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한 순간을 사진에 담아
증 언 자 : 정 재회(남)
생년월일 :1942(당시 나이 38세)
직 업 :사진사(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요
1980년 당시 사진관을 경영하던 정재희씨는 5 · 18 당시사건 사진을 찍다가 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팔과 복부에 관통상을 당했다. 그 후 5 ·18부상자회의 부회장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시위 소식
나는 장흥에서 태어나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이주하여 방림동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진에 흥미를 느끼게 되어 사진 찍는 일을 직업으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국가에서 발급하는 국가 사진사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을 따게 되니 사진관을 차릴 수 있게 되었고, 나는 작품활동도 하며 다른 사진작가들처럼 예술활동을 하였다. 결혼을 하여 아내가 학원 강사를 하기도 하고 내 사진관 옆터에 의상실을 내어 비교적 살림이 풍족했다. 나의 생활은 큰 풍파 없이 그런대로 행복했다. 1979년까지도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저 보통의 전라도 사람들이 김대중씨에게 거는 기대와 신뢰를 갖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관형이라는 사람의 알선으로 김대중씨의 청년동지회 일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청년동지회에서 양림동,방림등, 학동의 조직부장 일을 맡아 하였다.
1980년 5월까지도 그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을 보면서 전반적인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정치적 야심이나 야망보다는 소극적으로 현체제가 잘못되어 있다는 정도였다. 다만 가톨릭 신자로서 갖는 강한 의협심과 희생정신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런 내게 1980년 5월 김대중씨의 구속 소식은 충격이었다.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대열에 우호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꼭 김대중씨의 구속만이 아니더라도 잘못 돌아가고 있는 이 정치현실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하는 시위는 옳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가끔 나가서 시내의 정경을 보면서 이런 나의 생각은 더욱더 굳어졌다. 그저 시위가 옳다는 정도가 아니라 군인들의 무자비한 행동은 상식을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시내는 놀라운 광경뿐이었고 군인들은 너무 잔인했다.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18일경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버스가 비정상적이나마 운행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거리에서 군인들이 젊은 사람들을 개패듯이 패면서 무자비하게 끌고 갔다. 그날 집에 오니 친구가 시내에서 본 일을 이야기했다.
친구는 중앙국민학교 옆에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이 어찌나 살벌하게 날뛰던지 사람들이 다 골목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숨어 있던 바로 옆골목에서 책가방을 든 여고생이 자기는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거리로 나갔다. 그런데 거리에 있던 공수부대가 달려와 그 여고생을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앞으로 넘어지는 그 여학생의 배를 다시 치니 뒤로 나가떨어졌다. 아주머니들 몇 명이 그것을 보고 달려나가 "오매,사람 죽소. 왜 이러요" 하며 소리를 지르니 그 아주머니들을 발로 차고 차로 끌고 갔다. 깜작 놀란 친구가 전남대병원 앞으로 공수부대를 피해서 오는 길에 보니 병원 앞에 엄청나게 많은 피가 낭자해 있더 라는 것이었다.
사진촬영, 그리고 부상
시내에서 내 눈으로 이성을 잃은 듯한 공수부대의 행동을 본 데다 친구의 말까지 듣고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시위에 참가하여 돌을 던지고 싸우는 것보다 이런 사실들을 사진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은 방림다리에 군인들이 서 있고 분위기가 살벌하여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도청 앞에서 차가 불타던 20일경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날 불에 타는 차를 찍는 등 이리저리 다니며 하루 종일 사진을 찍었다. 다음날도 또 시내로 나갔다. 시내의 분위기는 더욱더 살벌해지고 있었다. 군대생활을 해본 내가 봤을 때도 광주시내에서 난동을 부리는 군인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때가 21일 오후 1시경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보통사람이 공수부대에게 느끼는 원초적인 두려움이나 공포는 덜했던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지만 전남대 의대 입구에서 도청으로 나가는 좁은 도로를 걸어 충장로 입구까지 왔다.
그때 가톨릭센터 앞에 사람들이 운집해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있던 충장로 입구에는 나를 포함해서 네 사람 정도가 있었다. 도청 앞으로 나가니 군인들이 분수대를 둘러싸고 앉아 휴식을 취하며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나 평화스러워 보여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촬영을 하려고 사진기를 조작하는 순간 갑자기 타다닥 소리가 났다. 사진기를 조작하고 있는 내게 공수부대들이 집중사격을 한 것이다. 순간 허리가 퍽 구부러지면 숨이 콱 막혔다. 어깨와 배에서 피가 푹 솟아올랐다. 순간 죽는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 순간에는 내 눈으로 상처를 보고 싶어 숨이 막혀 허리가 안 펴지는데도 죽을 힘을 써서 상처를 열어보았다. 피가 몸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앞은 보이는데 흐릿한 유리가 눈앞을 가린 것처럼 답답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계속 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내 주위에서 Ml6의 다연발 소리가 불꽃을 튀기며 계속해서 타다닥거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급히 골목으로 끌었다. 내 옆에는 어린 아이가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어디에서 총을 쏘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청 옥상 위나 수협 위에서 갈겨버린 모양이었다. 그 순간에도 군대에서의 생각이 나며 그들이 나를 정조준해 총을 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른팔과 복부를 관통당했고 같이 총을 맞았던 꼬마는 복부관통상을 입었다.나는 몸을 웅크리고 피를 두 손으로 받으면서도 신부님이 생각났다. 그때 당시 나는 신 앙심으로 충만해 있을 때였다. 영세도 받고 성령 세미나까지 받았던 때였다. 누구보다 집사람과 당시 5세이던 막내딸이 생각났다. 막내딸이 나를 부르는 환청까지 들렸다. "아빠, 아빠"하고 애타게 부르는 것이었다. 순간 내가 꼭 죽어야 한다면 한 시간만 더 살고 싶었다. 신부님을 만나고 집사람을 만나 집안일을 부탁하고 싶었다.
병원으로 옮겨져
공수부대원들은 계속 한길에 대고 총을 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끌고 들어간 곳은 당시 광산동 옥천여관 골목이었다. 그 골목에는 공수부대가 총을 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피해 있었다. 옥천여관으로 들어가니 문을 열어주었다. 주인이 문을 열고 이렇게 살벌한 거리에 뭐 하러 나왔냐며 걱정해 주었다. 나는 엄청난 출혈로 인해 기절해서 늘어지고 말았다. 옥천여관에는 당시 전남매일 지붕으로 넘어가는 사닥다리가 있었다. 그곳을 넘어 사람들이 나를 미문화원 맞은편 임한택병원으로 데려갔다. 그 병원에서는 지혈을 시려주고 팔에 링게르를 꽃아주며 여기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니 가까운 적십자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지프차를 타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에는 엄청나게 환자가 많았다. 의사가 수술을 할 수 없다며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다시 지프차를 타고 기독병원으로 갔다. 옆에서 내가 급한 환자라고 아우성을 쳤고 나를 데리고 간 사람에게 기독병원에 아는 사람이 있어 수술이 빨리 되었다. 수술실로 들어간 때가 총에 맞은 지 40분 후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출혈로 죽었을 거라며 다행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 군대에서 태권도 교관을 지내 강한 정신력으로 버틴 것 같았다. 수술 중간에 의식이 돌아왔다. 내가 죽은 듯이 혼절해 있으니 마취가 덜 된 상황에서 배를 짼 모양이었다. 혼미한 상태에서 김대중씨가 생각나며 일어나려고'아무리 힘을 써도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겠고 또 기절을 했다. 정신이 들어보니 회복실 병실에 누워 있었다. 가지고 있던 사진기는 잃어버렸고 구두도 벗겨지고 없었다. 수술을 한 곳을 보니 배꼽 아래에서 밑으로 완전히 째놓고 또 옆으로도 째놓았다. 수술 후 꿰맨 자리가 꼭 중국옷의 단추연결이 된 곳 같았다. 짼 곳이 4, 5센티미터가 넘었다. 코에서 위로 호스를 연결해 놓고 오른팔을 묶어놓은 상태에 왼팔에 링게르를 꽃고 오줌을 배설시키기 위해 신장에 호스를 연결해 놓았다. 호스가 줄줄이 연결되어 있고 온몸이 묶여 있으니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독병원은 환자로 꽉차게 한 명 한 명에 세심한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다른 약은 거의 주지 않고 링게르만 놓아주었다. 목마름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사막에서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의 심정이 이런가보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 한 컵만 먹으면 죽어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다가 배를 맡이 째 고통이 극심했고 차라리 다리를 자른 사람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 사람들은 다리를 잘랐지만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배를 엄청나게 짼 나는 살지 죽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신부님과 집사람이 찾아왔을 때 유언까지 했다. 상태가 계속 악화되었다. 수술 후 노폐물을 제거하기 위해 코에 연결한 호스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다 괜찮은데 나만 그랬다. 그렇게 3일이 지나니 숨도 쉴 수 없게 되었다. 새벽에 구토를 시작했다. 배에 뭐가 잔뜩 차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으니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엄청나게 맡은 노폐물을 토했다. 급기야는 코에서 피가 나오고 눈에서도 피가 나왔다. 몸 속으로 연결된 호스가 계속 요동을 치며 위를 자극했고 그 고통으로 거의 실신상태에 이르렀다. 그래도 토하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게 꽃아졌던 호스가 막혀 있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얼고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병원에는 환자가 워낙 많아 그런 것을 하나하나 시험하고 조사해 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입원해 있었으나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독병원에는 총상환자를 치료해 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총상에는 열상이 따르기 때문에 그냥 꿰매면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상처를 제 매놓았다. 상처부위가 곪은 곳을 긁어낸 다음 다시 봉합했다. 그렇게 27일이 되었다. 여자 목소리로 방송이 들려왔다. 시민 여러분, 동참해 주십시오. 현재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하려고 진격하고 있습니다. 막아야 합니다. 저희들을 살려주세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방송을 하며 돌아다녔다. 동참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는다는 그 목소리가 우리 모두를 긴장하게 했다. 30분쯤 후 방송이 끊어지고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탕 하는 소리가 아니라 벼락치듯 갑작스럽게 총소리가 났다. 도청을 장악하려고 계엄군들이 진주를 할 때였던 모양이다. 기독병원 담 밑에서도 계엄군 수천 명이 공포까지 섞어 엄청나게 총을 쏘아댔다. 사람들이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고 하면서 모두들 겁에 질려 달달 떨었다. 우리를 사살하려고 온다는 말까지 돌았다. 병원에서는 총소리가 들리면서부터 소등을 해 버렸다.
그리고 방송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숨으라고 했다. 환자들이 변소나 병실 침대 밑으로 숨느라고 수라장이 벌어졌다.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나는 기도만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군인이 들어와 다 사살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병원 안으로 들어 오지는 않았다.그날 집에서도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방림국교 옥상과 방림동 뒷산 부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지 총탄이 비오듯 하였다고 했다. 우리 식구들은 밤새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고 한다. 사건이 끝난 후 김대중 씨가 구속까지 된 마당에 청년 동지회 입회원서와 그동안 촬영한 필름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집에 있는 30∼40명의 입회원서와 필름을 마땅한 장소가 없어 지붕 위에 숨기라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비에 다 젖어버려서 필름도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중에서 겨우 건진 필름 두 통은 나중에 어떤 서울대생이 와서 가져가버렸다.
퇴원과 후유증
광주항쟁이 끝나고 20여 일이 흘렀다. 어느 날 신임 도지사로 발령된 김종호라는 사람이 병원에 찾아왔다. 아마 도청이 장악되고 광주항쟁이 진압된 후 화해무드를 조성하기 위해 온 것 같았다. 그는 "어떻게든 여러분을 도와드리겠다. 치료비는 정부에서 보상을 해주고 신상문제도 해결해 줄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치료받으라."고 하더니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아주 정중하게 절을하고는 돌아갔다. 그 뒤 함석헌 씨가 찾아왔다. 병원을 두루 돌며 격려했다. "여러분의 뜻이 보람으로 나타날 수가 있을 것이다. " 신문에는 계속 엉터리 기사가 실렸다. 광주 시민보다 군인이 더 맏이 죽었다, 광주 시민은 20여명 죽었다 등의 기사는 병원에 있는 우리들을 분노시켰다. 그래서 병원에 있던 사람들이 방송은 거짓말쟁이고 신문 또한 믿을 수 없으니 불매운동을 하자고 했다. 병원으로 전국 각지에서 위문품이 왔다. 하루는 의사가 같은 병실에 있던 홍두표(무등증 2, 총상환자)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퇴원을 하고 통원치료만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았다며 거절했다. 그때 의사가 몹시 언짢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마침 그 다음날 도교육위원회에서 흥두표에게 20만원이 왔다. 우리는 흥두표에게, "네가 병원에서 안 나가고 버터서 나온 돈이다. "며 웃었다. 뒷날은 나보고 나가달라고 했다. 겨우 상처가 아물고 온몸이 퉁퉁 부어 있는데 다른 환자를 위해서 편의를 봐달라는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데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우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집이 방림동이라 통원치료하기도 쉬울 것 같았다.꿰맨 부위가 다시 터지지 않겠느냐고 염려했더니 괜찮다고 하여 안심하고 퇴원했다. 그 후 통원치료를 다녔다. 통원치료를 다닌 지 한 달쯤되어서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항상 오전에 다니는데 그날은 다른 날보다 느지막하게 병원에 갔다가 치료를 받고 나오니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양림동에서 아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내가 인사를 하자, 그 아주머니는 갑자기 악을 쓰며 신발이 벗겨져도 내던지고 도망을 가버렸다. 그때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으나 알고 보니 동네에는 내가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고 했다. 우리 집사람이 나를 관에 넣어서 방림동 뒷산에 묻고 오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질 무렵 어둠컴컴한 골목에서 창백한 나를 보았으니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갈 만도 했다. 하루는 통원치료를 하고 오다가 집 앞에서 몸을 이기지 못해 미끄러져 그대로 사진관 큰 유리문을 들이받았다. 5밀리미터 두께의 유리가 와장창 깨진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다리를 여러 군데 꿰매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그 뒤 바로 27일에 들었던 총소리에 놀란 데다 유리를 들이받고 놀란 것이 겹쳐 경기가 생겼다. 문만 크게 닫혀도 깜짝깜짝 놀라며 진땀을 흘렸다. 그런 나를 보다못한 아내가 요양을 다녀오라고 했다. 그때가 1980년 8월경이었다. 포항에 있는 동생집에 가서 쉬어볼까 하고 아내와 집을 나섰다. 광주에서 포항으로 바로 가는 차가 없어 경주를 거쳐가야 했는데 광주에서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경주에서 하룻밤을 잤다. 경주관광호텔 신축건물에 투숙했는데, 밤 3시경 갑자기 요란한 진동이 일어나며 몸이 위로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 겁에 질려 벌벌 떨고만 있었다. 하필 그날 관광호텔 낡은 건물을 개수공사하던 중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은 큰 사고였다. 꾐을 고치러 나섰다가 오히려 또 한 번 심한 충격을 받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후로 경기가 더 심해졌다. 그래서 항상 모든 일을 하느님께 의지하여 성서를 품에 안고 다녔다.
부상자회 창립경과
1981년부터는 조그마한 예식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해에 척추를 다친 이광영이라는 사람이 5 · 18 부상자 모임을 갖자고 찾아왔다. 나는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서로 돕고 살자는 데 공감을 하여 남동 무진교회 강신석 목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20여 명이 모여 만든 부상자회 결성에 참가했다. 그때부터 상상할 수 없는 경찰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내가 모임 주선을 하고 다니니까 안기부에서는 집사람에게까지 온갖 공갈,협박을 하며 내 일을 방해했다. 처음 무진교회에서 모였을 때는 경찰이 건물을 둘러싸고 지켰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전에는 경찰 앞에만 가면 괜히 마음이 꺼림칙했는데 5 · 18 때 그렇게 험하게 다치고도 살았는데 사람이 두 번 죽겠냐'싶어 이제는 겁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왜 우리가 이렇게 당해야 하는가 하는 오기도 생기고 우리가 옳다는 생각이 들어 모임 계획을 계속 추진했다. 모임 때마다 정보원이 따라·다니고, 심지어는 도청까지 했다. 아무리 비밀리에 추진을 해도 어떻게 된 일인지 다새어나갔다. 지금도 왜 그렇게 비밀이 잘 새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우리의 모임은 계속되었다. 모임이 계속되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억울한 경우가 생길 때마다 여러 방법으로 대처를 했지만 결국은 정부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정부 각 기관에 진정서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 도지사가 김창식이었다고 기억을 하는데, 아무리 진정서를 내고 면담요청을 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우리 끈질긴 활동에 1983년 처음으로 의상을 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도에서 부상자에게 의료보험카드를 만들어주겠으나 영세민카드로 해죽겠다고 했다. 또한 5· 18이 5공화국 이전에 일어날 일이고 이미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 일이므로 정부에서는 책임을 질 수가 없다고 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우리는 그 말을 걸고 싸움을 하기보다는 당장 의료보험카드를 받아 부상자들 치료를 하겠다는 생각에 수속을 밟으러 갔다. 그런데 김우곤 보건국장이 그런일은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사람을 갖고 놀아도 유분수지 위에서는 해준다고 했다가 밑에서는 못 해준다고 하는 것이 무슨 말이냐며 싸웠다. 정부기관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당장 그 자리만 모면을 하려고 이리저리 책임전가를 하는 데는 귀신들이었다.또 언제는 청와대에서 우리를 오라고 한다고 해서 서울로 갔다. 도착을 하니 청와대에서는 오라고 한 적이 없다고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우리는 그 앞에서 데모를 하다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효자동파출소로 끌려갔는데 위압적인 태도로 다짜고짜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라고 했다. 우리는 전두환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의자를 던지고 말 그대로 난동을 피웠다. 우리의 이런 기세에 놀라 소장은 오늘은 우간다 대통령이 방문중이니 며칠 후에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거기서 며칠을 있다가 종로경찰서로 이첩이 되었다. 백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호위를 하는 가운데 종로경찰서에 도착하니 일주일 후에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면담은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여러 기관에 숱한 면담을 요청했으나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다. 1987년에는 5 18 기간에 망월동 추모식을 마치고 톨게이트를 통과하려는데 경찰이 소형차량만 시내진입을 허가하고 부상자회 버스는 보내주지 않았다. 나는 그때'임원진과 자가용을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부상자회 버스에 최루탄을 쏘는 것이 보였다. 버스 유리를 뚫고 최루탄이 내부로 들어가 사람들이 유리창을 깨고 뛰쳐나오는 등 난리가 났다. 학동에 사는 강해중씨는 장님인데 거기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 우리는 자가용에서 내려 항의를 하고 박옥재회장이 차 앞에 드러누웠다. "빨리 책임자 나와라. 너희는 에미 애비도 없느냐. 너희가 깡패 집단이지 경찰이냐!" 하며 시위를 했다. 그때 나는 직통으로 날아오는 사과탄을 가슴에 맞았다. 숨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가슴이 아프더니 사과탄에 맞은 가슴뼈가 불거져 버렸다. 그 뒤 서장을 고소를 하겠다고 했더니 광주경찰서에서 형사를 보내 사과를 했다. 5 · 18은 군부의 계획적인 음모였다 1980년 당시에 내가 찍었던 사진은 가톨릭센터에서 있었던 광주사진전에 20점쯤 기증하고 자료집 발간하는 곳에도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으로 광주의거 진상규명에 미력하게나마 협조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1980년 7, 8월경에 서울대생이라며 학생 몇 명이 찾아왔다. 내게 필름을 빌려주라고 했다. 학생들의 희생적인 투쟁에 항상 고마워하던 나는 돌려받기로 하고 필름을 빌려주었는데 그 뒤로 아무 연락이 없다. 그들에게는 별것이 아닐지라고 내게는 아주 소중한 것인데 말이다. 보상문제는 나중에 알고 보니 나하고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들한테는 다 돈이 나온 모양인데 나만 나오지 않았다. 돈이 안 나온 사람은 무급 처리가 된 사람이라고 했다. 왜그런가 했더니 부상자 등급기준이 부상 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병원에 오래 있었던 사람은 유출이고 빨리 퇴원한 사람이나 군에 대항한 사람은 무급이 나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중증이었는데도 다른 사람을 위해 일찍 퇴원한 탓에 경상 차리로 되어 있다. 도지사에게 직접 가서 얘기 하고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생활형편도 넉넉하고 왠지 꺼림칙해서 받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우를 처꼴가 되었는데 도에 찾아갔더니 2백만원을 주더라고 했다. 얼마쯤 후에 내게도 동에서 쌀을 가져가라고 연락에 왔지만 가난한 사람들이나 주라며 받지 않았다.그후 급수를 책정한다고 해서 기독병원에 갔더니 당시 급해서 엑스레이를 찍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복부에 콩알만한 남한이 대여섯 개 박혀 있었다.납탄은 국제적으로도 사용이 금지되었다는데 자기 나라국민에게 납탄을 쓴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광주의거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광주 시민 전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시위차량을 타고 지나가면 전부가 나서서 수건을 일는 대로 내주고,우러 옆집 슈퍼마켓에서 물건이 동이 날 정도로 사람들이 시위대에게 먹을 것을 사주었다. 산수동에서 떡까지 해저 시민군에게 보내고 시위물품 조달을 위해 돈을걷기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광주의거는 전시민의 뜻이었다. 그중에서 유족이나 부상자는 은이 없어 다치고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총기를 탈취한 것은 정당방위이고 을은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국회에 나가서 증언을 한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들은 청문회에서 한결같이 총을 쏜 것이 자위권 발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내가 그때 당한 것은 총을 들고 나갔거나 그들에게 어떨 위해를 줄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그런데 그들의 행등이 자위권 발동이었다면 사진을 찍는 내 행동이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이었다는 말이 된다. 도대체 무관한 국민에게 사진활영을 한다는 이유로 총을 쏘는 것이 상식적으로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나는 내 경우만 보더라도 평민당이나 운동권에서 주장하듯이 5 · 18 광주의거는 군부의 계획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조사 · 정리 송강희)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