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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1970~80년대의 엄친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비고사 전국 차석으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는데,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나?
그런 얘기가 있지만, 어릴 때 시험 좀 잘 본 것이 대수는 아니다. 요즘은 오히려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다.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나는 학생 시절에도 시험성적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큰 인생과 사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내가 원래 물리학과 수학을 좋아했었고 특히 물리학에 매력을 느껴서 고2가 되면서 이과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 해 여름방학 때 집중적인 독서기간을 가지면서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지음, 창작과비평사 펴냄)부터 당시 197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이 읽던 책들을 많이 읽었다. <창작과 비평>(계간지, 창비 펴냄)도 정기적으로 봤다. 그러면서 물리학이나 수학이라는 것이 모순된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고, 이런 학문에 대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 의한 공부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허용하지 않는 사치라고 느꼈다. 대신 '사회에 대해 공부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길을 모색하는 쪽으로 진로를 잡아야 하지 않나' 하는 고민을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이과 공부를 하고 대학시험은 문과로 봤다.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지는 않았다. 밤늦게까지 볼을 차는 체질이었지(웃음).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후 2학년 때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이라는 어쩌면 출세가 보장된 상황에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것 때문에 학교에서 제적당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 심정은 어떠했나?
그때 유신말기에는 사실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숫자는 굉장히 적었다. 암묵적으로는 지지가 있었을지언정 엄혹한 탄압의 시대였기 때문에 1980년대와는 달리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나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때 이미 그런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이고 그랬기 때문에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고1 때부터 정치적 행동을 시작했다. 요즘은 '조중동'이라고 불명예스러운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광고 사태라고 해서 광고주들이 광고를 내지 못하게 해서 이것을 두고 싸우면서 해직언론인들이 많이 생겼다. 그때 나는 전교를 돌아다니며 모금을 해서 언론자유를 위해 소위 '격려 광고'라는 것을 내기도 했다. 그때부터 요주의 인물이 됐다. 당시 엄청난 시국사건이었던 민청학련 사건에도 영향을 받았다. '아, 이렇게 불의와 독재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구나.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동아>(동아일보 시사 월간지)에 실린 민청학련 사건과 박형규 목사님에 관한 기사를 보고 큰 감동이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구나. 정의를 위해 싸우고 감옥도 가는 목사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들은 만날 천국가라고만 외치는 줄만 알았는데(웃음), 그 글을 읽고는 박형규 목사님이 이끄시는 제일교회에 제 발로 찾아가기도 했다. 이게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중학교 2학년 때 10월 유신이 있었는데 그 때부터도 이미 정치의식은 있어서 '박정희가 영구 독재를 하려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민주인사, 재야인사들의 강연회도 다니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조금 까졌다(웃음). 그런 내게 중2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 펴냄)를 선물로 사주셨다. 그래서 대학교 가서 학생운동을 하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선배는 "너 참 불쌍하다"고 했다. 1~2학년 때는 미팅도 하고 연애도 하고 놀다가 나중에 의식화가 돼서 학생운동을 해야 남는 게 있는데, 학교 들어오자마자 학생운동만 하니 안됐다고 한 것이다. 어쨌든 1학년 때부터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면서 그 후로 7~8년 정도 매년 수사기관을 들락거리지 않고 해를 넘긴 적이 없었다.
의외다. 곱게 자란 느낌인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것은 아니고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그런데 선친이 사업에 실패해서 막내인 내가 자라날 때는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신문 돌리는 일도 해봤다. 그런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면 고생 하나 모르고 자란 귀공자라고 했다(웃음). 세상 물정도 모르고 좋은 집안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자라고 학교도 범생이처럼 서울대와 하버드를 다니면서 누릴 거 다 누리며 산 사람처럼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아니다. 학교 다니면서 나만큼 많이 맞은 사람도 많지 않을 거다. 모범생도 아니었고 숙제도 안 해가고 지각도 많이 해 맞기도 했고, 특히 선생님들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해서 많이 맞았다. 그때는 선생님들이 권위에 도전하면 폭력으로 다스렸고 감정을 담아 때리기도 했다. 피가 나서 바지가 살에 달라붙을 정도로 맞아보기도 했다. 남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살았다.
그런데 보면 참 밝은 성격이다. 항상 웃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낙천주의자이다. 지나간 일을 자꾸 후회하고 옛 원한을 돌이키고 앞일을 걱정해봤자 도움되는 것이 없지 않은가.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내일 해도 될 일을 오늘부터 하지 말자'를 내 모토로 삼고 마음 편하게 살려고 한다. 앞서 말한 고생들은 다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과 싸운 것은 '자기가 뭔데 내가 틀렸다고 말할 자유도 없고 권리도 없다고 해?'라는 인간 유종일로서 가진 자존심 때문이었다. 데모하면 얻어맞고 감옥 갈 줄 뻔히 알면서도, 또 막상 아프고 힘들긴 했지만 위축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름 거칠게 살았고, 어렸을 때부터 사회 구조적인 문제와 어른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많이 부딪혔다. 나는 고분고분한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여기저기 많이 박치기를 했지만 그래도 밝고 자신감 있었다.
스스로 생각했을 때 나는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본다. 비록 만날 얻어터지고 감옥에 가긴 했지만 공부의 영역에서는 늘 노력한 것에 비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런데 이것이 대한민국에서는 엄청난 특권이었다. 만약 공부 못하는 사람이 나처럼 학교생활을 했다면 정학이나 퇴학까지도 당했을 거다. 데모를 주도했는데도 봐주었다. 사소한 잘못들에 대해서도 선생님들께서 비교적 관대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도 불만이었다. 왜 나를 차별대우해서 잘해주는 것도 공평한 처사는 아니었으니까. 다른 아이들은 내가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서 까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봤을 때 아니다 싶은 것에 대해서 대들고 싸웠을 뿐이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하나의 특권이자 학생으로서는 권력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 특권을 본인을 위해 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상대적으로 약한 친구들을 위해 싸우는데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그리고 혹시 선생님들이 너를 못 건드니까 그렇게 잘난 척 대들고 그러는 거 아니냐며 오히려 친구들로부터 따돌림 즉 왕따를 당하지는 않았나?
ⓒ프레시안(최형락) |
왕따는 아니었다. 놀기를 좋아해서 노는 데는 다 꼈다. 물론 철없이 잘난 척을 해서 나를 아니꼽게 생각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추첨(속칭 뺑뺑이) 1세대였는데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집안과 모든 주위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경기고등학교에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추첨으로 서라벌고등학교에 갔다. 그때 서라벌고등학교라고 하면 깡패학교, 후진학교라는 인식이 있었다. 학교 입학 전에 반 편성 시험을 봤는데, 전교 1등을 했다. 게다가 집안의 경제적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학교에서 알아서 3년 동안 학비 전액을 지원해주는 장학금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등록금을 하나도 내지 않고 다녔다.
당시 문교부(지금의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우수반 편성을 금지했는데, 우리 학교는 편법으로 우수반을 만들었다. 30명은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나머지는 다른 학생들로 채운 것이다. 당연히 수업은 우수한 학생들 위주로 진행했다. 공부 잘하는 30명을 위해 나머지 학생이 철저히 희생당해야 하는 구조였다. 나는 그것부터가 너무나 불만이었다. 불의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공부를 잘한다거나 집안에 돈이 좀 있어서 엄마가 선생님 찾아다니는 학생들은 지위를 누리고 나머지 아이들은 소외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관련해서 지금은 이미 돌아가신, 우리 담임선생님께는 개인적으로 죄송하지만 한 일화가 있다. 담임선생님은 당시 학교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우수반을 맡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잘하는 일 중의 하나가 학생들로 하여금 등록금을 빨리 내게 하는 일이었다. 납입금 마감이 한 달 남았을 때부터 틈틈이 종례시간에 "너 언제까지 낼 거냐?"면서 체크했다. 하도 닦달하니 납입금을 낼 수 있는 애들은 다 내고 늘 사정이 안 되는 친구들만 남게 되었다. 그 친구들을 앞에 세워두고 "너, 도대체 언제까지 낼 거야?"라고 재촉하면 그들은 매번 기가 죽곤 했다. 그게 얼마나 아이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인가. 어느 날 그 모습을 보고 그만 폭발해버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당신이 교육자요, 세리(稅吏, 세금 징수 일을 맞아보던 관리)요?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라고 선생님께 삿대질하며 덤벼버렸다.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져 나더러 교무실로 오라고 했다. 그런 후에 대걸레자루로 어마어마하게 맞았다. 맞으면서도 도대체 내가 왜 맞아야 했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고 화가 더 끌어 올랐다. 맞은 것이 하도 억울하고 아파서 벤치에 앉아 혼자 열을 식히고 있는데 옆에서 갑자기 분 냄새가 나고 보드라운 살결의 접촉이 느껴졌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계셨던 젊은 여선생님이 내 옆에 앉으신 것이다. 그러시더니 "차 한 잔 하러 갈까?"라고 하셨다. 그러고 당시 다방에 가서 "왜 그랬니? 아프니?"라는 말 한마디 안 하시고 커피 한 잔 사주시고는 집에 가라고 하셨다. 정말 '쿨'하지 않은가.(웃음) 그때 처음으로 다방이란 곳을 들어가 봤는데 지금도 나는 그 선생님이 고맙고 참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내 삶은 지금도 그 연장선에 있다. 지금 학교(KDI)와 소송하고 있다. 대학원장님은 점잖으신 분인데 지금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고 계시다. 사실 서로 피곤한 일이다 보니 굳이 그렇게 소송해야 하느냐고 하시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청년 유종일을 사로잡았던 화두가 있었다면?
사회 정의였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부터 유신독재까지 많은 것들이 굉장히 불의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그 상황에서 나름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학벌사회인 대한민국에서 공부를 잘했으니 그랬다. 우리 집안이 어렵기도 했지만 나는 과외나 학원이 필요하지 않아서 그것들과 일체 담쌓고 지냈고 공을 차는 것을 좋아해서 야구, 농구, 축구 다 하고 대학생들 보는 책이나 읽고 있고 학교 공부에 투자한 시간이 민망할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운이 좋아서 시험은 항상 잘 봤다.
공부 잘하는 것이 말 그대로 거저 받은 선물, gift였던 셈이다.
그렇다. 나는 수업에 그다지 집중하지도 않고 떠들고 장난치면서 대충 공부하는 데도 성적이 잘 나왔다. 그래서 솔직히 미안했다. 그리고 공부 잘하거나 집안이 잘사는 아이들이 그렇지 못한 아이들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고, 공부 못하고 가난한 친구들은 인격이 무시당하고 최소한의 권리까지도 박탈당하는 것에 예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쪽으로 감수성이 발달했다. 그래서 부조리한 것을 참지 못하고 한 번씩 질러버렸다.
본인이 노력하지 않고 받은 재능으로 인해 누리는 특권에 대해 나름의 부채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내가 받은 특권을 사회를 위해 써야겠다는 거창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불의와 불공평과 위선을 참지 못하는 감수성은 강했던 것 같다. 나는 굉장히 감정적인 편이다. 내 감정이 그런 것들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힘이 있거나 나이가 많다고 혹은 완장을 찼다고 해서 명백히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눈 뜨고 보지 못하겠다. '그래 좋다, 한번 박아보자' 싶다. 심지어는 군대에서도 그랬다. 한 번은 선임 하사가 술에 취해 내무반에 와서 아무 이유 없이 기합주고 괴롭혔다. 고참들은 군대생활이 아니꼽다고 하면서도 머리 박으라 하면 시키는대로 하는데 나는 반항해버렸다. 그래서 나 때문에 부대 전체가 '빤빠라'라고 겨울에 빤쓰(속옷)만 입고 눈 쌓인 연병장에 나가 구보를 한 적도 있다. 고참들은 쪽팔리고 잠도 못 자고 고생하니 날 죽인다고 했다. 여러 후환이 따르곤 했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졸업 후 대개 민주화운동이나 노동현장 등으로 갔다. 그런 일반적 경로가 아닌 유학을 생각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대학교 1학년 때는 제일교회에서 전태일 열사의 남동생과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이랑 같이 단식농성을 했고, 또 서울대 사회학과 심포지엄 사건으로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 1학년이라고 봐줘서 며칠 만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대학교 2학년 때는 약 2주 동안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나왔고, 대학교 3학년 때는 긴급조치 9호 위반 마지막 사건의 주동자로 구속되었다. 매년 일이 있었다는 게 농담이 아니다(웃음). 박정희 대통령 사후 긴급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풀려나서 복학했지만, 1980년에 다시 제적을 당했다. 나는 5.18 국가유공자인데 당시 체포되어서 특수수사대에서 여러 가지 험난한 경험을 했고, 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강제징집을 당했다. 최근 학림사건이 무죄판결 됐는데 나는 군에 입대한 후 무림사건이라는 것에 연루되었다. 이등병 신분으로 보안대에 끌려가서 흔히 서빙고라 부르는 전설적인 보안대 대공분실에도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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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후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민주화운동이나 사회변혁운동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가졌지만,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갈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당시 운동권 분위기는 소위 현장론이 득세해서 노동현장에 가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나는 대세에 추종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현장에 갈 사람은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분야에 진출해서 사회를 바꿔나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경제학에서 비교우위론을 배워서 그런지 몰라도 각자의 자질에 맞게 효과적으로 민주화운동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모두 다 현장에 가야한다는 말은 굉장히 교조적으로 들렸다. 대학생 때 구로동∙가리봉동의 공단에서 야학도 꾸준히 했고 노동자들과 편하게 잘 지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또 다른 이유로 내가 운동가 내지는 혁명가로 살아가는 것에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학생 때 주장했던 것들이 이론에 대한 깊은 고찰이나 심사숙고 없이 섣불리 한 행동이라 여겨졌고 정의감만 앞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제대로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지 되돌아봤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솔직히 공부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마침 전두환이 일정한 자유화 조치를 취하면서 그 첫 단계로 제적당한 학생들의 복학을 허용했다. 그게 1984년인데 이때 복학을 하면서 공부를 좀 진지하게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매우 열정에 찼던 학생운동 리더로서 자기 운동에 회의를 느꼈다는 자체가 어쩌면 절망 혹은 실패로 와 닿았을 것 같다. 당시 분위기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어쩌면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
내가 미국에 유학을 간다니까 미 제국주의에 투항하는 거다, 변절이다, 이렇게 비난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누가 정말 변절하는지 두고 보자.' 어쨌든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원래 대세추종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위해 내가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정말 해보고 싶은 것을 나름대로 찾은 것이다.
서울대 학부 졸업 후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박사과정에 진학했을 뿐만 아니라 전액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한국학생 최초로 학부만 졸업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던데.
일전에 정운찬 선생님이 총리로 지명되셨을 때 <오마이뉴스>에 선생님께서 자기 정체성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공개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 편지에서 살짝 밝힌 바 있는데, 사실 정운찬 선생님은 내가 유학을 가서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유신시대에 나 같은 운동권 학생의 지도교수는 몹시 힘들었다. 당국에서 지도교수에게도 많은 압박을 가했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꼴통 운동권 학생이었으니, 지도교수님께도 큰 부담이었다. 사실 내게는 담당 형사도 있었다. 연인 사이도 아닌데, 매일 집 앞 다방에서 만나 둘이 커피 한 잔 마시고 형사와 함께 택시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당시 부잣집 애들도 택시를 타지는 않았는데 가난한 내가 그런 호사를 누렸다.(웃음)
내가 3학년 올라갈 때 정운찬 선생님이 미국에서 막 새내기 교수로 오셨다. 당시 내 지도교수님은 연세가 많으신 분이었는데 학과장께서 지도교수를 바꿨다. 골치 아픈 학생인 나를 젊은 정 선생님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래서 정 선생님과 상견례를 했는데 참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밥과 소주를 사주시며 내 이야기를 다 들으셨다. 그러더니 "네가 다 맞다, 나는 네 생각에 다 동의한다" 하시면서 "'학생운동 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하는 대신 딱 한 가지만 부탁을 하겠다. 이것은 꼭 들어줬으면 좋겠다"라며 반드시 성적관리를 하라고 하셨다. 나중에 언제 도움이 될지 모르니 시험 때 한 이틀만이라도 신경을 쓰라고 하셨다. 내 스타일을 파악하셨던 거다. 그 전에는 학교 공부와 담쌓고 지냈지만, 그 후로는 적어도 시험 때는 신경을 조금 썼다.
어쨌든 그런 배경이 있어서, 좀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정운찬 선생님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쭤보았다. 그랬더니 "그래요"하시면서 당시 유학 준비를 하고 있던 홍익대 전성인 교수를 소개시켜 주시면서, 전 교수에게 유학 준비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어보라고 하셨다. 사실 나는 유학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셨던 것 같다. 어쨌든 그래서 그때 토플과 GRE가 시험 이름인 줄 처음 알았다(웃음). 그리고 선생님은 나의 스타일로 봐서 학풍이 자유로운 하버드가 잘 맞을 거라고 하셨다. 그런데 솔직히 당시 한국 학생이 하버드 경제학과에 들어간다는 것은 서울대 경제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톱으로 졸업한 학생이거나, 이에 더해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한승수 교수의 추천서가 있어야만 가능했다고 한다. 나는 솔직히 이런 것도 몰랐다. 나의 무모한 도전이 성공해서 이 신화가 깨졌다. 아마 정운찬 선생님 말처럼 하버드가 학풍이 자유롭고 그래서 내가 쓴 "I was a prisoner"로 시작하는 에세이를 보고 '얘, 조금 또라이 같은데 뽑아보자' 그랬던 것 같다.
미국에서는 학부 이후에 박사과정으로 들어가는 게 자연스럽다. 거의 다 석·박사 통합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외국유학생은 석사 학위 소지자들을 뽑았다. 나는 제적 두 번 당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그러면서 남들보다 늦어졌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전두환 정부가 학부는 복학을 시켜주었지만, 운동권 학생은 서울대 대학원에 못 들어가게 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유학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정운찬 선생님이 나랑 하버드가 잘 맞을 것 같다고도 하셨고, 그래서 나는 성적도 안 되고, 석사 공부도 안했고, 부족하지만 좀 개기는 심정으로 지원을 했다. 내가 최초인지는 잘 모르겠고 내가 하버드 다닐 때 나 같은 경우를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날 뽑으려면 장학금 다 주고 뽑고, 아니면 뽑지 말라고 편지를 썼다. 그렇게 해서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까지 지원도 받으며 다니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내가 공부를 잘하고 잘나서 그랬던 것이 아니고 'Need-blind policy'라는 하버드 입학사정 정책 때문에 가능했던 것을 알았다. 이 정책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정책인데, 입학사정을 할 때 이 학생의 경제적 여건은 일체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잠재력만 보고 뽑은 후에, 경제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면 장학금 주고 필요가 없으면 안 주는 거다. 그래서 나는 돈이 없어서 장학금 혜택을 받은 거지 뛰어난 학생이라 장학금을 받은 것이 아니다.
에세이가 "I was a prisoner"로 시작한 것이 인상적이다.
내가 하버드에 가게 되자 후배들 사이에서는 대학원도 안 다니고 학교 다닐 때 데모만 하고 한승수 교수 추천서도 없는데 어떻게 하버드에 가게 됐는지 궁금해 한 모양이다. 후에 김상조 교수에게 들었는데 후배들이 내 에세이 카피를 구해서 봤다고 한다(웃음). 그런데 시작이 "I was a prisoner"여서 따라 할 수 없었다고 한다(웃음). 어쨌든 "I was a prisoner"라는 첫 문장이 사회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을 얘기하는 단초로 사용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찍이 민주화운동을 하느라 대학 초반 성적이 좋지 못한 것을 좀 이해해달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뭐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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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의 유종일을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도 같지만, 주류 경제학을 공부하고 난 후 개혁적인 경제학자로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주류 경제학자의 일반적 경로가 아닌 개혁적인 경제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대학 제적을 당하고, 학력 고졸에 앞으로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던 청년이 하루아침에 하버드 대학 박사과정에 장학생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어마어마하게 신분상승을 한 것이었다. 하버드에 와 보니, 하버드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집안이 대단하거나 집안이 대단한 부인을 두었거나 적어도 나름대로 굉장히 잘 나가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하버드 박사 출신이라는 것이 그냥 기득권 세력에 편입되어서 그야말로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가 참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이것이 천 길 낭떠러지처럼 느껴졌다. '아! 내 인생은 그게 아니지. 인간 유종일이가 그런 식으로 살 수는 없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비록 지금 내가 여기 와 있지만 민주화운동을 계속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곳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이어갔다. 그때 보스턴 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할 수 있는 단체가 딱 하나 있었는데 뉴잉글랜드 목요 기도회라고 당시 홍근수 목사님이 리더로 계셨다. 거기에 들어가서 그곳에 계시는 목사님들과 신학생들, 교포사회 지도자들과 함께 모임을 하고, 보스턴에서 데모도 하고 멀리 워싱턴까지 가서 데모도 하고 그랬다. 가장 뿌듯하다고 여기는 일은 1985년에 하버드에 가서 1990년에 미국 노트르담 대학교(University of Notre Dame) 조교수가 되었는데, 그해 봄 하버드를 떠나기 전에 '광주항쟁 1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하버드대학에서 광주항쟁 기념행사를 한 것은 아마 전무후무한 일일 거다. 지금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있는 마도원 씨가 가세하여 뮤지컬 공연도 했고, 미국인들과 교민들도 많이 와서 광주항쟁을 기렸다.
교수로서 학문적으로 출세하려면 테크니컬한 논문들 많이 내는 것이 중요한데 나의 관심은 세상에 중요한 문제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학문적으로 유행을 따라가자면, 당시 한국 학생들에게 유행하였던 계량경제학이나 수리경제학을 해야 하는데 나는 전부터 갖고 있던 문제의식을 잃지 않고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버드에 있었지만 유럽의 진보적인 경제학자들과도 대학원 시절에 많은 교류를 하였다. 물론 주류경제학도 다 공부하긴 했지만 진보적인 학자들의 비주류 이론들도 함께 공부했다. 그때 막 프랑스에 등장했던 레귤라시옹 스쿨의 대표적인 학자들도 만났고 영국의 유명한 진보 경제학자들도 만났다.
사실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계속하면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굳이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이민사회에는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다'는 말이 있다. 나 또한 그런 것을 느낀 거다. 처음으로 조교수가 되어서 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LA에서 로드니 킹 사건이 발생했다.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 남자애를 백인 경찰들이 개 패듯이 패는 비디오가 유출되어서 그것을 본 흑인들이 들고일어났다. 알다시피 당시 한국인 상점들도 큰 피해를 보았다. 어쨌든 인종차별과 사회정의 이슈가 폭발했는데도 캠퍼스가 조용한 것이었다. 나는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야, 너희들은 데모도 안 하냐. 미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의 뿌리가 이렇게 터져 나왔는데 너희들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와서 내 강의 듣는다고 앉아있냐?"라고 했다. 그러데 분위기가 썰렁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태도였다. 답답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사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나도 그렇게 되어갔다. 외형상으로 보면 분명 나는 미국 사회의 일원인데 미국 사회의 문제가 나의 문제로 다가오고, 그런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관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인이 아닌 객으로 살고 있는 거다. 개인생활은 있되, 그 사회의 주인이 아닌 거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애들 때문이었다. 하버드에 처음 갔을 때 이번에 세계은행 총재가 된 김용 씨와 가깝게 지냈다. 우리 아내가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알바를 한 것을 계기로 친해졌다. 그는 학부를 브라운 대학교에서 했는데, 학창시절 운동 서클을 만들어서 열심히 활동한 아주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그를 통해 한인 1.5세나 2세 학생들과도 접촉을 하게 되었는데 이들과 만나보니 정체성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학에 와서는 아무도 본인을 미국인으로 안 쳐주는 것을 경험하고 충격을 받는다. 생긴 것만을 보고 "야, 너 어느 나라 출신이냐? 영어 왜 이렇게 잘하냐?" 이렇게 나오니까 거기에서부터 충격을 받는 거다. 그래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겠고 한국에 와서 김포공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어눌한 한국말로 "광화무은으로 갑쉬~다~"하면 택시 기사가 "야, 한국 놈이 한국말도 못해?" 이러고, 여학생들한테는 다짜고짜 "양놈한테 시집가면 안 된다"고 하고. 그래서 또 충격받고 연세대 어학당에 가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면 "양키, 고 홈!" 하면서 애들이 데모한다. 그러니까 애들이 "Who am I?" 하면서 괴로워하는 거다. 사실 나는 민족주의를 비롯한 모든 집단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정의와 인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가 뿌리 내려야 할 문화적 바탕이 있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편하지 않겠나, 그리고 우리 애들한테 그것들을 심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수석 제의도 받았었고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경제 공약을 총괄하는 등 정치적으로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두 정부의 개혁정책이 후퇴하는 것을 비판하며 거리를 둔 것으로 알고 있다. 혹시 그 기회들을 보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 또는 고위직에 대한 유혹으로 자신의 개혁적 태도를 접고 싶던 순간들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실망이 컸다. 김대중 정부 때 나름대로 사이드라인에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고쳐 볼까 노력했었다.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거시정책이 무엇보다도 잘못됐다고 보았다. 경제가 엄청나게 위축되고 대량실업사태가 벌어지고 기업들이 줄도산하는데, 여기에 고금리하고 재정긴축을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정책이다. 당시 나는 이것을 팽창정책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IMF가 사면초가로 비판을 받으면서 나중에 정책을 변화시켰는데 그랬기 때문에 한국 경제가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 또 재벌개혁을 좀 더 세게 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왔다 갔다 하다가 정권 말미에 용두사미가 되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나는 마구잡이로 규제를 완화하고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하고 자본시장 개방, 외환 자유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반대했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한국이란 사회를 몸으로 익히고 난 후 사회적 발언을 해야지 외국에 있다 들어와서 아는 척하면서 함부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중매체에 글을 쓰는 것은 한국에 들어온 후 최소 2∼3년 동안은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을 어기고 딱 두 번 <한겨레>에 특별 기고를 한 적이 있는데, 하나는 재정 건전성의 신화에 관해서, 즉 무조건 긴축을 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고, 또 하나는 2단계 외환 자유화를 한다고 했을 때 이것을 하면 안 된다고 글을 썼다. 이 기사를 쓰고 난 다음에 당시 재경부에서 전문가 의견을 수렴한다고 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그래서 나의 의견이 좀 받아들여지나 보다 하고 나갔더니, 나를 포함해서 약 10명 정도를 불렀는데 외환자유화를 반대하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 자리가 나 엿 먹이는 자리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뭐라고 한 줄 아나. 여기서 잘난 척 좀 해야겠다(웃음). 관료들을 대할 때는 확고한 철학과 자신감과 깡이 있어야 한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느냐면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할까요. 우리가 외환위기 이후로 실업자가 얼마가 생기고, 노숙자가 얼마나 생기고, 가정파탄이 얼마가 생겼는지 아십니까? 외환위기를 초래하는데 아무 잘못이 없는 서민들이 지금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기 있는 분들은 다 경제 관료고 경제학자들입니다. 적어도 일반 국민에 비해 훨씬 더 책임이 큰 사람이지요. 나를 포함해서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고통분담을 했는지, 어떻게 책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에 제2의 외환위기가 나면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모두 이름을 공개할 테니 책임질 생각 하세요. 내가 이름 다 적어놨습니다." 그랬더니 전원이 "원칙적으로는 자유화하는 게 맞지만 부작용이 우려되고 보완정책이 필요하고 점진적으로 해야 하고…"라고 하면서 말을 바꾸는 거다. 결과적으로 그때 추진했던 제2단계 외환자유화 조치가 2012년이 된 지금 이 시점에도 아직 안 끝났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렇듯 나름 노력을 하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 나의 노력은 큰 의미가 없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김대중 정부 시절의 사이드라인에서 했던 조언조차 할 수 없이 철저하게 배제된 상태였다.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지만 의미 없었다. 경제 정책이 솔직히 큰 틀에서 삼성의 영향력 아래 있었지 않았나. 지금 이명박 정부가 부자 감세라고 비난받고 있는 게 법인세, 소득세 인하다. 참여정부 첫 경제정책이 바로 그거였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완화해서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한미 FTA를 밀어붙였다.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하겠는가. 혹시라도 좀 바뀔까 기대를 했는데 전혀 그렇게 가지 않고 가면 갈수록 신자유주의적으로 가고 있어, 도저히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전면으로 나서서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노무현 정부와 각을 세운 것이 혹시 지난 4.11 총선 과정에서 공천에 탈락하는데 원된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가 나에게 맞는 자리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는 이가 있으면 그가 선생님이건, 동네에서 압도적으로 잘 살던 의사건, 재벌이건, 대통령이건, 그 누구건 자가가 힘 있다고 나쁜 짓 하는 꼴은 못 보고 들이박고 살아왔다. 그러니까 어떤 권력이든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기는 어렵다. 물론 세상을 진지하게 바꿔보겠다고 하면 카멜레온처럼 위장변장도 다 해야 하는데. 나도 그런 거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닌데 내가 넘고 싶지 않은 선이 있는 것이다. 자유인으로서 가진 자존심 말이다. 이것은 도저히 넘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나한테 대통령 시켜준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한미 FTA는 찬성할 수 없다. 이런 거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지 않나. 나는 진인사도 안 하면서 어영부영 살지만, 이것을 농담 삼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열심히 하는 데까지 해보고 책임은 하나님이 지라고 말이다.
지난 4.11 총선 공천 과정에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 어떤 면에선 독재 정권 시대에 권위적인 사람들이야 원래 그러려니 하겠지만 민주화 운동 했던 사람들이 실제 당내에서 행하는 패권적 행동은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다.
여러 이유들로 인해 그래도 나는 언론에 부각도 되고 많은 사람들의 동정과 위로를 받았지만 알게 모르게 억울하게 경선에서 배제되거나 탈락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통합진보당의 경선 부정을 이야기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민주당의 경선도 못지않게 불공정했다. 공(公)이 아니라 사(私)천을 했고 이 때문에 압승할 수 있었던 선거를 새누리당 단독 과반수를 만들어 주는 참패로 이끌었다. 모두가 눈앞의 자기 이익만을 챙겼지 자기 욕심을 넘어서서 원칙과 가치를 지키고 나간 사람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한두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상당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었을 텐데. '지도자 빈곤의 시대구나'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공천 과정에서 처절하게 당하면서 수양을 많이 했다. 세상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억울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조금 더 겸손해지라고 이런 공부를 시켜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경제민주화라는 것이 앞으로 최소 25년은 잡고 해야 될 일이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다.
앞으로도 계속 정치를 할 예정인가?
광의의 정치를 할 것이다. 내 인생이 송두리째 정치다. 지금껏 나는 특별히 어떤 포지션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변화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이러한 정책이 필요하고, 그렇게 갈 수 있도록 일하면 되는 것이다. 관직은 이전에도 하겠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 뜻을 실현하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하지 않은 것이다. 경제민주화를 통한 사회 정의를 위해서 내 입장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즐기면서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상황에 따라서는 법을 직접 만들거나 정책을 직접 집행하는 역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리를 위해서 한다는 것은 나와 정말로 맞지 않다. 경제민주화 특별위원회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활동하면서 정책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꼭 국회의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분들이 주변에서 권유를 했고 특히 정동영 민주당 전 의원께서 간곡하게 권유하셨던 것이다. 국회의원이 목표였으면 그 전부터 힘 있는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했을 것이다.
비록 이번 총선에서는 안됐지만 경제민주화를 이루어감에 있어 유종일에 거는 사회적 요구가 크다. 경제민주화를 위해 본인에게 어떠한 역할이 맡겨져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를 실현할 구체적인 활동계획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많은 국민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음을 느낀다. 진지하고 성실하게 바람직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언젠가 사회가 나에게 구체적인 역할을 주문한다면 해야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나를 앞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조만간 팟캐스트 방송으로 경제학 강의를 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만큼 경제전문지가 많은 나라도 없는데 정작 쉬운 경제학 교과서 하나 없다. 국민들은 편향된 경제관만 주입받고 스스로 경제문제에 대해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경제학 책은 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고 말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이것이 경제학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쉬운 강의를 하려고 한다. 주류 언론이 몰아가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이론과 정책에 대해 사람들이 "세상은 그게 아니라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 인터뷰 제목이 '자유인'이다. 유종일에게 있어서 자유란?
종교개혁으로 근대세계를 여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마틴 루터의 유명한 설교 중에 "담대하게 죄를 범하라(Sin boldly!)라는 것이 있다. 타락한 가톨릭 교회의 위계 질서에 도전하는 용감한 정신이 어디서 왔겠는가. 자유란 게 그런 거다. 과감하게 저질러야 한다. 해보면 되는데 사람이 지레 겁먹고 남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정말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인 규율이란 것은 필요하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규율마저 어기라는 게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위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충실하고 과감하게 저질러야한다.
한번은 딸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학부모를 초청해서 강의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아이들에게 딱 한마디를 하자 순식간에 떠들던 아이들이 집중을 하더라. "여러분, 절대 어른 말 듣지 마세요. 어른들 말 들으면 인생 망칩니다. 부모님 말 듣지 말고, 선생님 말 듣지 말고, 이모나 삼촌 말 듣지 말아요. 인생 끝납니다"(웃음)라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고정관념이라는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너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너는 누구인지, 네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네가 재미있어하는 게 무엇인지, 보람을 느끼고 신나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내가 이것을 해보고 싶다는데 정치권력이나 사회적 편견이나 웃어른들이나 그 누군가가 억압을 한다면 그 억압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맞서 싸워보자.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충실하자.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동시대의 청년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청년들을 보면 안타깝다. 이런 현실에서 도전정신을 가지라고 하면 "놀고 있네"라고 반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의 잘못된 구조와 정책을 바꾸는 일은 또 다른 일이고 이 순간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소중한 인생에 충실하고 '이게 하고 싶다, 나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딪쳐서 해보라고 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주위의 기대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하고 그것을 위해 억지로 스펙을 쌓는 일은 안했으면 좋겠다.
안드레 애거시(Andre Agassi)라는 한 때 세계 랭킹 1위를 한 테니스 선수가 있다.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 브룩 실즈라는 프린스턴대 출신의 미녀 여배우, 그야말로 재색을 겸비한 규수와 결혼까지 했다. 그런데 그가 마약을 하고 완전히 망가졌다. 돈과 명예를 다 누리던 그가 그랬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거기에는 어렸을 때부터 그를 혹독하게 훈련시킨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가난한 이민자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테니스 훈련을 강요했다. 그래서 애거시에게 테니스는 성공의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억압이었다. 윔블던 우승을 해도 아버지에게 잘못한 것을 지적당했다. 그는 행복을 몰랐고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약에 빠지고 테니스 실력은 형편없이 추락해 선수 생명이 끝났다. 그러던 그가 다시 맹훈련을 통해 부활하고 세계랭킹 1위를 탈환한다. 그가 만든 자선단체를 통해 불우한 아이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는 가운데서 삶의 의미를 재발견한 것이다. 자신의 재단을 통해 더 많은 아이들이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재정이 필요했는데 그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테니스였기 때문에 다시 코트로 돌아온 것이다. 이때는 누구의 강요나 기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어서, 자신이 좋아서 테니스를 치게 되었다. 평생의 억압에서 해방된 그는 아버지도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무얼 말해주나? 남들의 기대가 아니라 내가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남들이 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일지라도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자유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 아무리 어렵더라도 결혼 못하고 애기 못 낳는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연애는 꼭 하자.(웃음)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장지선)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프레시안 20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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