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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목요카페 강의안>
나의 시, 나의 시론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시작하며
내가 문학에 발을 들이고 글을 쓰게 된 것은 세 개의 경험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하나는 초등학교도 가기 전에 내가 본 풍경의 경험이다. 그때 우리 집은 바로 바닷가에 면해 있었다. 사리 때는 집 담벼락 앞까지 바닷물이 찰랑거릴 정도였다. 어느 날인가 내가 낮잠에서 깨어 바다를 바라보니 붉은 석양아래 석양보다 더 붉은 단풍으로 물든 나뭇짐을 실을 작은 목선이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그때 처음 배운 ‘아름답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나는 애초에 이런 유미주의자였다.
둘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간 봄 소풍 때의 경험이다. 어렸을 때는 체격이 왜소하고 몸이 약했다. 처음으로 간 초등학교 소풍을 학교에서 괘 먼 거리인 삼학도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걸어가는 중에 너무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도시락에서 젓가락이 빠져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그걸 집어들 기력이 없었다. 어찌어찌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그만 기진해 쓰러지자 선생님들이 세 학년 위인 누나를 불러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오자 당시 고등학생인 형이 어찌된 일인지 나에게 물었다. 그때 내가 ‘파란 풀과 깨끗한 바위를 보니 눕고 싶어 누우니 잠이 들었을 뿐이라고.’고 말했다. 형은 돌아가시기 전에 가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어릴 때부터 시인이었다고 한다.
셋째는 중학교 1학년 때의 경험이다. 봄이 되면 그 당시 내가 살았던 소도시 변두리 농촌은 한 가지 향기로 가득찼다. 그것은 마른 똥 냄새다. 봄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 밭을 일구고 그 위에 거름으로 인분을 뿌려 놓으면 그것이 봄 햇살과 봄바람에 마르고 발효되어 향기인지 악취인지 분간하기 힘든 오묘한 냄새를 만들어 낸다. 그 냄새를 맡으면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동네 앞산을 넘어 누군가 찾아올 것 같고 그 사람이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리고 갈 것 같았다.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 그 어떤 새로운 것이 되고 싶었다. 그 느낌을 시로 써서 처음으로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이렇게 내 예술적 토양은 세 가지이다. 요약하자면 아름다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감, 말로써 나와 세상을 재배치하려는 헛된 몽상, 새로운 것에 대한 끌림과 호기심 등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왜 꼭 시를 쓰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런데 어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순전히 불량해지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좀 더 정확하게는 폼나게 불량해지는 방법으로 시를 썼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가난한 지방 소도시의 답답함과 당시 학교 사회의 일상화된 폭력과 억압적인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음껏 불량해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모자를 삐닥하게 쓰고 교복 단추를 몇 개 풀고 운동화 뒤축을 밟아 신는 것만으로는 불량함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방 안에 자전거 체인을 넣고 다니거나 몰려다니며 패싸움을 벌이는 대범함을 원래 타고 태어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가 가장 효과적인 불량기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시를 쓰는 이후로 그 지긋지긋한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들으며 비실비실 웃을 수 있었다. 시를 쓴다는 이유로 5.16이 어쩌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사회 수업을 빠지고 백일장 대회에 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를 쓰면서 중국집 2층에 모여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가끔은 그 술값을 국어 선생님이 내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폼나는 불량함을 선사해주는 시를 어찌 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시를 쓰면서 나는 무엇인가를 안 하는 불량함을 누리고 있다. 시를 쓰면서 나는 아이들의 미래에 관심을 두지 않는 불량한 아버지이고, 집안 살림에 얼마나 돈이 드는지는 시를 쓰는 동안 생각할 겨를이 없어 불량한 가장이 된다. 공권력이 힘없는 자들을 짓밟거나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개인들의 권리가 덧없이 무너져 가도 나는 시를 쓰면서 아니 시를 쓰니까 애써 외면할 수 있었다. 시를 쓰면서 나는 건실한 가장과 건전한 시민이기를 포기하거나 망각하고 있다. 이렇듯 시는 내가 불량해지는 핑계이고 또 원천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시와 시가 주는 불량함이 내게는 너무 소중하다. 그것으로 나는 세상을 견디고 또 다른 불량한 인간들과 소통을 한다. 그래서 그 불량함이 건전한 세상과 굳건한 정신에 흠집을 내고 착한 사람들을 뒤흔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지킬 것은 지키며 착하게 살라는 모든 권력의 강요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피할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시를 쓰면서 나는 나의 불량함이 세상에 불온한 공기를 퍼뜨리고 있다는 즐거움에 젖어 있다. 이렇게 불량함을 전파하는 것이 시인의 소명이고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에 이런 나의 생각을 시로 쓴 적이 있다.
시가 불량해 진다
불온을 꿈꾸며 시를 써보지만
불량한 시만 자꾸 쓰게 된다
시는 가치이고 의미이며 또한 가치 있는 의미라는
한 중견 시인의 한 마디에
내 시는 사상 불량한 시가 되고
시 쓰면 돈이 되냐는 집사람의 딴죽에
품질 불량한 상품이 된다
잘 빚어진 항아리처럼 존재로 아름답지 못하니
미학적 불량이고
나무를 키우거나 꽃을 피우지 못하니
생태적 불량이다
칼과 불이 되지 못하고
민족이니 전통은 원래 내 시가 알 바 아니니
좌로도 우로도 정치적 불량이 되겠다
말을 하면 짧은 바람이 되어 세상을 말리고
쓰인 글자는 모두 거친 모래가 되어 눈에 쓰리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안다
실현된 불온은 선량이 되고
희망 없이 꿈꾼 불온은 불량이 된다는 것을
불량하고 불량해서 불량할 수밖에 없는
시를 쓴다
불량하게
- 「불량한 시」
2. 시란 무엇일까?
시에 대해서는 많은 말들이 있다. “시는 사특함이 없는 말이다,” 라는 시경의 이야기도 있고, “시는 감정의 유로”라는 워즈워드의 말도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건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는 정의다.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언어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 말의 두 가지 기능
말이 뭐냐고 물어보자. 좀 똑똑한 학생은 “실제 있는 사물을 대신해 나타내는 기호”라는 대답을 할 게다.
맞다. 말은 사물과 짝을 이룬다. 예컨대 ‘물, water, 水’는 모두 물을 나타내는 기호다. 기호는 사물의 특성을 잘 알게 해 준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말은 ‘부재하는 사물’도 나타낸다. 있어으면 하거나 있어야 할 물건이 없을 때 그것을 대신하는 기호가 바로 말이기도 하다.
실제 존재하는 사물을 가리키는 말의 기능을 지시적 기능이라 한다. 부재하는 사물을 나타내면 환기적 기능 또는 마술적 기능이라고 한다.
환기는 뭔가를 불러낸다는 뜻이다. 마술사가 빈 보자기 안에서 비둘기를 꺼내고, 신문지로 꽃을 만들곤 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말을 통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내기. 정말 마술 같은 일이다.
- 문학은 언어의 마술
비록 지금은 없으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하는 무언가를 불러내는 일, 문학은 말의 환기적 기능(마술적 기능)을 주로 사용한다. 문학은 언어의 마술인 셈이다. 다음은 유명한 김소월의 시 <금잔디> 가운데 한 부분이다.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핀 금잔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금잔디’만 주목해보자. 시인은 금잔디가 있다는 사실, 또는 금잔디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이 시를 쓴 게 아니다.
이 시에서 금잔디는 지시적 기능을 위해 쓰인 게 아니라는 뜻이다. 시인은 무덤가에 난 금잔디를 보고 먼저 죽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피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금잔디는 가고 없는 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가신 님을 불러내는 금잔디라는 말의 마술! 일상의 쓰임새와 달리 이렇게 말을 특별하게 사용하는 게 바로 문학이다.
- 말의 두 가지 의미
‘이슬’을 생각해 보자. 과학 시간에 배웠다시피 이슬은 이른 아침 공기 중의 습기가 차가운 물체에 부딪쳐 맺히는 작은 물방울이다. “이슬에 옷이 젖는다”고 말할 때 이슬은 지시적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이런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이슬처럼 사라져간 인생”이라 말할 때 이슬은 쉽게 사라진다, 덧없다는 뜻이다. 이슬은 영롱함을 나타내기도 하고, 눈물을 연상시켜 슬픔을 떠올리게도 한다.
말이 가져오는 이런 부수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내포적(또는 함축적) 의미라 한다.
앞서 설명한 말의 마술적 기능을 살리기 위해선 이 내포적 의미를 잘 활용해야 한다. 없는 사물을 불러내려면 그것을 연상시키는 말을 써야 효과가 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최영미)
3. 시인은 누구?
시인의 행실이 조금 불량하거나 시인이 비도덕적인 행동을 보일 때 가차없이 “시인이라는 작자가 그렇게 살아서 되겠어.” 이렇게 사람들은 나무란다. 반대로 시인이 너무 반듯하고 모범적이어도 “당신 시인 맞어? 그래서 시를 쓰겠어?”라고 빈정댄다.
이렇게 사람들은 시인들에 대해 모순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비도덕적인 시인을 욕하다가 착한 시인을 보면 시인이 너무 반듯하다고 또 뭐라 한다. 하지만 시인을 폄훼하거나 시인을 옥죄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지적에 사실은 진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일단 시인은 윤리나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시인이기에 더 높은 정도의 윤리나 도덕을 요구받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나 도덕은 좀 특별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 시인들이 왜 시를 쓰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지 시인으로 행세하기 위해서, 시로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창조의 기쁨이 우리 시인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든다. 그런데 언어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 것은 기존의 언어에 의해 말해져 왔던 세상과 삶을 새롭게 다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언어를 통한 삶의 성찰이 시를 쓰는 중요한 의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인의 윤리성이라는 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라는 아주 막연하고 광범위한 것이다. 시인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이다. 시를 통해 삶과 세상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시인이 그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사람들은 모범적인 시인을 폄훼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좀 삐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왜 그럴까? 시인에게 삐딱한 불량함은 소중한 것이다. 그것으로 시인들은 세상을 견디고 또 다른 불량한 인간들과 소통을 한다. 그래서 그 불량함이 건전한 세상과 굳건한 정신에 흠집을 내고 착한 사람들을 뒤흔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지킬 것은 지키며 착하게 살라는 모든 권력의 강요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피할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시를 쓰는 시인들은 이 불량함이 세상에 불온한 공기를 퍼뜨리고 있다는 즐거움에 젖어 있다. 이렇게 불량함을 전파하는 것이 시인의 소명이고 운명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인은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쉽게 말해 불량함이 윤리가 되는 존재이다. 세상의 가치에 반하고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며 권력이 쳐 놓은 질서를 애써 거부하는 불량함을 통해 삶과 세상을 성찰하는 윤리를 실천한다. 비윤리 또는 탈윤리가 윤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가치에 순응하고 규범화된 윤리를 맹종하는 시인은 비윤리적이라 단언할 수 있다. 더러 그러한 시인들이, 기존의 가치관에 안주하며 위안을 느끼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거나 권력의 시혜를 얻어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규범의 강요에 신음하고 있을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속박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비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교의를 설파하고 정치적 이념을 선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갖게 하는 것은 시인의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갖지 못한 또는 시인이 이미 버리고자 한 권력의 역할이다. 시가 권력에 복무할 때 시인은 타락한다. 시인이 아무리 숭고한 종교적 교의나 정의로운 정치적 이념을 전파한다 하더라도 그때 시인은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라 권력의 입이 된다. 시인은 권력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불량하게 대들고, 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들의 꿈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시는 자유의 다른 말이다. 때문에,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시와 시인은 비윤리적이다.
4. 시인은 어떻게?
(1) 낯설게 하기
기존의 가치와 유용성에 저항하면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그것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온갖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 필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문학의 효용에 대한 이러한 개념 규정은 사실 오래 전부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나 미국의 신비평주의자들에 의해 ‘낯설게 하기’(용어해설11)라는 용어로 설명된 바 있다. 낯설게 하기란 기존의 것을 변형 변화시켜 새롭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런데 무엇을 변화시키는가? 문학에서는 바로 언어를 변화시킨다. 우리가 일상적 사용하는 언어적 용법이 아니라 언어에 여러 가지 조작을 가하여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를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특별하게 사용하여 기존의 언어에 수반되는 통념적인 의미 통념적인 사고를 벗어나게 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고를 하게 하는 것이다.
한 예로 ‘결혼’이라는 말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일상적인 의미에서 결혼은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 생활이라는 관념을 동반한다. 그래서 주위에서 누가 결혼한다고 하면 다들 ‘좋겠다’ 또는 ‘깨 쏟아지겠다’ 등의 말을 버릇처럼 내놓는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또 당연히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꼭 그렇지는 않다.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 얼마나 있겠는가? 어떻게 생각하면, 결혼 생활은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는 이런 상투적인 생각 때문에 상대에 불만을 가지고 결국 상대를 괴롭히고 그래서 불행해지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떤 시인은 ‘그대는 천사 나라의 비밀 경찰’이라고 결혼식장에 나타난 신부를 표현했다. 행복한 결혼과 아름다운 신부라는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관념을 완전히 낯설게 만들고 있다. 이를 통해 어쩌면 사랑의 감옥일 수 있는 결혼 생활의 억압성과 사랑보다는 서로간의 구속과 소유만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 결혼 제도의 실제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이 짧은 시구를 통해서 일상의 상투적 언어에 의해 감춰진 은폐된 진실을 드러낸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닷가 될 수 있을까.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보통 많은 사람들은 시에서 뭔가 예쁘고 고운 그리고 따뜻한 말을 기대한다. 요즘 젊은 학생들이 많이 읽고 또 좋아하는 시들 역시 따뜻하고 안온해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그런 경향의 시들이다. 그런데 위의 최승자의 시는 이런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다. 이 시는 마치 세상에 대해 저주를 퍼붓듯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바로 그러한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이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까지 하다. 적어도 시인에게는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을’ 하면 수확과 풍성함과 아니면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느끼는 센티멘탈한 그러나 아름다운 슬픔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것이 가을에 대한 통념적인 생각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는 릴케의 시 구절이나 ‘저 기울어진 달빛 그늘로 우리 낙엽을 밟으며 헤어지자’ 등의 유치한 소녀 취향의 낭만적 시 구절 들을 생각할 것이다. 풍성함이나 애잔한 슬픔, 아름다운 이별 등등이 가을에 대한 우리의 통념적 느낌이다.
그러나 이 시인에게 가을은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매독같이 더럽고 추악한 고통이다. 황혼은 밀레의 만종에서와 같은 경건한 마무리가 아니라 마비와 죽음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생명력을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지’는 것과 같이 삶의 지향이 사라지고,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사람들과의 단절과 소외가 심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과거는 폐수처럼 세월 속에서 썩어가고 있으면서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다. 시인이 보기에 가을은 현대 사회의 인간들이 느끼는 이러한 소외와 절망감을 증폭시키는 계절인 것이다.
이렇듯 이 시는 ‘가을’의 의미나 거기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몇 개의 말들을 통해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통념 속에서의 가을은 왠지 모를 서글픔에 젖은 감상이거나 풍성한 수확이 주는 충만감이거나 그런 것이다. 가을이라는 말에서는 시나브로 떨어지는 낙엽, 풍성한 가을 들판을 연상한다. 그런데 이런 통념을 가지고 있으면 이런 통념으로만 세상을 보게된다. 사실은 그런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가을은 아름다운 것이고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는 가을에서 폐수나 매독을 본다.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척박함을 말하고 있다. 왜 세상이 척박한지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인의 경험도 있을 것이고, 사회적 시대적 분위기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가지는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여간 가을에 대한 통념을 거부하고 세상의 본모습을 바라보는 시인에게 가을은 이런 부정적인 모습으로 ‘개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사실은 이 시를 읽으면 누구나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껴 본 것 같은 생각에 공감할 것이다. 앞서 지적한 통념 때문에 미처 깨닫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삶이 그런 측면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 시인은 이러한 통념을 깨고 세상을 다시 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어둠을 고발하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시인의 강렬한 열망을 표출한다.
(2) 아이러니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을 보거나 경험할 때 “참 아이러니한 일이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성직자가 범죄를 저지르거나 표창을 받은 모범 시민이 알고 보니 사기범이었음이 밝혀졌을 때 바로 이런 표현을 쓴다.
그렇다면 아이러니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아이러니(Irony)는 우리말로 반어라 한다. 거꾸로 말한다는 뜻이다. 아이러니란 원래의 의도를 숨기고 반대로 말하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그리스의 희극에서부터 온 말이라고 한다. 이 희극에서 에이론(Eiron)과 알라존(Alazon)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약한 에이론이 자신의 겉모습과는 달리 외적으로 강한 알라존을 이기는 데서부터 아이러니라는 말이 왔다고 한다. 사실은 영리하고 똑똑하나 겉으로는 약하고 무식하고 우스꽝스럽게 가벼워 보이는 에이론이 힘세고 진지하고 잘난척하는 알라존을 이긴다고 하는데 에이론이 알라존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가 상반되는 두 태도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알라존이 자신의 힘과 신념을 맹신하는 데 비해 에이론은 약함과 강함, 영리함과 미련함이라는 두 가지의 대립을 알면서 거기에서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알라존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드러나는 것과 속에 숨겨져 있는 내용의 차이에 기초를 둔 것이 아이러니이다. 즉 반어는 표면적인 의미와 내포된 의미가 다른 것을 말한다. 겉으로는 A라고 말하고 속으로는 B를 뜻하는 것이 바로 반어다. 비유가 두 사물간의 유사성을 중시여기는 것에 비해 반어는 두 사물의 상반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수사학적으로 아이러니를 이야기를 할 때 의미의 강조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설명한다. 상반되는 것과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의미를 훨씬 두드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흔히 일상적으로 하는 말 중에 예쁜 아기를 보고, ‘아이 얄미워라’라고 말한다든지, 잘못한 아이의 행동을 보고 ‘정말 예쁜 짓도 많이 하는구나’ 라고 말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아이러니의 수사법이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단순히 의미의 강조 효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든 예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예쁜 아기를 보고 얄밉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대조에 의한 의미의 강조만은 아니다. 너무 예쁜 나머지 얄미운 정도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미묘한 심정의 표현이다. 거기에는 그렇게 예쁜 아이를 가진 그 아이의 부모에 대한 질투심도 들어있고, 예쁜 것을 예쁘다고 말해서 그 예쁜 것이 손상될 것 같은 어떤 조바심도 들어있다.
아이러니는 하나의 단어로는 표현하거나 분명히 단정할 수 없는 다양한 느낌과 생각을 한꺼번에 제시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이다. 그렇게 볼 때 아이러니는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니라 사물이나 세상을 보고 표현하는 정신적 자세나 태도와 관계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러니는 동물의 보호색처럼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적에게 일격을 가하는 수사적인 장치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또 표현하는 하나의 태도이다. 아이러니는 균형잡힌 넓은 시야를 성취하게 하고, 삶의 복잡성과 가치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불일치의 공존이 삶의 구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러한 삶의 자세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러니야말로 시와 예술의 근본적 성격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일한 원리나 확실하고 명확한 신념이 가진 단순화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사물의 구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이고 예술이라 할 때 바로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이상에서와 같이 아이러니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대비를 통한 강조를 나타내는 ‘수사적 아이러니’와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을 수용하는 ‘포괄의 아이러니’이다. 수사적 아이러니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반대의 것을 말함으로써 강렬한 대비를 이끌어내는 아이러니이다.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좀더 확고하게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이와 반대로 포괄의 아이러니는 확정지을 수 없는 두 극단의 생각을 동시에 드러내는 아이러니이다. 두 가지의 생각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정신적 긴장을 표현해 준다. 그래서 이 둘을 각각 ‘확정적 아이러니’와 ‘불확정적 아이러니’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한 시인이 쓴 서로 다른 두 시의 예를 들어 두 가지 아이러니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① 확정적 아이러니의 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 시에서도 아이러니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네가 오지 않을수록 나는 너에게 가고 있고, 너와의 만나지 못함이 헤어짐이 아니라 가까워짐이라는 역설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라 할 수 있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라는 구절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너는 일단은 연애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일 것이다. 연인만이 아니라 친구일 수도 있고, 민중일 수도 있고, 민주나 자유일 수도 있다. 어떻든 여기서 너를 만난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어떤 완전한 소통을 의미한다. 인간과 인간이 소외를 극복하고 소통을 회복하는 사랑이나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자유를 지금 시인은 갈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너는 지금 없지만, 즉 인간간의 완전한 소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단절만이 심화되어 있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시인은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역사와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넓혀 생각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이 지금 단절과 소외를 겪고 있지만 역사적 안목에서 바라볼 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또 사회 속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되어 있고 그러한 사회적 활동에서 우리의 단절과 소외가 극복되리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한 인식은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가는 행위이다.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의 단절과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고 그것의 의미를 생각할 때 우리들의 관계는 회복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시인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시에서 쓰여진 아이러니는 이러한 시인의 생각을 보다 확고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헤어짐과 오지 않음을 통해 만남의 필연성과 가야할 사명의 의의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아이러니 사용을 위에 설명한 대로 ‘수사적 아이러니’ 또는 ‘확정적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를 통해 확실한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고, 반대의 태도를 드러냄으로써 보다 명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는 그런 아이러니이다.
② 불확정적 아이러니의 예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앞서 인용한 시가 시인이 30대에 쓴 것이라면 이 시는 시인이 50이 다되어 쓴 시다. 이러한 시간과 나이의 차이를 반영하듯 앞의 시는 아직 생에 대한 열정과 희망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인 데 반해 이 시는 인생에 대한 쓸쓸한 체념이 느껴진다. 그것은 일단 어조에서도 온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시의 어조는 뭔가 갈구하면서 또한 다짐하는 듯한 희망적이면서 적극적인 확신에 찬 어조이다. 그러나 이 시의 어조는 다분히 주저하면서 머뭇거리고 체념하는 듯한 어조로 되어 있다.
시의 리듬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앞 시는 중간쯤의 비교적 짧은 시구들의 반복을 통하여 너에 대한 확신과 믿음과 그리고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의 다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시는 풀어진 산문체로 씀으로써 긴장감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삶에 대한 기대나 바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시의 배경의 차이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앞서 인용한 시의 배경은 다방인데 이 시의 배경은 술집이다. 다방이나 술집이나 누군가를 만나는 곳이다. 다방에 혼자 있거나 술집에 혼자 있거나 다 불쌍하고 외롭게 보인다. 누군가 만날 사람을 못 만났거나 어떻게 해서 혼자 되어버린 사람이다. 그러나 다방은 만남의 시작이다. 그러나 술집은 만남의 끝에 존재하는 곳이다. 때문에 다방에서 홀로 된다는 것,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 아직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집에서 혼자 있다는 것은 누군가 만나리라는 기대도 희망도 남아있을 수 없다. 우리가 다방에서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외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불쌍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혼자 쉬고 있다거나, 무슨 일로 상대에게 바람을 맞았지만 어느 땐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너무 처연하게 보일 것이다. 인생의 막다른 곳에서 혼자 버려진 너무나 쓸쓸한 한 인간을 보는 듯이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시는 인생에 대한 열패감과 절망감을 표현한 자기 연민의 시로 읽혀진다. 그러나 이는 이 시의 아이러니를 이해하지 못한 해석의 결과이다. 이 시의 아이러니는 ‘아름다운 폐인’이라는 구절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과거 70년대나 80년대를 뜨겁게 살아왔던 것처럼 어떤 가치라든가 신념이라든가 희망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가치지향이 없는 삶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폐인이다. 그러나 신념이나 가치나 전망이 주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기 때문에 반대로 아름다울 수가 있다.
‘슬픔처럼 상스럽다’라는 표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세상일에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런 것이 사실은 상스러운 감상과 무어 다르겠는가 하는 인식이다. 그런 것을 벗어버린 초연함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자신의 모습을 절대화하고 미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과거의 삶이 억압이고 자기기만이지만 또한 지금의 자기 모습도 ‘뚱뚱한 가죽부대’처럼 퍼지고 주저앉혀진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폐인이다.
이 시에서 보여준 이러한 아이러니가 ‘불확정적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앞의 확정적 아이러니에서는 아이러니를 그것을 만든 시인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불확정적 아이러니에서는 아이러니를 시인이나 독자 모두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아이러니는 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신이나 운명이거나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때문에 시인은 아이러니컬한 대립 속에서 긴장과 방황을 경험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목소리 높은 신념에 이끌린 바깥의 삶이나 지금 주저앉혀진 자신의 삶, 그 어디에도 진실이나 정당한 길은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사이의 끝없는 긴장과 그 사이에서의 방황에 사실은 우리의 삶이 놓여있고 거기에서 진실과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까지도 이 시는 아이러니를 통해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로필
황정산 : 1958년 전남 신안 출생.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 박사.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활동 시작. 2002년 『정신과표현』으로 시 발표. 대전대학교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역임. 월간 『우리시』 주간 역임. 현재 계간 『불교문예』, 계간 『상상인』 주간. 저서로는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 『소수자의 시 읽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