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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5 -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6~14일)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국내외 영화인과 관객 등 5천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6일 오후 부산 해운대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개막식이 열렸다.
10월6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73개국 307편의 영화가 초청됐다. 이 가운데 61편은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전세계에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월드프리미어이며, 인터내셔널프리미어(자국 아닌 다른 나라에서 첫 상영)와 아시아프리미어도 각각 28편과 87편에 이른다.
개막작은 대만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쓰리타임즈>다. 1911년, 1966년, 2005년 세 시대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지난 5월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서 120분 버전으로 상영됐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는 전면적인 재편집을 통해 완성도를 높인 135분짜리 최종본이 처음으로 상영될 예정이다.
폐막작으로는 한국 황병국 감독의 <나의 결혼 원정기>가 선정됐다.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진 채 묵묵히 자신의 인생에 출실한 변방 사람들에 관한 휴먼멜로드라마로, <태양은 없다>와 <무사>의 조감독을 지낸 황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감독이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며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한겨레
1989 - 고르바초프, 동독 방문
1989년 오늘 고르바초프(Gorbachyov, Mikhail S., 1931~ )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동독을 방문한다.
에리히 호네커(Honecker, Erich, 1912~1994) 동독 서기장이 그를 영접한다.
고르바초프는 이번 방문 기간에 호네커 동독 서기장에게 정치 민주화와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설득은 소용없었다.
호네커 서기장이 폐쇄적인 통치를 그만 둘 태세를 보이지 않자 라이프치히(Leipzig)를 중심으로 동독 주민들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다.
결국 호네커는 고르바초프가 방문하고 돌아간 지 얼마 안 돼 실각한다.
호네커는 같은 달 18일 서기장 직에서 물러나 이듬해 말 소련으로 망명한다. /YTN
- AOPU 창설 제1주년 기념, 1963.4.1
1982 - 아시아-태평양 우편연합(APPU) 집행이사회 개막
아시아-태평양 우편연합 [Asian Pacific Postal Union, APPU]
아시아 및 태평양 국가의 우편업무 관계의 확장·촉진·개선을 위해 우편업무의 협력 증진을 도모하고자 설립한 국제기구.
지역연합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한 만국우편조약에 의거하여 1961년 1월 23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국을 비롯한 8개 국이 모여 창립총회를 갖고, 1962년 4월 1일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회장국은 필리핀이며 본부는 마닐라에 있다. 회원국은 한국·필리핀·타이·일본·오스트레일리아·라오스·뉴질랜드·인도·중국·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파키스탄·말레이시아·파푸아뉴기니·스리랑카·싱가포르·몰디브·네팔 등이다.
회원국 상호간의 기술협력이나 우편요금 인하, 우편업무의 발전과 연구를 위하여 직원의 상호교환 또는 파견근무도 실시하고 있다. 기구의 운영을 위하여 총회·집행이사회·중앙사무국을 두고 있으며, 각 회원국 산하의 전직원에 대한 자질향상교육·훈련을 위하여 아시아 태평양 우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naver
아시아-대양주 우편연합 [The Asian and Oceanic Postal Union, AOPU]
"아시아-대양주 우편연합(AOPU) 창설 제1주년을 기념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4월 1일에 아시아, 대양주의 지도 및 AOPU를 표시한 봉투를 도안으로 하여 4원권 우표를 발행한다.
AOPU는 아시아, 대양주의 여러나라 간에 단일 우편지역을 형성하여 협약 체결국가 간의 우편관계를 확장, 촉진하고 개선하여 우편업무의 분야에서 협조를 증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기구는 우리나라와 필리핀이 창설을 제안하고, 필리핀 정부가 18개국을 초청한 바 한국, 중화민국, 일본, 말라야 타일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동 초청을 수락하여 8개국이 1961. 1. 10일부터 23일까지 마닐라에서 11차에 걸쳐 AOPU 협약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마닐라우편회의라 하며 동회의에서 AOPU가 탄생되었고 비준된 전문 24조의 협약은 1962. 4. 1 부터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현재 정회원국은 한국, 중화민국, 필리핀, 타일란드, 일본, 라오스, 인도네시아, 호주 등이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81 -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el-Sadat, Muhammad Anwar, 1918~1981) 피살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1981년 10월 6일 열린 제4차 중동전 발발기념 군퍼레이드 참관도중 암살단의 저격으로 숨졌다. 암살단은 사다트의 친미정책과 이스라엘과의 평화노력에 불만을 가진 회교정통파 신도들로 현역 사병이었다.
암살 전 사다트는 이스라엘의 이라크 원자로 폭파와 베이루트에 있는 PLO 본부 폭격으로 3년전의 캠프데이비드 합의가 무위로 돌아가면서 아랍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국민들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사다트의 배신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민주화정책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불안해지는 정세속에서 사다트는 반대파 지도자 1300명을 체포했다. 이런 와중에 암살사건이 발생했다.
사다트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 나세르가 이끈 1925년의 이집트 혁명에 자유장교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는 그 뒤 국무장관, 국민회의 의장, 부통령 등을 지냈고, 1970년 나세르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중동 평화의 길을 연 공로로 1978년 이스라엘 수상 메나헴 베긴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다트 사망이후 중동 전역에 한때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았으나 그를 뒤이은 무바라크 신임 대통령과 미국의 신속한 대응조치로 평온이 회복됐다. /조선
1977 - 육림의 날 제정
[1977.10.6 제1회 육림의 날]
- 박정희 대통령, 박근혜와 경기도 시흥군 지지대고개에서 그동안 심은 나무를 검목하고 비료를 줌
- 잡목은 경제림이 되지 않는다면서 20-30년 걸리더라도 수종개량을 장기적으로 추진하라고 지시
- 육림의 날은 국민식수운동을 효과적으로 넓히고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올해 처음 제정
- 나무를 심는 성의 못지않게 가꾸는 정신도 중요
- 왕릉 주변 산에 나무를 심는 모습
/영상역사관 ehistory.korea.kr/history /Google
육림의 날 (11월 첫째 토요일) (제1회 육림의 날 - 1977.11.5)
... 또한 朴대통령은 한 걸은 더 나아가 조림의 사후관리를 영구히 지속시키기 위하여 1977년 4월 5일 植木日 현장에서 가을에 검목과 더불어 육림일을 하루 정하여 봄에 심은 나무를 가꾸는 날로 해 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매년 11월 첫 토요일이 育林의 날로 결정되어 조림지시비 ․ 검목 ․ 병충해방제 ․ 잡목 솎아내기 ․ 가지치기 등에 많은 국민이 참여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박정희대통령 인터넷기념관 www.516.co.kr/board /Google
(1977년 10월 6일 처음 육림의 날 행사를 가진 뒤에 11월 첫째 토요일로 새로 정한 모양입니다. ^.@)
25th Anniv.
1973 - 제4차 중동전쟁 발발
1967년의 ‘6일전쟁’이 이스라엘의 완전한 군사적 승리와 거대한 영토 획득으로 종결되었을 때 그것이 정말 종전으로 이어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패배한 아랍인들은 굴욕감과 복수심에 1973년의 10월 전쟁을 준비했다. 6일전쟁으로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빼앗겨 그들의 심장부를 이스라엘의 날카로운 칼날 앞에 드러내놓았고, 요르단은 이슬람 성지를 유태인 지배하에 넘겨주었으며, 이집트는 수에즈운하에서 큰 위협을 받았다.
그러던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경,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 양전선에서 이집트와 시리아가 일제히 이스라엘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날은 유대교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국경일인 ‘정결 의식의 날’이었다. 다시말해, 이스라엘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바로 다음날 7일, 이스라엘은 예비역을 대동원해 반격태세를 갖췄다. 이어 9일에는 다마스카스와 레바논을 폭격, 시리아전선에서의 제공권(制空權)을 장악했고, 골란고원의 전차전(戰車戰)에서도 시리아군에 압도적인 공격을 전개했다. 이에 이집트ㆍ시리아를 지지하는 아랍 8개국까지 참전했지만, 전세는 이미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전투가 계속되자 16일, 아랍측이 정전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를 거부하자 아랍측이 17일 서방제국에 대한 석유전략을 발표함으로써 오일쇼크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20일에는 이스라엘 지원국에 대한 석유수출금지ㆍ산유랑 20% 감소ㆍ유가 인상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황금의 물’ 석유가 ‘공포의 물’로 변했다. 이에 22일, 유엔안보리에서 정전결의안이 채택되었고, 정전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전투는 계속되었다. 결국, 사실상의 정전은 정전협정이 합의에 도달한 그해 11월에나 이루어졌다.
중동전쟁으로 인해 이집트와 시리아 양국은 총2천3백대의 전차를 상실했고 이스라엘은 2백대의 전차만 상실했다. 항공기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475대를 상실한 반면 이스라엘은 115대를 상실했다. 병력손실도 아랍측이 1만6천명이었던 반면, 이스라엘은 2천5백명에 그쳤다. /조선
1972 - 서울 인구 600만 돌파, 세계 6위
서울특별시의 인구는 1960년 244만 5402명(인구밀도 9,112명/㎢)의 인구가 1963년 대대적인 시역확장과 함께 325만 4630명으로 늘어나 300만 명 이상의 도시가 되었고, 1970년 543만 3198명, 1976년 725만 명, 1983년 920만 명, 그리고 1988년 1028만 6503명으로 인구 1000만 명의 거대도시로 변모하였다.
1992년말에는 1096만 9862명(인구밀도 1만 8121명/㎢)으로 광복 당시 90만 1371명(인구밀도 6,627명/㎢)에 비해 1000만 명 이상 늘었고, 1960년 이후 전국인구 증가분의 44%를 서울이 차지하였다. 전국인구에 대한 비율은 1960년 약 10% 수준에서 1970년 17.6%, 1980년 22.3%, 1990년 24.4%, 그리고 1992년 25.1%로 최고를 이루었다. 면적은 전국의 0.61%에 불과하지만 인구는 전국 인구의 25%를 차지하여 4명 중 1명이 서울사람인 셈이었다. /naver
각 사고의 모든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들어 다시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는 정족산·태백산 사고의 실록을 조선총독부로 이관하였다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으로 이장하였고, 적상산 사고본은 장서각으로 옮겼으며, 오대산 사고본은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하였는데 1923년의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장서각 소장의 적상산본은 1950년 6·25전쟁 때 북한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었고, 정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1929~193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1/4축쇄판(縮刷版) 888책 한장본(漢裝本)으로 30절(折)을 영인(影印) 출간하였으며, 1958년에는 역시 태백산본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8축쇄판(A4판) 48책 양장본으로 간행, 보급하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에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완료하였으며, 남한에서도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2년부터 분담하여 국역작업을 시작하여 1994년 4월에 마무리지었다. /naver
1952년 10월 6일 6·25전쟁 중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일명 백마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로, 이곳을 탈환하면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민지원군과 국군 간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었다. 공격을 감행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하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해 총병력 4만 4,056명이었으며, 각종 포 55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국군은 이에 대응해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병력에 미군의 지원을 받아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9일 동안 12차례에 걸쳐 치러진 공방전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은 약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국군의 승리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 보병과 포병 간의 적절한 협동,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를 통한 충분한 휴식에 있었다. /브리태니커
1950 - 나비연구가 석주명(石宙明, 1908~1950) 사망
석주명(石宙明)은 오로지 나비밖에 몰랐던 사람이다. 한 줄의 논문을 쓰기 위해 3만마리의 나비를 만지고, 6·25 때는 15만마리의 나비를 지키기 위해 피란도 하지 않고 남산 국립과학박물관을 지켰다.
생전에 그가 정리한 한국산 나비는 모두 246종. 53년이 지난 현재까지 밝혀진 나비가 모두 251종인 점을 감안하면 그의 연구성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평생을 산과 들에서 보내며 75만 개체의 나비를 직접 채집·조사·분류해 한국 나비학의 초석을 세웠다.
그의 공적은 오늘날 세계 학계에서 통용되는 유리창나비의 아종명(亞種名)에 그의 성을 딴 ‘SEUK’으로 남아 있다. 그는 또 제주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개척한 사람이기도 하다. 2년간 머물렀다는 인연으로 10권의 저서와 30편의 논문을 펴내고 유채꽃을 일본에서 제주도로 들여온 것도 석주명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죽었다. 1950년 10월 6일, 서울 충무로4가 개천가에서 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술을 마시던 청년들이 쏜 총에 맞고 42세로 요절한 것이다. /조선
1927 - 첫 유성영화 '재즈 싱어(Jazz Singer)' 개봉
"기다려! 기다려! 넌 아무것도 듣지 못했잖아!(Wait a minute! Wait a minute! You ain’t heard nothin’ yet!)” 1927년 10월 6일, 주인공 알 졸슨의 목소리가 뉴욕 워너 브러더스 극장에 울려퍼졌을 때 관객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영화에서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영화사에 길이 기록될, 최초의 유성 영화 ‘재즈 싱어(Jazz Singer)’의 첫 대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관객들은 비록 두 장면에서만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이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게는 경이(驚異)였다. 사실 영화에 소리가 등장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 해 전에 워너사가 바이터폰(vitaphone)이라는 장치를 이용, 영상에 영화음악을 합성한 ‘돈 주앙’이라는 영화를 소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배우들의 육성까지는 담아내지 못했다.
결국 영예는 ‘재즈 싱어’로 넘어갔고, 워너사는 350만달러라는 기록적인 흥행수입을 거둬들여 파산 직전에서 기사회생, 메이저 영화사로 발돋움했다. 영상과 음악과 목소리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유성영화 자리는 이듬해 제작된 ‘뉴욕의 등불’이 차지했다. /조선
1926 - 미국에서 토키(발성)영화 성공
토키는 영화 발명 후 얼마 뒤부터 시험 제작되고 있었는데, 본격적인 토키의 등장은 라디오의 증폭기가 사용되고부터 이다. 1926년 미국의 워너 브라더즈사가 파산 직전으로 몰렸을 때 시험삼아 바이터폰(Vitaphone)을 사용한 디스크식 부분 토키 작품인 <돈 쥬앙>을 만들었고 이것의 성공으로 이듬해 거의 완벽한 토키 작품인 <재즈 싱어(1927)>를 만드는데, 이와 함께 토키 영화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1929년 이후 유럽의 여러나라 영화도 잇달아 토키영화 시대를 맞는다. 그러나 영화예술을 흑백 무성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영화예술가들의 대부분은 토키에 반대했다. 그들은 무성영화의 예술성은 토키의 새로운 요소인 음성에 의해 파괴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윽고 그들도 영상과 음성의 두 요소를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을 연구했다. /Google
1914 - 노르웨이의 민속학자, 탐험가 헤이에르달(Heyerdahl, Thor, 1914~2002) 출생
'콘 티키(Kon-Tiki)'(1947), ' 라(Ra)'(1969) 등 유명한 대양항해 과학탐사를 조직했다. 이 두 탐험은 원거리의 상이한 고대 문명 간의 대양항해 접촉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시도되었으나, 그의 이론은 보다 아카데믹한 학자들에게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7년 그와 몇몇 대원들은 원시 뗏목인 콘티키호를 타고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에서 폴리네시아까지 항해함으로써 폴리네시아인이 남아메리카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증명했다. 이 항해에 얽힌 이야기는 그의 저서 〈콘 티키 Kon-Tiki〉(1950)와 동일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묘사되어 있다. 1969년 다양한 국적을 가진 대원들과 함께 세밀하게 제작된 고대 이집트의 갈대 보트를 타고 모로코에서 대서양을 건너 약 1,000km 떨어진 중앙 아프리카까지 항해했다. ... /브리태니커
이스터섬((Easter I.)에 대해 처음으로 학술적인 조사를 한 사람은 노르웨이 인류학자 헤이에르달이었다. 그는 마르키즈제도의 거석상(巨石像)과 남아메리카의 거석문화(巨石文化)는 서로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잉카시대의 콘티키호(號)를 복원하여 1947년에 페루해안에서부터 투아모투제도로 항해하였다. 그리고 1955~1956년에 걸쳐 이스터섬의 모아이가 서 있는 아후라고 하는 종교유적을 조사하였다. 아후는 돌을 앞쪽으로 쌓아 올려서 바다 쪽을 높게 만든 30m×100m의 대좌(臺座) 위에 1~15개의 석상을 일렬로 세워 놓은 것인데, 200개 이상 확인되었다. 석상 중에는 높이 약 10m가 되는 것도 있다. /yahoo
1903 - 미국의 법률가, 정치인 맥마흔(McMahon, Brien, 1903~1952) 출생
brien McMahon(1903~1952) was an American lawyer and politician who served in the United States Senate (as a Democrat from Connecticut) from 1945 to 1952. McMahon was a major figur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Atomic Energy Commission, through his authorship of the Atomic Energy Act of 1946(the McMahon Act).
McMahon served as chairman of the Special Committee on Atomic Energy, and the first chairman of the Joint Committee on Atomic Energy. McMahon was a key figure in the early years of atomic weapons development and an advocate for the civilian (rather than military) control of nuclear development in the USA. Also, in 1952, McMahon proposed proposed an "army" of young Americans to act as "missionaries of democracy", which sowed the seeds for what would later become the Peace Corps. /wikipedia
1892 -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 테니슨(Tennyson, Alfred) 사망
테니슨 [Tennyson, Alfred, 1809.8.6~1892.10.6]
- 'Steeple'
1890 - 미국의 사진작가 스트랜드(Strand, Paul, 1890~1976) 출생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미국 사진에 추상과 객관성을 강조하는 데 공헌했다.
17세 때 후에 공장 노무자들과 이주민들에 대한 사진으로 유명해진 사진작가 루이스 W. 하인으로부터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인의 권유로 뉴욕의 '291'화랑에 드나들게 되었고, 그곳에서 사진분리파의 지도자이며 피카소·세잔·블라크 등 전위파 회화에 심취해 있던 앨프레드 스티글리츠를 만났다. 스트랜드도 전위파 화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그림자 유형과 뉴욕 Shadow Pattern, New York〉(1915)·〈월스트리트 Wall Street〉(1915) 같은 사진에서 추상적 형태와 패턴을 강조하게 되었다. 당시 가장 대담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하얀 담장 White Fence〉(1916)에서 스트랜드는 색조(色調)의 단계들과 율동적인 패턴으로부터 강력한 구성을 만들었다. ... /브리태니커
1889 - 폴란드의 작가, 문학평론가 돔브로프스카(Dabrowska, Maria, 1889~1965) 출생
대중적으로나 문학적으로 폴란드 산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근대 폴란드의 장편 연대기 소설 〈밤과 낮 Noce i dnie〉(4권, 1932~34)으로 유명하다.
폴란드와 벨기에에서 교육을 받았고 스위스의 로잔 대학을 다닌 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살았다. 1909년 폴란드 신문들에 정치·경제 개혁 및 협동조합운동에 관한 기사를 쓰기 시작하여 평생 동안 이 주제들을 계속 다루었다. 1914년 첫 단편 〈야네크 Janek〉를 발표했으며 1920년대에 3권의 단편집을 펴냈다. 그 가운데 〈저 땅에서 온 사람들:이야기들 Ludzie stamt d:Cykl opowie ci〉(1926)은 그녀가 평생 동안 지녔던 농민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작품이다. ... /브리태니커
1889 - 중국공산당 공동 설립자, 사상가 리다자오[李大釗, 이대쇠, 1889~1927] 출생
자 슈창[守常]. 필명 밍밍[明明]. 허베이성[河北省] 출생. 텐진[天津]의 북양학당(北洋學堂)과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신종보(晨鐘報)》의 편집자로 활동하는 등, 신문화운동에 참가하여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반동성(反動性)을 비판하였다. 1918년 베이징[北京]대학 문과대학 교수 겸 도서관 주임이 되어 ‘사회운동사’를 강의하는 한편, 《신청년》 《매주(每週)평론》 등을 통하여 러시아혁명을 높이 평가한 《볼셰비즘의 승리》에 이어,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인 《나의 마르크스주의관》을 발표하는 등, 중국공산당 창당의 사상적 준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0년 베이징대학 내에 마르크스주의연구회를 창설, 이듬해의 5 ·4운동 후 신문화운동 지도자가 되었고,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또 1922년에는 국민당에 입당, 그 개편과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추진하였다. 1924년 모스크바에서의 제5회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 후, 1925년 쑨원[孫文]이 죽자 국민당 및 공산당 지도자로 활약, 1925년 수도(首都)혁명, 1926년 3·18사건 등 국민운동을 지도하다가, 1927년 4월 장쭤린[張作霖]의 러시아 대사관 수색사건 때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저서에 《리다자오선집[李大釗選集]》과 많은 논문이 있다. /naver
(리다자오[LI DA ZHAO, 李大釗]는 그간 '이대교', '이대조'의 두가지로 흔히 읽혀왔는데 최근에 나온 몇몇 역사교양서에서 '이대쇠'로 읽는 경향이 있는 걸 보았습니다. '교'나 '조'로 읽는 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쇠'로 읽는 추세가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성姓이 아닌 이름名의 경우에는 복수의 음의를 지녔을 경우 역자가 소신대로 결정할 수 있는거고 사실 그런 경우가 속속 있습니다. /Google)
- 'The English Girl from the Star' - 'Yvette Guilbert Singing'
- 'Moulin Rouge', by Toulouse-Lautrec - 'Moulin Rouge', by Toulouse-Lautrec
1889 - 물랭 루주 개장
1889년 10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뮤직 홀과 댄스 홀인 물랭 루주(Moulin Rouge)가 개장되었다. 물랭 루주는 '붉은 풍차'라는 뜻으로 1889년 10월 6일 파리 세계박람회가 열렸을 때 댄스 홀로 문을 열었으며, 매혹적인 프렌치 캉캉 춤으로 인기를 끌었다. 1914년 화재로 전부 타버린 것을 1918년 뮤직 홀로 개축했으며 댄스 홀은 별도로 그 옆에 세워졌다. 뮤직 홀은 한때 인기 가수가 중심이 된 황금시대를 맞았는데, 토키 영화의 발달에 따라 현재는 영화관으로 탈바꿈했다. 물랭 루주가 명성을 날리던 당시의 분위기는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 <물랭 루주에서 At Moulin Rouge>에 잘 나타나 있다. 파리의 대표적인 환락가에서 캉캉 춤을 추는 무희들의 화려한 의상과 번쩍 들어올린 다리 등 환락적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현재 물랭 루주로 불리고 있는 것은 댄스 홀 '발 뒤 물랭 루주'이며, 인기 연예인의 쇼가 공연된다. /브리태니커
- 'Chapel of Notre Dame du Haut, Ronchamp'
- Switzerland 10 www.soojip.com
1887 -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 출생
스위스의 라쇼드퐁 출생. 본명 Charles- Edouard Jeanneret. 스위스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펠레와 베렌스의 건축사무소에서 얼마 동안 일하였으나 20대 전반은 주로 유럽과 중근동 각지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도시건축을 연구하였다.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이후로, 잡지 《에스프리 누보:L’Esprit Nouveau》와 많은 저서, 도시계획과 실제 작품을 통해서 마침내 국제적인 합리주의 건축사상의 기수가 되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하는 그의 유명한 아포리즘으로 상징되는 신선한 기계미학이 이 시기의 모든 제작에 일관되어 있고, 이와 같은 건축사상은 《건축을 향하여》 《도시계획:Urbanisme》 등, 이 시기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같은 사상이 구체적인 도시의 스케일로 나타난 것이 《현대도시》(1922)와 《플랑 부아쟁》(1995) 등이다.
실제 작업은 주택 중심으로, 페사크 주택단지(1926), 슈투트가르트 주택박람회의 집(1927), 가르셰의 주택(1927), 그리고 필로티 위에 떠 있는 명확한 원초적 형태라고 하는 푸아시의 사보이관(1930) 등을 완성하였다. 1927년 제네바 국제연맹 회관의 현상설계에서 그의 응모작이 최후 단계에서 심사원단에게 거부된 것을 계기로, 근대건축가의 국제적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듬해 근대건축국제회의(Congr s Internationaux d’Architecture Moderne:CIAM)를 주재하였다. 1930년대에는 파리 구세군회관, 파리의 스위스학생회관(1932), 파리교외 주말의 집(1935), 그리고 광대한 브리즈솔레유(차일)가 있는 브라질의 문교보건부(1935) 외에는 경제불황과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실제 작품은 적으며, 그래서 근대건축국제회의의 이념에 바탕을 둔 도시계획의 제안에 몰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합의 회의 사무시설을 위한 일(1946∼1947)을 맡았으나 중도에서 물러나고, 이어 마르세유의 《유니테》라는 거대한 아파트(1952)를 설계하였다. 모뒤롤에 의한 이 건축은 그의 오랫동안의 도시주거 연구의 집대성이었다. 이어 자유분방한 롱샹의 교회당(1955), 리옹 근교의 라툴레트수도원(1957), 아마다바트의 미술관, 그리고 만년에 가장 정성을 기울인 인도 찬디가르의 신도시 건설이 있으며, 그곳에 최고재판소 등의 청사건축을 남겼다. 1920년대에 시작되는 근대합리주의 건축의 국제적 양식 속에 서양건축의 기조인 고전주의 미학을 조화시켜, 철근콘크리트 건축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점에서 그의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 제자로 김중업(金重業)이 있다. /naver
1887 - 멕시코의 소설가 구스만(Guzman, Martin Luis, 1887~1976) 출생
멕시코시에 있는 국립자유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멕시코혁명에 합류하여 판초 비야의 혁명군에서 대령으로 복무했다. 1914~34년 마드리드와 뉴욕에서 망명생활을 했는데, 뉴욕에서는 〈그라피코 El grafico〉지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혁명의 경험을 회고록 〈독수리와 뱀>(1928)으로 이름을 남겼는데, 이 회고록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혁명을 이룩한 인물들을 그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소설 〈지도자의 그늘〉(1929)로도 유명한데, 이 소설에서는 1920년대 멕시코의 정치적 부패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밖에 주요작품으로 〈판초 비야 회고록〉(1940)·〈청년 미나, 나바라의 영웅> 등이 있다. ... /브리태니커
1869 - 스웨덴의 서정시인 베리만(Bergman, Bo Hjalmar, 1869~1967) 출생
초기의 염세적이고 운명론적 인생관은 당대 정치적·사회적 위기의 압력을 받아 공격적인 인도주의로 바뀌었다.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는 20세기 스웨덴 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 우체국 직원으로 있을 당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33년에 퇴직했다. 첫 시집 〈꼭두각시 Marionetterna〉(1903)에서는 우울한 수동성을 표현하고 있으나 이후의 시들, 특히 마지막 3권의 시집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Trots allt〉(1931)·〈옛 신들 Gamla gudar〉(1939)·〈왕국 Riket〉(1944)에서는 유럽의 정치 발전에 대한 공격이 점차 강해진다. 그밖에 산문 작품으로 5권의 단편소설, 5편의 장편소설, 5권의 모노그래프 등과, 자전적 단편(斷片) 등이 있다. ... /브리태니커
1866 - 캐나다 태생의 미국 무선공학자 페선던(Fessenden, Reginald Aubrey, 1866~1932) 출생
캐나다 밀턴 출생. 어릴 때 에디슨의 조수로 일하였다. 1893~1900년 피츠버그대학교 전기공학 교수를 지낸 뒤, 미국 측후소에서 일기예보의 무선송신법을 연구하였다. 지속전파(持續電波)를 발진하는 고주파 교류발전기, 전해검파기(電解檢波器) 등 500여 종의 발명이 있다. 미국 무선기술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naver
1831 - 독일의 수학자 데데킨트(Dedekind, Richard, 1831~1916) 출생
브라운슈바이크 출생. 법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카롤린대학에서 수학하고 괴팅겐대학에 진학하여 M.A.슈테른, K.F.가우스, W.베버 등의 강의를 들었다. 또한 가우스의 후임이었던 디리클레의 영향도 받았다. 1854년 괴팅겐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며, 1858년 취리히공과대학 교수를 거쳐 브라운슈바이크 고등기술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수학 활동은 넓은 의미의 ‘수(數)’ 전반에 걸친 거의 모든 영역에 미쳤으며, 추상성과 일반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군(群)을 공리계(公理系)로 정의했던 초기의 연구에서도 이 경향은 명백했지만, 가장 유명한 역작인 《연속과 무리수》(1872)에서 풍족한 결실을 보였다. 여기에서 무한집합을 고찰하였고 절단개념(切斷槪念)의 도입으로 연속성을 규정하였으며, 무리수의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해석학의 기초 수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밖에 이데알이라 불리는 집합의 소분해(素分解)의 연구로 대수적 수에 관한 이론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naver
1769 - 영국의 군인, 캐나다의 행정관 브록(Brock, Isaac, 1769~1812) 출생
1812년 미·영전쟁에서 '어퍼캐나다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졌다. 1785년 기수(旗手)로 영국군에 입대해 1797년 제49연대 중령이 되었으며 1802년 캐나다로 파견되었다. 캐나다에서 1805년 대령으로 진급했고 1811년에 소장이 되었다. 1810년 어퍼캐나다(지금의 온타리오 주) 주둔군 전체를 지휘했으며 이후 식민지 임시 부총독으로서 민정을 맡아보았다. 1812년 미·영전쟁이 일어나자 전격적으로 어퍼캐나다 방어에 나서 민병대를 조직했다. 1812년 8월 15일 영국과 인디언 연합군을 이끌고 미군을 물리쳐 디트로이트를 점령하고, 그 공로로 바스 훈장을 받았다. 10월 13일 그의 군대는 나이애가라 변경지대의 퀸스턴 고지 전투에서 다시 미국에 승리했으나 그는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 /브리태니커
1742 - 노르웨이 태생의 덴마크 작가, 해학가 베셀(Wessel, Johan Herman, 1742~1785) 출생
경구, 가벼운 운문, 신고전주의 비극의 풍자로 유명하다. 1761년 코펜하겐대학에 들어간 때부터 43세로 죽을 때까지 베셀은 항상 빚에 쪼들리는 영원한 학생 같은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코펜하爛淪隙?노르웨이 학생들을 위한 영향력 있는 문학 및 친목 단체인 ' 노르웨이 협회'의 설립자(1772) 중 한 사람이자 뛰어난 재주꾼이었다. 독일로부터 전파된 낭만주의 문학의 초기 징후들에 반대해 노르웨이 학생들은 합리주의를 선택했고 '그리스인을 여러분의 모델로'라는 모토를 채택했다. 1775년부터 협회가 출판하기 시작한 문집에 즉흥시·운문·경구시 등을 기고했으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양 극단을 풍자적 해학의 목표로 삼았다. ... /브리태니커
1552 -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출생
중국명은 이마두(利瑪竇). 1571년 예수회에 가입, 클레시오 로마노에서 콜라비우스에게 수학 ·천문학 등을 배우고 인도를 경유하여 1582년 마카오에 도착, 중국 내지(內地)로의 입국을 결심하고 중국어를 공부한 후, 1583년 조경(肇慶:廣東省에 있었음)에서 정주 허락을 받고 전교(傳敎)를 개시하였다. 이어 소주부(韶州府) ·남창부(南昌府) ·난징[南京]을 거쳐 1601년 베이징[北京]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명(明)나라의 만력(萬曆) 신종(神宗)에게 바친 자명종(自鳴鐘:탁상시계) ·대서양금(大西洋琴:피아노의 전신)은 황제를 크게 기쁘게 하여 베이징에서의 정주를 허락받았다. 선무문(宣武門) 내에 주택을 구입하고, 이곳을 전교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중국에서 전교하기 위해서는 독서인층(讀書人層)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믿고, 서양의 학술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역서인 《기하학 원본》과, 세계지도 위에 각종 천문학 ·지리학적 설명을 덧붙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이다. 그 밖에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가 있다. 이러한 학문은 중국 지식인층의 관심을 끌어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등의 유력한 관료도 개종(改宗)하여 그의 전교사업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저서에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 등이 있는데, 《천주실의》는 한국의 천주교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naver
1459 - 독일의 항해가, 지리학자 베하임(Behaim, Martin, 1459~1507) 출생
뉘른베르크에서 출생했다. 상업수습원(商業修習員)으로서 네덜란드로 갔다. 이어 1484년에 포르투갈로 건너가 국왕 주앙 2세의 항해고문관이 되고 항해용기구의 개량, 지도의 제작을 맡았다. 포르투갈의 항해자 디에고 캄과 함께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험하였다는 사실은 근거가 희박하나, 기니해안을 다른 항해자와 함께 항해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1492년 뉘른베르크에서 세계 최초로 지구의(地球儀)를 만들었다. 그의 지구의는 콜럼버스의 지리관(地理觀)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포르투갈에 있었으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naver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영토로 만든 당나라는 다시 신라까지 넘보았으나, 670년 신라가 먼저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를 공략, 나당전쟁으로 들어갔으며, 671년 · 675년, 그리고 676년에 군량보급 차단, 매소성전투, 기벌포(伎伐浦)대첩 등으로 당나라를 압박하여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랴오둥으로 옮기게 함으로써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naver
나는 중학교때 부터 우표수집가 이였다.
재미나고 언제나 황홀 하였다.
군대 갔다와서 어다론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몇개 안 남은 우표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청개구리 (이정오)드림
첫댓글 우리는 항상 욕망의 힘으로
갑니다.
늘 젊음이 있지요?
하지만 이제 늙음이 있어요?
다리가 앖어도
춤을추는 요정 입니다!
옛날에는 취미로 우표수집을 하는사람들을 보면서 특이한 취미도 다있구나 라는 생각을했었는데 ,
청개구리님의 글을 접하니 우표수집에서 얻는지식이 참으로 많음을 새삼 알게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