫어하면 여름을 싫어하는 것이고, 내가 좀 추운 걸 싫어하면 겨울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마치 그러한 계절 자체에 어떤 장단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 외에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9장의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과연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옳은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로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 무엇을 기준으로 가지고 있느냐 하면 내가 좀 편하면 복이라 생각하고, 내가 좀 불편하면 저주로 생각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기준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기도 하지만 사실 고난 자체가 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미 야고보서 1장에서 그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왜 그렇습니까?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되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가 되는 방향으로 있다는 것입니다(약1:2-4).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 복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결국 저주로 치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죽을병에 걸렸다가 기도해서 15년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작정도 변경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관련된 내용을 살필 때 좀 더 살피기로 하고, 성경은 기도함으로 인해 마치 생명이 연장된 것처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장 “아! 이것이 얼마나 복인가!”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물론 생명을 연장 받은 것, 그렇게 말씀하신 것 자체는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히스기야 생애에 있어서는 그의 생명 연장과 관련된 부분이 과연 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고민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병이 나음으로 인하여 교만해 지고 그로 인해 바벨론 사신이 왔을 때 그 성의 구석구석 다 보여주어 결국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남유다의 왕들 중 가장 악한 왕이라 할 수 있는 므낫세를 병이 나았을 때 쯤 혹은 이후에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 현상의 일들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기보다는 그의 말씀을 들을 것을 권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약1:19).
결국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외모를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기준을 버려야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 스스로가 계속해서 기준이 되어 판단하게 된다면 지금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생각이 다 악한 생각이요, 죄를 짓는 것이요, 범죄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이 오고, 고난이 온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내 쪽에서 불편하다는 것으로 마치 저주를 받은 것인 양, 복이 아닌 것인 양 생각하지 마시란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라 훈련하셔야 하는 것이 우리 자세로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차별하여 대하는 문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모든 것은 단지 사람을 차별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자기 이익을 구하는 것이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 현장에 들어오면 마치 하나님께서 훈련하시기 위해 주셨는데도 자기에게 이익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저주인 양 생각한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먼 것이겠습니까? 다 주 앞에 범죄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성경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어느 하나도 빠뜨려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율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지만 따로 떼어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서로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하나를 범하면 하나만 범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모든 부분을 범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율법은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구체적인 예를 드는데,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과 관련해서 말씀합니다. 11절을 보시면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율법이 가지고 있는 뜻, 단지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까지를 다 따지게 되면 사실 우리는 율법의 어느 하나라도 지킬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혹 어떤 항목에 대해서는 지켰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그 항목을 지켰다고 율법을 다 지킨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살인하지 않았다,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주신 분의 성품을 반영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지키지 않는 이상 율법을 범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적인 살인, 실제적인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켰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사람과는 달리 하나님은 마음까지도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99%를 지켰다고 한들 1%를 지키지 않으면 다 어긴 것이 됩니다. 100%를 지켜야지만 율법을 지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차별하는 것, 외모로 판단해서 누구에게는 잘하고 누구에게는 못한다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율법을 지킨 것이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지키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 모든 일이 자기 이익과 관련하여 일어난다면 더더욱 율법에 순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12절과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1절의 말씀으로 하자면 율법은 매우 엄격하고 가혹합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온전히, 완전히 지키라고 한다면 그 율법 앞에서는 아무도 설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앞에 의로울 수 있는 자가 없고, 율법 앞에 구원을 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 그대로 너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율법 즉 율법의 엄격성을 제한하고 그 가혹성으로부터 구원받은 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심판은 긍휼의 심판입니다. 율법으로 심판하는 공의의 심판이 아니라 긍휼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긍휼의 심판은 본래 공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받으심으로 공의의 심판 대신 긍휼의 심판을 받게 된 데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너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너희도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향한 긍휼이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도 말하고 행하는 것이 긍휼을 따라 말하고 행하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너희가 긍휼을 행하지 않는다면 긍휼 없는 심판, 다시 말해 공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공의의 심판, 긍휼의 심판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긍휼의 심판을 받는 자들은 긍휼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이런 경고의 말씀을 통해 확증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말씀합니다. 긍휼이 공의를 이기고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무엇으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가?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이익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로 대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가 아니라 긍휼로 대하셨기 때문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무엇보다 차별하는 것, 외모로 취하는 모든 방식에 대해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고, 신앙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고린도후서에 보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씀도 있습니다(고후6:14). 그러나 이 때는 차별 혹은 외모로 취하는 목적, 즉 자기 이익된 것을 취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죄와 함께 먹고 마시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차별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오늘날 동성애도 괜찮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떠한 죄든 죄와 관련해서는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 이익을 위해서 차별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결코 외모로 판단하고 외모로 취사선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향력이란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줘야 할 자들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쉽게 판단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여러분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는 좀 아프고, 자존심이 상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곧바로 저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저주인가? 물론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택하신 백성을 다루실 때 단지 징계 자체로 끝나는 법이란 적어도 하나님께는 결코 있지 않습니다. 직장이 어떠하고, 가정이 어떠하고 하는 것들은 때로 내가 감당하고 있지 못하고, 자족하지 못해서 하소연하기 때문에 부정적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로 이런 일을 감당케 하시는가로 생각해 본다면 반드시 우리의 삶의 자세가 달라져야 할 부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외모로 속지 마셔야 합니다. 외적인 것, 보이는 것에 의해 쉽게 판단하지 마셔야 합니다. 한국은 지금 성형열풍 가운데 있습니다. 다 외모에 철저히 메여있다는 증거와도 같습니다. 성도도 성형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형을 합니까? 실제 얼굴을 뜯어 고쳐서 성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성형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상관없는 성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떻게 대하셨는지 말씀을 통해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영광의 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거저 받은 자들입니다. 받을 수 있는 자들이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결코 받을 수 없는데 거저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것은 세상적으로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할지라도 믿음에 있어서 부요하도록 하기 위해서, 또한 더더욱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심지어 율법으로 보자면 공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때문에 공의의 심판이 아닌, 긍휼의 심판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긍휼로 사람들을 대해야지 결코 차별하거나 외모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 있는 말씀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찬을 앞두고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의 열매로서 어떤 사랑을 가지고서 나타내고 있는지 한 번 돌아보시면서, 혹 믿음에 합당한 열매가 부족하다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심령을 가져야 할 것이고, 나아가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해 달라고, 나아가 이웃에 대하여도 그런 사랑이 나타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