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죄송합니다.
"나 죽으면 아버지 옆에 묻어줘."
밖에는 봄비답지 않은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토요일 오후, 한가하게 낮잠을 즐기던 나는 화들짝 놀라 깨었다. 주무시는 줄 알았던 어머니는 어느새 일어나셔서 나를 내려다 보고 계셨다.
무척 조심스럽게 하시는 말씀이었지만 그 억양 속에는 간절한 소망과 결심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머니는 전에 누가 뭐라 해도 꼭 화장해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동안 산소라도 쓰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수없이 화장을 당부하시던 어머니께서 뜻밖에 하시는 말씀이라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래, 그랬었지. 그런데... 왜 그런지 두 번 죽는 것 같아서..."
어머니는 지난날 자식들은 물론, 조카며느리들한테 까지도 그토록 다짐하시던 말씀을 기억하시는지 마지막 말끝을 흐리셨다. 사실 나는 어머니께서 장례에 관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때 이미 화장을 결심했었다. 그래서 화장을 말씀하실 때 속으로 잘됐다고 생각했었다.
우리 집안에는 큰아버님께서 생전에 마련하신 조그만 동산이 있다. 양지바른 그곳엔 이미 조부모님과 큰아버님 내외분, 그리고 아버님이 모셔져 있다. 여러 기基를 더 쓸 수 있는 충분한 여유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 뜻대로 화장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쓸쓸하지 않으시도록 어머니의 일부를 아버님 산소에도 뿌려 드릴 생각이었다.
사고를 당하신 후 지병까지 악화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계실 때 형제들은 모두 내 뜻에 동의 했다.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그 많은 날 중 반은 의식이 없으신 상태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셨고, 의식을 찾으셨다 해도 고통뿐이었던 그 순간에 어머니는 엄청난 삶의 의지를 보이셨다.
자식들이 담당 의사의 거듭된 '예고'에 연락망과 영안실에 댈 음식을 점검하는 등 해프닝을 겪었던 그때도 어머니는 "죽고 싶지 않으시냐?" 는 누님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셨다.
30여 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큰 누님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시댁을 따라 역시 미국으로 떠났던 작은 누님도 와 계셨고, 유학 중 허둥지둥 귀국한 막내를 비롯, 세 여동생들도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모습에 가슴 아파했다.
"엄마, 너무 아프지? 이렇게 살아 있으면 무얼 해. 차라리 죽고 싶지 않아?"
젊은 나이에 좀 더 잘살아 보겠다고 멀고도 낯선 나라에 가서 두 아들 약사 만들고, 의사 만들며 정말 열심히 사느라 센머리 연갈색으로 물들이고 엄마 앞에 선지 겨우 두 번째인데, "숨 좀 돌렸으니 자주 나올게" 하고 떠난 지 몇 달 안되어 허겁지겁 날아온 딸인데 사랑하는 엄마를 저승으로 보내고야 싶었을까.
누님은 지금도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하신다. 그래서 어머니의 고통이 빨리 끝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점에 대해 담당 의사들도(합병증이 많아 3개 과 합동 진료였다)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그것이 사람의 본능이든 어머니의 바람이든 삶에의 의지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그때까지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우리 가족은 나만 빼고 모두 가톨릭신자다. 서너 번 이렁저렁한 일로 성당엘 따라가 보긴 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주변만 맴돌고 있는 터다.
내가 어머니의 영면 후 화장을 생각한 것은 '굴레에서의 영원한 해방'을 위함이었다.
살아오신 팔십여 년을, 적어도 김씨가문에 시집오신 이후 어머니는 자신은 장롱 속에 깊이깊이 묻으시고 오로지 남편과 자식들을 위한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내셨다. 또 처녀 시절부터 앓으셨다는 그 몹쓸 놈의 '속병' 때문에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한학자 가문인 우리 집은 따뜻한 부부의 정을 나누며 오순도순 자식들과 사랑을 나누기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가풍家風이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오신 어머니들이 대부분 그러셨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어머니의 삶은 너무도 영어囹圄의 몸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해드릴 수있는 방법으로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안겨 드리고 싶었다. 비록 돌아가신 뒤일지라도 육신과 영혼을 저 넓은 하늘과 바다에 안겨 드리고 싶었다. 몇 평 유택幽宅에 머무시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께서 지금 아버지 옆에 눕고 싶으시다는 거다.
참으로 기적이었다. 도저히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실 것만 같더니 일 년 반 정도의 투병 생활 뒤 지팡이를 짚고 걸으실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때 우리는 너무도 기뻐했고, 나는 틈나는 대로 열심히 모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 후로 일 년이 지난 지금, 어머니는 다시 누우셨다.
골절부위(요추와 골반)의 통증을 호소하시더니 기력이 쇠진하셨는지 혼자서는 몸을 가누기가 어렵고 가끔 딴 말씀을 하신다.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 딴 말씀을 하실 땐 깜짝깜짝 놀란다.
"이러시면 안되는데... 몸은 불편하셔도 정신만은 맑게 품위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사셔야 할텐데..."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요즘에는 바깥 출입은 못하시더라도 집안에서는 붙잡고 걸으실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숨 놓은 상태다.
웬일이실까? 심경에 변화라도 있으셨단 말인가? 그동안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겪으시면서도, 그 문제는 한 번도 말씀 안 하시더니 왜 갑자기 아버지 곁에 누우시겠다는 걸까? 아니야, 갑자기가 아니야. 아마도 침묵하고 계시는 동안 당신께선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셨을 거야. 결심은 하셨지만 말씀하실 때를 미뤄왔을 뿐일 거야.
삶과 죽음 사이를 오락가락하시는 동안 어쩌면 그 전에 느끼지 못하셨던 죽음에의 두려움을 느끼셨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보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 아버지 곁에 누우시면 두려움도 외로움도 덜 하실 거라고 생각하셨을 듯하다.
어머니는 요즘도 가끔 자손들의 도움으로 용변을 해결하실 때 "식구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말고 빨리 가야 하는데..." 라고 혼잣말을 하신다. 미안한 마음에,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나 하는 회한 때문에 안타깝고 괴로워하시는 게 역력하다. 육신의 고통도 힘드신데 정신적 고통까지 겪으시니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길지 않은 여생, 한없이 기쁘고 행복한 시간 들로만 채워 드릴 수는 없을까.
언뜻 아버지 곁에 가시겠다는 어머니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하신 말씀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은 내 생각과 다르다는 점을 말씀드렸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장차 산소는 정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문제는 사촌 형님들께도 여쭈었다가 한 분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도 산소를 정리해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짐짓 어머니의 진심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표정 뒤에 숨기신 마음을 읽으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는 이제 예전같이 자식들을 생각해 마음과 표정을 달리하실 수 있는 어머니가 아니셨다.
"그건 그래...“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맺지 못하시고 쓰러지듯 요 위에 누우셨다.
"어머니 염려하지 마세요. 한식 때 산소에 가서 작은 형(사촌)하고 어머니 모실 자리를 보아 두었는걸요. 할아버지하고 아버지 사이에..."
정말이었다. 비록 화장을 말씀하신다 해도 진심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과, 화장은 어머니보다 내가 더 원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에 모실 자리를 정해 두었던 것이다.
다른 날 같으면 장난기 섞인 내 말에 웃으실 만도 한데 오늘은 돌아누우시며 눈물만 훔치셨다.
(1998년 봄, 살아계셨을 때 써놓은 글입니다. 어머니는 그 후 2년 가까이 더 사시고 2000년 1월 20일 여든여덟 해의 생을 마감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