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발병했을 때가 5살인가 그랬던거 같아요
제 기억엔 어머니께서 절 업보 매우 다급하게 서울을 향해 움직이셨어요
당시에는 저희 집이 가난해서 힘들었다구 하더군요
그리고 막 병원을 이모집이라고 하면서 저를 속이더라구요 ㅋ 실제 이모가족까지 다 와서 절 돌봐줬어요 하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심각한 표정으로 제 피를 뽑던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
바로 입원하고
날마다 목뒤에서 피를 뽑았던가 해서 골수 검사를 했어요
당시 헤모글로빈 수치가 5가 안됬다고 하더군요.
어머니 얼굴은 완전히 어둠으로 잠겨있었구요
이 때는 사망율이 60~70%라는 진단이 나와서 다들 거의 포기상태였대요. 제 담당 선생님은 서울대 병원 안효섭교수님이었습니다.
얼마후 다시 맘 잡고 몸관리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전 특별히 치료를 할 방법이 없었데요. 골수를 이식하자니 실패 확률도 높고 수술을 할 수치도 안되고 너무 어리고 등등;;;
또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병이 원인불명에 현재 알려진건 몇 가지 의약품과 신체가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생긴다는 연구결과가 있기 때문에 약품도 쓸 수 가 없었죠.
그래서 쓴 약이 피디와 이상한가루약 그리고 항생제 하나 였던거 같아요.
제 기억에 항생제는 감기같은걸 대비한거 같고 나머지 약은 성장호르몬이었던 거 같아요. 성장호르몬으로 빠른 성장을 제촉하여 식욕을 높이고 자연스럽게 몸이 성장하면서 수치가 올라가도록 해야 한다는 원리였어요.
참 괴로웠던 시절인거 같아요. 유치원 못가는 것은 당연한거죠. 운동도 할 수가 없었죠. 집에만 박혀서 혼자 로봇장난감을 놀고 동네서 정말 친한 몇 명과 놀았던 기억만 나네요. 컴퓨터는 당시 별로 보급되지 않았고 컴퓨터 역시 1년에 한 2번 만질까 였어요. 할 때도 전자파 차단 복을 입어야했죠. 아이스크립 녹차 감 이런 음식도 금지였어요. 아이스크림은 균때문이었고 녹차, 감은 떪은 맛 때문이죠. 떪은 맛이 나는 음식들이 피를 흡수한다고 해서 먹을 수가 없었어요. 그외에도 많았죠. 정말 철처하게 음식을 가렸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음식을 가려서 인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은 후에도 몸에 안좋다는 음식은 절대 먹지 않았죠. 집에서 최고의 자연식만 준비해 주신 덕분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리를 못잡으시다가 한곳에 자리잡고 제대로 된 전문의로 거듭나신 덕분도 있었구요. 주변 여러 분들이 제 건강을 걱정하면 여러가지 좋은 것들을 보내주셨죠.(한약재는 입에 안댔습니다. 이것 역시 어떤 원인을 제공할 지 모르고 몸에 안맞은 사람한텐 매우 안좋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은 가능했습니다. 그래도 항상 조심해야 했죠. 친구들과 스포츠를 즐길 시간은 전혀 없었습니다. 성장호르몬의 영향으로 몸은 완전 애늙은이 처럼 변했고 초등1학년 짜리가 얼굴은 곰보처럼 여드름이 덥었구요. 당연히 점점 또래 아이들은 저를 이상한 아이 취급하고 왕따로 몰더군요 . 아픈 것이 저를 힘들게 한다기 보다는 이런 생활이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한 3학년 까지는 계속 외톨이로 지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옆에서 절 도와준 정말 좋은 아이들 몇 명이 있었기에 그나마 괜찮았던 거 같아요. 지병때문에 하고 싶은걸 참는건 할수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건 결딜 수 없었죠. 초등입학 전에도 충분히 혼자지내는 데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합니다. 남들 뛰어놀 때 집에서 혼자 뒹굴뒹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얼굴의 여드름이 들어가더군요 . 수치는 조금씩 계속 올랐습니다. 의사선생님의 생각이 적중한거죠.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그동안 항상 일찍자고 일찍일어나고 수치가 어느정도 회복되자 운동도 꾸준히 했죠. 제가 생각해도 당시의 절제력은 엄청난 것 같아요. 절대로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부모님께 조르지 않고 항상 제가 먹을 수 있는 것만 먹었습니다. (그 절제력이 지금도 있다면 정말 뛰어난 공학자가 되겠군요)
또 재미있는 건 제가 당시에 달리기 유망주였던거에요 ㅋ 성장호르몬을 먹어서 그런지 또래보다 근육이 잘 발달되서 그런지 초등6학년땐 이미 100m가 12초 7인가 그랬어요. ㅋ 이 때까진 선수로 가끔 나왔는데 그것도 제 몸때문에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제대로연습도 못해서 그런지 점점 떨어진 결광에요. ㅋ
하지만 곧 제 운동의 한계를 느꼈죠. 체력은 남들보다 월등히 떨어졌죠. 6학년때까지 수련회 소퐁 현장학습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6학년 되고 수치가 10에 가까워 지고 약을 끝고 나서야 인제 또래와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매우 하기 싫었습니다.)--;
이 때 부터는 탄탄대로 였습니다. 사실 전에 수두를 걸려서 정말 목슴의 위기를 느낀 적이 있었죠.-=- 하지만 수두는 누구나 한번씩은 겪는 다고 하더군요. 당시 정말 위험했지만 장기간 투병끝에 나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몸이 완전치 않은 건 항상 느낄수 있었습니다. 등산하고 나면 1주일씩 꼭 학교를 결석한다던가 감기 같은게 돌면 항상 제가 먼저 걸리죠--;;;;
학교도 참 많이 빠졌죠. 초등학교 친구들은 제가 얼굴이 창백했던거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 다고 하데요. ㅋ
어느 센가 중학생이 되고 전 인제 완전히 청소년 사회에 적응하게 되었어요. 항상 속으로 조심하고 적절한 선에서 절제를 해야했지만 인제 친구들도 제가 아픈 걸 인식하고 절 도와줬어요. 힘든 일이 있으면 저는 항상 마지막 까지 미뤄줬습니다. 선생님들도 그랬구요.
코피가 한번나면 2~3시간 씩 멈추지 않아서 학교를 1주일 씩 빠지고 그랬는데 그러면 친구들이 와서 공부한 내용 뭐 있다고 가르쳐주기도 하고 같이 놀아주기도 하더군요. ㅋ
그러면서 몸은 계속 좋아진거 같아요. 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어요. 치료는 단순히 자기가 몸조심하고 병원치료 꾸준히 받는 다고 낳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모든 상황이 맏아 떨어져야 되는 거에요. 자신은 자신대로 병을 이길 수 있도록 계속 절제하고 참고 노력해야 하고, 또한 자신이 사회에 나갈 준비도 해야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좋은 사람들로 부터 더욱 힘을 얻어야 된다는 것을요. 가장 소중한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합심에서 뭉치고 한 사람의 완쾌를 위해 뭉친 사람들의 규모를 점점 더 크게 해야되요.
결론은 치료는 더 미래를 보고 나아가야 해요. 저는 그 점에서 어머님께 감사드려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제가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제 미래를 생각하시면서 나아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하셨죠. 아픈 것을 이겨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요. 그 다음 사회에 자신이 녹아들 준비를 같이 하는 거죠.
중3 정도 됬을 때 전 제가 살던 도시에서 꽤 유명해졌어요. 몸이 아픈 건 학교 사람들밖에 몰랐지만, 수학 과학 분야에서 시에서 인정하는 학생이 되었죠.
전 이병을 앞으로 계속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완벽한 완쾌는 정말 힘들죠. 이건 계속 저에게 핸드캡으로 작용할 거에요. 항상 저를 잡고 늘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회사에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죠. 뽑아주는 사람들은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중 누구를 뽑을까요
이런 생각이 드니 그냥 건강만을 위해서 살수는 없엇고 공부를 동행했습니다.
제가 너무 건방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아프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핸드캡으로 완쾌후에도 반드시 찾아 오게 됩니다.
학교도 자주 빠지고 학원도 자주 빠져서 따라가는데 힘든 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했습니다.
부모님게서는 계속 저를 써포트 해주시고 저에게 채찍질을 하셨어요. 제가 만족해서 이정도면 되겠지 하고 멈출려고 하면 그정도로는 너의 핸디캡을 극복할 수 없다. 더 크게 보라면서요.
그 땐 사춘기 마음에 정말 속상했어요. 부모님들께서는 만족이 없구 욕심만 많구나.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게 결국 사실이었으니까요.
제가 중3을 마칠 때 전 이미 광주광역시에서 알아주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당시 헤모글로빈 수치는 11 정도 되었습니다. 혈소판이 정상인의 1/3을 못넘었지만 헤모글로빈이 회복된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몸의 에너지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헤모글로빈이니까요.
그리고 과학고를 들어왔습니다. 과학고는 1년 반만에 졸업이 가능하니까 힘든 고등학교 생활을 덜 하고 좋은 대학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죠. 이 때도 참 몸때문에 에피소드가 많았죠. 한번은 부모님 몰래 축구를 했는데 다리가 긁혔어요. 그걸 부모님이 아시고 절대 축구를 못하게 하시고 우리반은 축구 대항 대회에서 지게되었죠. 또 단체 기합받는데 저만 안혼나니 억울해하는 친구도 많았구요.--;;;
그래도 다들 절 아프다고 이해해주고 편의를 많이 봐주었던 것 같아요. 그 친구들입장에서도 저는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 잇는 경쟁자였다는데 잘 도와줘서 참 고마웠어요.
수치는 다행히 계속 회복됬어요. 분위기를 탄것이죠.
중학교 때만해도 한달 한번 두달 한번 정도는 계속 병원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그 때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수치가 13까지도 갔으니까요;;;
그리고 무난히 카이스트라는 곳에 입학을 하게 되었구요.
참 많은 사람들이 저를 도와준것 같아요. 덕분에 지금 자리에 온것 같구요
어떻게 보면 전 골수 이식도 하지 않고 순탄한 병생활을 한 건 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건 여러분들에게 미래를 보라는 거에요.
병은 당연히 나을 수 있어요!! 이렇게 마음 가짐을 가지고 조금더 미래를 보아요. 맘을 곧게 먹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거에요. 제 친구중 중 3때 백혈병때문에 죽은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도 그랬어요. 그 아이를 돕기 위해서 우리 학교 모든 학생이 모금운동하고 같이 놀러가고 공부를 도와줬어요. 하지만 결국 죽었지만 그 아이는 단순히 치료만을 원하지 않고 우리와의 융합을 더욱 원했던거 같아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좀 말하려던게 흐틀어진거 같아요==;;
그래도 여러분도 사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해요ㅣㅣ;
제가 다 알고 잇는 사실을 그냥 강조만 한 꼴일거에요 아마 ㅋ
인제 전 안심하고 있어요. 제 몸은 거의다 나았어요. 완치는 아니지만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지요.
그리고 전 꿈이 있어요. 어렸을 때 부터.
의사는 별로 좋아하는 직업이 아니지만 의료공학자가 되고 싶어요 그럴려먼 의과 공부도 필요하겠지만요 ㅋ
여러분 다 같이 힘네요 ~~
재생불량성빈혈은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그 정도가 확연히 달라져요
강한 절제력만 가진다면 누구나 조금씩이라도 나아질 수 있어요.
제가 큰 치료를 안받아 봐서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또한 15년 동안 그 병과 싸우면서 여기 까지 온것이에요. 강하게 마음 먹고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보아요
첫댓글 카이스트? 나랑 좀 친하면 안될까요 ㅋㅋ 정말 대단합니다 자주 들어 오셔서 힘을좀 주세요 그리구 원하시는 꿈 꼭 이루시길빌어요........아자!
고맙습니다.
yognsuhaha@hotmail.com 이거 제 엠에스엔이에요 엠에스엔 하시면 연락주세요 제가 메신절르 주로 쓰고 메일을 안보거든요
대단하시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