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세계 역사학계의 화두는 ‘세계사 다시 보기’다.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과연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가 지대한 관심사이긴 하지만 기존의 세계사를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뭔가 부족함과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유럽중심주의 세계관에 주변의 역사를 끼워맞추는 식으로는 ‘새로운 역사’에 대한 욕구가 가시질 않는다. 기존의 좌표를 아예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래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빅 히스토리(big history)’ ‘글로벌 히스토리(global history)’의 필요성이다. 이전에는 무시하고 간과했던 지역과 사건을 중심에 세워 역사를 재편하고 재조명함으로써 가능한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지구촌의 역사를 쓰자는 것이다. 나폴레옹만큼이나 칭기즈칸이 강조되고, 중동과 중국이 유럽 못지않은 역사의 중심무대로 재편되는 식이다.
아직 국내에는 생소한 이 ‘글로벌 히스토리’를 서울대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가 주간조선 지면을 통해 선보인다. 특히 주 교수는 인간의 의식주와 얽힌 일상사를 주제로 삼아 ‘글로벌 히스토리’에 대한 탐사를 시작한다. 주 교수는 “지구촌 인간의 삶은 직접적인 이주나 사상의 교류 이전부터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 다양한 매개체를 중심으로 큰 얽힘이 있었다”고 말했다. 주경철의 ‘글로벌 히스토리’ 첫번째 주제는 ‘커피’다.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커피의 기원 설화는 에티오피아의 염소치기 칼디의 이야기일 것이다. 어느 날부턴가 칼디가 기르는 염소들이 밤늦게까지 흥분해서 잠을 자지 못한다.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염소들이 어떤 나무 열매를 먹고 나면 그처럼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칼디는 직접 그 열매를 씹어보았다. 그러자 아주 기분 좋은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게 여긴 칼디는 근처의 수도원을 찾아가 원장에게 열매를 보이며 이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원장은 쓸데없는 일이라며 열매를 불 속에 집어던졌다. 그러자 열매가 구워지며 아주 향긋한 냄새가 났다. 이 열매를 갈아 물에 녹인 것이 세계 최초의 커피가 되었다. 수도원장이 이 음료를 시험 삼아 마시자 정말로 한밤중까지 정신이 또렷한 채 잠이 안 왔다. 이때 수도원장의 머리를 스치는 훌륭한 생각이 있었으니, 밤에 철야 기도를 하는 수도사들이 이 음료를 마시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 열매를 끓인 음료를 마시고부터는 수도사들이 꾸벅꾸벅 조는 일 없이 밤새 맑은 정신으로 정진할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염소치기 칼디와 그의 춤추는 염소들”이라는 이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동양언어학자인 파우스투스 나이론(Faustus Nairon)이 1671년에 출판한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슬람권에서는 모카(예멘 남서 해안의 작은 항구 도시)의 성자 알리 이븐 우마르에 관한 설화가 유명하다. 우마르는 스승이 죽으면서 명한 대로 모카로 가서 여러 기적을 행했다. 예컨대 모카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흙을 한 줌 움켜쥐자 그곳에서 물이 솟아나왔는데 이것이 이 지역 최초의 우물이라고 한다. 얼마 후 이 지역에 역병이 크게 유행하자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우마르는 기도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그렇게 병을 고친 사람 중에는 이 지방 영주의 딸도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 난 후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우마르와 그 여인 사이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접한 영주는 격노하여 우마르를 추방했다. 우마르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커피나무를 발견한 그들은 열매를 달여 마시며 지냈다. 그 후 모카에 또 역병이 돌았고, 사람들은 다시 우마르를 찾아왔다. 그런데 이때 우마르는 시커먼 액체를 마시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우마르는 이 액체에 잠잠(Zamzam) 성수(聖水)와 같은 영험한 힘이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잠잠은 이슬람교 최대 성지인 메카의 카바 신전 옆에 있는 샘으로서, 수천 년 전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황야에서 갈증으로 울부짖었을 때 알라가 물을 솟아나게 한 곳이다. 전 세계의 순례객들이 메카에 와서는 반드시 이 샘물을 마실 뿐 아니라 집에 병자가 있는 사람이면 이 물을 가져다가 먹여서 병을 낫게 한다. 그런데 우마르 성인이 권한 커피가 바로 이 성수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이 음료를 마신 사람들이 모두 병이 나았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영주는 깊이 뉘우치고 성자를 다시 모카로 모셔왔다.
:: 15세기
이슬람 성직자의 음료서 메카 몰려든 순례자들 속으로
물론 두 설화 모두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특히 우마르 설화는 모카 항구를 통해 수출되는 커피(모카커피는 모카에서 생산된 커피가 아니라 그곳에서 수출된 커피를 뜻한다)의 명성이 확립된 이후 그것을 정당화하느라고 생겨난 설화로 보인다.
두 설화 모두에서 눈에 띄는 점은 신심 깊은 종교적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커피는 수도사들이 철야 기도를 하는 데에 쓰이거나, 혹은 기도의 힘으로 병을 치료할 때 ‘치료 보조제’ 역할을 한다. 실제로 커피를 처음 애용한 사람들은 수도사들, 그중에서도 특히 이슬람교 신비주의자인 수피(Sufi)들이었다. 그 이유는 커피의 성질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커피는 잠을 쫓고 식욕을 억제하며 정신을 흥분시킨다. 이렇게 보면 커피는 몸에 하등 좋을 게 없는 물질이다. 그런데 수도사들은 바로 이런 ‘나쁜 점’들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지극한 신앙심을 지닌 수도사들은 밤을 새워 기도하고, 이 세상의 욕심을 끊어 먹을 것에 집착하지 않고, 심리적 흥분 속에 신을 맞이해야 한다. 원래 커피는 ‘한 잔의 여유’가 아니라 ‘불꽃 튀는 종교적 긴장’의 음료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대개 그렇듯이 커피의 경우 역시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일이 돌아갔다.
▲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커피 마시는 장면.
:: 16세기
술 금지된 이슬람 세계에서 ‘이슬람의 와인’으로 사랑
처음에는 종교적인 의도로 마셨다고 해도, 일반 신도들이 따라 마시면서 커피의 의미가 바뀌기 시작했다. 메카의 신전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이 음료를 돌려가며 마시는 동안 사람들은 점차 그 향과 맛을 즐기게 되었다. 메카는 매년 전세계 이슬람 신도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15세기 말에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커피는 순례객들에 의해 이슬람 세계 전체로 퍼져갔다. 1510년에는 카이로에서 커피를 볼 수 있었고 1559년에는 이스탄불에도 보급되었다. 정작 메카에서는 이 음료가 이슬람 율법에 맞는지 아닌지를 놓고 미묘한 문제가 있어서 금지 물품이 되었다가 다시 해금되었다가 하는 일이 반복되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커피는 다마스쿠스, 알레포, 알제 등지로 퍼져갔다. 술이 금지된 이슬람 세계에서 커피는 ‘이슬람의 와인’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점차 뿌리를 내렸다.
유럽인들 중에 처음 커피를 경험한 것도 이슬람 국가를 방문한 여행자들이었다. 1615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렀던 피에트로 델라 발레라는 사람의 기록을 보자.
‘터키인들은 색깔이 까만 음료를 마시는데, 이를 단숨에 마시는 게 아니라 아주 천천히 마신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이 음료를 마시지 않는 일은 없다. 사람들은 카포우에(Kafoue)라고 부르는 이 음료를 마시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데 때로 7~8시간 동안이나 지속한다.’
▲ 1686년에 세워진 카페 ‘프로코프’에서는 볼테르, 디드로 등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이 커피를 즐겼다.
:: 17세기
‘만병통치약’으로 유럽 소개된 후 상류층에 급속 확산
대체로 17세기 중엽이 되면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다. 베니스에는 1615년경, 마르세유에는 1644년, 런던에는 1651년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커피의 유행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는 1669년 터키의 대사 솔리만 무스타파 라카가 중요한 외교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루이 14세를 만나러 프랑스에 온 사건일 것이다. 그는 루이 14세가 터키 황제의 친서를 받을 때 일어서지 않는다고 화를 낼 정도로 오만했고 결국 외교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가 파리 상류층 사람들에게 터키식으로 꾸민 방에서 흑인 노예들을 시켜 일본 자기에다 커피를 대접한 일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지만 커피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에는 기호품이라기보다는 우선 약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는 신상품이 도입될 때 흔히 있는 일인데, 대개 온갖 병을 낫게 하거나 정력을 강하게 해준다는 식의 소문이 돌게 마련이다. 후추·코코아·담배, 심지어 감자 같은 경우도 처음 소개될 때에는 이와 마찬가지였다. 1671년 리옹에서 출판된 ‘커피, 차, 코코아의 효용’이라는 책에는 커피의 약효가 이렇게 나와 있다. ‘이 음료는 모든 차갑고 축축한 체액을 말리고 바람을 제거하며 간을 보하고 수종을 완화한다. 옴이나 피가 썩는 병에도 효과가 탁월하다. 심장의 열을 내리게 하고 지나친 박동을 조절해 주며 복통을 완화하고 식욕 감퇴에도 좋다…커피에서 나는 김은 안질, 이명(耳鳴), 숨이 찰 때, 비장의 통증 그리고 기생충에도 효과가 있다. 특히 과음 과식에 이 이상 좋은 것이 없다.’ 한마디로 커피는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 사르트르, 카뮈 등 20세기 중엽 파리 지식인들이 모여들던 카페 ‘레 되 마고’.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커피는 약이라기보다는 향과 맛으로 즐기는 일반 음료로 자리잡아 갔고, 유럽 주요 도시들에는 카페들이 속속 등장했다.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는 1686년에 생제르맹 시장 근처에 세워진 카페 프로코프일 것이다. 뷔퐁, 디드로, 달랑베르, 루소, 볼테르, 돌바크 등 계몽주의 시대의 쟁쟁한 문인과 사상가들이 다 이곳 단골손님들이었다.(20세기 중엽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 파리 시내에 위치한 카페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에 사르트르, 보부아르, 카뮈, 헤밍웨이, 피카소 같은 철학자·문인·예술가들이 모여들곤 했으나 오늘날에는 주로 한국인이나 일본인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
:: 18세기
황실·귀족 음료서 서민층 확산… 유럽 각국 커피 재배 나서
처음에 커피는 왕실 사람들과 귀족층만 즐길 수 있는 고급 음료였으나 점차 광범위한 사회 계층으로 퍼져갔다. 17세기에는 아직 낯선 물질이었던 이 음료는 18세기가 되면서 ‘부르주아의 음료’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다시 시간이 흘러 그 다음 세기에는 커피에 설탕을 듬뿍 집어넣어서 칼로리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일반 서민들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수입량도 늘어났고, 결국은 모카 인근 지역의 생산에만 의존하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유럽 각국은 곧 자국 식민지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1712년에 네덜란드가 자바 섬에 커피나무를 이식한 것을 시작으로 곧 부르봉, 카옌, 마르티니크, 자메이카, 생도멩그 등 여러 섬에서 커피가 재배되었다. 유럽 국가들은 이제 국내 수요를 맞추는 것을 넘어 세계 다른 지역에까지 수출했다. 네덜란드가 자바 커피를 페르시아와 인도에까지 판매한 것이 한 예다. 그리하여 커피는 문명의 경계를 넘어 세계인의 음료로 성장해 갔다. 커피는 처음 접하면 쓴맛과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음흉한 검은색 때문에 거부감을 갖게 마련이지만, 일단 한번 마시게 되면 곧 길들여지게 된다.
▲ 에티오피아의 한 마을에서 커피를 건조시키고 있다. 석유 다음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무역품목인 커피는 전세계적으로 매일 10억컵이 소비되며 연간 판매액만 800억달러에 이른다. / photo 조선일보 DB
:: 19세기
우리나라에도 상륙… 고종황제가 최초의 매니아
19세기 말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커피가 들어왔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찍 커피를 마신 사람 중 한 명이 고종황제일 것이다. 1896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흉흉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신변의 불안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 동안 머물게 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른다. 그 동안 친일내각이 몰락하고, 김홍집·정병하 같은 대신들은 군중들에게 타살 당하고, 내각은 다시 옛날식 의정부(議政府)로 되돌려지고, 많은 이권들이 러시아 측에 넘어가고…. 국사(國事)가 이처럼 처연하게 돌아갈 때 고종황제께서는 러시아 공사 측이 대접하는 커피를 마시며 아픈 마음을 달래고 계셨다. 커피의 쓴맛과 검은 색깔 때문에 보약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 왕세자와 함께 매일 아침 대접에 커피를 가득 담아 좍 한 번에 들이켰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고종황제가 커피 향을 음미하고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커피 맛을 제대로 알고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왕실에서 시작된 커피 소비가 곧 신분 높은 고관들에게 퍼지고, 이어서 문인들이 다방에 모여 유유자적 인생과 문학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품목이 되었다가, 1960~1970년대의 독특한 ‘모닝(커피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 마심으로써 영양보충까지 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도 유럽 커피의 역사와 거의 같은 궤적을 보인 셈이다.
:: 커피의 발전
이성적 음료, 육체노동서 정신노동시대로의 전환과 맞물려
▲ 파리 최초의 카페 ‘프로코프’의 간판
커피가 이처럼 전세계로 퍼져가게 된 기본 동인이 무엇일까?
아마도 커피가 근대 부르주아 문화와 내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커피는 부르주아의 심성과 잘 어울리는 음료, 즉 이성적이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라 할 수 있다. 아침부터 맥주나 포도주를 마셔서 머리가 둔해진 수공업자, 혹은 어딘지 나른하고 에로틱한 분위기에서 코코아를 마시는 귀족들과 대비되는 도시 중산층 시민의 전형적인 기호품이 된 것이다. 17세기에 이미 커피 선전 문구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알코올이 드리운 안개 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인류는 커피의 도움으로 깨어나 시민적 각성과 근면성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커피는 영국의 청교도주의, 혹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뒤에 가지고 있다. 중세의 육체노동자에서 근대의 정신노동자로의 전환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영국의 커피하우스가 사업 장소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읽을 수 있다. 1687년 혹은 1688년에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가 런던의 타워스트리트(Tower street)에 ‘로이드의 커피하우스’라 이름 붙인 가게를 냈다가 이것이 롬바르드가(Lombard Street)로 옮겨져 약 80년 동안 번성했다. 이곳에는 선장, 선주, 상인, 보험회사 대리인 등 항해와 관련된 업자들이 많이 몰려와서 정보를 교환했는데, 이것이 후일 세계 최대의 보험 및 해운 사업체로 발전한 것이다.
:: 커피와 문화
부르주아 가정의 아늑함 상징… 산업발전에 따른 일종의 보상
▲ 커피나무
또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커피가 이처럼 근대 사회의 공적(公的) 영역에서만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사적(私的) 영역에서도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이다. 커피는 부르주아 가정의 아늑함을 보장해 주는 상징으로도 중요해졌다. 사업가들이 아침에 활기차게 일을 시작하기 위해 커피하우스에서 모닝커피를 마셨던 데 비해, 여성들은 오후의 커피 모임을 만들어서 다정하게 담화를 나누는 기회로 삼았다. 근대 사회는 냉철하고 타산적인 기업가들의 모임처럼 차가운 성격을 띠지만, 동시에 그런 측면을 완화시켜 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만큼이나 그에 대한 보상으로 ‘스위트 홈(sweet home)’이 강조되는 것이 그런 점을 가리킨다. 커피는 그 양쪽 세계 모두와 성공적으로 결합하는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파인과 길모어의 ‘고객체험의 경제학’에 나오는 분석에 따라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의 가격 구성을 살펴보자. 커피 한 잔에 들어가는 원재료로서 원두 가격은 고작 1~2센트에 불과하다. 이 원두를 잘 갈아서 포장한 다음 포장, 명칭, 가공법을 바꿔가며 제품화하여 팔면 값이 오르지만, 이때에도 한 컵 분량으로 보면 대개 5~25센트 정도이다. 이것을 가지고 일반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팔면 대개 1달러 정도로 가격이 오른다. 그런데 별 다섯 개짜리 고급 레스토랑이나 품위가 넘치는 카페에서 팔면 브랜드 값으로 대략 5달러까지 된다. 파인과 길모어는 커피가 가장 비싸게 팔리는 곳의 예로 베니스의 카페 플로리안의 커피 가격 15달러를 제시한다. 1센트와 15달러라는 큰 가격차를 만든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카페 플로리안에서는 단순히 커피라는 물질을 판매한 것이 아니라 문화를 가공하여 ‘체험’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우리가 커피라고 말할 때에는 단지 카페인과 같은 물질의 약리적 효과만이 아니라 이 물질과 내적으로 깊이 연관된 문화까지 포함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슬람교의 성스러운 종교성으로부터 근대 부르주아 문화에 이르기까지 커피와 관련된 긴 궤적을 따라가 보았다. 커피는 이제 우리 삶에서 떼어내기 힘든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한 잔의 커피 속에는 지구 위의 여러 문명들의 다양한 요소가 여릿여릿 녹아들어 있다.
/ 주경철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 석사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네덜란드사 전공) ·현 서울대 인문대 서양사학과 부교수 ·‘문화로 읽는 세계사’ ‘대항해시대’ ‘네덜란드’ ‘문명과 바다’ 등 저서 다수